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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된 영화유산

김태형 콘티뉴이티 작가

영화 콘티뉴이티 작가이자 감독. 데뷔작 <대한민국 헌법 제1조>(2003)를 시작으로 <잠복근무>(2005), <플라이 대디>(2006), <청담보살>(2009), <김종욱 찾기>(2010), <무서운 이야기>(2012), <숨바꼭질>(2012), <결혼전야>(2013), <우아한 거짓말(2013), <순수의 시대>(2014) 등 30여 편의 한국영화 콘티를 만들었다. 감독과의 소통을 중시하며 그 능력 역시 탁월해 최근 국내영화계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콘티작가 중 한명이다.

기부된 소품 이미지

기증자에게 듣는다 <순수의 시대>(㈜화인웍스, ㈜키메이커) 김태형 콘티뉴이티 작가 인터뷰
태상준
꽤 ‘잘’ 나가는 콘티뉴이티(이하 ‘콘티’) 작가다.(웃음) 어떻게 영화 일을 하기 시작했나?
김태형
<대한민국 헌법 제 1조>(2003)의 연출부로 영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 각색과 콘티 작업만 하다가 연출부 활동도 병행했다. 사실 내 최종 목표는 감독이다. 원래는 조감독을 하다가 그 영화가 엎어지면 다른 영화 콘티 하나 해서 돈 벌고 그랬다. 철저히 ‘알바’ 개념이었다. 전업 콘티 작가로 활동하게 된 건 민규동 감독의 수필름에서 제작한 <김종욱 찾기>(2010) 때부터다. 그 전에는 시나리오 쓰다 시간이 날 때 마다 작업한 경우다. 그때 작업한 영화 중에서는 <잠복근무>(2005)와 <플라이 대디>(2006), <청담보살>(2009) 정도가 언급할만한 작품이다.
태상준
전업 작가를 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경제적인 면이 크게 작용했나?
김태형
그런 점도 있다. 콘티는 단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연출 그 자체다. 감독과 촬영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어떻게 구현할지 계획을 세우는 연출 회의다. 감독을 지망하는 내게는 유리한 자산이다. 여러 감독들과 만나서 비슷한 이야기를 어떻게 다르게 풀어가는 지에 대한 수업을 받는 거니까. 회의에서의 내 아이디어가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됐는지, 배우가 이를 어떻게 채웠는지도 확인할 수 있고. 평범했던 콘티가 현장에서의 변수와 배우의 능력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장면으로 탈바꿈했을 때를 확인할 때는 짜릿하다.
태상준
전업 작가를 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경제적인 면이 크게 작용했나?
김태형
그런 점도 있다. 콘티는 단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연출 그 자체다. 감독과 촬영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어떻게 구현할지 계획을 세우는 연출 회의다. 감독을 지망하는 내게는 유리한 자산이다. 여러 감독들과 만나서 비슷한 이야기를 어떻게 다르게 풀어가는 지에 대한 수업을 받는 거니까. 회의에서의 내 아이디어가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됐는지, 배우가 이를 어떻게 채웠는지도 확인할 수 있고. 평범했던 콘티가 현장에서의 변수와 배우의 능력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장면으로 탈바꿈했을 때를 확인할 때는 짜릿하다.
태상준
이야기를 들어보니 감독이 콘티를 그릴 때가 가장 이상적인 경우일 것 같다.
김태형
김지운이나 박찬욱, 봉준호 감독이 그렇다. 회의 때 김지운 감독은 그림을 그리고, 옆에서 콘티 작가는 사진을 계속 찍는다고 하더라.(웃음) 그런데 김지운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기존 콘티와는 완전히 다른 콘티를 또 만들어 낸다. 콘티는 자기 생각을 한번 총정리하는 거다. 일단 정리를 해야 가이드라인이 만들어 지니까. 그 위에 여러 가지가 더 얹어질 수 있다.
감독에는 두 부류가 있다. 박찬욱이나 봉준호처럼 콘티대로 가는 감독과, ‘러프’한 콘티로 현장에서 유동성 있게 운용하는 감독이 있다. 전자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만 따라 와!” 식의 천재 감독이라면, 후자는 현장 스태프들과 어우러져서 만들어 가는 경우다. 콘티 작가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가 보람이 있다. 콘티대로 찍힌 영화보다는 그 콘티가 촬영 현장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무엇이 더 덧붙여지는지가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튼튼한 가이드라인이 정립돼 있다면 어떠한 변수라도 다 수용될 수 있다.
