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철
김혜경은 단순한 대상 이상의 여성 캐릭터다.
오승욱
남자를 구원하는 성모나 어머니 같은 여성 캐릭터 혹은 여성 판타지가 되지 않도록 굉장히 노력했다. 전도연 씨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얘기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취재를 통해 직업여성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 실제와 가깝다 하더라도 너무 어리석게 보이거나, 그것과 반대로 너무 야무지게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세계와 그럴 듯하게 어울릴 법한 여자로 그리려했다. 취재했던 여성 중 한 분이 기억에 남는다. 매일 끔찍한 남자를 보고 사는 그녀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솔직함이라는 무기’였다. 감화를 주는 말이었다. 그 외에 실제 목격한 것들이 반영된 캐릭터여서 발을 땅에 붙이게 되었다고 본다. 소모적인 여성 캐릭터, 대상화된 여성 캐릭터로 그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의 문제라기보다 한 인간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이용철
극중 정서를 공유하는 공간이 거의 없다. 관계를 나눈 다음날 아침이 유일하다. 머릿속에 계산이 오가는 장면일 수도 있는데 따뜻하게 그렸다.(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승욱
말이 많았던 장면이다. 혹자는 왜 그렇게 돈을 쉽게 주나, 말이 안 된다고 했다. 혜경이 나한테 돈을 주고 보증금을 빼가라는 대사에 주목해야 한다. 남자를 이용해 돈을 뺏으려는 게 아닌 거다. 두 사람 사이의 애틋함은 있으나, 서로에게 전달되지는 못하는 암호문을 타전하는 것 같은, 그 느낌만을 오로지 살리고 싶었다. ‘무뢰한’의 장면 중 제일 중요한 건, 모든 게 모이고 모인 라스트에서 혜경이 칼로 재곤을 찌르는 것이다. 찌를 때까지의 그녀의 감정이 소중한데, 만약 그녀가 계산을 하고 그랬다면 감정이 연결되었겠나. 촬영 도중 전도연 씨가 나를 긴장하게 만든 적이 있다. 나중에 감정이 오지 않으면 안 찌를지도 모르겠다는 거다. 감정이 안 가는데 찌른다면 가짜 연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화역에서 찍은 체포 장면이 클라이맥스가 되지 않도록 신경 썼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라스트를 에필로그로 만들어 버리니까.
이용철
라스트로 가면서 <제3의 사나이>(1949)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오승욱
<무뢰한>과 닮은 영화가 무지 많다. 그 중 하나는 장 피에르 멜빌의 <형사>(1972)다. 거의 같은 얘기이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극중 카트린느 드뇌브와 알랭 들롱이 맡은 인물 사이의 관계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의 남편이자 범죄자인 남자가 죽기 전까지, 그리고 죽고 난 이후의 어떤 것들에 대해 따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두 번째 쓰면서 ‘형사’에 조금밖에 안 나오는 두 사람의 관계로 ‘무뢰한’의 전체를 이야기하겠다, 고 방향을 잡았다. 드뇌브의 남편이 운영한 술집 ‘시몽’을 지날 때 들롱은 어떻게 행동할지, 드뇌브는 또 어떻게 반응할지, 그게 너무 보고 싶고, 그녀의 남편이자 친구인 사람을 죽인 들롱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할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제3의 사나이>는 그것들을 간결하게 표현한 경우다. <무뢰한>이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다. 혜경이 재곤을 찔러야 하니까. 그래도 <제3의 사나이>에 대한 나 나름의 오마주는 있다. 라스트 전, 기찻길 옆에서 두 사람은 헤어진다. 재곤이 차를 몰고, 걸어가던 혜경은 육교로 건너간다. <제3의 사나이>에 존경을 바치는 장면이다.
이용철
재곤이 움직이다 커트되는 마지막 쇼트에서 여러 이미지들이 맴돈다.
오승욱
너무 많다. <정무문>(1972)에서 정지 쇼트, 이두용 감독의 <무장해제>(1975)에서 여자가 소리 지르다 멈추는 장면 등 참 많이 나온다. 초고에서부터, 재곤이 걷다 어떤 표정을 짓는 데서 딱 스틸이 되고, 그의 얼굴 위로 도장처럼 인장처럼 ‘무 뢰 한’이란 제목이 찍히는 걸 그렸다. 사실 영화의 전체 톤과 안 어울리는 데가 거기라는 생각도 든다.
이용철
낡은 콘크리트가 주는 인상은 여타 변두리의 풍경과 달라 보인다.
오승욱
세월의 때가 완전히 묻어서 쇠락한 곳, 그리고 개발되고 있는 곳. 전자가 점점 뒤로 와 개발되는, 그런 개발 천지인 곳을 그리려했다. 영화 전체의 톤에서 개발과 그 이전의 것이 대조돼 보이기를 의도했다. 장소를 헌팅할 때도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인데, 아파트가 철거되거나 촬영허가가 안 나면서 문제가 됐다. 공간에 대한 야망이 있다. 촬영감독의 부인이 사진작가인데, 찍은 걸 보고 “감독이 인물보다 공간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나의 가장 깊은 곳을 본 거다. <무뢰한>에서,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진행하는 한편 서울이란 곳이 어떻게 생긴 곳인지 나의 시각 아래 보여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다음에도 계속하고 싶은 건, <보바리 부인>에서 하나씩 바뀌는 배경이 인물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처럼, 욕망과 지형을 함께 다뤄보는 것이다.
이용철
도입부와 엔딩의 서늘한 푸른색, 시퍼렇게 멍이 든 것 같은 색이 영화에 많이 나온다.
오승욱
<줄탁동시>(2011)에서 인물이 새벽에 걷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무뢰한>의 혜경과 재곤이 활동하는 시간대는 새벽, 초저녁, 그리고 밤이다. 그것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고민하다 촬영감독과 둘이 약속한 것은 ‘투박하고 거칠고 어둡게 찍자’는 것이었다. 촬영감독이 밤은 옐로우가 깃든 레드로, 나머지 장면은 전부 블루 톤으로 강렬하게 대비시키고 싶다고 제안했고, 나도 동의했다. 블루도 검을 색을 탄 느낌의 것을 원했다. 촬영감독이 디테일을 살리면서 놓치지 않고 표현해놓아 안아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