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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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된 영화유산

공작

  • 감독 윤종빈
  • 각본 권성휘, 윤종빈
  • 프로듀서 국수란
  • 촬영 최찬민
  • 미술 박일현
  • 의상 채경화
  • 음악 조영욱
  • 편집 김상범, 김재범
  • 출연 황정민, 이성민, 조진웅, 주지훈
  • 제작사 사나이픽처스, 영화사 월광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특별핵사찰을 요구하며 ‘장군’을 부르자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해 ‘멍군’으로 응수했던 1993년이 <공작>의 배경이다. 남한은 북한이 핵이 있는지, 아니면 개발하고 있는지, 개발하고 있다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다. 정보사 소령 출신인 안기부 요원 박석영(황정민)은 상부인 안기부 해외실장 최학성으로부터 북의 핵개발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해오라는 명령을 받고 마산 출신의 대북사업가로 위장해 중국 베이징으로 향한다. 그 곳에서 그는 ‘서울무역’이라는 무역 회사를 차린 뒤, 북한의 외화벌이를 책임지고 있는 대외경제위와 끈이 닿은 재일동포 기요하라(김인우)로부터 북한 상품을 사들이며, 수개월 동안 자신을 노출시킨다. 그러면서 북 고위직에 포섭당하려고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어느 날, 박석영은 베이징에 주재하는 북한 대외경제위 리명운 처장(이성민)을 만나면서 그의 공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리명운은 박석영이 접근할 수 있는 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김정일 위원장과 독대가 가능한 거물이다. 하지만 리명운은 군 정보사 소령 출신인 박석영을 쉽게 믿지 못하고 계속 테스트한다. 박석영은 그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한다.

영화사 월광 기증 <공작> 의상

윤종빈 감독 인터뷰
<공작>을 빼놓고 올해의 영화를 논할 수 없다. 블록버스터 <군도 : 민란의 시대>(2013) 이후 윤종빈 감독이 약 5년 만에 내놓은 <공작>은 한국 첩보 역사상 최초로 북한 국가 안전보위부(이하 보위부)의 방패를 뚫고 적의 심장부(평양)까지 침투한 스파이 “흑금성”을 스크린에 불러낸 첩보영화다. 하지만 첩보영화로서 <공작>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나 ‘본 시리즈’처럼 액션 신도, 총격 신도, 폭파 신도 없다. 이처럼 윤종빈 감독은 흑금성의 공작을 통해 적을 무력화하는 데서 발생하는 장르적 쾌감에는 그다지 관심 없어 보인다. 공작의 목표가 흐릿해지는 순간 스파이로서 흑금성의 정체성도 덩달아 흔들리는데, <공작>은 이 변화를 통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북핵의 진짜 실체는 무엇인가, 한국의 기득권 세력은 북핵을 어떻게 이용했나, 한반도의 냉전 이데올로기는 누구의 배를 채웠나, 스파이 흑금성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고 공작을 했나. 남과 북이 점점 가까워지고 북한과 미국이 대화의 노력을 거듭하는 2018년 지금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
김성훈
<공작>은 제작 과정이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프로젝트인데.
윤종빈
원래는 1980년대 안기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안기부가 했던 공작들을 조사하다가 암호명이 흑금성(본명 박채서)인 스파이의 존재를 알게 됐다. 어떤 사람인지 조사해보니 ‘진짜 이런 일이 있었는가’ 싶더라.
김성훈
전작 <군도 : 민란의 시대>가 개봉했던 2014년 7월 당시,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이하 <이이제이>)의 ‘흑금성 특집’ 편을 통해 흑금성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윤종빈
전작을 끝내고 난 뒤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 안기부를 취재하다가 우연히 <신동아>에 실린 기사 ‘공작원 흑금성! 北 보위부 침투, 김정일 만나다’를 읽으면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후 <이이제이>를 통해 흑금성을 취재했던 당시 <시사저널> 기자였던 김당씨를 알게 됐고 그에게 흑금성과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흑금성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 중이라고 해서 흑금성의 가족을 통해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김성훈
흑금성 사건의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나.
