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악녀>가 극장에서 내린 뒤 미국을 오갔는데.
정병길
아직 결정된 건 없다. 한국 영화가 될지, 할리우드 영화가 될지 모르겠다. ‘미드’가 될 수도 있고. 얼마 전 <워킹데드>를 제작한 AMC 스튜디오의 피디를 만나 미드 제작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김성훈
할리우드에 진출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던데.
정병길
할리우드로부터 시나리오를 몇 권 제안받았다. 메이저 스튜디오가 만드는 블록버스터인데 맡으면 안 될 것 같다. 에이전트가 책을 받은 건지, 스튜디오가 나를 잡아오라고 시키면서 책을 준 건지 모르겠지만, 직접 쓴 시나리오나 적은 예산의 시나리오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고 싶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김성훈
해외 영화제에서 <악녀> 반응은 어떤가.
정병길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반응이 훨씬 좋다. 액션을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김성훈
전작 <내가 살인범이다> 이후 약 5년 만의 신작인데.
정병길
NEW 장경익 콘텐츠사업부문 대표(현재는 스튜디오앤뉴 대표다-편집자)와 술을 마시다가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보라”라는 얘기를 들었고, 그 이후 정말 마음대로 책을 쓴 게 <악녀>다. 성인 여성인 주인공이 액션을 하는 이야기는 한국에서 시도하기 힘든 생각이 있었지만, 장경익 대표가 약속을 지킬 줄 알고 그런 시나리오를 썼다.
김성훈
<내가 살인범이다>가 첫 상업영화였다. 그 작품을 만든 뒤 <악녀>에 들어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는데.
정병길
전작의 흥행 성적이 좋아서 투자를 받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내가 살인범이다>와 <악녀>는 예산도, 촬영 회차도 비슷했다. 다만, <악녀>는 표준 계약서가 적용돼 하루에 찍을 수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시간 순서대로 찍는 걸 선호하는데 이번에는 여러 이유 때문에 촬영 스케줄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많아 골치가 아팠다.
김성훈
여성 원톱 액션 영화를 하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
정병길
10살 때 비디오로 <니키타>를 보고 매우 좋아했다. 한국에는 여성이 원톱인 드라마조차 거의 없고, 액션 영화에서 여성은 대체로 서브 역할에 머무르지 않나. <니키타>와 이 영화에 오마주를 바친 여러 영화들을 보면서 여성 액션 영화를 꼭 만들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김성훈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액션 영화가 없다 보니 배우를 캐스팅하는데 참고할만한 작품이 없었을 것 같다.
정병길
연기를 잘 하는 게 중요했다. 액션은 잘 못해도 잘하는 것처럼 보이게 연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김성훈
주인공 숙희는 아이러니한 운명을 가진 여성인데.
정병길
슬픈 여자의 일생처럼 무엇을 하려고 해도 나쁘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불안감을 가진 여성. 겉으로는 착한데 사람을 죽이는 킬러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여주고 싶었다.
김성훈
<니키타>가 숙희는 만드는데 좋은 참고가 됐나.
정병길
<니키타>와 그 영화를 연출했던 뤽 베송 감독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니키타>는 참고 그 이상이었다. 이 영화가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될 수 있었던 것도 <니키타>의 후광 덕분이지 않았나 싶다. 칸 프로그래머들에게 <악녀>는 <니키타>를 보고 자란 아이가 커서 자신의 해석대로 만든 영화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김성훈
숙희의 이미지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1976)에서 피를 뒤집어쓴 캐리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캐리의 어떤 면모가 영감을 주었나.
정병길
캐리가 피를 뒤집어쓰면서 착한 여자가 마녀처럼 변한 것처럼 보이지 않나. 숙희가 뒤집어쓴 피도 자신의 피가 아니잖아. 누군가를 찔러서 자신의 얼굴에 튄 피인데, 가해자임에도 마치 피해자처럼 자신의 얼굴에서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미술을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 이미지가 계속 연상됐고, 그게 이 영화의 핵심 비주얼이 됐던 것 같다.
