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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된 영화유산

악녀

  • 감독 정병길
  • 각본 정병길, 정병식
  • 촬영 박정훈
  • 미술 신선화
  • 의상 채경화
  • 출연 김옥빈, 신하균, 성준, 김서형, 조은지, 이승주, 손민지, 민예지
  • 제작사 앞에있다
그녀는 국가 비밀조직에 스카우트되어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얻는다.
“10년만 일해주면 넌 자유야.
하지만 가짜처럼 보이는 순간, 그땐 우리가 널 제거한다”

살기 위해 죽여야만 하는 킬러 숙희 앞에
진실을 숨긴 의문의 두 남자가 등장하고,
자신을 둘러싼 엄청난 비밀에 마주하게 되면서 운명에 맞서기 시작하는데…
"보여줄게,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정병길 감독 · NEW 기증 <악녀> 소품

정병길 감독 인터뷰
<악녀>가 시도한 여성 원톱 액션 영화는 남성 위주의 한국 영화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니까 여성 주인공이 혼자서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체구의 남성들을 힘으로 제압했던 영화가 한국 영화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투자 받기 쉽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하면 <악녀>를 쓰고, 연출한 정병길 감독의 도전은 용기 있다.
데뷔작 <우린 액션배우다>(2008), 첫 상업영화 <내가 살인범이다>(2012)를 차례로 연출한 그다. 이 영화는 어린 시절부터 살인병기로 길러진 숙희(김옥빈)가 국가 정보요원에 스카우트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를 얻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언제나 그랬듯이 하고 싶은 걸 끝까지 밀어붙인 그의 세 번째 도전은 올해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됐다. 칸 국제영화제가 끝난 뒤 할리우드 에이전트 계약과 차기작 논의 때문에 미국과 한국을 바쁘게 오가던 지난 7월 21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정병길 감독을 만났다. 그는 한국영상자료원의 수집 캠페인에 깊이 동감하며 영화 속 숙희(김옥빈)가 들고 다니며 남성들을 제압한 무기 쌍칼과 도끼를 기증해주었다.
김성훈
<악녀>가 극장에서 내린 뒤 미국을 오갔는데.
정병길
미국 에이전트를 만나 계약을 했다.
김성훈
신작은 결정됐나.
정병길
아직 결정된 건 없다. 한국 영화가 될지, 할리우드 영화가 될지 모르겠다. ‘미드’가 될 수도 있고. 얼마 전 <워킹데드>를 제작한 AMC 스튜디오의 피디를 만나 미드 제작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김성훈
할리우드에 진출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던데.
정병길
할리우드로부터 시나리오를 몇 권 제안받았다. 메이저 스튜디오가 만드는 블록버스터인데 맡으면 안 될 것 같다. 에이전트가 책을 받은 건지, 스튜디오가 나를 잡아오라고 시키면서 책을 준 건지 모르겠지만, 직접 쓴 시나리오나 적은 예산의 시나리오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고 싶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김성훈
해외 영화제에서 <악녀> 반응은 어떤가.
정병길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반응이 훨씬 좋다. 액션을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김성훈
전작 <내가 살인범이다> 이후 약 5년 만의 신작인데.
정병길
NEW 장경익 콘텐츠사업부문 대표(현재는 스튜디오앤뉴 대표다-편집자)와 술을 마시다가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보라”라는 얘기를 들었고, 그 이후 정말 마음대로 책을 쓴 게 <악녀>다. 성인 여성인 주인공이 액션을 하는 이야기는 한국에서 시도하기 힘든 생각이 있었지만, 장경익 대표가 약속을 지킬 줄 알고 그런 시나리오를 썼다.
김성훈
<내가 살인범이다>가 첫 상업영화였다. 그 작품을 만든 뒤 <악녀>에 들어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는데.
정병길
전작의 흥행 성적이 좋아서 투자를 받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내가 살인범이다>와 <악녀>는 예산도, 촬영 회차도 비슷했다. 다만, <악녀>는 표준 계약서가 적용돼 하루에 찍을 수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시간 순서대로 찍는 걸 선호하는데 이번에는 여러 이유 때문에 촬영 스케줄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많아 골치가 아팠다.