윤종빈
한국의 정보기관도 정치인이나 민간인을 사찰하고 댓글이나 단 게 아니라 대북 공작을 굉장히 치밀하게 했구나 싶었다. (웃음) 흑금성이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에 뛰어들게 되는데, 그 이야기가 너무나 영화적이었다. 기사나 자료가 한정적인 비사라 이야기의 전말이 너무 궁금했다. 흑금성 사건을 취재했던 김당 기자를 통해 박채서씨와 연락을 취했는데, 수감 중이었다(박채서씨는 북한에 군사 정보를 넘겨준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 받고 수감됐고 2016년 5월 31일 만기 출소했다).
김성훈
당시 감옥에 복역하고 있던 흑금성, 박채서씨를 면회간 적 있나.
윤종빈
면회를 가려고 했지만 박채서 선생님이 당신 같은 유명한 사람이 오면 국정원에 보고된다고 만류하셨다. 대신 영화사 직원을 보내라고 하셔서 손상범 영화사 월광 대표가 면회를 갔고 영화화 허락을 구했다. 이후 서신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박 선생님과 주고받았다.
김성훈
취재하면서 알게 된 흑금성(의 공작)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윤종빈
많은 사람들이 첩보영화라고 하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나 ‘본 시리즈’를 떠올리는데, 나는 그 영화들이 첩보영화가 아닌 액션영화라고 생각한다. 흑금성 사건을 영화로 만든다면 사실적인 (첩보)영화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동시에 첩보물의 주인공인 스파이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스파이는 군인인데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는 피아 식별이 아닌가. 냉전 체제가 낳은 존재로서 스파이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과정을 그려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흑금성이 공작을 하면서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에 개입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극적이었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김성훈
대학 노트 4권에 달하는 박채서씨의 수기에는 그의 공작이 굉장히 세세하게 기록됐다. 이 실화의 어떤 부분을 시나리오에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나. ‘암호명 흑금성’이라는 사실을 살리는 과정에서 각색이 쉽진 않았을 것 같다.
윤종빈
알다시피 이 얘기는 흑금성의 십 몇 년에 걸친 첩보 활동을 다루고 있는데, 그 활동 모두 두 시간짜리 영화에 담아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한반도의 핵심 이슈인 북핵 문제에서 시작해 북의 핵개발을 저지하려는 남한, 그리고 개혁과 개방에 대한 의지를 보이는 북한, 두 개의 축을 놓고 각색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팩트를 지키면서 각색하는 건 불가능하니 그 방향을 중심에 놓고 팩트보다는 영화적 논리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성훈
북핵 문제로 이야기를 시작한 건 그때도, 지금도 한반도를 둘러싼 중요한 이슈니 시의성이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나.
윤종빈
실제로 당시도 북핵 사태가 국제사회에서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 영화에서든 실제 국제사회에서든 북핵 이슈가 한반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북핵이 맥거핀이라고 생각했다. 북핵의 실체는 어마어마하고 광범위하지만 모습을 드러내기는커녕 정치적 도구로서만 이용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남한의 보수 정권은 물론이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그 동안 철저하게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북핵 문제에 접근했듯이 말이다.
김성훈
영화 속 흑금성의 내레이션은 단순한 정보 전달뿐만 아니라 속내를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스파이로서의 감정과 상황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윤종빈
스파이의 정체성을 다루는 이야기인 동시에 흑금성 입장에선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내레이션 사용이 불가피했다. 이 영화는 1시간 반 가량 흑금성이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얘기하지 않는다, 얘기할 수도 없고. 나중에 정체성이 변하게 되는 순간 그의 생각을 얘기하게 하는 방식이 1인칭 시점 밖에 없었다.
김성훈
흑금성이 북한 대외경제위(리명운), 국가안전보위부(정무택)에 접근하는 시퀀스들은 만남이 거듭될수록 서스펜스가 구축되어야 하는 게 관건이었을 텐데.