태상준
요즘에는 투자, 배급이 확정되기 위해서는 시나리오에 더해 풀 콘티가 요구된다고 들었다.
김태형
프리 프로덕션을 알차게 쓰라는 말이다. 긴장하라는 거지. 현장에서 대충 ‘비빌’ 생각하지 말고, 조금 더 고민하라는 것이다. 검증이 안 된 신인 감독들의 경우가 그렇다. 영화가 산업이다 보니 글로 된 시나리오만으로는 돈이 회수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많다. 그들 입장에서도 판단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 풀 콘티를 요구하는 거다.
태상준
그러나 모든 감독이 기제출한 콘티와 똑같이 영화를 촬영하는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어떤 감독은 이런 이슈로 감독직에서 해임되기도 했다.
김태형
민감한 부분이다. 제작자와 감독의 입장이 서로 너무 달랐다. 어느 쪽이 잘했다, 잘 못했다는 판단할 수 없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영화가 상품이고, 그 상품을 시장에 내놨을 때 최대한 많이 팔리기를 기대한다. 콘티로 유추했고 생각했던 그림이 있었을 텐데, 촬영 현장에서는 전혀 그 그림대로 가고 있지 않았으니 당황했을 것 같다. 설계도를 넣었을 때는 KS 마크를 받았는데, 정작 공장에서는 전혀 다른 걸 만들고 있었던 거다.
태상준
국내에서 활동하는 전업 콘티 작가는 몇 명이나 되는가? 일반 관객들에겐 무척 낯선 직업이다.
김태형
한국에서 활동하는 콘티 작가는 1000명도 안 될거다. 주로 메이저에서 활동하는 콘티 작가들 중에서는 강숙 작가(<허삼관>(2014), <오늘의 연애>(2014))와 임선애 작가(<해무>(2014), <수상한 그녀>(2014)), 장강희 작가(<국제시장>(2014), <동창생>(2013)) 등이 유명하다. 또 차주한 작가를 축으로 활동하는 콘티 브라더스(<건축학개론>(2012))는 ‘팀’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회사다.
태상준
용어 정립을 할 필요가 있겠다. 콘티뉴이티와 스토리보드는 같은 말인가?
김태형
스토리보드(Storyboard)가 좁은 의미의 콘티뉴이티(Continuity)다. 스토리보드가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면, 콘티는 시나리오를 쪼개서 어떻게 촬영할 지에 대한 사항들을 나열한 것들이다. 콘티는 그림이 아닐 수도 있다. 글만으로도 가능하지만, 대부분은 거기에 그림이 더해진 형태다.
태상준
과거 작업 환경과 비교하면 어떤가? 당연히 좋아졌겠지?
김태형
처음에는 그림만 원할 때가 많았다. 1998년에 봉만대 감독이 조감독이었던 시대극 <팔만대장경> 콘티 작업을 했었는데 그때는 철저히 그림만 그렸다. 콘티 개념은 전혀 없었다. 21세기 넘어와서 조금 달라졌다. 샷에 대한 이해도가 없으면 힘들다. 애니메이션 연출과 영화 연출은 전혀 다르다. 영화 연출에서 특정 샷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콘티 작업을 한다면, 애니메이션 연출에서는 실제 카메라로 구현할 수 없는 각들이 가끔 나온다. “너 미대 나왔다며? 네가 콘티 해!”가 일반적이던 때라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사람들이 콘티 작가로 많이 활동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프로젝트가 킥오프되고 연출부와 제작부가 감독 밑에 꾸려지면, 시나리오 완고가 나오기 전이라도 콘티 작가를 구한다. 감독과 헌팅도 같이 다니고 미팅도 하면서 연출 회의를 한다. 서로 의견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일종의 ‘맞선’인거지. 콘티 회의의 구성원은 감독과 촬영 감독, 스크립터와 콘티 작가, 이렇게 네 명이 메인이다. 거기에 간혹 조명감독이나 미술 감독, CG 감독이 참여하기도 한다.
태상준
시나리오 작가는 콘티 회의에 참석을 안 한다는 말인가?
