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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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예정 전시

2022년 기획전시 Ⅰ

위대한 유산: 태흥영화 1984-2004

  • 기간|2022.04.14.(목) ~ 09.25.(일)
  • 장소|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실
 

 

태흥영화사는 1984년부터 2004년까지 20년 동안 총 36편의 영화를 제작한 영화사다. 태흥영화사가 활동한 시기는 기존의 충무로 영화계 질서가 무너지고 영화제작 자유화, 할리우드 직배 허용,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 멀티플렉스 탄생 등 한국영화의 격변기였다.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 태흥영화사는 전통적인 충무로 제작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한국영화의 변화와 도약을 견인해나간 전무후무한 영화사였다. 한국영화의 흥행 기록을 수차례 갱신하는 한편, 새로운 감독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주요 해외 영화제를 통해 한국영화를 알리며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초석을 닦았다. 그 중심에 감독들을 과감하게 밀어주던 승부사 이태원 대표가 있었다.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아 한국영화의 문화 주권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던 이태원 대표. 그가 이끈 태흥은 일개 영화사를 뛰어넘어, 한국영화의 자존심이자 한국영화 발전을 추동하는 심장과도 같았다.

이번 기획전시는 지난해 10월 24일 세상을 떠난 고(故) 이태원 대표를 추모하고, 그가 설립한 태흥영화사가 한국영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마련되었다. 태흥영화사는 1985년부터 25차례에 걸쳐 한국영상자료원에 총 2,179점의 자료를 기증했다. 태흥의 고난과 영광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은 물론 당대 영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서편제>, <취화선> 등 태흥이 남긴 주옥같은 36편의 작품과 제작, 배급과 관련한 다채로운 자료들을 통해 태흥이 한국영화사에 남긴 위대한 유산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전시 기획 : 조소연
자료 조사 : 권세미, 조준형

<비구니>, 실패를 딛고 우뚝 서다

군납사업으로 돈을 번 태흥상공의 이태원 대표는 1974년 저돌적인 투자로 경강(경기 강원) 지역 배급권을 확보하며 영화배급과 극장업에 성공적으로 안착한다. 이태원 대표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영화제작에 도전, 1983년 태창영화사를 인수한 뒤 1984년 태흥(泰興)영화사로 이름을 바꿔 창립한다.
태흥영화사의 창립작은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였다. 기생이었던 주인공(김지미)이 불교에 귀의해 해탈하는 여승에 대한 이야기로, 제작비를 과감히 투자하고 한국전쟁을 재현한 대규모 신을 비롯하여 20% 이상을 촬영한 상황이었으나 당시 정부와 대립하고 있던 불교계가 제작 중단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끝내 제작이 무산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비구니>로 큰 손실을 보았지만, 태흥영화사는 당대 최고 감독인 이장호, 이두용, 배창호와 함께 <무릎과 무릎사이>(이장호, 1984), <돌아이>(이두용, 1985), <어우동>(이장호, 1985), <뽕>(이두용, 1985), <기쁜 우리 젊은 날>(배창호, 1987)과 같은 흥행작을 연이어 선보이며 흥행사로서의 입지를 성공적으로 다진다. 상업적인 소재에 제작비를 아낌없이 투자하며 완성도를 높인 것이 주요한 성공 요인이었다.

임권택과 함께 새 역사를 쓰다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는 1984년부터 2004년까지 총 36편의 필모그래피 중 11편을 임권택 감독과 함께 했다. 그리고 그중 8편은 정일성 촬영감독이 참여했다. 이들 세 사람이 함께한 영화 여정은 한국영화의 새 역사를 만들어낸 찬란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국제적 관심을 받게 된 임권택 감독이 이태원 대표의 간곡한 권유로 만든 액션물 <장군의 아들>(1990)은 서울 관객 67만 이상을 기록하며 13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겨울여자>(1977)의 58만 기록을 훌쩍 뛰어넘었고, <서편제>(1993)는 한국영화 초유의 1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켰다. <춘향뎐>(2000)은 한국영화로는 처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분에 진출했고, 뒤이어 <취화선>(2002)은 동 영화제 감독상 수상이라는 기념비적인 성과를 이루어냈다.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 파란을 일으킨 젊은 영화인들이 아닌, 수십 년간 성실하게 영화를 만들어 온 ‘장인’들이 일궈 낸 역사적 기록"
(심재명, 2022)

신진 감독들과 새 영화를 만들다

"흥행물도 나와야 하지만, 그것만 하면 영화는 없어진다" - 이태원

설립 초기 소위 잘나가는 감독들과 함께 하던 태흥은 점차 신진 감독 기용의 폭을 넓혀간다. 제작 자유화가 일면서 이장호, 이두용 등 중견 감독들이 직접 제작사를 차려 독립한 영향도 있겠지만, 이태원 대표는 1986년 세무조사를 받으면서 ‘돈’보다는 명예로운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때문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과감하게 기용한 이규형 감독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가 흥행 1위를 차지하면서 새로운 감독의 발굴은 계속 이어진다. 이명세, 곽지균, 장선우, 김홍준, 송능한, 김유진, 김용태 감독들의 연출작이 이태원 대표의 직관과 결단으로 탄생했다.
여러 편의 흥행 실패로 수차례 재정적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좋은 영화, 관객에게 사랑을 받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그의 다짐은 영화제작에서 물러나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칸을 꿈꾸다

"예전부터 임 감독에게 우리, 이왕이면 칸에 가자고 그랬지." - 이태원

태흥영화사는 설립 초기부터 해외 진출을 꿈꿔왔다.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연기상(강수연)을, <서편제>(1993)로 상하이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임권택)과 연기상(오정해)을, <화엄경>(1993)으로 베를린영화제 알프레드 바우어상(장선우)을 받으며, 한국영화의 세계 진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춘향뎐>(2000)으로 칸영화제 본선 진출을, <취화선>(2002)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임권택)을 수상하며, 태흥영화사의 해외 진출 도전은 화려한 성공을 거둔다.

에필로그

이태원 대표는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작품인 <천년학> 제작에서 손을 떼면서, 제작 일선에서 물러났다. 대기업, 투자사 중심으로 영화계 지형이 바뀌고, 새로운 세대들이 치고 올라오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틀어쥐어야 직성이 풀린다”던 이태원 대표가 미련을 버린 것인지 모른다. 격동의 시대에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과 뚝심으로 변화와 도약을 이끌었던 이태원 대표는 비록 떠났지만, 그가 이룬 도전과 성취는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 한국영화계에 큰 힘이 되어 주고 있다.

"영화 제작자로 만 20년을 보내면서 서른여섯 편을 만들었다. 아무도 한국영화의 장래에 승부를 걸지 않을 때 과감히 ‘베팅’한 게 적중했다. 나는 ‘이건 이기는 게임’이라고 확신했고, 게다가 운도 따랐다. 돈은 크게 못 챙겼지만 적어도 명예는 얻었다." - 이태원

"이제 나의 시대는 지나갔다. 다시 영화를 제작할 생각은 없다. 자기가 좋아서 죽기 살기로 하는 놈이 이기는 거다. 진심을 다해, 거짓 없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 이태원

※ 주요 전시물

태흥영화사가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한 제작, 배급과 관련한 총 2,179점의 자료 중 85점이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된다.
태흥영화가 제작한 36편 영화의 포스터와 전단지를 감상할 수 있고,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태흥영화의 주요장면을 편집한 오마주 영상을 전시장 내 마련된 스크린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복원한 태흥영화사의 미완성작 <비구니>의 풀영상이 공개되며,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비롯하여 태흥이 보유하고 있는 트로피 총 38점을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