한국영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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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전시

잡지로 보는 한국영화의 풍경

녹성에서 씨네21까지

  • 기간|2016.06.16.(목) ~ 09.25.(일)
  • 장소|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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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잡지는 1919년 10월 최초의 활동사진연쇄극인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공개된 지 한 달 후인 11월에 등장하여 한국영화와 100년의 시간을 함께해왔다. 그동안 영화잡지는 한국영상문화와 영화산업의 발전과 함께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해왔다. 영화잡지는 영화비평, 영화 상영에 대한 정보, 영화와 영화인의 이미지, 영화인의 이야기, 제작과 배급에 대한 정보, 당시 관객들의 반응, 광고 등 독자들에게 다양한 지식과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함으로써 영화문화와 관객성을 키워나가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영화에 관한 끊임없는 담론의 장을 제공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 교재로서의 기능도 수행해왔다.이번 전시는 한국 최초의 영화잡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잡지의 유형과 특색에 주목하여 지난 100년간의 한국영화사와 영화문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지면이 사라지고 있는 영화잡지는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미래적 역할과, 한국영화의 질적 향상을 위한 비평의 현대적 역할 그리고 지난 한국영화를 기록하는 역할 등을 지속하기 위해 영화잡지의 발간은 새롭게 부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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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 ~ 1945년

1903년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 영화(활동사진) 상영을 시작한 이래 1919년 이전까지 우리나라에는 영화잡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활동사진의 상영 정보는 「황성신문」, 「매일신보」 등 신문 기사나 광고 등을 통해 대중에게 알렸다. 1919년 11월에 등장한 「녹성」은 일본 유학파들이 만들어 국내에 배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말 영화잡지이다. 이 시기 영화잡지는 주로 영화인들이 주축이 된 동인제 형태로 만들거나, 영화작품 선전을 위한 일종의 영화작품 광고의 개념으로 만들었다. 1931년에 창간한 「영화시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영화잡지는 단명하였다. 해방이전까지 약 17권의 영화잡지가 창간되었다.

「녹성」(1919), 「영화」(1926), 「키네마」(1927), 「문예영화」(1928), 「대중영화」(1930), 「영화시대」(1931),「영화가」(1931), 「신흥예술」(1932), 「연극운동」(1932), 「신흥영화」(1932), 「영화부대」(1934), 「영화조선」(1936), 「조선영화」(1936), 「막」(1936), 「영화보」(1937), 「무대」(1939), 「영화연극」(1939)

  • 잡지로보는한국영화5
    녹성
    창간일| 1919년 11월 5일
    구분| 월간지
    발행처(발행인)| 녹성사(이일해)
    가격| 40전

    도쿄의 녹성사에서 발행하여 경성의 족성사에서 발매.
    국판 90면으로 발간된 창간호에 따르면, “내용은 널리 예술방면으로 구하야 우리네 정신계를 크게 개혁”하고자 했으나 “처음 일이라. 기네마계에서만 재료가 모였”고 그 대신 “대서명작인 문예만을 취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통권 1호로 종간,
    조선 최초의 ‘영화잡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 문예영화
    창간일| 1928년 3월 10일
    구분| 월간지
    발행처(발행인)| 문예영화사(최호동)
    가격| 25전

    이경손을 고문으로 최영태가 편집, 최호동이 평양의 문예영화사에서 발행하였다.
    국판 48면으로 간행된 창간호에는 나운규를 비롯하여 정기탁·강홍식·신일선·임운학 등 당대를 대표하는 조선 영화인들이 직접 쓴 글 뿐만 아니라, 채플린의 파리 외유기도 번역되어 실려있다.
    통간 1호로 종간되었다.

  • 영화시대
    창간일| 1931년 2월
    구분| 월간지
    발행처(발행인)| 영화시대사 (박누월)
    가격| 10전

    "소위 푸로레타리아에 속한것도 아니오 뿌르조아에속한것도 아니라 일반 영화대중의 엄정중립한 공기(公器)"가 되겠다는 사명하에 창간, 몇차례 정간을 겪기도 하였으나 해방후까지 20여년 가까이 명맥을 이어갔다.
    조선 및 일본촬영소의 선구자 수십여명을 망라한 영화지로서 윤백남, 이명우 이필우, 김연실, 김성춘, 김일해, 이병일, 이창용, 안종화 등 필자의 면면이 화려하며, 조선을 비롯하여 미국, 만주, 독일, 소련, 중국등 다양한 지역의 영화 기사와 비평을 수록하였다.