김태형
안 온다. 일단 털고 나면 끝이다. 콘티 작업을 할 때 또 각색이 된다. 특정 신이 빠지기도 하고, 시나리오엔 없었던 신이 추가되기도 한다. 시나리오 작가가 창작을 하긴 했지만, 어느 선까지 끝내면 빠져야 한다. 계속 남아서 ‘감 놔라 배 놔라’ 그러면 서로 힘들어 지는 거다.(웃음)
태상준
콘티 회의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김태형
회의실 중앙에 내 태블릿과 연결된 큰 화면이 있다. 내가 그리는 게 화면에 보인다. 회의 과정에서 여러 의견들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수정이 되는 거다. 영화의 전반적인 톤앤매너에 대한 이야기와 촬영 감독이 잡은 계획, 레퍼런스 영화들, 감독이 생각하는 이 영화의 핵심, 캐스팅과 배우 이야기 등 그 영화에 대한 모든 것들을 다 공유한다. 본 작업에 들어가면 신들을 어떻게 만들건 지 고민하고. 콘티 작가는 감독과 함께 연출을 고민하고 기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콘티 작가는 엔드 크레딧에 연출부와 함께 올라간다.
태상준
대략 풀 콘티가 완성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는가?
김태형
크랭크 인 시점까지 한 달 정도 남았을 때 콘티 회의가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과거에는 나도 연필로 콘티를 그리고 콘티 회의에서 이를 구성원들에게 확인 받고 그랬다. 요즘에는 태블릿으로 작업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일을 맞추지 못할 때가 많다.
태상준
콘티 없이 영화를 찍는 감독도 꽤 있다. 홍상수 감독이 대표적이다.
김태형
홍상수 감독은 현장의 즉흥성이 중요한, 콘티가 필요 없는 영화를 찍는 감독이다. 김기덕 감독도 마찬가지고.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샷이 자신의 주제를 향해 달려간다. 관객과의 전쟁을 해야 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상업 영화는 기본적으로 ‘밀당’ 영화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샷이 관객들과 밀고 당기기를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콘티가 필수적이다.
태상준
콘티와 완성된 영화의 싱크로 율이 높은 감독은 누가 있을까?
김태형
이번에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섹션에 진출했던 <오피스 office>(2014)가 그랬다. 홍원찬 감독이 <추격자>(2008)와 <황해>(2010) 작가 출신인데, 처음 회의할 때 자기는 무조건 콘티대로 다 찍을 거니까 콘티가 완벽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촬영 감독이 현장에서 만들어가는 스타일이라 조금 걱정이 됐다.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감독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영화 작업 때문에 중국에 로케이션 갔을 때다. <오피스> 현장 스태프가 촬영한 장면들을 휴대폰으로 전송해줬는데 콘티와 100% 똑같더라고.(웃음) 고집 피우면 결국 누가 이기겠나. 감독이 이기지.(웃음) 또 한 명은 <4인용식탁>(2003)의 이수연 감독. 지금 <해빙> 작업하고 있는데, 열 작품 정도는 연출한 것 같은 포스의 감독이다.
태상준
콘티 작가로서 협업하기 힘든 감독 스타일을 꼽는다면?
김태형
감독이 현장 경험이 전무할 때 가장 힘들다. 신인 감독들의 경우 시나리오를 그림으로 구현할 때 어떤 수고들이 겹쳐지는지 모르고, 돌발 변수도 고려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지만 어설프게 아는 것보다는 아예 모르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김종욱 찾기>의 장유정 감독이 그랬다. 뮤지컬에서는 날고 기는 사람이지만, 영화 쪽에서는 완전 ‘초짜’였다. 처음에는 편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콘티 회의에서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잘 알았다. 그런 탓에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꽤 겪었지만 스태프들이 ‘으?으?’ 해서 무사히 완성된 경우다. 현장 분위기도 꽤 좋았다고 하더라.
태상준
콘티 감각이 탁월한 배우는 누가 있을까?
김태형
김윤석? 모두가 힘들었을 거라고 이야기를 하던데 <완득이>(2011)에서 이한 감독은 너무 좋았다고 하더라. 배우가 그림을 볼 줄 알아서 큰 도움이 됐다는 말을 들었다. 정우성도 있다. 그는 배우지만 기본적으로 감독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대사와 연기뿐만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필름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태상준
좋은 콘티 작가가 되기 위해 꼭 갖춰야 할 미덕을 꼽는다면?
김태형
그림을 잘 그리는 게 좋은데, 디자인보다는 만화를 잘 그리면 유리하다. 인서트의 경우는 회화 느낌이 나야 할 때도 있다. 베스트는 스태프를 해 본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는 거다. 콘티는 좋은 감독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공 필수 영역이다. 현장을 알지 못하면 힘들다. 감독이 수동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태상준
대개 1년에 몇 작품에 참여하는가?