김성훈
여성 원톱 액션 영화를 하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
정병길
10살 때 비디오로 <니키타>를 보고 매우 좋아했다. 한국에는 여성이 원톱인 드라마조차 거의 없고, 액션 영화에서 여성은 대체로 서브 역할에 머무르지 않나. <니키타>와 이 영화에 오마주를 바친 여러 영화들을 보면서 여성 액션 영화를 꼭 만들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김성훈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액션 영화가 없다 보니 배우를 캐스팅하는데 참고할만한 작품이 없었을 것 같다.
정병길
연기를 잘 하는 게 중요했다. 액션은 잘 못해도 잘하는 것처럼 보이게 연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김성훈
주인공 숙희는 아이러니한 운명을 가진 여성인데.
정병길
슬픈 여자의 일생처럼 무엇을 하려고 해도 나쁘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불안감을 가진 여성. 겉으로는 착한데 사람을 죽이는 킬러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여주고 싶었다.
김성훈
<니키타>가 숙희는 만드는데 좋은 참고가 됐나.
정병길
<니키타>와 그 영화를 연출했던 뤽 베송 감독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니키타>는 참고 그 이상이었다. 이 영화가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될 수 있었던 것도 <니키타>의 후광 덕분이지 않았나 싶다. 칸 프로그래머들에게 <악녀>는 <니키타>를 보고 자란 아이가 커서 자신의 해석대로 만든 영화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김성훈
숙희의 이미지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1976)에서 피를 뒤집어쓴 캐리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캐리의 어떤 면모가 영감을 주었나.
정병길
캐리가 피를 뒤집어쓰면서 착한 여자가 마녀처럼 변한 것처럼 보이지 않나. 숙희가 뒤집어쓴 피도 자신의 피가 아니잖아. 누군가를 찔러서 자신의 얼굴에 튄 피인데, 가해자임에도 마치 피해자처럼 자신의 얼굴에서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미술을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 이미지가 계속 연상됐고, 그게 이 영화의 핵심 비주얼이 됐던 것 같다.
김성훈
김옥빈의 어떤 모습이 숙희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정병길
순박한 모습도 있고, 세련된 모습이 있는 얼굴이 매력적이다. 눈이 가지고 있는 묘한 느낌도 좋았고. 착해 보이기도, 악해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연기가 안정되어 있다.
김성훈
시나리오를 읽은 김옥빈의 반응은 어땠나.
정병길
시나리오를 보내고 일주일이 지난 뒤 처음 만났을 때 출연하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이런 영화가 나온다는 사실을 되게 신기해했다.
김성훈
신하균 씨는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나.
정병길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서른 살 때 준비했던 영화에 남자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적 있는데 그 영화가 무산되면서 헤어진 뒤 이번에 다시 만난 셈이다.
김성훈
촬영 전, 권귀덕 무술감독과 함께 이제껏 보여주지 못한 액션을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 같다.
정병길
<내가 살인범이다>때도, <악녀>때도 새로운 액션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다. <내가 살인범이다>할 때 이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싶은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악녀> 때는 빨리 진행했던 것 같다. 권귀덕 무술감독도 <내가 살인범이다>때보다 훨씬 더 진화했다.
김성훈
영화 속 주요 액션 시퀀스를 하나씩 살펴보자. 오프닝 시퀀스를 1인칭 시점의 액션으로 펼쳐내 보였는데. 숙희의 액션을 체험한다는 점에서 게임 같더라.
정병길
3~4년 전 VR 단편영화 연출을 제안받은 적 있다. VR 영화를 공부하면서 언젠가 극장이 사라지고 VR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못하게 되었는데 그때 떠올랐던 아이디어들이 이 영화를 하는데 많은 공부가 됐다. 이 영화를 준비하다가 1인칭 액션으로 서사를 풀어간 영화 <하드코어 헨리>(2015, 감독 일리야 나이슐러)가 개봉했다. 오프닝 시퀀스를 1인칭 액션과 원신 원컷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하드코어 헨리>가 <악녀>의 오프닝 시퀀스와 너무 비슷하면 ‘우리는 포기하자’ 심정으로 개봉하는 날 <하드코어 헨리>를 봤다. <하드코어 헨리>는 계속 점프 컷으로 연출됐고, 총을 많이 썼다. 우리는 칼 위주였고.
