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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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된 영화유산

택시운전사

  • 감독 장훈
  • 미술 조화성
  • 의상 조상경
  • 출연 송강호, 토마스 크레취만, 유해진, 류준열, 박혁권, 최귀화, 엄태구, 유은미
  • 제작사 더 램프
1980년 5월, 서울 택시운전사.
“광주? 돈 워리, 돈 워리! 아이 베스트 드라이버”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은 외국손님을 태우고 광주에 갔다 통금 전에 돌아오면
밀린 월세를 갚을 수 있는 거금 10만원을 준다는 말에
독일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태우고 영문도 모른 채 길을 나선다.

광주 그리고 사람들. “모르겄어라, 우덜도 우덜한테 와 그라는지…”
어떻게든 택시비를 받아야 하는 만섭의 기지로 검문을 뚫고 겨우 들어선 광주.
위험하니 서울로 돌아가자는 만섭의 만류에도
피터는 대학생 재식(류준열)과 황기사(유해진)의 도움 속에 촬영을 시작한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심각해지고 만섭은 집에 혼자 있을 딸 걱정에 점점 초조해지는데…

쇼박스 기증 <택시운전사> 의상 · 소품

“외부자 만섭이 느낀 정서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을 보여주려 했다.” 장훈 감독 인터뷰
장훈 감독을 만난 건 <택시운전사>가 이미 400만 관객을 돌파하고 난 뒤였다. 전작 <고지전>(2011) 이후 무려 6년 만에 내놓는 신작이라는 점에서 관객이 영화를 어떻게 봐줄지 부담감이 컸겠지만, 이미 많은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까닭에 그의 양어깨가 한결 가벼워보였다(<택시운전사>는 9월18일 현재 1215만여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의 관객을 동원했다. 김성훈: 편집자).
잘 알려진 대로 <택시운전사>는 1980년 5월 광주를 스크린에 불러들인 작품이다.
서울에서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은 외국 손님을 태우고 광주에 갔다가 통금 전에 돌아오면 택시비 10만원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영문도 모른 채 독일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태우고 간 광주는 서울과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있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광주 시내 곳곳에 걸려있었고, 시민들은 너도나도 금남로 앞으로 모여들었고, 전두환 정권의 군대는 시민들을 향해 최루탄과 총을 쏘았다. 외부인 만섭과 피터의 시선을 통해 관객을 피로 얼룩진 광주의 참상으로 안내한다. 특히, 안개 낀 밤, 시야가 흐릿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금남로 시퀀스는 총알과 방망이가 언제, 어떻게 날아올지 몰라 매우 공포스러웠고, 충격적이었다.
<택시운전사> 제작진은 한국영상자료원에 매우 귀중한 의상과 소품을 각각 기증해주었다. 하나는 피터가 들고 다니며 1980년 5월 광주를 기록하는 카메라다. 또 하나는 만섭을 연기한 송강호씨가 입고 나온 노란색 택시운전사복과 회색 바지다. 의상과 소품 모두 1박2일 동안 이어지는 두 캐릭터의 광주 여정 동안 등장하는 까닭에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아! 하고 무릎을 딱 칠지도 모른다. 중요한 소품과 의상을 기증해준 장훈 감독을 만나 나눈 <택시운전사> 제작 뒷이야기를 전한다.
김성훈
관객 반응이 좋은데.
장훈
다행이다. 개봉하기 전에 관객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영화에 담아내려고 했던 부분이 잘 전달됐는지 궁금했고. 오랜만에 내놓는 영화라 많이 긴장됐고 설레었다. 관객들이 좋게 봐주신 것 같고, 연출 입장에서 손익분기점(BEP)를 넘어서 다행이다.
김성훈
SF물을 쓰다가 더 램프 박은경 대표로부터 연출을 제안 받았는데 <택시운전사>의 어떤 부분이 마음을 움직였나.
장훈
제안을 받기 전에 박은경 대표를 우연히 뵈었다. 박 대표로부터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한 외신 기자가 택시기자와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녀오는 이야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몇달 뒤 시나리오 초고가 나왔다며 연출을 제안해왔다. 그때 쓰고 있던 SF물은 2고까지 진행되고 있었는데 냉정하게 따져보니 수정해야 할 부분이 많고,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싶었다. 마침 그때 제안을 받은 <택시운전사> 시나리오는 독자로서 편하게 읽혔고, 여운이 남았다. 보통 사람 만섭이 광주에 내려가 겪는 감정적인 변화에 감정 이입을 했고, ‘내가 만섭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같은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현대사로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뤄야한다는 역사적 무게보다는 만섭에게 공감되는 부분이 (연출을 맡는데) 더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일주일 정도 고민하다가 맡기로 했다.
