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박물관

한국영화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보물창고

기증된 영화유산

무뢰한

  • 감독 오승욱
  • 각본 오승욱
  • 소품 유청
  • 의상 채경화
  • 출연 전도연, 김남길, 박성웅, 곽도원, 김민재
  • 제작사 ㈜사나이픽처스
범인을 잡기 위해선 어떤 수단이든 다 쓸 수 있는 형사 정재곤(김남길). 그는 사람을 죽이고 잠적한 박준길(박성웅)을 쫓고 있다. 그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는 박준길의 애인인 김혜경(전도연). 재곤은 정체를 숨긴 채 혜경이 일하고 있는 단란주점 마카오의 영업상무로 들어간다. 하지만, 재곤은 준길을 잡기 위해 혜경 곁에 머무는 사이 퇴폐적이고 강해 보이는 술집 여자의 외면 뒤에 자리한 혜경의 외로움과 눈물, 순수함을 느낀다. 오직 범인을 잡는다는 목표에 중독되어 있었던 그는 자기 감정의 정체도 모른 채 마음이 흔들린다. 그리고 언제 연락이 올 지도 모르는 준길을 기다리던 혜경은, 자기 옆에 있어주는 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기부된 <무뢰한> 소품

대여된 <무뢰한> 의상

기증자에게 듣는다 <무뢰한> 오승욱 감독(사나이픽처스) 인터뷰
지금 와서 오승욱이 <8월의 크리스마스>(1998)로 그 해 대종상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던 인물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킬리만자로>(2000)로 데뷔한 이후 15년 동안 신작을 발표하지 못한 감독에게 그것은 차라리 전설 같은 이야기다.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지금의 오승욱에게 중요한 것은 ‘무뢰한’이며, 그만큼 중요한 것은 15년이라는 시간이다. <무뢰한>은 올해의 걸작이며, 영화를 연출한 오승욱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에게 강남 이야기를 써보라고 유혹했고, 또 누군가는 좀 밝은 이야기로 바꾸라고 충고하기도 했지만, 그는 끝내 자기가 믿고 아는 이야기를 버리지 않았다.
그가 인터뷰 도중 몇 차례 했던 말은 ‘그건 거짓말이잖아요’였다. 거꾸로 우리는 물어봐야 한다. 왜 우리의 시대는 거짓말하는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 왜 살아본 적이 없는 상류층의 삶만을 꿈꾸게 하는지, 왜 현실의 어두운 면을 계속 부정하는지.
그럼에도 오승욱은 ‘그들’이 바라는 영화를 만드는 재주가 자신에게 없다고 말하며 웃는다.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다. 누군가의 영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하나씩 만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결국 전부의 영화에 장막을 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세상에서 결국 만들어지는 것은 그림자의 영화들이다.
그래서 <무뢰한>을 더 지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전부의 영화가 살아남기 때문이다.
이용철
어떤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썼나?
오승욱
이번에는 남자가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시작이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이라면, 마지막은 ‘멀리서 보면 껴안고 있는 것 같은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여자가 남자를 칼로 찌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써 나갔다. 사실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고 시나리오를 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용철
이미지보다 인물의 감정이 더 오래 머무는 영화다.
오승욱
촬영하는 동안 잘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두 번째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무뢰한>은 두 사람의 감정만으로 다 끌어가는 영화라는 생각을 굳혔다. 촬영할 때도 이미지보다 정재곤(김남길 분)과 김혜경(전도연 분)이라는 인물의 감정을 어떻게 운반할지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했다. ‘킬리만자로’는 에너지가 넘쳐나는 반면 감정이 잘 전달되지 못한 영화였다. 이번 영화에서는 감정이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집중한 것인데, 거기에는 배우들의 도움이 무엇보다 컸다.
이용철
재곤이 죽은 남자의 연인을 만나는 첫 시퀀스는 후반부에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오승욱
<킬리만자로>에서도 그랬는데, 공교롭게도 또 그렇게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다. <무뢰한>의 초고가 나올 즈음 한 글자도 쓰기 힘든 상황에 빠졌다. 감독의 입장에서 다음 신을 어떻게 찍을까, 그런 생각 속에서 허우적대니 시나리오의 진척이 힘들었다. 당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 친구가 글의 힘으로 시나리오를 쓰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글의 힘으로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나이가 들수록 글의 힘으로 밀고 나가는 게 힘들어진다.