김성훈
무엇보다 <악녀>의 오프닝 시퀀스는 굉장히 긴 롱테이크이지 않나.
정병길
그래서 촬영하기 전에 리허설을 많이 했다. 합을 다 짜고, 연습하면서 카메라로 찍어본 뒤 슛을 들어갔다. 원신 원컷 설정이지만 중간마다 컷이 되는 지점이 있지 않나. 컷 티가 나지 않게 계산해 찍었다.
김성훈
합은 프리 비주얼 작업으로 사전에 준비했다고.
정병길
스턴트맨들과 동영상 콘티를 만들었다. 버스 액션신은 3D로 프리 비주얼 작업을 했다. 오토바이가 달리면서 선보이는 액션 시퀀스는 ‘어떤 느낌으로 가자’ 정도만 가지고 촬영에 들어갔다. 오토바이 액션 시퀀스가 준비를 가장 적게 했던 부분인데 오프닝 시퀀스나 엔딩(버스) 시퀀스에 비해 가장 마음에 든다.
김성훈
스태프들이 힘들어했다던데.
정병길
전작에 비하면 힘들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는데.
김성훈
오토바이 액션신은 어떻게 설계했나. 오토바이가 굉장히 빨라 보이던데.
정병길
실제 속력을 내면서 찍진 못했고, 빠르게 보이도록 연출했다. 그 시퀀스는 컴퓨터 그래픽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실사로 촬영했다. 카메라와 오토바이의 거리가 멀었던 까닭에 광각렌즈를 투입했다. 촬영감독이 한 손으로 들고 찍어도 될 만큼 작은 카메라를 사용했다. 카메라가 오토바이를 한 방향으로만 담았는데 이쪽, 저쪽 돌면서 찍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그걸 시도하지 못한 건 다소 아쉽다.
김성훈
몇 회 차만에 찍었나.
정병길
빨리 찍었다. 오프닝 시퀀스도, 오토바이 액션 신도 각각 1회차씩 줄여서 일찍 끝냈다. 오토바이 액션 신 다 찍고 술 마시러 갔는데 사람들이 정말 다 끝난 거냐고 묻더라. (웃음)
김성훈
숙희와 민주(손민지)가 요정에서 험상궂은 남성 두 명과 맞붙는 액션신은 웬만한 남성 배우들 못지않게 박력감이 넘쳤다.
정병길
영화에서 보여준 장면보다 더 세게 찍으려고 했다. 2 대 2 액션이 아니라 요정 복도까지 끌고 나가는 설정까지 염두에 두고 회의를 했는데 예산이 없다는 거다. 그전까지 제작비를 아껴서 찍었는데 갑자기 예산이 없대. (웃음)
김성훈
숙희가 차체에 매달린 채 다른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신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던데.
정병길
원래는 카 체이싱 없이 버스를 쫓아가 타는 장면이었는데 프리 비주얼 작업을 하면서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설정으로 바꿨다. 같은 시선을 보고 있기 때문에 차체에 매달린 채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진 않다. 후진보다 훨씬 쉽다. 그래서 권귀덕 무술감독이 자동차에 타서 운전을 하고, 김옥빈 씨가 와이어에 매달린 채 차체 위에 앉은 채로 찍었다.
김성훈
버스 안에서 액션이 벌어져지다가 버스가 뒤집히는 설정을 보니 여러 액션 영화들이 떠올랐다.
정병길
서른 살에 데뷔하려고 했을 때 썼던 책이 하나 있다. <내가 살인범이다> 찍기 전에 썼던 이야기인데 그 시나리오의 오프닝 시퀀스가 버스 액션신으로 시작된다. 버스에서 난투극을 벌이다가 버스가 뒤집어지면서 타이틀이 딱 뜨는 식이었다. (웃음)
김성훈
<악녀>가 나오기 전에 서울액션스쿨에서 버스를 뒤집은 적이 있었나.
