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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기획전시 I

청춘 신성일, 전설이 되다.

  • 기간|2019.04.04.(목) ~ 06.30.(일)
  • 장소|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실

신성일은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래 50여년간 514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한국영화사상 가장 길게 톱스타의 지위를 누린 배우였다. 1960년대 초 청춘영화를 통해 스타로 발돋움한 후, 시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청년을 넘어, 70년대 무력감에 빠진 중년 남성을 대변했고, 80년대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비루한 장년의 얼굴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다양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를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으로 칭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기획전은 신성일의 영화세계에서 특히 ‘청춘’이란 키워드에 주목한다.

신성일에게는 기성세대 배우들과 차별화되는 신세대적 매력이 있었고, 독보적인 외모가 있었다. 하지만 신성일이라는 ‘스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1960년대 청춘영화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신성일은 청춘영화로 엄앵란과 함께 스타덤에 올랐고, 청춘영화를 통해 대체 불가능한 스타로 장기간 자리매김하였다. 물론 신성일이 없었다면 1960년대 청춘영화 장르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성일은 1960년대 청춘영화 장르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신성일이 어떻게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이 되었는지, 1960년대 청춘영화장르와 함께 조명해보고자 한다.

전시 기획
조소연(한국영상자료원 큐레이터)



뉴스타申星 넘버원一

신필름 배우 공모에 합격하여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강신영에게 신상옥 감독은 ‘뉴스타 넘버원’이라는 의미를 담아 ‘신성일(申星一)’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로 데뷔하였고,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아낌없이 주련다> (유현목, 1963)부터이다.

<가정교사>(김기덕, 1963)를 시작으로 엄앵란과 함께 청춘영화에 출연하면서 스타덤에 올랐고,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으로 최고 스타로 등극하였다. 50여년 동안 총 514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을 뿐만 아니라, 1964~74년 11년간 제작된 한국영화 중 1/4에 해당하는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할 만큼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영화사를 관통하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배우 신성일의 바이오그래피와 한국영화사에 남긴 전설적인 기록들을 사진, 영상, 유품(트로피 등), 통계 등과 함께 전시하였다. 특히 신성일이 생전에 가장 아꼈던 ‘최악배우상’(1967)을 직접 볼 수 있다.



은막의 황금콤비 : 신성일&엄앵란

<가정교사>(김기덕, 1963)에 함께 출연한 신성일과 엄앵란은 한국영화사에서 최초로 스타시스템, 콤비란 말을 만들어냈다. <청춘교실>(김수용, 1963)에 이어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신성일과 엄앵란은 흥행 보증수표가 되었고, ‘신성일-엄앵란 콤비’는 60년대 청춘영화의 대표적인 심볼이 되었다.

당시 영화계를 좌지우지한 지방업자와 극장주는 ‘신성일과 엄앵란’의 출연여부를 기준으로 필름을 매입하였고, 신성일과 엄앵란 동반 출연 영화 제작이 줄을 이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신성일-엄앵란이 만들어낸 스타콤비를 이용한 흥행 시스템은 엄청난 것이었다. (1964년 27편에 함께 출연하였고, 총 동반 출연작은 58편)

1964년 10월 신성일-엄앵란의 결혼은 말 그대로 ‘세기의 결혼식’이자, 사회적 스펙터클이었다. 스크린 안과 밖 모두에서 가장 매혹적인 대상이었던 신-엄 커플은 그 자체로 대중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맨발의 청춘(1964, 김기덕)

<맨발의 청춘>은 당시 서울 관객 25만 명을 동원한 당대 최고의 흥행작이었다. 그동안 외화만을 즐겨 찾던 젊은이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청춘영화의 결정판이었고, 신성일에게 독보적인 스타의 지위를 안겨준 작품이다. 청바지와 가죽점퍼, 반항적인 눈빛의 신성일은 이 영화를 통해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반항적인 캐릭터의 상징이 되었다.

이 영화는 일본영화 <진흙투성이의 순정>(1963)을 모방했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혹평을 받기도 했으나, 서구문화와 사회변화로 인한 젊은 세대들의 문화적 경험과 사회적 좌절을 가장 감각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크게 인정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 속 독창적인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는 두수(신성일)의 방을 공간 재현하여 관람 재미를 더한다.





청춘영화

청춘영화는 대략 1963년에서 1968까지 흥행한 장르를 말한다. 주로 도시 공간을 배경으로 하면서, 서구문화에 대한 동경과 욕망이 드러나고,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 반항하는 젊은이들의 좌절과 분노가 새로운 영상 감각으로 표현된 영화들을 일컫는다.

김기덕 감독의 <가정교사>(1963)가 포문을 열었고, 김수용 감독의 <청춘교실>(1963)이 아카데미극장 개관작으로 걸려 흥행에 성공하면서 청춘영화의 전성기를 예고하였다. 이어 <맨발의 청춘>(1964)으로 절정을 맞이하며 청춘영화는 흥행 장르로 자리잡았다.

‘김기덕 감독-신성일·엄앵란 콤비-아카데미 극장’이라는 흥행 공식이 작동했고, 특히 신성일은 청춘영화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신성일과 트로이카

결혼 이후 잠정 은퇴한 엄앵란의 뒤를 이어 청춘영화의 주인공이 된 여배우는 문희(65년 <흑맥> 데뷔), 남정임(66년 <유정> 데뷔), 윤정희(67년 <청춘극장) 데뷔) 세 명의 트로이카와 고은아 등이었다. 김지미의 스타덤도 건재했지만, 문희, 윤정희, 남정임 등 신인 여배우들의 급속한 성장 은 청춘영화와 60년대 한국영화의 붐을 이끌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여배우들의 청춘영화 파트너는 오직 신성일 한명 뿐이었다.

훼-ㅅ션 스타

1960년대 청춘영화에 등장한 패션은 ‘스타’를 탄생시키고, 청춘영화의 붐을 조성하는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패션을 영화와 현대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시킨 계기가 되었다.

60년대 남성들의 패션 아이콘은 자타공인 신성일이었다. 특히 ‘맨발의 청춘’ 서두수가 입은 ‘보머 재킷’과 스포츠 머리의 ‘반삭 헤어스타일’은 청춘의 상징이 되었다. 엄앵란, 문희, 김지미 등 당대 톱스타들은 대본이 나오면 노라노 등 의상 디자이너를 찾아갔다. 명동을 중심으로 부티크들이 형성되었고, 영화와 패션은 서로 공생하며 황금기를 함께 열어갔다.



렛츠 트위스트 어게인

청춘영화에 나타나는 꿈과 같은 화려한 생활상과 문화는 초라한 젊은이들이 현실을 잊고 환상에라도 빠져보고 싶은 심리가 투영된 것으로, 동경과 욕망의 대상이었다.

특히 청춘영화 속 댄스홀 공간은 배우 신성일의 욕망과 좌절, 번뇌와 고민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자주 활용되었다. ‘심장에서 타오르는 강한 정열이 얼굴과 눈동자에 싸늘하게 얼어 붙은 것 같은’ 매혹적인 고독을 지닌 그의 모습은 청춘의 표상이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