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박물관

한국영화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보물창고

기증된 영화유산

일장춘몽

  • 감독 박찬욱
  • 각본 박찬욱, 박찬경
  • 프로듀서 황진하
  • 촬영 김우형
  • 조명 김민재
  • 편집 정지은
  • 음악 장영규
  • 미술 류성희
  • 의상 이진희
  • 출연 유해진, 김옥빈, 박정민
  • 제작사 (주)모호필름
비명에 스러진 고을의 은인, 여협 흰담비를 묻어줄 관을 만들 나무를 구하기 위해 장의사는 버려진 무덤 하나를 파헤친다. 그 바람에 무덤의 주인인 검객의 혼백이 깨어나 자신의 관을 되찾으려 소란을 피우고, 덕분에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흰담비의 영혼마저 깨어나게 되는데… 삶과 죽음이 만나고 결혼식과 장례식이 어우러지는 모던 판소리 한마당. iPhone 13 Pro로 찍은 거장 박찬욱 감독의 저세상 무협 로맨스

(주)모호필름 기증 <일장춘몽> 의상
흰담비역(김옥빈) 의상 흰담비역(김옥빈) 의상
검객역(박정민) 의상 검객역(박정민) 의상
영혼역(김정선) 의상 영혼역(김정선) 의상
영혼역(신해수) 의상 영혼역(신해수) 의상
영혼역(김소원) 의상 영혼역(김소원) 의상