이용철
시작하고 한동안 정재곤만 나온다. 그는 세상에서 동떨어져 존재하는 사람이다.
오승욱
초고를 쓸 때는 남자의 이야기로 다 끌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자만으로는 절대 표현 안 되는 것들이 있었다. 그에게 뭔가 드러나게 하려면 여성을 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실 세계의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정재곤이란 인물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준 실제 모델은 있다. <킬리만자로>를 준비하면서 취재를 많이 했다. 그때 흥미롭고 매력적인 형사를 만났다. 정재곤처럼 거의 혼자 다니며 활동하는 형사였다. 크고 잘 생겼고 쾌남이고 옷도 항상 고급으로 맞춰 입는 사람인데, 재미있는 건 집이나 가족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항상 차에서 자고 아내도 없고 주변의 여자관계라고 해봐야 비자금을 관리해주는 (이모라 불리는) 여성 한 명 외에는 없었다. 그 사람의 얘기, 그 사람의 느낌이 정재곤이란 캐릭터에 들어 있다. 아벨 페라라의 <배드 캅>(1992)에 나왔던 하비 카이틀의 느낌이랄까.
이용철
조직 내에선 여성 전문가 같은 재곤은 기실 여성을 전혀 모르는 인물 아닌가.
오승욱
여성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은 아니다. 이혼을 당했고 여성 자체를 무서워한다. 남자나 범죄자들과는 친하고 교류가 잘 되지만, 여자와는 교감을 별로 해본 적이 없고 소통이 잘 안 되는 사람이다. 「수호지」의 ‘무송’, <피와 뼈>(2004)의 ‘김준평’ 같은 무뢰한들이 원래 그렇다. 한마디로 미숙한 거다.
이용철
김혜경은 단순한 대상 이상의 여성 캐릭터다.
오승욱
남자를 구원하는 성모나 어머니 같은 여성 캐릭터 혹은 여성 판타지가 되지 않도록 굉장히 노력했다. 전도연 씨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얘기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취재를 통해 직업여성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 실제와 가깝다 하더라도 너무 어리석게 보이거나, 그것과 반대로 너무 야무지게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세계와 그럴 듯하게 어울릴 법한 여자로 그리려했다. 취재했던 여성 중 한 분이 기억에 남는다. 매일 끔찍한 남자를 보고 사는 그녀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솔직함이라는 무기’였다. 감화를 주는 말이었다. 그 외에 실제 목격한 것들이 반영된 캐릭터여서 발을 땅에 붙이게 되었다고 본다. 소모적인 여성 캐릭터, 대상화된 여성 캐릭터로 그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의 문제라기보다 한 인간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이용철
극중 정서를 공유하는 공간이 거의 없다. 관계를 나눈 다음날 아침이 유일하다. 머릿속에 계산이 오가는 장면일 수도 있는데 따뜻하게 그렸다.(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승욱
말이 많았던 장면이다. 혹자는 왜 그렇게 돈을 쉽게 주나, 말이 안 된다고 했다. 혜경이 나한테 돈을 주고 보증금을 빼가라는 대사에 주목해야 한다. 남자를 이용해 돈을 뺏으려는 게 아닌 거다. 두 사람 사이의 애틋함은 있으나, 서로에게 전달되지는 못하는 암호문을 타전하는 것 같은, 그 느낌만을 오로지 살리고 싶었다. ‘무뢰한’의 장면 중 제일 중요한 건, 모든 게 모이고 모인 라스트에서 혜경이 칼로 재곤을 찌르는 것이다. 찌를 때까지의 그녀의 감정이 소중한데, 만약 그녀가 계산을 하고 그랬다면 감정이 연결되었겠나. 촬영 도중 전도연 씨가 나를 긴장하게 만든 적이 있다. 나중에 감정이 오지 않으면 안 찌를지도 모르겠다는 거다. 감정이 안 가는데 찌른다면 가짜 연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화역에서 찍은 체포 장면이 클라이맥스가 되지 않도록 신경 썼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라스트를 에필로그로 만들어 버리니까.