정병길
우리나라에서 버스를 뒤집은 사람이 딱 두 명 있다. 유상섭, 권귀득 액션 감독. 어쨌거나 <악녀>를 찍을 때 버스가 넘어지면서 많이 밀릴 줄 알았다. 우리가 스쿠터로 버스를 뒤따라가면서 넘어진 버스가 우리를 덮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는데 말이다.
김성훈
<악녀>로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받은 경험은 감독으로서 어땠나.
정병길
칸에 다녀온 덕분에 할리우드 쪽과의 미팅이 많이 생겼다. 할리우드가 액션 영화로서 <악녀>가 가지고 있는 지점을 좋아하는 것 같다. 칸에서 첫 상영된 뒤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왔는데 그때만 해도 의례적인 반응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칸에 갔다 와서도 미팅 요청이 들어오고, 할리우드 에이전시로부터 책을 받으니 정말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 실감이 난다.
김성훈
<악녀>에서 숙희가 가지고 다니는 쌍칼과 도끼를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해주셔서 감사하다. 관객들이 대번에 알아차릴 중요한 소품인데, 기증 캠페인에 참여하신 소감을 듣고 싶다.
정병길
한국영상자료원이 설명해주신 대로 영화가 끝나면 소품이나 의상을 버리거나 영화사 창고에 들어가는 게 굉장히 안타까웠다. 영국의 어떤 아카이브는 제임스 본드의 수트를 모두 보관해 전시하지 않나. 본드 시리즈에 등장한 차도 다 보관하고 있다더라. 그 영화에서 차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나. 어쨌거나 한국 영화도 의상이나 소품을 다 모아서 제대로 보관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있다가 기증 캠페인에 동참할 수 있어 기분이 좋다. <악녀>는 사실 드릴만 한 게 없다. 총도 모두 비비탄 총이고, 그렇다고 버스를 드릴 수도 없고, 버스 문짝이라도….(웃음)

정병길 감독이 꼽은 미술, 의상이 인상적인 영화 베스트5
1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은 청바지와 선글라스 그리고 헤어스타일
1961, 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
“오드리 헵번이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 덕분에 영화 속 그녀의 의상과 소품이 유행을 선도했다. 물론 오드리 헵번이 출연했던 영화 대부분 그녀를 염두에 두고 의상과 소품을 만들었지만 말이다.”
2
<소림 축구>의 씽씽(주성치) 운동화
2001, 감독 주성치
“축구선수에게 비싼 축구화는 중요하지 않다.”
3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의 모든 의상과 미술
2015, 감독 조지 밀러
“영화 속 의상과 미술은 조지 밀러의 세계 그 자체.”
4
<일대종사>의 궁이(장쯔이) 의상
2012, 감독 왕가위
“장쯔이의 우아한 액션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5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의 슈트
2014, 감독 매튜 본
“그냥 슈트가 아니라 갑옷이다.”
글 김성훈(<씨네21> 기자)·사진 최성열(<씨네21> 기자)

박정훈 촬영감독 인터뷰
'어떻게 찍었을까' 궁금할 만큼 <악녀>는 위험천만하고 무모한 촬영이 많은 작품이다.
스태프들 사이에서 “또라이”라고 불릴 정도로 과감했던 정병길 감독의 프리 비주얼이 고스란히 화면에 펼쳐질 수 있었던 건 박정훈 촬영감독의 공이 크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촬영부로 <취화선>, <하류인생>, <천년학>을 차례로 작업하며 촬영감독이 가져야 할 덕목을 배웠고, <미조>(2014) <설행_눈길을 걷다>(2015) 등을 촬영해온 그다.
그를 만나 <악녀> 촬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성훈
정병길 감독과 <악녀>의 촬영에 대해 어떤 고민을 나눴나.
박정훈
정병길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액션이 명확했다. 1인칭 시점의 오프닝 액션 시퀀스, 오토바이 체이싱 시퀀스, 엔딩의 버스 액션신 등 주요 액션신에 대한 이미지가 분명했다. 그래서 감독이 머릿속에 있는 액션을 시각화시키는 방법 위주로 고민했다. 그 외에는 시퀀스마다 어떤 톤으로 보여줄지 생각했고.