김성훈
광주민주화운동이 아직 청산되지 않은 현재 진행형 역사라는 점에서 결정하는데 부담감이 컸을 것 같은데.
장훈
예민한 부분이 많아서 (결정하는데) 더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고지전>(2011) 때 6·25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다루는 게 힘들었다. 광주도 다루기 힘든 역사라는 점에서 선뜻 할 용기가 안 났다. 1980년대 광주 밖에서 살았던 외부인 만섭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간접적으로 알게 된 나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광주를 경험하지 못했던 외부인의 시각으로 그려진 이야기라면 그나마 접근해볼만 할 것 같았다. 광주에 더 초점을 맞추는 이야기였다면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 같다.
김성훈
<꽃잎>(1996) <박하사탕>(1999) <화려한 휴가>(2007) <스카우트>(2007) 등 광주민주화운동을 직·간접적으로 그려냈던 한국영화들이 <택시운전사>를 만드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
장훈
그 작품들을 보면서 직접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진 못했지만 현재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그들의 희생 덕분이라는 빚이 늘 마음 속에 있었다. 언젠가 나 또한 광주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그만큼 어렵고 부담스러운 역사가 아닌가.
김성훈
영화의 주인공 피터의 실존 모델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실제로 만났다고 들었는데.
장훈
궁금증 몇 가지가 있었다. 오프닝 시퀀스에 올라가는 자막대로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다. 당시 힌츠페터 기자가 광주에 들어가기 전부터 광주에 들어가 1박2일 동안 겪는 기록들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찍은 필름 영상 또한 아직도 남아있다. 반면, 만섭의 실존 모델인 김사복씨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택시운전사>가 천만 관객을 동원한 뒤 김사복씨의 아들이 나타나 자신의 아버지가 김사복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김성훈: 편집자). 그러다보니 만섭은 피터에 비해 영화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에 가까운데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만섭은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님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인물일까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자세하게 줄거리를 써서 독일에 가서 그분을 만나 읽어드렸는데, 시나리오를 듣는 내내 “맞아, 맞아” 같은 반응을 보이시며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다 듣고 난 뒤 “좋다, 영화로 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응원해주셨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시나리오가 실화의 허용 범위 안에 있는 것 같아 만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김사복씨를 더 알고 싶었다. 가정사, 광주에 가게 된 이유, 성격 등등. 힌츠페터 기자도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더라. 자신보다 열살 정도 많았고, 사람이 매우 좋았으며, 광주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탱크에 가로막혔을 때 샛길을 찾아 갔을만큼 기지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해주셨다.
김성훈
그를 만난 경험이 피터라는 캐릭터를 만드는데 어떤 영감을 주었나.
장훈
다큐멘터리가 아닌 까닭에 인물이 사건을 겪으면서 변화해야 하는데 만섭은 큰 변화를 겪는 반면 피터는 연출을 제안 받았을 때부터 매우 평면적이었다. 이 인물을 좀 더 영화적으로 만들기 위해 몇 가지 궁금했었다. 광주에 왜 왔는지, 갑자기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어떻게 그렇게 빨리 올 수 있었는지, 한국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사실 외신 기자가 광주에 가는 게 쉽지 않잖나. 그리고 왜 기자가 되었는지도 물었다. 특별한 사명감을 가진 기자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너무 평범하고 상식적인 대답을 해주셔서 한편으로는 피터를 입체적으로 발전시키기가 어렵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 분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까닭에 그의 사연이 더욱 임팩트가 있었고, 감사했던 것 같다.
김성훈
힌츠페터 기자가 해준 얘기가 구체적으로 뭔가.
장훈
광주에 간 이유는 기자니까, 기자가 된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 영화에서 만섭과 피터의 대화로 나오는 내용이다. 당시 위험한 상황에서 피터와 만섭, 두 사람이 광주에 간 건 특별한 사명감이나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자신이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낸 거다.
