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우리는 조상경 의상감독의 손을 거친 의상을 익히 봐왔다. 잘 모르겠다고? <신세계>(감독 박훈정, 2013)에서 정청(이정재)이 입은 수트, <친절한 금자씨>(감독 박찬욱, 2015)에서 이영애가 입었던, 물방울무늬가 불규칙적으로 나열된 땡땡이 원피스가 떠오른다. <타짜>(감독 최동훈, 2006)에서 김혜수가 입었던 원색 계통의 실크 원단의 원피스는 정 마담(김혜수)의 섹스어필한 매력을 극대화하는 무기이자, 수컷들이 득실거리는 도박판에서 기가 전혀 눌리지 않게 해준 보호막이었다. <헤어질 결심>(2022) 이전에 <만추>(감독 김태용, 2011)가 있었다. <만추>에서 현빈과 탕웨이가 각각 입은 짙은 갈색 계통(현빈)과 옐로 계통(탕웨이)의 낡고 긴 코트는 안개가 자욱한 시애틀과 더없이 잘 어울렸고,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두 남녀의 쓸쓸한 운명과 애틋한 감정을 암시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영화 4편이 한주 간격으로 맞붙었던 올해 여름 시장에서 조상경 의상감독이 작업한 영화만 <외계+인> 1부와 <헌트>, 두 편이나 된다. 데뷔작 <피도 눈물도 없이>(2002)부터 최근의 <헌트>까지 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영화 속 인물들의 의상들을 창조해낸 그를 만나 <외계+인> 1부, <헌트> 그리고 에미상 6관왕을 차지했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게임> 등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한 세 작품에 대한 작업기를 들었다.
김성훈
<헌트>보다 앞서 올해 여름 시장에 개봉햇던 최동훈 감독의 신작 <외계+인> 1부 얘기도 해보자. SF 판타지 장르인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의상감독으로서 이야기가 어땠나.
조상경
<외계+인> 1부는…스스로 반성을 많이 했다. 전작 대부분 그랬듯이 이 영화 또한 시나리오 초고부터 받아서 읽었고, 감독님과 함께 브레인스토밍을 해서 발전시킨 뒤 촬영했다. 코로나 19 전이던 지난 2019년 가을에 시나리오를 받아서 2020년 프리 프로덕션 작업을 시작했고, 2021년에 촬영을 한 것이다.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인 <범죄의 재구성>(2004)을 함께 작업한 뒤로, <타짜>(2006) <암살>(2015)을 함께 호흡을 맞춘 만큼 최동훈 감독에 대한 신뢰도가 컸고, 지금도 여전히 그에 대한 신뢰감이 크다. 시나리오에 관한 얘기보다 시나리오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던 것도 그래서다. 20년 가까이 알고 지냈는데 최동훈 감독이 이렇게 신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너무 좋더라. 지금도 최동훈 감독을 굳게 믿는다. 그래서 1부 흥행 결과 때문에 많이 속상했다.
김성훈
이 영화의 과거는 고려라는 시대적 배경이 제시되어 있지만,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이야기라 의상감독 입장에선 과거를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는지가 중요했을 것 같다.
조상경
‘여말선초’가 이야기의 시대 배경이었다. 고려와 조선 사이의 굉장히 혼란스러웠던 시기. 등장인물은 왕족이나 양반이 아니었고. 고려풍의 의상을 재현하면 모 드라마처럼 또 역사 왜곡 이슈가 제기될 우려가 있어 조심스러우니 인물의 의상들을 좀 더 힙하게 표현하는 게 어떻겠냐고 최동훈 감독님께 제안했었다. 그 당시라면 어떤 스타일을 보여주더라도 지금 젊은 관객들은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이런 생각들을 나누면서 의상 작업의 출발점이 됐던 건 무륵(류준열)의 청녹색 도포. 다른 사극을 작업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옷을 입는 배우가 보여주는 고유의 색이 있다. 평소 배우 류준열의 매력을 잘 알고 있다. 캐릭터와 작품을 열심히 준비하고, 감각과 센스가 좋다. 무엇보다 류준열은 되게 밝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야기의 무대가 고려이기도 해서 물과 하늘의 색감인 청녹색이 어울리겠다고 판단했다. (류)준열이의 외모와 액션, 움직임을 고려해 좀 더 밝고, 가벼운 의상을 여러 겹 입혔다. 색감이라고 하면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색깔들.
김성훈
김태리가 맡은 이안의 한복 의상은 붉은색을 베이스로 하는데.
조상경
이 영화는 등장인물이 많아서 여러 인물이 한 공간에 모였을 때 캐릭터들이 확연히 구분되어야 했다. 더군다나 이안은 1부에서 다 드러나지 않은 사연을 가진 인물이라 서사에서 선명하게 표현하는 게 중요했다.
김성훈
김우빈이 연기하는 가드와 썬더는 현재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캐릭터인데 가드가 그레이 톤의 코트를 입는다면 썬더는 핑크색 상의를 입어 크게 대비된다.
조상경
가드는 불필요한 장식 없이 미니멀하게 표현하는 게 중요했다. 오랜 시간 지구에서 잘 머무르고 있고, 이안을 돌보는 보호자로서의 모습을 고려해 그레이톤의 코듀로이, 니트 등 온기가 느껴지는 소재를 골랐다. 반대로 썬더는 더 발랄한 컨셉의 점프 슈트, 1970년대 스타일의 빈티지 양복과 핑크색 의상으로 표현했다. 사실 썬더의 핑크색 의상은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의상 피팅할 때 (김)우빈이가 ‘가드는 감이 잡히는데 썬더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 다소 경직된 핏으로 표현하는 가드와 달리 썬더는 시도하기 나름인 캐릭터인데, 우빈이가 옷에 따라서 연기가 바뀌고, 최동훈 감독님은 그러한 변화를 잘 관찰하다가 캐치하는데 도가 튼 연출자다. 그래서 내 작업실에서 썬더에 맞는 여러 의상들을 피팅하다가 여성용 핑크 자켓 하나를 발견했다. (김)우빈이한테 ‘이거 한번 입어볼까’하며 대보았는데 느낌이 확 살더라. 우빈이도 편하게 받아들였고. 가드와 구분되는 의상이라 아주 우연한 기회로 썬더의 캐릭터를 찾을 수 있었다.
김성훈
김의성씨가 연기한 빌런, 자장 법사는 승려의 법의를 통해 빌런 특유의 비밀스러움을 표현한 것 같더라.
조상경
모든 원단을 수작업으로 염색했는데 작업 시간이 오래 걸려서 촬영 하루 전날까지 손을 봐야했다. 자장 법사가 입은 법의는 색감이 붉은색을 중심으로 두고 노란색과 파란색을 섞어 토색과 자황색을 활용했다. 자장 법사가 쓴 가면은 광대가 부각된 채 입은 웃는 전통적인 탈 형태와는 전혀 다른 컨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