김성훈
<악녀>는 보통 액션 영화보다 호흡이 긴데.
박정훈
기존의 액션 영화는 짧은 컷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만든 사람이 짧은 컷으로 분할하고 싶어서 그렇게 연출한 게 아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체로 배우들이 긴 호흡의 액션을 소화할 수 없는 까닭에 컷을 잘게 분할하는 거다. 정병길 감독이 가지고 온 콘티는 한 호흡으로만 이어져서 과연 배우가 소화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 게 사실이다. 숙희가 남성들을 제압하는 설정을 두고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캐릭터로 인식하고 작업했다.
김성훈
호흡이 길다는 건 촬영감독에게 도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박정훈
기술적으로 시도할 게 많아 좋은 도전이었다. 한 컷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트릭을 많이 고민했고, 그게 자극이 됐다.
김성훈
1인칭 시점으로 촬영한 오프닝 시퀀스는 정교하게 설계됐다. 원신 원컷처럼 보이게 찍은 까닭에 <버드맨>에서 에마누엘 루베스키 촬영감독이 시도한 트릭을 연상하게 하고(하나의 롱테이크처럼 보이게 찍은 촬영은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앨프리드 히치콕이 자신의 1948년작 <로프>에서 컷 되는 부분을 교묘히 감춰 하나의 테이크처럼 보이게 시도한 바 있다-편집자).
박정훈
촬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감독, 무술감독과 셋이서 <하드코어 헨리>라는 영화를 보러 갔는데 우리가 한 생각과 비슷한 점이 너무 많은 거다. 그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그런 힌트를 많이 얻었다. 와이드 한 화면을 구현하기 위해 와이드렌즈를 찾았고, 단순히 컷을 이어붙이는 게 아니라 체감할 수 있는 움직임을 더 많이 고민했으며, 카메라 앞에서 포인트가 될만한 움직임을 연출하기로 했다. 보조출연자에 무술팀을 몇 명이나 포함시킬지, 배우가 칼을 돌리는 위치를 어디로 정할 건지 등 작은 설정들을 일일이 고민했다. 그래서 카메라를 스턴트맨의 신체 여러 곳에 달아봤고, 12mm, 14mm 렌즈, 고프로 등 다양한 렌즈를 활용해 관객이 최대한 체감할 수 있는 느낌이 어디까지인지 테스트했다.
김성훈
오프닝 시퀀스는 카메라가 김옥빈 씨를 대신한 스턴트 배우의 몸에 밀착했다고 보면 되겠다.
박정훈
그렇다. 김옥빈 씨와 체형이 가장 비슷한 스턴트 배우가 카메라가 달린 헬멧을 쓴 채로 연기해 훨씬 생생하게 연출됐다. 내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는 게 배우에게도, 내게도 훨씬 더 편한 방식인데 스턴트 배우의 손이 카메라에 나와야 하는 장면이 있어 카메라를 몸에 부착한 채로 찍어야 했다.
김성훈
그때 와이드 한 12mm 렌즈를 사용했다고 들었는데 그 렌즈가 적합하다고 판단한 이유가 무엇인가.
박정훈
밤 신이라 조명을 세팅하는데 한계가 있어 감도가 높고 화각이 최대한 넓은 렌즈가 필요했다. 여러 렌즈들을 테스트해봤는데 적합한 렌즈들은 너무 크고, 무거워 소니 A7S 카메라에 부착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12mm 렌즈가 우리가 담아낼 수 있는 가장 넓은 화각을 구현해 최종적으로 그걸 선택했다.
김성훈
<악녀> 이전에 12mm 렌즈를 사용한 적 있나.
박정훈
왜곡이 심한 렌즈라 영화에서는 거의 안 쓴다. 우리 영화에서는 왜곡이 있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김성훈
오프닝 시퀀스에서 조명은 어떻게 설계했나.