1946 ~ 1970년

해방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약 25권의 영화잡지가 발간되었다. 6.25전쟁과 휴전 후 폐허 속에서 한국영화재건을 위해 정부의 ‘국산영화 면세조치’ 등 정부를 비롯한 영화인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영화 재건과 더불어 영화잡지도 다시 활기를 되찾아갔다. 1954년에 들어서면서 일반 영화 대중지를 표방한 잡지인 「영화세계」가 등장한다. 이 잡지는 대중영화잡지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1964년 한국영화잡지 사상 큰 효과와 공로를 남긴 잡지인 「실버스크린」이 발간되었다. 이 잡지는 영화 비평과 같은 전문적인 내용과 대중적인 요소를 적절히 가미하여 당시에 많은 비평가들이 이 잡지를 통해 얼굴을 알렸다. 또한 대한극장에 기반을 가진 ‘세기상사’라는 영화회사에서 자체의 제작 또는 수입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스크린」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신성」(1946), 「영화순보」(1947), 「예술영화」(1948), 「신영화」(1949), 「희곡문학」(1949), 「은영」(1949), 「연극영화」(1954), 「영화세계」(1954), 「스타-」(1955), 「국제영화」(1955), 「현대영화」(1955), 「스크린」(1956), 「신영화」(1957), 「뉴앵글」(1957), 「씨나리오문예」(1959), 「영화예술」(1959), 「씨네마팬」(1960), 「스크린 「미의 생활」 개제」(1960), 「영화정보」(1960), 「영화잡지」(1963), 「실버스크린」(1964), 「영화·연예」(1964), 「영화예술」(1964), 「내외영화」(1965), 「영화·TV」(1966), 「영화문화연구」(1970)

  • 영화세계
    창간일| 1954년 12월
    구분| 월간지
    발행처(발행인)| 영화세계사(정운선)
    가격| 300환

    1954년 12월 창간된 1950-60년대 대표적 영화잡지.
    대부분의 당시 영화잡지들이 단명했음에 반해 영화세계와 국제영화는 오랜기간 발간되며 사랑을 받았다. 창간 당시에는 발행인이 정운선, 편집인이 김갑산이었으나 1950년대 말 경 사장 겸 발행인이 강대진으로 바뀌었다. 창간 당시 발행인 정운선은 당시 한국 영화계가 육성책의 빈곤으로 수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외국영화의 시장화되고 있음을 한탄하며 "우리 국산영화의 육성"에 작은 도움이나마 되기 위해 잡지를 내놓는다고 밝힌다. 그래서인지 창간호에는『국내제작계 동향』, 황성수의『영화제작정책론』, 김광섭의 『외국영화 수입의 무정책성과 국산영화 재건을 위하여』, 이한구의 『한국영화의 국책성과 예술성」등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돋보인다.

  • 국제영화
    창간일| 1955년 5월 10일
    구분| 월간지
    발행처(발행인)| 월간 국제영화 뉴스사(박봉회)
    가격| 200환

    1955년 11월호 정도가 창간호일 것으로 추정된다.
    발행인 박봉회, 주간 노만, 편집장 천백원 등으로 초기 제작진이 구성되었다. 국제영화는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정책으로 폐간하기 전까지 약 25년 간 존속했다. 가장 오랜시간 유지되었던 잡지 중의 하나다.
    국내외 스타의 동향이나 영화 줄거리 소개, 홍보등이 주된 분량을 차지했지만 한국영화의 정책이나 시설소개, 깊이있는 좌담등 단순히 가십성 잡지만으로는 볼 수 없는 깊이도 가지고 있던 잡지였다.

  • 실버스크린
    창간일| 1964년 7월
    구분| 월간지
    발행처(발행인)| 아리랑사(이월준)
    가격| 60원

    『실버스크린」은 우리나라 대중잡지사상 한 획을 그은 월간지『아리랑」(삼중당 발행)의 임원직에서 물러난 이월준이 발행하였다.
    창간호부터 판권이 넘어가기 전인 12월호까지 제호 앞에'아리랑을 붙여 「아리랑실버스크린이라 하였다. 생활필수품이 되어버린 영화를 대중들이 좀더 재미있게 감상하기 위한 지혜를 제공하겠다는 목표아래 창간된 이 잡지는 당시 국내에서 유행하던 청춘영화를 진단하기 위해 '한국청춘영화의 그 배경과 현실' 특집을 통해 김종원의 '왜색에 뿌리박은 사이비 청춘상'과 김수용 신봉승의 대담으로 엮은 '청춘영화 왈가왈부', '방향을 잃은 기획의 비극' 등을 실었다. 또한 '미래의 영화인을위한 쎄미너'를 통해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제공하기도 하였는데, 〈오발탄〉의 유현목 감독이 쓴 '나의 연출노우트', 〈젊은 표정〉(이성구, 1960),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등의 시나리오 작가 김지한의 시나리오강좌, 연극연출가 이진순의 '연기교실' 등을 실어 차별성을 두었다. 이 잡지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표지를 장식한 1965년 11월호까지 통권 15호를 내었다.