이용철
라스트로 가면서 <제3의 사나이>(1949)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오승욱
<무뢰한>과 닮은 영화가 무지 많다. 그 중 하나는 장 피에르 멜빌의 <형사>(1972)다. 거의 같은 얘기이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극중 카트린느 드뇌브와 알랭 들롱이 맡은 인물 사이의 관계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의 남편이자 범죄자인 남자가 죽기 전까지, 그리고 죽고 난 이후의 어떤 것들에 대해 따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두 번째 쓰면서 ‘형사’에 조금밖에 안 나오는 두 사람의 관계로 ‘무뢰한’의 전체를 이야기하겠다, 고 방향을 잡았다. 드뇌브의 남편이 운영한 술집 ‘시몽’을 지날 때 들롱은 어떻게 행동할지, 드뇌브는 또 어떻게 반응할지, 그게 너무 보고 싶고, 그녀의 남편이자 친구인 사람을 죽인 들롱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할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제3의 사나이>는 그것들을 간결하게 표현한 경우다. <무뢰한>이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다. 혜경이 재곤을 찔러야 하니까. 그래도 <제3의 사나이>에 대한 나 나름의 오마주는 있다. 라스트 전, 기찻길 옆에서 두 사람은 헤어진다. 재곤이 차를 몰고, 걸어가던 혜경은 육교로 건너간다. <제3의 사나이>에 존경을 바치는 장면이다.
이용철
재곤이 움직이다 커트되는 마지막 쇼트에서 여러 이미지들이 맴돈다.
오승욱
너무 많다. <정무문>(1972)에서 정지 쇼트, 이두용 감독의 <무장해제>(1975)에서 여자가 소리 지르다 멈추는 장면 등 참 많이 나온다. 초고에서부터, 재곤이 걷다 어떤 표정을 짓는 데서 딱 스틸이 되고, 그의 얼굴 위로 도장처럼 인장처럼 ‘무 뢰 한’이란 제목이 찍히는 걸 그렸다. 사실 영화의 전체 톤과 안 어울리는 데가 거기라는 생각도 든다.
이용철
낡은 콘크리트가 주는 인상은 여타 변두리의 풍경과 달라 보인다.
오승욱
세월의 때가 완전히 묻어서 쇠락한 곳, 그리고 개발되고 있는 곳. 전자가 점점 뒤로 와 개발되는, 그런 개발 천지인 곳을 그리려했다. 영화 전체의 톤에서 개발과 그 이전의 것이 대조돼 보이기를 의도했다. 장소를 헌팅할 때도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인데, 아파트가 철거되거나 촬영허가가 안 나면서 문제가 됐다. 공간에 대한 야망이 있다. 촬영감독의 부인이 사진작가인데, 찍은 걸 보고 “감독이 인물보다 공간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나의 가장 깊은 곳을 본 거다. <무뢰한>에서,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진행하는 한편 서울이란 곳이 어떻게 생긴 곳인지 나의 시각 아래 보여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다음에도 계속하고 싶은 건, <보바리 부인>에서 하나씩 바뀌는 배경이 인물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처럼, 욕망과 지형을 함께 다뤄보는 것이다.
이용철
도입부와 엔딩의 서늘한 푸른색, 시퍼렇게 멍이 든 것 같은 색이 영화에 많이 나온다.
오승욱
<줄탁동시>(2011)에서 인물이 새벽에 걷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무뢰한>의 혜경과 재곤이 활동하는 시간대는 새벽, 초저녁, 그리고 밤이다. 그것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고민하다 촬영감독과 둘이 약속한 것은 ‘투박하고 거칠고 어둡게 찍자’는 것이었다. 촬영감독이 밤은 옐로우가 깃든 레드로, 나머지 장면은 전부 블루 톤으로 강렬하게 대비시키고 싶다고 제안했고, 나도 동의했다. 블루도 검을 색을 탄 느낌의 것을 원했다. 촬영감독이 디테일을 살리면서 놓치지 않고 표현해놓아 안아 주고 싶다.
이용철
왜 밑바닥의 깡패들에게 관심이 많나.
오승욱
초기에 <무뢰한>의 배경을 강남으로 바꿔달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는 레이스가 달리면 안 된다, 그것을 다는 순간 모든 것은 다 가짜로 바뀐다. 영화를 만드는 의미가 없어지는 거다’라고 답했다. 집으로 오면서 어쩌면 나는 앞으로 영화를 못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 관심의 유무를 떠나 어렸을 때부터 주위에서 보고 겪은 것들이 다 그런 것들이다. 나는 부자로 살아본 적이 없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모두가 그것을 원하니 아는 게 없는 나로서는 절망할 밖에. 내가 아는 세계에는 연민, 짜릿한 느낌이 있고 좋아하는 만큼 할 얘기도 많다. 영화에 형사가 계속 등장하는 건, 어릴 때부터 죄 짓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레미제라블>이나 <로드 짐>(1965) 같은 거. 그리고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것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이용철
피와 액션이 난무하는 한국 누아르와 비교해 <무뢰한>의 노선은 다르다.