윤종빈
각 캐릭터들의 면면과 그들의 관계성이 잘 표현된다면 충분히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령, 대외경제위에 소속된 리명운은 보위부에 소속된 정무택보다 상관이지만 함부로 할 수 없고 정무택은 리명운을 감시해야 하는 관계 말이다. 또 흑금성이 그들에게 일부러 짜증내고 화를 내며, 일을 뒤엎으려고 하는 모습들이 그의 작전처럼 느껴진다면 흥미 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박채서 선생님이 쓴 수기를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건 스파이가 북한 인사들에게 화를 내는 게 일종의 작전이었다는 부분이었다. 박 선생님에게 왜 화를 냈냐고 물어보니, 그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스파이가 첩보 작전에 실패한 이유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북한에 너무 고분고분했다고 말했다. 모두 북에 끌려간 것도 그래서고. 박 선생님이 오히려 ‘나는 안 할 거야’라고 강단 있게 나가니까 북한이 끌려오더라고 얘기해주었다.
김성훈
대사 양이 워낙 많다 보니 배우들의 입에 붙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
윤종빈
예닐곱 차례에 걸친 리딩을 통해 여러 설정들을 테스트하고 수정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었다. 그보다는 배우들이 인물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너무 완벽한 스파이를 표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파이도 사람이기에 긴장할 때는 떨고 반대로 일이 잘 풀리면 좋아하는 표정을 미세하게나마 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공작원을 그리고 싶었는데 황정민 선배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뉘앙스까지 표현해주셔서 그가 기술적으로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지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김성훈
순안국제공항부터 시작되는 평양 시퀀스는 하늘 위에서 바라본 대동강, 아파트들이 줄지어 늘어선 광복 거리 등 이제껏 한국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스펙터클을 펼쳐놓는데.
윤종빈
한국 사람들은 여러 영상들을 접하면서 평양을 잘 알지 않나. 관객에게 진짜 평양이라고 믿게 해야 했다. 해외에서 촬영된 소스를 구하고 평양과 비슷한 풍경을 가진 중국 연변 지역을 물색하고 세트를 짓고 CG로 합성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평양을 표현했다.
김성훈
기주봉 배우가 어떤 점에서 김정일 역할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윤종빈
개인적으로 연기를 좋아하고 김정일과 키가 비슷한 한국 배우 세 명의 리스트를 할리우드 특수분장팀(프로세틱 르네상스(Prosthetic Renaissance Inc. :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블랙스완> 등 작업-편집자)에게 보여주었다. 그 팀이 기주봉씨라면 김정일과 똑같이 분장할 수 있다는 의견을 주면서 기주봉씨를 캐스팅하게 됐다.
김성훈
북한 무용수 조명애와 함께 삼성 애니콜 광고에 출연했던 가수 이효리가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장면에 자신의 역할로 직접 특별출연해 깜짝 놀랐다.
윤종빈
처음에는 자신의 역할을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이 영화가 어떤 이야기이고 극 중 이효리가 등장하는 장면이니 당신이 안 나오면 안되며, 당신이 마무리하는 작품이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써서 이효리씨에게 보냈다. 그렇게 출연해준 덕분에 한 회차만에 촬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김성훈
영화의 결말은 흑금성과 리명운의 애틋한 감정이 느껴지던데.
윤종빈
둘은 오랜만에 만났지만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이잖나. 서로에게 ‘나는 괜찮아’라고 안부를 전할 수 있는 ‘아재’들만의 방식이 뭐가 있을까 했을 때, 주고받은 선물을 보여주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둘이 각자 할 수 있는 마지막 의사표시라고 보았다.
김성훈
박석영은 한 영화 안에서 여러 얼굴을 가진 사나이인데, 영화를 찍는 동안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던가.
윤종빈
그는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다. 군인이고 국가에 대한 생각이 투철하고 굉장히 침착하며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라고 설정했다. 그런 확고한 신념이 흔들렸을 때 오는 딜레마를 후반부에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성훈
이 영화는 “흑금성”이라는 스파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었던 ‘북풍’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다.
윤종빈
북풍은 분단 이후 한국의 보수 세력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한 도구였다. 거대한 적을 내세우고 우리 안의 결속을 다지는 게 보수라 불리는 세력의 논리였는데, 이제는 그게 무너졌다고 생각한다. 그 실체는 지난 정권 때 만천하에 드러났고 최근의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냉전 시대의 사고와 이데올로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By 김성훈(<씨네21> 기자) ㆍ 사진 김성백(스튜디오 “오늘의 나” 작가), 백종헌(<씨네21> 사진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