1971 ~ 1990년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이 시기는 가히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였다. 1959년 한국영화 제작편수가 100편을 돌파하는 등 영화산업도 함께 발전해갔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1960년초부터 등장한 공중파 방송의 개국과 한국영화의 질적하락 등으로 한국영화는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한국영화산업은 급격히 쇠퇴되었다. 한국영화사와 흥망을 같이 해 온 영화잡지는 이 시기에 약 10권의 잡지밖에 발간하지 못했으며, 1980년 언론통폐합조치로 활발히 발간해오던 「국제영화」 등이 폐간되었다.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한 기관지 성격의 잡지인 「코리아 시네마」는 영화정책이나 한국영화계의 시급한 문제, 외국영화계의 제작 방향 등에 대한 내용 등을 수록하는 등 영화잡지의 명맥을 이어갔다. 또한 장르의 경계를 넘어 영화에 뜻을 같이한 영화인들이 모여 「영상시대」와 같은 동인지 성격의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197~80년대 한국영화 암흑기와 함께 영화잡지계도 불황이었지만 1984년 한국 대중 영화잡지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스크린」이 발행되었다. 1989년에 정성일 평론가가 초대편집장으로 창간한 「로드쇼」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영화전문지의 춘추시대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스크린」과 「로드쇼」 이 두 권의 잡지가 지금의 한국영화를 만든 시조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코리아 시네마」(1971), 「월간 영화」(1973), 「계간 영상시대」(1977), 「스크린」(1984), 「비디오」(1984), 「시네마」(1987), 「영화다이제스트」(1988), 「로드쇼」(1989), 「비디오 플라자」(1989), 「비디오무비」(1990)

  • 계간 영상시대
    창간일| 1977년 7월 20일
    구분|계간지
    발행처(발행인)| 영상시대사(변인식)
    가격| 600원

    장르의 경계를 넘어 영화에 뜻을 같이 하는 김승옥, 최인호, 김화영, 하길종, 김호선, 이장호 등과 같은 문인과 영화인들이 모여 만든 동인지 성격의 잡지이다.
    창간호는 프랑스 뉴웨이브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작품(쥘과 짐, 두 영국 여인과 대륙)을 다룬 안병섭의『주제와변주」를 비롯하여 변인식의 「어떤 영화를 만들것인가」, 하길종의 「새세대·새영화·새정신」등과 시나리오 「빠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등을 소개하고있다. 이잡지는 계간으로 출발했으나 1년만에 2호를 내놓고 수명을 다했다.

  • 스크린
    창간일| 1984년 3월
    구분| 월간지
    발행처(발행인)| 창인사(조태형)
    가격| 2,500원

    한국 대중 영화잡지의 효시로 대중영화 전반은 물론 한국영화계의 현안을 다루는 영화전문지이기도 하면서 스타들의 브로마이드 잡지로도 기능하며 젊은층을 파고들었다.
    『로드쇼」 가 등장하기까지 '국내 유일의 영화잡지'라는 명성을 독점적으로 누렸다. 안성기가 인터뷰 끝난 취재 기자를 직접 차를 몰아 집으로 데려다주고, 신인배우 김혜수가 편집실로 음식을 들고 찾아오는 일도 가능하던, 말하자면 영화기자들에게 그야말로'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평론가 시절의 박찬욱 감독이 고정 글을 기고하기도 했고 쿠엔틴 타란티노와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2011년 마지막 호를 냈다.

