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연 의상감독부터 만났으면 좋을 것 같다.” <기생충>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뒤 봉준호 감독에게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 유산 수집 캠페인과 관련해 만나자고 요청하자 그는 최세연 의상감독도 함께 만나줄 것을 주문했다. <기생충>이 끝나자마자 오랜 만에 긴 휴식을 취한 최세연 의상감독은 <기생충>과 관련된 인터뷰 대부분 거절하던 차였다. 주인공 김기택(송강호) 가족과 박 사장(이선균) 가족, 상반된 두 가족이 대비될 수 있는 건, 의상, 촬영, 미술, 음악 등 영화의 여러 요소들이 감독의 지휘 아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 덕분이다. 어렵게 최 의상감독을 그의 작업실에서 만나 <기생충> 의상과 관련한 자세한 제작 뒷이야기를 들었다.
김성훈
<기생충>은 인물과 공간이 무척 중요한 이야기다. 촬영 전, 봉준호 감독과 영화 속 의상에 대해 어떤 얘기를 나누었나.
최세연
많은 인물들이 함께 서사를 전개하는 <도둑들>(2012, 감독 최동훈)이나 <독전>(2018, 감독 이해영) 같은 전작과 달리 <기생충>은 김기택(송강호)과 박동익 사장(이선균) 상반된 두 가족의 컨셉을 전달하는 게 우선이었다. 감독님이 가장 먼저 주문하신 건 영화 속 인물들이 존재감을 애써 드러내지 않아도 수채화처럼 이야기에 스며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우, 기정, 기택, 충숙 등 기택의 가족 구성원이 차례로 동익의 집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 기택과 동익 두 가족을 구분하는 질감과 색감으로 의상 컨셉을 세웠다. 보통 공간에서 인물을 소외시키면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반면, 이번 영화는 인물들이 입는 옷이 가구나 소품의 일부인 것처럼 색감과 질감을 설계했고, 그러기 위해 촬영과 조명 그리고 미술 파트와 함께 긴밀하게 준비했다.
김성훈
구체적으로 홍경표 촬영감독, 이하준 미술감독과 색감과 질감에 대한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궁금하다.
최세연
<마더>(2009) <해무>(2014) <옥자>(2017) 등 봉준호 감독이 연출하거나 제작한 전작들을 쭉 함께 해온 팀인 까닭에 수시로 소통할 수 있어 타협의 폐혜가 거의 없는 호흡을 자랑하고 있다. 보통 소품팀이 공간을 세팅하는데 필요한 의상 소품을 공수하는 반면, 우리는 공간을 채우는데 필요한 의상들을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작업한다. 기택 가족의 반지하집에 있는 가족 구성원들의 의상, 충숙의 액세서리들은 의상팀이 준비한 것들이다. 또, 배우들이 의상을 피팅하는 과정에서 홍경표 촬영감독님, 이하준 미술감독님이 항상 참여해 카메라 테스트를 하며 적합한 의상을 점검하고 고른다. 사전에 논의하는 작업 방식 덕분에 질감과 색감을 미리 대비하고 체크할 수 있어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 그것이 보람감이 더욱 큰 이유다.
김성훈
그러한 방식으로 작업할 수 있는 게 키스탭 모두 오랫동안 작업을 해서 서로를 잘 알기 때문인가.
최세연
그렇다. 특히 봉준호 감독님은 프리 프로덕션을 보통 영화보다 길게 준비하신다. 이전 제목이었던 <데칼코마니> 시절부터 합류했으니 오래 준비한 셈이다. <해무> 때부터 봉 감독님은 시나리오와 관련된 이야기를 툭툭 옆구리 찌르듯이 얘기하신다. 무슨 이야기를 먼저 했지라는 생각보다는 계속 하나씩 이야기하다가 <옥자>가 들어갔고, 그러고 난 뒤 <기생충>이 시작됐다.
김성훈
인물마다 질문을 드리고 싶다. 기택의 반지하 집에서 기택 가족들은 매번 각기 다른 옷을 입는데.
최세연
<기생충>은 등장인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해 인물 별로 의상을 설명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전작인 <도둑들>의 경우 주인공이 여럿이었던 까닭에 각각의 캐릭터를 의상을 통해 살렸던 반면, 이 영화는 기택 가족과 박 사장 가족을 각각의 덩어리로 생각해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기택 가족은 물빨래를 하는 의상을, 박 사장 가족은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의상을 주로 입는 것으로 분류했다. 기택 가족이 입는 옷은 원단에 따라 오래 빨아 입어서 시간이 묻어날 수 있는 오염이 있고, 늘어나거나 줄어든 기장 때문에 사이즈가 정확하게 맞지 않는다. 박사장 가족이 주로 입는 옷은 드라이를 해야 하는 모던한 스타일이다. 그래서 직접 제작한 의상이 많고, 거기에다가 생활감을 주기 위해 염색하고 간지 내고 세탁도 여러 번 했다.
김성훈
기택 가족이 입는 옷은 집 안에 있을 때와 박사장 집으로 갈 때 차이가 확연하던데.
최세연
기택 가족이 상대하는 사람은 소위 VIP 고객이다. 기택 가족은 자신들의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 말끔한 옷을 입었다. 기정 외에는 모두 레퍼런스가 있는 인물이라 그 인물을 가이드로 삼고 접근했다.
김성훈
박사장 가족은 저택에 살고 있는 부자이지만, 재벌이 아닌 까닭에 옷이 너무 화려하진 않다. 박 사장 가족의 옷을 설정하면서 어떤 고민을 했나.
최세연
의상을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드라마에서 설정된 1차적인 경제적 형편보다는 시나리오에 드러나 있는 인물의 직업, 성격, 대사 그리고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딱 봐도 명품 같은 옷은 배제했다. 집 분위기에 맞게 심플하고 모던한 느낌을 살리려고 했다.
김성훈
이정은 배우가 연기한 문광은 우리가 TV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보던 부잣집 가정부와 달리 깔끔하고 지적으로 보이는 정장 스타일의 옷을 입었던데.
최세연
박 사장 집을 처음 설계하고 지은 문광현자부터 박 사장까지 오랜 시간 동안 다져온 부잣집 가정부의 정서적인 감각은 담 넘어 학습된 서당 개 같은 인물이다. 실제로 재벌집 가정부들은 의상 스타일이든 자가용이든 어느 정도의 형편이 보장된 삶을 살고 있다. 문광의 스타일을 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기우든 누구든 박 사장 집에 오면 문광이라는 인물이 이 집의 주인인지, 시어머니인지, 장모인지 착각할 수 있는 스타일로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김성훈
문광의 남편인 근세는 어떻게 접근했나.
최세연
근세는 박 사장 집의 지하 비밀 공간에서 나름 새로운 세계를 가꿔가는 인물이다. 차가운 공간과 대비되는, 위트 있는 소품들과 함께 살아간다. 문광의 보살핌 덕분에 전혀 방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너무 미천한 캐릭터로 접근하진 않았다. 오히려 닫힌 공간에서 오랫동안 폐쇄된 생활을 한 이 히스테리컬한 인물을 직관적으로 어떤 공간에서든 어둠으로 존재하기 원하는 부부의 바람을 검은색 톤으로 표현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주인집 1층에 위치한 냉장고를 터는 것이다. 기어가든, 벽에 붙어가든 눈동자 외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불필요했을 것이다.
최세연
아직 제목을 말씀드릴 수 없지만, 뮤지컬 영화와 스나이퍼를 소재로 한 영화, 두 편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