김태형
지난해가 최고였다. 무려 일곱 편을 했으니까. 한 해 통틀어 보름도 쉬지 못했다. 1~2주마다 새로 시작하는 영화와 끝나는 영화가 맞물려 돌아갔다. 개인적으로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건 다섯 작품 정도? 동시에 세 작품을 진행할 땐데, 한 영화의 콘셉트 회의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각각 세 영화의 스크립터 세 명이 ‘빚쟁이’처럼 전화가 오곤 했다. 지옥을 경험한 거지.(웃음)
태상준
주변에 콘티 작가를 꿈꾸는 후배들이 있는가?
김태형
콘티는 최종 결과물인 영화로 나아가는 중간 결과물이라 저작권이나 사용권이 애매할 경우가 많다. 굳이 하겠다면 말리겠다. 과거와 비교하면 처우는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돈 많이 줘서 뭐해. 어차피 그림인데.”라는 반응도 있다. 아, 문인대 편집감독 큰 딸이 콘티 작가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웃음)
태상준
<순수의 시대> 이야기를 해보자. ‘야한’ 영화의 스토리보드 작업은 좀 민망할 것도 같다.(웃음)
김태형
그런 게 힘들면 이 일 못한다. <블라인드>(2011)로 성공한 후 다음 영화라 안상훈 감독이 부담이 컸다. 사전 회의 할 때 영화의 시작은 <글래디에이터 gladiator>(2000)로 잡았다. 피와 살이 튀는 진짜 전쟁터에서 야수 같은 인간을 보여주고, 그 이후에 땀과 정액으로 범벅된 끈적끈적한 섹스 신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이런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순수한 사랑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의도가 제대로 발현되지 못했다.(웃음)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이라고 생각해서 들어간 경우인데 액션과 섹스 신, 스케일로 시나리오의 약점을 가릴 수는 없었던 것 같다.
태상준
함께 작업하고 싶은 감독을 꼽는다면?
김태형
나카시마 테츠야 좋아한다고 하면 감이 오지 않나?(웃음) 가이 리치 좋아한다. ‘날티’나는 코엔 형제라고나 할까? 재치 있고 화려한 미장센을 보여주지만, 자기 논리 안에서 색감이 활용되는 영화들이다. 한국에서는 박찬욱과 봉준호. 둘 다 대단한 감독들인데, 내 성향 상으로는 박찬욱 감독이 더 좋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편하고, 영화를 보면 볼수록 재치와 감각적인 것들이 자꾸만 발견된다.
태상준
가까운 미래에 박찬욱 감독과 꼭 작업할 수 있기를 바라겠다.(웃음)
김태형
<아가씨> 콘티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과 콘티를 하면 재미는 없다고 하더라. 워낙 완벽한 감독인 게지. 수동적인 걸 아주 싫어하기는 하는데, 박찬욱 감독이라면 한 번 시키는 대로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기는 하다.(웃음)
태상준
그러면 지금까지 참여했던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
김태형
<미쓰go>(2012). 50회차 가까이 30억 원의 제작비가 들었는데, 처음부터 새로 해야 했던 작품이라 기억이 난다. 박철관 감독이 워낙 형 같은 감독이라 도와준 경우다. 그런데 <미쓰go>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다른 감독이 기획, 개발한 작품이었다. 스토리보드도 있었고, 시나리오도 그가 아니면 소화할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 이전 작업물을 뛰어 넘고 싶어서 애를 쓰긴 했는데, 결과물 보면서 울뻔 했다. ‘통통’ 튀는 재기발랄한 영화와 박철관 감독의 궁합이 안 맞았다. 그는 휴먼 드라마나 누아르에 강점이 있는 감독이었으니까.(웃음)
태상준
지금까지 작업한 콘티는 어떻게 보관하고 있는가?
김태형
대부분은 데이터로 보관하고 있지만 분실된 경우도 있다. 스캔한 것을 실수로 지웠거나, 책의 형태로 원본이 있었는데 이사 과정에서 잃어버리기도 했다. 데이터의 가치를 떠나서 완성된 영화와 콘티를 비교하는 작업을 꼭 해보고 싶다. DVD 커멘터리처럼 코멘트를 달아보는 것. 회의 때는 이야기가 이랬고, 실제 영화는 이렇게 찍혔다는 걸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태상준
작업한 영화중에 기대가 되는 작품을 꼽는다면?