  • 로드쇼
    창간일| 1989년 4월 1일
    구분| 월간지
    발행처(발행인)| 시평사(김수달)
    가격| 4,000원

    1989년 4월 창간한 《로드쇼》는 정성일이라는 존재의 등장과 함께 설명해야 할 것이다.
    '책 속의 책' 콘셉트의 '도씨에'는 당시 영화 마니아들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일종의 해방구 같은 꼭지였다. 1992년《로드쇼》를 나온 다음에도 시사월간지《말》의 영화평, MBC FM의 '정은임의 영화음악' 게스트, 〈한겨례신문》의 영화평 등을 통해 한국의 '씨네필'이라는 상상적 공동체의 리더가 됐다. 창간과 동시에 "10년뒤 창간호를 1억에 사겠습니다"라는 대대적인 홍보를 펼쳤지만 결국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1990년대, 2000년대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영화계는 여전히 암흑기였고 산업적으로도 불황이었다. 1992년 <결혼이야기> 개봉을 시작으로 로맨틱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의 한국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영화는 다시 관객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후반 경쟁지로 시작한 「스크린」과 「로드쇼」는 1990년대 초반 영화잡지계를 이끌어 갔고, 특히 「로드쇼」는 하이틴스타 광고 및 홍콩영화 팬클럽 모집 등 주로 가십 내용으로 지면을 채웠던 잡지와 차별화하여 전문적인 영화비평과 담론을 제시했고 정론지 스타일의 고품격 잡지를 지향하였다. 이어 영화탄생 100주년인 1995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주목할 만한 영화전문지가 등장한다. 이 중 「씨네21」, 「키노」 등이 대표적인 영화전문지였는데 주간지와 월간지라는 다른 환경 속에서 이 두 잡지는 경쟁관계를 형성하여 한국영화 비평 등을 통해 한국영화를 발전시키는 주역이 되었다. 이어 「필름2.0」이라는 주간지가 창간되어 「씨네21」과 본격적인 주간지의 경쟁시대를 만들어내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전문적이고 많은 담론들을 쏟아내면서 한국영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후 IMF 구제금융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과 초고속 인터넷서비스의 등장으로 모든 정보가 빠르게 돌아가면서 2000년대에 들어, 잡지들은 하나 둘씩 폐간되어 한국영화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은 「씨네21」만이 고전분투하며 또 다른 영화전문잡지가 등장하여 선의의 경쟁을 통해 끊임없는 영화담론을 만들어 낼 날을 기다리고 있다.

「씨네필」(1994), 「씨네21」(1995), 「키노」(1995), 「프리미어」(1995), 「영상문화」(1998), 「필름컬처」(1998), 「독립영화」(1999), 「필름2.0」(2000), 「무비위크」(2001), 「DVD21」(2001), 「DVD2.0」(2002) 등(1990)

  • 씨네21
    창간일| 1995년 4월 24일
    구분|주간지
    발행처(발행인)| 한겨래신문사(권근술)
    가격| 2,500원

    1995년 4월 한겨레 신문사가 창간한 최초의 주간 영화지다.
    1대 편집장은 당시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조선회가 맡았으며 창간 1호 특집부터 '누가 한국 영화계를 움직이는가'라는 기사를 내세우는 등 이전 영화잡지들과 달리 한국영화를 그 중심에 놓았다. '한국영화 파워 50' 등도 같은 맥락이며 업계 동항과 뉴스에 발빠른 접근 영향력 있는 평론으로, 단숨에 한국 영화잡지를 대하는 이름이 됐다. 조선회, 허문영, 남동철 등 전임 편집장과 김영진, 이상용, 심영섭, 황진미등 『씨네21이 배출한 기자와 평론가들이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2003년 8월 한계레신문사로부터 분사해 (주)씨네21 법인을 꾸려 최근까지 발간하고있다.

  • 키노
    창간일| 1995년 5월 1일
    구분| 월간지
    발행처(발행인)| (주)LIM(이정재)
    가격| 5,000원

    『로드쇼」편집장이었던 정성일, 「스크린」편집장이었던 이연호를 주축으로 1995년 5월 '100년을 기다려 온 그 잡지가 온다'는 도발적인 카피와 함께 창간했다.
    「키노」에 대해 정성일은 한 특집기사의 소개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집단 명사 키노. 1995년 5월에 창간되어 이제까지 (두 번을 거르고) 67권의 책을 만들었다. 많은 전사자를 냈으며, 새로운 희생양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매년 1월호에 편집부의 그 해 10 베스트 영화를 선정하여 공식적인 견해를 밝히면서, 동지들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들의 베스트 10영화를 만들어 함께 소개한다. 언제나 인터뷰를 최상의 영화소개라고 믿고 있으며, 우리들의 이데올로기는 우정이며 최고의 미학은 작가주의라고 믿는다."
    2003년 99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발간되지 않았다.

  • 필름2.0
    창간일| 2000년 12월 12일
    구분| 주간지
    발행처(발행인)| (주)미디어2.0(최영재)
    가격| 3,000원 (이후 1,000원)

    『미디어2.0」이라는 온라인 저널로 시작해 오프라인으로 확장하며 2000년 12월 19일 창간되었다.
    전성기 때에는 가판 판매량에서 씨네21을 앞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05년에는 한국잡지로서는 최초로 브랜드 네임 그대로 일본에 수출되기도 했다. 다른 잡지들에 비해 한결 깔끔한 다자인이 영화팬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하지만 재정적 어려움과 불안정한 수익구조로 인해 결국 2008년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