이진희 의상감독 인터뷰
<일장춘몽>은 11년 전 아이폰4로 단편 <파란만장>을 연출했던 박찬욱 감독이 아이폰13 프로로 다시 제작한 20분짜리 단편영화다. 장의사(유해진)가 고을의 은인인 흰담비(김옥빈)를 묻어줄 관을 만들 나무를 구하기 위해 버려진 무덤을 파헤쳤다가 그곳에 잠들어 있던 검객(박정민)의 영혼이 깨어나면서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을 그려내는 이야기다. 전통과 판타지,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 문화가 혼재되어 있는 독창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과감한 색감의 한복 의상을 스크린에 수놓은 이진희 의상감독을 만나 의상을 통해 흰담비와 검객 그리고 장의사 등 세 인물의 정체성과 캐릭터에 대해 물었다. 평일 낮에 방문했던 그의 작업실은 고요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김성훈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이야기가 어땠나.
이진희
서사가 길거나 친절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박찬욱 감독 특유의 위트나 상징이 숨어있어서 시각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체 한국적인 것에 관심이 많고, 놀이하듯이 한국적인 것을 주제로 한 작업을 하고 있는 데다가 마침 조선 초기 민화에 꽂혀있던 시기에 박 감독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조선 초기 민화에 담긴 새로운 색감들을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면 재미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큰 기대감을 안고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김성훈
말씀대로 <일장춘몽>이 전통과 판타지,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 문화가 혼재되어 있고, 독창적인 이야기라는 점이 이 작품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이진희
그렇지 않았다면 과감한 시도를 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김성훈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보통의 사극과 달리 <일장춘몽>에서 등장인물들이 입은 한복들은 색이 과감해서 인상적인데, 영화 전체적인 의상 컨셉을 정할 때 중요하게 고민했던 것은 무엇인가.
이진희
이 영화가 박찬욱 감독과의 첫 작업인데, 박 감독님과 대화를 나눠보니 창작자를 굉장히 존중해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님께서 정한 큰 원칙의 기준 안에서 의상감독으로서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많이 열어주셨다. 의상감독으로서 평소 관심이 많던 조선 초기 민화를 이 작품 속에 녹여내고 싶은 마음이 커서 보따리를 풀듯 책을 보여드렸다.
김성훈
그게 어떤 책인가.
이진희
(테이블 위의 두꺼운 민화 사진집을 꺼내보이며) 일제감정기 때 일본인들이 민화들을 일본으로 가져가버린 바람에 일본에서 관련 서적들을 출판해 국내에는 없는 자료다. 박 감독님께 그 책을 보여드렸더니 굉장히 흥미로워하셨다. 김옥빈이 연기한 흰담비와 관련한 설정을 포함해 감독님의 의견을 꼭 따라야하는 부분 외에는 내 아이디어들을 경청해주셨다.
김성훈
(책 속 민화를 보면서) 시나리오 상에서 시대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설정되어 있었나, 아니면 이 같은 책이나 자료를 함께 보면서 시대적 배경을 찾은 것인가.
이진희
후자다. 아이디어를 주고 받으면 시대적 배경을 함께 찾았다. (조선 민화를 함께 보면서) 이런 괴석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돌과 모양이 많이 다르지 않나. 조선 후기 민화 속 나무는 영국이나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굉장히 예쁘지만, 조선 초 민화 속 나무는 야성적이다. 박 감독님께 조선 초 민화가 가진 생명력과 야성성을 설명드렸더니 관심을 많이 보이셨다. 이 책을 감독님, 미술감독님께 보여드렸고, 조선 초 민화가 가진 야성성을 이 작품에 담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김성훈
말씀대로 조선 초기 민화의 색감이 과감하고 강렬하다.
이진희
그래서 확실히 조선 후기 민화보다 과감해서 매력적이다. (조선 후기 민화들을 보면서) 후기 민화들은 전반적으로 색감이 깨끗하고 따뜻한 파스텔 톤인데 조선 초기 민화들을 만나면서 민화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우리가 이렇게 야성성이 있구나. 그걸 <일장춘몽>의 판타지한 세계관에서 재미나게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박 감독님 덕분에 행복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김성훈
주요 배우들의 의상들을 보니 배우들이 맡은 캐릭터에 맞는 고유의 색과 에너지 그리고 아이덴티티를 의상을 통해 부여한 것 같다. 김옥빈씨가 연기한 흰담비는 이름부터 어떤 색으로 표현해야 할지 단서를 주는 캐릭터인데, 흰담비의 의상을 구상할 때 고민했던 것은 무엇인가.
이진희
이 세계관에서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게 멜로 드라마이지 않나. 제2의 몸이자 캐릭터인 의상을 통해 흰담비와 검객(박정민), 두 인물 간의 멜로 드라마가 서사에 제대로 붙게 하려고 했다. 흩날리는 느낌, 영혼의 느낌이 나는 의상이면 좋겠다 싶었다. 캐릭터의 이름대로 흰담비는 기본적으로 흰색이 주요 색감이라 그것을 표현하는데 충실했다. 실크 특유의 날림 느낌이나 여러 겹을 포개어 풍성한 느낌을 살려 신비롭고 여성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김성훈
흰담배가 과거 무예 고수였던 시절을 보여주는 시퀀스에선 되게 거칠고, 선이 굵은 느낌이 인상적이었다.
이진희
검객을 만나기 전까지는 와일드한 털이나 가죽 소재를 사용해 선이 굵고 야성적인 느낌을 주려고 했다. 미술팀과 함께 가면도 함께 만들었고.
김성훈
김옥빈이라는 배우가 맡으면서 흰담비 캐릭터가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이진희
흰담비와 잘생긴 검객 그리고 장의사(유해진) 등 세 주요 인물의 공통점은 관계였다. 조선 초기 민화에서 광기를 느꼈는데, 이 야성성이 세 인물을 통해 잘 표현된다면 <일장춘몽>에 생명력이 생길 거라고 보았다. 각기 다른 세 캐릭터가 가진 광기는 무엇일까 고민한 결과, 흰담비는 센 에너지와 여성성이 공존하는 느낌으로 풀었고, 장의사는 의뭉스러운 느낌을 가진 캐릭터로 노란색 톤이 절묘하게 잘 맞아떨어졌다.
김성훈
유해진씨가 연기한 장의사는 광대 같은 캐릭터인데.
이진희
(장의사의 의상을 꺼내 보여주면서) 장의사는 되게 고집스러운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집의 흔적이 옷을 통해 보여주기 위해 (해진 부분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샌딩기로 직접 갈고 손으로 꼬매서 기워 입은 흔적들을 드러냈다. (노란톤의 장의사 의상을 보여주면서) 이 의상의 노란색은 감독님께서 유해진씨는 노란색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원칙이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듣고 ‘아, 유해진씨는 노란색이지’라고 곧바로 받아들여지더라.
김성훈
박정민이 연기한 검객은 짙은 청녹색 톤의 의상을 입은 캐릭터인데, 이 색감으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진희
검객은 관을 뚫고 처음 등장하지 않나.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무사인데, 이 영화의 서사에는 그의 전사가 따로 없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님께 검객이 언제 죽었는지 여쭤보니 감독님께서 고려시대에 죽었을 수도 있고,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다고 말씀주셨다. 고려와 조선 초 사이에 죽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 시기의 복식이 무사의 신비로움을 드러내줄 수 있겠다 싶었다. 의상의 채도가 아주 깊고 어두우면서도 의문스러운 면모를 강조해주고 싶었는데 (박)정민씨는 피팅하는 순간 녹색이 몸에 딱 붙어서 다른 색이 필요없었다.
김성훈
세 명의 주요 인물뿐만 아니라 많은 등장인물들이 입은 의상들이 색감이 다양해서 강렬했고, 인상적이다. 색감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어 의상감독 입장에서 좋았을 것 같다.
이진희
굉장히 행복했다. 평소 관심이 많던 ‘조선 초기’를 작품에 담아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일장춘몽>을 작업하는 내내 과감한 색들을 시도할 수 있어 신나게 일했다.
김성훈
<일장춘몽>은 애플의 아이폰으로 촬영했던 프로젝트인데, 카메라가 아이폰인 사실이 작업을 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하다.
이진희
아이폰의 카메라가 색감과 감성이 워낙 좋아서 색을 마음껏 사용해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젊은 세대들이 즐겨 사용하는 휴대폰인 까닭에 동시대의 감각에 맞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사극이라도 작품 속 색감을 현대화시키는 것도 중요했다.
김성훈
<일장춘몽> 제작진을 대표해 영화 의상을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유산 수집캠페인에 기증한 소감을 말씀해달라.
이진희
기록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영화가 계속 변화하고 있지 않나. 이러한 유산들을 아카이빙하고, 기록하면서 후배 의상감독, 미술감독이 그걸 발판으로 자신의 작업을 확장할 수 있고. 선배 세대들이 한 작업이 가진 어떤 깊이나 흔적이 이후에 등장하게 될 한국영화에 어떤 큰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점에서 한 페이지나마 내 작업이 보존된다는 건 굉장히 의미있고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글 김성훈(<씨네21> 기자) / 사진 김성백(스튜디오 '오늘의 나' 작가) / 편집 이주영(한국영상자료원 수집카탈로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