박정훈
이해원 조명감독과 얘기를 많이 나눴다. 건물 안 조명은 거의 다 풀 세팅을 했다. 1층, 2층, 3층, 각 층 조명의 톤을 제각각 다르게 설정했다. 층마다 미션을 하나씩 소화하는 느낌으로 말이다. 인물들이 움직일 때 반드시 담아내야 하는 포인트가 있는데 그걸 많이 신경 썼다. 가령, 칼이 숙희에게 들어올 때 카메라 앞에서 움직이도록 유도했다.
김성훈
오토바이 액션신은 난이도가 높아 보였다. 오토바이가 달리는 속도가 있고, 밤 장면이라 조명 세팅이 거의 불가능한 장면인데.
박정훈
원래 시나리오에는 시장의 좁은 골목이 배경이었다. 그곳에서 찍으면 배경이 계속 바뀌게 되는데, 모든 기술 스태프들이 조명 세팅을 포함해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시장은 안되겠다 싶어 생각한 게 터널의 8차선 도로였다. 배경이 전부 똑같으니까. (웃음) 프리 프로덕션의 30% 이상을 오토바이 액션 신을 설계하는데 할애했다. 조감독, 무술감독과 함께 감독이 준비해온 프리 비주얼을 보자마자 “미친놈” (일동 폭소)이라는 소리를 할 만큼 난이도가 높았다. 누가 봐도 전부 컴퓨터그래픽으로 연출해야 가능한 장면들이었는데 감독이 어려운 걸 던져놓고 풀어보라기에 모두 오기가 생겼다. (웃음) 그때부터 머리를 굴려 내린 결론은 렉카에 발판을 만든 뒤 카메라 두 대를 렉카에 고정을 해서 발판 밑에서 핸드헬드로 찍은 거다. 사람들이 아직도 오토바이 바퀴로 들어가는 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아직도 궁금해하는데 한 손으로 카메라를 잡고 바퀴 쪽으로 직접 넣어서 찍었다.
김성훈
조명을 세팅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
박정훈
조명이 없었다. 조명 감독님이 카메라 앞에서 서포트 조명을 들고 배우 얼굴만 밝혔다. 그 장면도 A7S 카메라로 찍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감도가 높아 노출이 가능했다. 메인 카메라가 레드 에픽이었는데 레드 에픽을 아무리 경량화해도 A7S를 못 따라간다. 레드 에픽으로 찍되 오프닝 시퀀스나 오토바이 액션신처럼 핸드헬드가 필요한 장면은 A7S로 찍은 것도 그래서다.
김성훈
버스 액션 시퀀스는 정말 무모해 보였는데.
박정훈
순서가 오토바이 액션 신을 찍고 난 뒤 그 시퀀스로 넘어간 거다. 그 장면을 촬영하기 전에 정병길 감독이 비를 뿌리면서 찍자고 제안했다. 프로듀서가 비용 때문에 안된다고 하던 중 김옥빈씨가 “저, 비 맞으면 안돼요” 한마디 하면서 상황이 정리됐다. (웃음) 결국 저희가 제공해드린 프리 비주얼대로 찍은 장면이라고 보면 된다. 감독이 구상한 프리 비주얼이 현실적으로 구현이 쉽지 않은 장면이 되게 많았던 까닭에 권귀덕 무술감독과 함께 프리 비주얼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게 우리의 관건이자 목표였다.

박정훈 촬영감독이 꼽은 미술, 의상이 인상적인 영화 베스트5
1
<라스 베이거스를 떠나며>의 플라스크(휴대용 위스키 병)
“역설적인 발상의 소품이 남자의 닫혀 있는 마음을 여는 도구로 사용되다.”
2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마리오네뜨
“두 명의 베로니카의 베로니끄를 의미함과 동시에 마치 신에게 조종당하는 인형과 같은 존재가 인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3
<토리노의 말>의 감자
“세상의 끝에서 먹는 인간의 유일한 음식이나 생존 조건.”
4
<하녀>의 쥐약
“영화 내내 나오는 쥐라는 기분 나쁜 집안의 방해물을 죽이기 위해 놓아둔 것인데 결국 한 가족을 죽이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는 아이러니.”
5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교환일기
“그저 여학생이라고 분류하는 사이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10대 여성들의 내밀한 세계를 현미경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도와주는 필터.”
글 김성훈(<씨네21> 기자)·사진 최성열(<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