김성훈
그게 피터의 매력이라고 느껴졌다. 사명감이 투철한 언론인은 재미가 없으니까.
장훈
그럼에도 충격적이었던 게 좀 더 특별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는 거다. 좀 더 의미가 있고, 깊은 뜻이 있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힌츠페터 기자는 “뭘 그런 걸 물어봐, 기자니까 당연히 가야지”라고 대답해주었다. 그게 훨씬 더 임팩트가 있었다.
김성훈
힌츠페터가 당시 광주에서 찍은 영상도 봤나. 어땠나.
장훈
당시를 기록한 글을 읽으며 ‘정말 이런 일이 있었다니’하고 상상하는 것과 달랐다.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당시 그 공간에 있었던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때 찍었던 광주민주화운동을 처음으로 외국에 알린 거다.
김성훈
실화를 재구성한 이야기이지만 가상의 인물에 가까운 만섭의 시선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피터가 아닌 만섭이 서사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장훈
만섭이 처음 그랬듯이 관객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간접적으로 아는 까닭에 만섭이 당시 광주를 몰랐던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편적인 한국인에 가깝기도 해서 아무래도 외신 기자보다는 일반 관객들이 정서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만섭이 광주를 처음 경험해 느끼듯이 관객 또한 그와 비슷한, 정서적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김성훈
피터를 통해 기대했던 부분은 무엇인가.
장훈
이야기의 정서는 외부자인 만섭을 통해, 이성적인 부분은 만섭보다 더 밖에 위치한 피터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다. 만섭과 피터, 둘은 동일한 시선을 가진 외부자가 아니니까. 광주의 진실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던 사람이 있으며, 보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된 사람이 있지 않나. 당시는 광주뿐만 아니라 남한 사회가 고립됐다. 1989년까지 여행 자율화가 안됐었다. 외국에 나가려면 국가에 신고해야 했으니까. 광주민주화운동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어도 다른 지역 사람들은 광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믿지 않았다. 그만큼 정보가 통제된 상황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이성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 피터였다. 다소 아쉬웠던 건 이야기가 만섭 위주로 전개되다보니 좀 더 이성적인 외부자(피터)의 시선 또한 비중있게 다루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거다.
김성훈
민주화운동 구호가 적힌 현수막, 시민들에게 무료로 기름을 나눠준 주유소, 주먹밥을 나눠준 여학생 등 광주의 풍경을 보여줄 때 어떤 고민을 했나.
장훈
현실이 영화보다 훨씬 처참했다. 대중영화로 묘사하기 없을만큼 눈 뜨고 볼 수 없는 자료도 너무 많다. 말씀대로 밥도 나눠먹고,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한 건의 절도사건이 없었다는 자료를 보면 광주 시민들의 인간적인 모습에 너무 감격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관객들이 잘 모르는 광주의 일상과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김성훈
광주 금남로 시퀀스가 참상의 현장을 재현하지 않나. 시민들이 군인들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만큼이나 공포스러웠던 건 최루탄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시야가 가려진 상황이 체험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장훈
<사울의 아들>(2015, 감독 라즐로 네메스)과 <알제리 전투>(1966,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를 참고했다. 다만, <사울의 아들>이 인물을 중심으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그려냈다면 <택시 운전사>는 지금 남아있는 기록 사진과 증언들을 가능한한 사진의 느낌으로 재현하려고 신경썼다. 광주를 다뤘던 영화들이 금남로를 실제 크기보다 축소해 보여줬다면 우리는 부감을 통해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폭을 최대한 맞추고, 최대한 길게 찍었으며, 그 외의 공간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채워 넣었다. 이전의 한국영화를 전혀 참고하지 않았고, 힌츠페터 기자가 찍었던 동영상을 많이 참고해 금남로를 최대한 실제 크기와 비슷하게 찍으려고 했다.
김성훈
암흑천지로 변한 광주에 불타는 건물이 너무 충격적이더라.
장훈
사진으로 기록이 남아있는 풍경이다. 처음 그 사진을 봤을 때 매우 충격적이었다. 밤이라 온 도시가 어두운데 불타는 그곳만 너무 밝은 거다.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어 넣은 장면이다. 안개 낀 도시를 부감으로 내려다보며 차량들이 지나가는 장면도 있지 않나. 그것도 남아있는 사진 이미지로부터 영감을 받아 연출한 장면이다. 굉장히 공포스러운 이미지였다. 또, 당시 증언들 중에 밤에 불이 켜져 있으면 위험할 수 있어 빛을 가리기 위해 커튼을 쳤는데, 커튼을 치다가 총에 맞아 돌아가신 분들도 있었다고 하더라.