오승욱
전작을 찍고 영화 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게 결국 감독의 살인이다, 라고 생각했다. 피가 나오거나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안 하고 싶었다. <무뢰한>의 시나리오를 여러 번 고치는 과정에서도 극중 죽는 사람은 맨 처음에 피살돼 발견되는 인물 한 명이었다. 박준길(박성웅)도 원래 죽는 게 아니고 그냥 잡혀가는 거였다. 액션 장면은 아예 하나도 없었다. 굳이 액션이라 부를 수 있는 장면이라고 해 봐야, 준길이 잡혀 가는 장면에서 형사와 몸싸움하는 것과 나중에 재곤이 혜경을 찾아가 사람을 때리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준길 역할로 박성웅 씨가 들어오면서 액션이 들어가게 됐다. 제작을 맡은 ‘사나이픽쳐스’의 한재덕 대표가, 남녀가 섹스를 나눈 후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보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걸 시나리오로 쓰면서 자연스레 다음 액션 장면으로 연결되었다. 원래는 재곤이 들어갔더니 준길이 도망가고 없어진 것으로 단순하게 끝나는 것이었다. 요즘 한국영화에서 액션을 참 잘 찍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근육과 근육인 두 남자가 서로 적이면서도 몸뚱이는 꽉 붙어서 껴안고 뒹굴뒹굴하는 그런 느낌으로 가는 거였다.
이용철
<킬리만자로>가 그러하듯, <무뢰한>도 문제는 인간에 대한 예의다.
오승욱
그것을 봉준호 감독이 예리하게 포착했다. ‘이 영화에는 인간에 대한 요만큼의 예의도 없는 야비하고 더러운 캐릭터들이 버글거리지만, 결국에는 이런 인간들 속에서 예의라는 걸 생각하는, 그런 영화를 만든 게 아닌가’ 그런 얘기를 해줘서 너무 고마웠다.
이용철
이제 지난 15년에 대해 질문하려고 한다. <킬리만자로> DVD의 음성해설을 하면서 ‘다음 영화는 좀 더 잘 만들겠습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 때 다음 영화는 언제쯤 찍을 것으로 생각했나.
오승욱
연출부 시절, 감독 한 분이 현장을 방문했다. 3, 40년 전에 영화를 연출하고 이후 한 편도 더 연출하지 못한 채 당시 부산에 살고 있다고 했다. 연출부 시절임에도 저렇게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킬리만자로> 때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다. 내년에 다음 작품을 찍겠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내게 그런 일이 벌어진 거다.
이용철
힘든 시간이었다. 어떻게 이겨냈나.
오승욱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캔터베리 이야기>(1971)에서 지오토가 꿈에서 깨어나 “꿈속에서 저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나오는데, 대체 나는 왜 그것을 그리려고 하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스틸 화면이 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 얼굴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철도 없고 마음이 편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더 옹졸해지고 나빠질 테고, 당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나쁜 영향이 갈 수도 있으니까. <무뢰한>의 제작이 들어가기 1년 전쯤에는 약간의 절망 상태에 빠져서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지 생각한 적은 있다. 그런데 마침내 영화를 찍게 되었고, 제작 도중에 힘든 위기에 처할 때에도 가장 덜 낙담한 사람은 나였다.
이용철
현장이 많이 바뀌었을 텐데 어떻게 적응했는가.
오승욱
제일 많이 달라진 건, 내가 나이를 많이 먹어서 나이 서열로 따지면 거의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가 되어버렸다는 거다. 연출부 시절부터 <킬리만자로>까지 유영길 촬영감독의 라인 분들과 계속 작업했다. 이번에는 그런 건 없는 상태였으나, 기본적으로 스태프들이 영화를 만드는 자세는 거의 다르지 않다. 잘 찍으려고 서로 노력하는 태도는 예전과 똑같다.
이용철
올해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에 출품돼 다녀왔다.