김성훈
김옥빈의 어떤 모습이 숙희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정병길
순박한 모습도 있고, 세련된 모습이 있는 얼굴이 매력적이다. 눈이 가지고 있는 묘한 느낌도 좋았고. 착해 보이기도, 악해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연기가 안정되어 있다.
김성훈
시나리오를 읽은 김옥빈의 반응은 어땠나.
정병길
시나리오를 보내고 일주일이 지난 뒤 처음 만났을 때 출연하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이런 영화가 나온다는 사실을 되게 신기해했다.
정병길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서른 살 때 준비했던 영화에 남자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적 있는데 그 영화가 무산되면서 헤어진 뒤 이번에 다시 만난 셈이다.
김성훈
촬영 전, 권귀덕 무술감독과 함께 이제껏 보여주지 못한 액션을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 같다.
정병길
<내가 살인범이다>때도, <악녀>때도 새로운 액션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다. <내가 살인범이다>할 때 이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싶은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악녀> 때는 빨리 진행했던 것 같다. 권귀덕 무술감독도 <내가 살인범이다>때보다 훨씬 더 진화했다.
김성훈
영화 속 주요 액션 시퀀스를 하나씩 살펴보자. 오프닝 시퀀스를 1인칭 시점의 액션으로 펼쳐내 보였는데. 숙희의 액션을 체험한다는 점에서 게임 같더라.
정병길
3~4년 전 VR 단편영화 연출을 제안받은 적 있다. VR 영화를 공부하면서 언젠가 극장이 사라지고 VR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못하게 되었는데 그때 떠올랐던 아이디어들이 이 영화를 하는데 많은 공부가 됐다. 이 영화를 준비하다가 1인칭 액션으로 서사를 풀어간 영화 <하드코어 헨리>(2015, 감독 일리야 나이슐러)가 개봉했다. 오프닝 시퀀스를 1인칭 액션과 원신 원컷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하드코어 헨리>가 <악녀>의 오프닝 시퀀스와 너무 비슷하면 ‘우리는 포기하자’ 심정으로 개봉하는 날 <하드코어 헨리>를 봤다. <하드코어 헨리>는 계속 점프 컷으로 연출됐고, 총을 많이 썼다. 우리는 칼 위주였고.
김성훈
무엇보다 <악녀>의 오프닝 시퀀스는 굉장히 긴 롱테이크이지 않나.
정병길
그래서 촬영하기 전에 리허설을 많이 했다. 합을 다 짜고, 연습하면서 카메라로 찍어본 뒤 슛을 들어갔다. 원신 원컷 설정이지만 중간마다 컷이 되는 지점이 있지 않나. 컷 티가 나지 않게 계산해 찍었다.
김성훈
합은 프리 비주얼 작업으로 사전에 준비했다고.
정병길
스턴트맨들과 동영상 콘티를 만들었다. 버스 액션신은 3D로 프리 비주얼 작업을 했다. 오토바이가 달리면서 선보이는 액션 시퀀스는 ‘어떤 느낌으로 가자’ 정도만 가지고 촬영에 들어갔다. 오토바이 액션 시퀀스가 준비를 가장 적게 했던 부분인데 오프닝 시퀀스나 엔딩(버스) 시퀀스에 비해 가장 마음에 든다.
정병길
전작에 비하면 힘들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는데.
김성훈
오토바이 액션신은 어떻게 설계했나. 오토바이가 굉장히 빨라 보이던데.
정병길
실제 속력을 내면서 찍진 못했고, 빠르게 보이도록 연출했다. 그 시퀀스는 컴퓨터 그래픽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실사로 촬영했다. 카메라와 오토바이의 거리가 멀었던 까닭에 광각렌즈를 투입했다. 촬영감독이 한 손으로 들고 찍어도 될 만큼 작은 카메라를 사용했다. 카메라가 오토바이를 한 방향으로만 담았는데 이쪽, 저쪽 돌면서 찍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그걸 시도하지 못한 건 다소 아쉽다.
