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태
2017년 7월쯤, 아내가 야구하는 소녀의 인터뷰에 관해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여자는 야구를 해봤자 프로에도 갈 수 없는데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여자도 프로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니 굉장히 신기한 것을 알았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때 이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좋은 성장영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고 바로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했다.
황민진
주인공인 ‘주수인’의 이름은 중성적이면서도, 어딘가 단단한 이미지가 있어서 캐릭터에게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주인공 이름을 정함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담았을지 궁금하다
최윤태
감주인공 이름에 있어서만큼은 정말 작명할 때처럼 한글과 한자를 고려해서 이름을 짓는다. 나에게 수인의 첫 번째 이미지는 운동장을 달리는 이미지여서 달리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주'라는 성을 지었다. 수는 빼어날 '수'를 썼고, 이름에는 잘 쓰지 않는 한자이지만 사람 '인'을 써서 태어날 때부터 출중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지었다. 또한 이름을 발음할 때 혀가 한 번에 움직여서 편히 부를 수 있도록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서 지은 이름이다.
황민진
수인(이주영)캐릭터를 디렉팅할 때 특별히 신경 쓴 지점은 무엇인가
최윤태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를 가장 많이 고민했다. 이 영화는 관객들이 주수인을 응원하지 않으면 실패한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서는 수인 캐릭터에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수인에게 관객들이 자칫 거부감을 느낄 수 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신경을 많이 썼다. 이주영 배우가 가진 단단한 이미지를 어떻게 하면 유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고민한 끝에 일부 장면은 여러 번에 걸쳐 촬영하고 편집할 때 여러 테이크에서 대사를 가져와 쓰기도 했다. 촬영 여건상 테이크를 많이 갈 수 없었음에도, 마지막에 구단장과 만나 수인이가 이야기하는 장면은 10~11 테이크까지 갔다.
황민진
딸을 가장 강하게 말리는 사람으로 어머니가 등장하고, 아버지는 딸을 응원하는 캐릭터로 나오는데 이러한 설정의 이유는 무엇인가
최윤태
엄마는 같은 여성이기에 오히려 수인을 응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성으로서 수인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아빠는 딸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기에 응원할 수 있지만, 수인이가 겪어왔던 삶을 아는 엄마로서는 오히려 딸의 꿈을 반대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황민진
곽동연 배우가 연기한 ’종호’ 캐릭터를 설정함에 있어서 어떤 부분을 고려하였나
최윤태
종호는 수인의 과거를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한 캐릭터였다. 종호를 통해 수인이 얼마나 실력이 뛰어나고 인정받았던 선수였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종호에게 수인은, 그리고 수인에게 종호는 연인과 같은 관계는 전혀 아니고 서로의 과거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황민진
(영화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국내 최초의 여자 야구 선수 안향미 선수가 걸었던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결말을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
최윤태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안향미 선수의 실화를 가지고 쓰려고 하지는 않았다. 영화 속에서 액자 소품으로 등장하는 ‘20년 만에 여자 고교 야구 선수 탄생’이라는 글귀에서 20년 전 선수가 안향미 선수다. 안향미 선수가 있었기에 지금의 수인이 있을 수 있었고, 수인이 있었기에 또 다른 여자 야구 선수가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캐릭터에게 어떤 것을 해줄 수 있는지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데, 의 경우 수인이가 원하는 것을 해내는 것이 과연 해피엔딩일지를 많이 고민했다. 고민 끝에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 수인이가 영화 이후로 어떤 삶을 살아가든 간에 지금의 나는 수인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으니까’라는 생각으로 결말의 방향을 정했다.
황민진
야구소녀 연출하면서 영향을 받은 문학작품이나 영화가 있나
최윤태
문학작품은 과 가네시로 가즈키 작가의 를 굉장히 좋아하고 영화의 경우는 폴 토머슨 앤더슨의 를 가장 좋아한다. 어렸을 적에 이 영화를 통해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가족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이야기는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가족 안에 있고, 가족만 잘 다뤄도 좋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된 것이다. 이 작품들이 에 어떤 영향을 줬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쓰는 글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황민진
영화 속 공간 중 가장 신경을 많이 쓴 세팅은 무엇인가
최윤태
원래는 미술적으로 하고 싶었던 것들이 굉장히 많았지만, 예산상 99%는 실현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공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공간은, 교내에 여성 선수 라커룸이 없는 상황에서 수인이가 화장실을 혼자만의 라커룸으로 꾸며서 쓰는 공간이었다. 수인의 감정과 상황을 이미지적으로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주수인 그 자체인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황민진
촬영에 들어가기 전 의상팀에게 특별히 요청한 부분이 있는지
최윤태
겨울에 촬영했기 때문에 최대한 계절감을 살려서 관객들이 겨울의 공기를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 평상복의 경우 붉은 톤이 많은 이유는 겨울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고, 주수인 캐릭터를 살릴 수 있는 강렬한 원색이자 이주영 배우에게 어울리는 색상이었기 때문이다.