김태형
정우성과 김하늘이 주연한 <나를 잊지 말아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과 <달콤, 살벌한 연인>(2006)에서 스크립터로 활동했던 이윤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한국에는 없는 미국 인디펜던트 감성의 영화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2003)이랄까? 스태프들은 ‘강남‘ 멜로라고 불렀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아주 묘하고 신선했다. 부디 잘 완성돼서 한국 영화의 영역이 확장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김태형 작가가 선정한, 콘티를 확인하고 싶은 영화 BEST 5
1
스내치 Snatch(2000)
감독_가이 리치
출연_베니시오 델 토로, 데니스 파리나, 비니 존스
장르_코미디, 범죄, 스릴러
“뉴욕에 살던 친구가 런던에 오는 장면이 있어요. 전화 ‘쿵’ 하고 택시 문 ‘꽝’ 닫히고 ‘다다닥’ 런던에 도착하는 세네 컷으로 끝나는 장면이죠. 콘티가 똑같이 있더라고요. 다른 건 몰라도 가이 리치는 템포감 하나는 기막힌 감독이에요. 사실 한국에서 이런 장면을 찍는다면, 대개 공항 장면으로 처리하거나 아니면 문을 열고 들어가서 나오면 런던이거나 하는 식이겠지요. ‘스내치’는 몽타주를 기가 막히게 썼어요. 뉴욕 택시와 런던 택시를 대비시켰고, 캐릭터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나열해서 미국에서 영국까지 가는 장면을 재치 있게 그려냈습니다.”
2
쓰리, 몬스터 Three... Extremes, Three, Monster(2004)
감독_박찬욱
출연_강혜정, 이병헌, 임원희
장르_공포
“한국, 일본, 중국 합작 영화 ‘쓰리, 몬스터’ 중에서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컷 Cut’. 박찬욱 감독 콘티는 다 좋아요. 세트와 세트 아닌 곳, 배우와 배우 아닌 자가 모여 있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한정된 공간에서 뭔가를 짜내기가 절대 쉽지가 않거든요. 대표적인 천재 감독입니다.”
3
황해 Hwanghae(2010)
감독_나홍진
출연_하정우, 김윤석, 조성하
장르_범죄, 스릴러
“누가 봐도 힘든 영화죠. 보는 것도 힘들지만, 찍기도 참 힘들었을 것 같아요. 상영 시간은 길고, 보고 나면 힘들고 불편하고.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더 좋아하는 영화에요. 이 영화에 얽힌 여러 비하인드는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디테일들은 훌륭해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감독 머릿속에서 나온 거잖아요. 구남(하정우 분)이 자신이 살인할 사람을 노리고 그 건물의 계단을 보고 사진을 찍으면서 계획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글 하나 없이 그림으로만 전달이 되잖아요. 그런 장면을 찍어냈다는 게 놀랍습니다. 아마 다른 상업영화였다면 그 장면은 백이면 백 통으로 없어졌을 거예요. 그 이후 드러나는 구남의 집요한 캐릭터 설명을 위해 꼭 필요했던 디테일이었죠.”
4
숨바꼭질 Hide and Seek(2013)
감독_허정
출연_손현주, 문정희, 전미선
장르_스릴러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어요. 감독과 프로듀서, 촬영감독 셋 다 신인인데다, 감독과 촬영 감독 고집도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영화에 대한 고민을 끝까지 놓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아침 열 시에 시작된 회의가 밤 열 시까지 이어지는 적이 많았어요. 회의 장소가 상암동 DMC인데, 집은 경기도 광주에요. 진이 빠질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기술 시사 보고 나서 뿌듯했어요. 허정 감독이 과거에 연출했던 단편들의 세계관이 ‘숨바꼭질’에서도 고스란히 구현됐더라고요. 정서가 완벽하게 확장됐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5
경주 Gyeongju(2014)
감독_장률
출연_박해일, 신민아, 윤진서
장르_드라마
“콘티가 없는 영화도 좋아합니다. 장률 감독의 ‘경주’나 지아장커의 ‘소요에 맡기다 Unknown Pleasures’(2002)는 콘티가 없는 영화라 좋아요. 콘티가 필요 없는 영화들이죠. 지아장커가 인정받는 이유는 그가 중국을 아름답지 않게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중국 감독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더 소중해요. ‘경주’의 장면들도 글로 나열한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영화가 다 끝나고 나면 묘한 울림이 있어요. ‘경주’를 보고난 후에 내가 하는 작업이 참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나는 ‘뚝딱뚝딱‘ 아이폰을 만들고 있는데, 이 분들은 나무를 깎아서 근사한 르네상스 예술품을 완성해 내고 있으니까요.”
By 태상준(영화저널리스트) | 사진 이준구(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