김성훈
만섭이 서울로 올라가다가 순천에서 국수를 먹고 다시 광주로 핸들을 돌리는 장면가 굉장히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건 송강호의 연기 덕분인 것 같은데.
장훈
그 장면을 찍을 때 현장에서 (송)강호 선배와 많은 얘기를 나누진 않았다. 물론 송강호 선배는 처음부터 그 신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었고, 나 또한 그 신이 관객들을 설득해야 그 이후의 감정이 납득될 수 있으니까 어려운 신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걸 배우에게만 맡길 수는 없었고, 그래서 다른 장치들을 많이 활용했다. 가령, 만섭이 피터가 떨어뜨린 필름 한통을 챙겼다가 나중에 병원에서 좌절하고 있는 피터에게 그걸 주면서 찍어야한다고 얘기하지 않나. 택시 범퍼에는 주먹밥을 주었던 여대생이 넘어지면서 묻은 핏자국이 있고, 만섭이 그걸 닦는다. 여러 장치들을 심어둠으로써 만섭이 다시 광주로 가야하는 이유를 보여준 거다.
김성훈
전라도 택시 기사들이 만섭을 돕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무뚝뚝하면서도 의리 있는 모습들 말이다.
장훈
당시 많은 택시 기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버스 몇 대와 택시 200여대가 금남로에서 차량 시위를 했었고, 그것 때문에 진압을 당하면서 부상자도 많이 생겼고, 차가 많이 망가지기도 했다. 영화 속 택시 기사들은 그 분들과 광주 시민을 대변하기 위해 설정한 캐릭터들이다.
김성훈
피터가 영화 내내 들고 다녔던 카메라와 송강호씨가 입었던 택시 기사복을 기증해주셨는데.
장훈
한국영상자료원의 수집 캠페인에 참여하게 돼 너무 좋다. 재현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거나 구해온 의상이나 소품들이 되게 많은데 영화가 끝나면 보존하는 비용이나 여러 이유 때문에 폐기되는 의상이나 소품들이 많다. <고지전> 때도 그렇게 버려진 소품이나 의상이 많고, 지금은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금남로 세트도 지금 없어졌지만 카메라와 택시기사복만은 영구 보존돼 관객들에게 영화의 감흥을 영원히 살려주었으면 한다. 다음 작품도 수집 캠페인에 참여하고 싶다. (웃음)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 주요 의상과 소품 한줄 코멘트
만섭의 택시
“녹색 브리사. 만섭의 분신이기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섭의 택시는 만섭의 가족에 대한 의무와 소망이 모두 담긴 만섭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고 약해보이는 만섭의 녹색 택시가 시대를 관통해 들어갔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만섭의 노란유니폼
“만섭의 녹색택시와 함께 가장 중요하게 결정해야 했던 색은 만섭의 노란색 유니폼이었습니다. 조상경 의상감독님이 씬 별로 각 씬의 정서에 맞는 다양한 채도의 노란색 유니폼을 제작하였으며, 씬별로 조금씩 다른 채도의 유니폼을 입고 촬영하였습니다.”
피터의 카메라와 필름
“만섭의 택시가 만섭의 분신이듯이, 피터의 카메라와 필름은 피터의 분신이라고 할수 있는 소품입니다. 피터의 카메라는 관객들에게 만섭의 시선과 다른 객관적 시선의 경험을 하게 합니다.”
목걸이 사진
“만섭의 가족 사진을 다시 택시에 걸어주는 피터의 목걸이. 광주택시기사들의 도움으로 광주를 빠져나온 뒤, 피터가 만섭의 끊어진 가족사진을 자신의 목걸이를 풀러 룸미러에 말없이 걸어줍니다. 둘 사이의 관계성의 변화를 보여주며, 만섭에 대한 피터의 마음을 보여주는 소품입니다. 2003년 노년의 만섭이 나올 때도 택시에 여전히 그 목걸이가 걸려있습니다.”
주먹밥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은 서로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었습니다. 주먹밥도 그 중 하나입니다. 주먹밥은 당시 광주 시민들의 마음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소품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