정병길
빨리 찍었다. 오프닝 시퀀스도, 오토바이 액션 신도 각각 1회차씩 줄여서 일찍 끝냈다. 오토바이 액션 신 다 찍고 술 마시러 갔는데 사람들이 정말 다 끝난 거냐고 묻더라. (웃음)
김성훈
숙희와 민주(손민지)가 요정에서 험상궂은 남성 두 명과 맞붙는 액션신은 웬만한 남성 배우들 못지않게 박력감이 넘쳤다.
정병길
영화에서 보여준 장면보다 더 세게 찍으려고 했다. 2 대 2 액션이 아니라 요정 복도까지 끌고 나가는 설정까지 염두에 두고 회의를 했는데 예산이 없다는 거다. 그전까지 제작비를 아껴서 찍었는데 갑자기 예산이 없대. (웃음)
김성훈
숙희가 차체에 매달린 채 다른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신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던데.
정병길
원래는 카 체이싱 없이 버스를 쫓아가 타는 장면이었는데 프리 비주얼 작업을 하면서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설정으로 바꿨다. 같은 시선을 보고 있기 때문에 차체에 매달린 채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진 않다. 후진보다 훨씬 쉽다. 그래서 권귀덕 무술감독이 자동차에 타서 운전을 하고, 김옥빈 씨가 와이어에 매달린 채 차체 위에 앉은 채로 찍었다.
김성훈
버스 안에서 액션이 벌어져지다가 버스가 뒤집히는 설정을 보니 여러 액션 영화들이 떠올랐다.
정병길
서른 살에 데뷔하려고 했을 때 썼던 책이 하나 있다. <내가 살인범이다> 찍기 전에 썼던 이야기인데 그 시나리오의 오프닝 시퀀스가 버스 액션신으로 시작된다. 버스에서 난투극을 벌이다가 버스가 뒤집어지면서 타이틀이 딱 뜨는 식이었다. (웃음)
김성훈
<악녀>가 나오기 전에 서울액션스쿨에서 버스를 뒤집은 적이 있었나.
정병길
우리나라에서 버스를 뒤집은 사람이 딱 두 명 있다. 유상섭, 권귀득 액션 감독. 어쨌거나 <악녀>를 찍을 때 버스가 넘어지면서 많이 밀릴 줄 알았다. 우리가 스쿠터로 버스를 뒤따라가면서 넘어진 버스가 우리를 덮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는데 말이다.
김성훈
<악녀>로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받은 경험은 감독으로서 어땠나.
정병길
칸에 다녀온 덕분에 할리우드 쪽과의 미팅이 많이 생겼다. 할리우드가 액션 영화로서 <악녀>가 가지고 있는 지점을 좋아하는 것 같다. 칸에서 첫 상영된 뒤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왔는데 그때만 해도 의례적인 반응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칸에 갔다 와서도 미팅 요청이 들어오고, 할리우드 에이전시로부터 책을 받으니 정말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 실감이 난다.
김성훈
<악녀>에서 숙희가 가지고 다니는 쌍칼과 도끼를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해주셔서 감사하다. 관객들이 대번에 알아차릴 중요한 소품인데, 기증 캠페인에 참여하신 소감을 듣고 싶다.
정병길
한국영상자료원이 설명해주신 대로 영화가 끝나면 소품이나 의상을 버리거나 영화사 창고에 들어가는 게 굉장히 안타까웠다. 영국의 어떤 아카이브는 제임스 본드의 수트를 모두 보관해 전시하지 않나. 본드 시리즈에 등장한 차도 다 보관하고 있다더라. 그 영화에서 차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나. 어쨌거나 한국 영화도 의상이나 소품을 다 모아서 제대로 보관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있다가 기증 캠페인에 동참할 수 있어 기분이 좋다. <악녀>는 사실 드릴만 한 게 없다. 총도 모두 비비탄 총이고, 그렇다고 버스를 드릴 수도 없고, 버스 문짝이라도….(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