황민진
의상 중 야구복을 설정함에 있어서 어떤 것을 고려했나
최윤태
원래 유니폼으로 생각했던 이미지는 보다 올드한 이미지였다. 그런데 촬영하게 된 학교의 유니폼이 원래 생각했던 컨셉보다 이주영 배우의 이미지에도 더 잘 어울려서 지금의 유니폼으로 정하게 되었다. 학교 이름도 실제 촬영지인 학교(백송고)와 동일하게 갔기 때문에 실제 백송고의 야구부 학생들은 영화 속 유니폼을 입고 훈련하고 있다.
황민진
주수인 유니폼의 등번호 29번은 어떤 의미를 담았나
최윤태
원래는 안향미 선수가 1번이었고 그 뒤를 이어서 2번이라는 의미로 주수인의 등번호를 2번으로 설정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렇게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웃음)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숫자인 아내의 생일로 정했다. 실제로 나도 운동할 때 29번을 등번호로 한 운동복을 입는다.
황민진
소품을 설정하면서 캐릭터별로 신경을 쓴 부분은 무엇인가
최윤태
가장 신경 써서 준비했던 것은 수인이가 가지고 다니는 인물소품이었다. 영화상에서 글로브가 두 가지가 나오는데 두 글로브를 어떤 것으로 할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첫 번째 글로브는 고등학교 야구 선수들이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글로브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갈색으로 설정했다. 두 번째 글로브는 일반적으로 고등학교 야구선수들이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하고 싶었고 색깔도 수인에게 잘 어울리는 원색의 글로브로 설정했다.
황민진
두 글로브의 차이를 두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최윤태
수인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는 시점에서, 개인적으로 기존에 수인이 가지고 있던 것과는 다른 커다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황민진
’진태’(이준혁)의 경우 의상·소품에 있어서 어떤 부분을 고려하였나
최윤태
진태의 의상을 준비하면서는 어떻게 하면 이준혁 배우가 멋있지 않을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했다. 그런데 실제로 의상을 입혀놓고 보니 의외로 아저씨 같아서 쓸데없는 고민을 많이 했었다고 생각했다. (웃음) 어둡고 허름한 의상 컨셉을 통해 인물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황민진
엄마와 수인의 과거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스크림을 특별히 '서주 아이스크림'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을지
최윤태
우선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하얀색 아이스크림을 원했다. 수인이가 감정적으로 지니고 있던 것들을 해소하는 데에는 다른 색이 들어가지 않은 하얀색의 이미지가 가장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또한 과거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아이스크림이면서 촬영지인 허름한 골목의 슈퍼마켓과도 가장 잘 어울리는 서주 아이스크림으로 설정했다. 촬영 당시 이 아이스크림을 서울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인천까지 가서 20여 개를 사 왔던 기억이 있다.
최윤태
아까 말했듯이 글로브에 가장 애착이 간다. 또 다른 소품 중 액자가 바뀌는 이미지가 수인이의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 측면에서는 스피드건에 나오는 숫자도 중요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150은 절대 나오지 않는 구속은 수인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다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수인의 한계를 나타내는 스피드건의 숫자를 통해 관객들이 수인이를 응원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최윤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영화의 초반, 수인이가 운동장 끝에서 끝으로 달리는데 화면 바깥으로 나간 후 한참 있다가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이다. 시간이 너무 길어서 삭제하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편집에서 자르지 않은 이유는 수인이가 화면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기다려준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장면 이후부터 관객들이 수인이를 이해하고 응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일 좋아하는 대사는 수인이가 진태에게 "내가 대신 가줄게요"라고 말하는 대사다. 그 대사는 나한테 하는 이야기일 수도, 관객들에게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황민진
수인에게 볼회전력을 살린 너클볼이 있었듯이 야구소녀만의 강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최윤태
잘 모르겠다. 연출자의 입장에서는 사실 장점보다는 안 좋은 이야기만 계속 듣다 보니까 더욱 모르겠다. 하나를 꼽자면, 어려운 환경에서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연기해준 좋은 연기자들이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들이 그 누구 하나 허투루 연기한 사람이 없었다.
최윤태
지금으로서는 완전 시작 단계여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만 아이템이 정해져서 현재 작업 진행 중에 있다.
황민진
한국영상자료원에 자료를 기증한 소감이 궁금하다
최윤태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영화 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기증이 이루어지면 가 더 오래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의미가 크다고 생각하고 있다.
황민진
다음 작품의 의상과 소품도 기증해주실 의향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