오승욱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조금 자고 다음 날 일어나 인터뷰 계속한 뒤 공식 상영에 참석하고, 다음 날 포토콜 나서야 하는 등, 밥 먹는 것 외에 도무지 짬이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영화를 보기는커녕 제대로 쉴 틈도 없었다. 인터뷰와 사진만 찍고 가는 느낌이었다. 연출부에게 줄 선물 하나 사지 못했다. 마지막 날, 일행과 한 시간 정도 술자리를 나눈 게 편한 시간의 전부였다.
이용철
칸에서 접한 반응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오승욱
전체적으로 보는 게 좀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제일 좋았던 것은, 카메라맨에 대한 언급이었다. 어둡게 찍었으면서도 디테일이 살아 있고, 색감이 놀랍도록 생생하다는 언급, 정지 상태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이미지에 대한 언급도 기분이 좋았다. 전도연과 김남길 두 배우에 대한 칭찬이야 굉장히 많았고, 편집과 음악에 대한 칭찬도 몇 차례 들었다.
이용철
영화에 참여한 분들에게 한 말씀.
오승욱
믿고 따라준 분들에게 정말 고맙다. 개봉을 하기까지 수많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같이 긴장하고 마음 아파하고 실망하고, 그런 부분에 대해 고마울 따름이다. “이건 우리 영화이지 않느냐”라는 감독의 말이 사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정말로 함께 해준 분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무뢰한> 이양준 조감독이 선정한 소품이 인상적인 영화 BEST 5
1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2000)
감독_스티븐 달드리
출연_제이미 벨, 줄리 월터스, 게리 루이스
장르_드라마, 코미디
광산이 파업을 시작했다. 이길 수 있는 투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리멸렬한 시간은 계속되었고 돈은 바닥 난지 오래다. 급기야 빌리의 아버지는 죽은 어머니의 유일한 유산인 피아노마저 부숴 땔감으로 써버린다. 피아노가 박살나 벽난로 속의 땔감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영화는 지옥 같은 삶의 환경에 의해 박살나버리는 우리의 ‘꿈’과 미래의 ‘희망’을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2
복수는 나의 것 Sympathy For Mr.Vengeance(2002)
감독_박찬욱
출연_송강호, 신하균, 배두나
장르_범죄, 스릴러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의 말에 우리는 관심을 가질 생각도 시간도 여력도 없다. 당장 자신에게 주워진 해결과제에 급급해 하루하루 정신없이 ‘빡세게’ 살아간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판결문은 나와 관련 없는 누군가의 무의미한 말 한마디도 어떨 때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3
스위밍 풀 Swimming Pool(2003)
감독_프랑수아 오종
출연_샬롯 램플링, 루디빈 사니에, 찰스 댄스
장르_미스터리, 드라마
지하철에서 한 중년 여성이 ‘사라모튼’이 쓴 추리소설을 읽고 있다. 그런데 아뿔싸, 맞은편에 그 작가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중년 여성은 이윽고 팬임을 밝히며 책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때 작가(샬롯 램플링)는 냉소적이고 단호한 표정을 짓는다. 사람을 잘못 봤다며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 하나로 영화는 그녀의 냉소적이며 배타적인 캐릭터를 구축한다. 그밖에도 사라 모튼의 소설책 표지는 제한적인 시간과 싸워 나가야하는 영화에서 효율적으로 잘 활용되고 있다.
4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Turtles Swim Faster Than Expected(2005)
감독_미키 사토시
출연_우에노 주리, 아오이 유우, 후세 에리
장르_코미디
주부 ‘스즈메’는 스파이 모집 스티커를 발견한다. 스파이가 된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어처구니없게도 또다시 ‘평범하게 살기’이다. 하지만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살면서도 스파이가 된 ‘스즈메’의 태도는 180도 달라진다. 작은 스티커 하나에서 전환된 그녀의 삶은, 같은 환경 속에서도 생각의 전환으로 삶의 태도가 변할 수 있음을 말한다.
5
칠드런 오브 맨 Children of Men(2006)
감독_알폰소 쿠아론
출연_클라이브 오언, 줄리안 무어, 마이클 케인
장르_모험, 드라마, 공상과학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정부는 자살키트를 배포해 마치 죽음이 공포스러운 현실을 벗어나 희망으로 닿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양 광고한다. 하지만 폭력과 테러로 포장된 ‘자살키트’가 아닌 주인공 ‘테오’의 희생을 통해 구원해 낸 ‘키(임신한 여자아이)’와 갓 태어난 그녀의 ‘아이’가 미래의 희망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By 이용철(영화평론가) | 사진_권영탕(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