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로맨스>와 <밀수>는 올해 극장에서 개봉해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두 영화 모두 연출한 감독도, 장르도, 줄거리도, 흥행 성적도 다르지만, 윤정희 의상감독의 의상이 관객을 서사와 캐릭터에 깊숙이 끌어들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원석 감독이 연출한 <킬링로맨스>는 저렇게 해도 되나 싶을만큼 과감한 의상들을 다양하게 선보이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매력에서 헤어나올 재간이 없다. <밀수>의 의상들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만큼 시대를 충실히 재현하는 동시에 각각의 인물들의 성격과 감정을 적확하게 드러낸다. 올해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 유산수집캠페인에 두 영화 속 등장인물의 의상을 기증해준 윤정희 의상감독을 만나 자세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다. 윤정희 의상감독은 <내 사랑 싸가지> <여자 정혜>로 의상팀 경력을 시작해 조상경 의상감독이 이끄는 곰곰의 멤버로 합류한 뒤 <박쥐> <군도 : 민란의 시대> <암살> <아수라> <신과 함께> 시리즈 등 많은 영화에 참여해 의상들을 제작했고, 이후 의상감독으로서 <검은 사제들> <골든슬럼버>, 최근의 <킬링로맨스> <밀수> 등 여러 영화 속 의상들을 선보였다.
김성훈
이원석 감독으로부터 <킬링로맨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의상감독으로서 어떤 도전이 될 작업이라고 보았나.
윤정희
워낙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 생각일까. 보통 시나리오를 읽고 감독님을 만나면 사진 한두장을 찾아서 그 사진들을 보면서 영화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이 영화는 빈손으로 이원석 감독을 만났던 것 같다. 어떻게 표현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아서 감독님을 뵙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이야기가 정리가 됐었다. 그때 감독님께서 여러 사진들을 보여주셨는데, 어렸을 때 봤던 TV가 노란색 벽 앞에 놓여져있는 이미지들이었는데 그걸 보고 시대나 현재 시점에 얽매이지 않고,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설계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색을 예쁘고 쓰고 싶었고, 한국영화에 이렇게 색이 많이 들어가는 영화가 없지 않을까 싶을 만큼 원단을 다양하게 고민했다. 이원석 감독이 1970년대를 좋아한다고 얘기하셨던 기억도 나고. 영화에서 주인공 조나단(이선균)은 좀 발랄한 캐릭터이지 않나. 이선균 선배는 조나단을 통해 변신을 할 거라면 아예 시도해보지 못한 컨셉으로 설계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김성훈
말씀대로 <킬링로맨스>는 동화 같은 이야기라는 컨셉 때문에 의상감독 입장에선 보통 작업보다 더 과감하고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감도 작용했을 것 같은데.
윤정희
맞다.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감독 션 베이커) 같은 핑크 색감을 과감하게 활용한 영화를 레퍼런스로 찾아보기도 했고. 색을 더 넣고 패턴을 과감하게 설계하는 게 주요한 과제였다. 원단 종류나 색을 룩보다 더 고민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이야기가 밝은 내용은 아니라 의상을 통해 다양하고 예쁘며 고운 색이 나오길 바랐다. 그런 색을 구현할 수 있는 원단이 무엇일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김성훈
<킬링로맨스>는 또한 보통 영화보다 더 다양한 의상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조나단은 재벌이라는 설정에 맞는 수트, 고급 피케 셔츠 등 다양한 스타일의 고급 의상들을 선보인다. 조나단 의상을 설계할 때 가장 고민하신 게 무엇인가.
윤정희
이선균 선배가 해보지 않은 스타일을 만들려고 했다. 이원석 감독이 1970년대 스타일을 너무 좋아해서 당시 해외 패션 에디터들과 관련한 사진이나 구찌 같은 명품 브랜드의 컬렉션들을 찾아보니 나팔바지를 입고 헤어스타일을 길게 한 사진들이 있더라. 그 분의 사진을 보고 조나단이다 싶었다. 그래서 그 분 사진을 다 찾아서 PPT 자료 한장에 다 붙여서 보여드리니 이선균 선배님이 민망해하시고. (웃음) 조나단의 의상은 실크 소재를 많이 사용했는데, 이선균 선배는 그렇게 후들후들한 원단을 소재로 한 옷을 입은 적이 없으시더라. 그런 의상들을 너무 낯설어하면서도 재미있어 하셨던 기억이 난다. 배우와 협의해 노란색을 많이 활용했고, 바지도 나팔 스타일로 하면 시대 의상처럼 보일까봐 광이 많이 들거간 고급 소재의 원단으로 제작했다.
김성훈
조나단이 입는 의상 중에서 하늘색과 흰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정장 의상은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색이라 인상적이었다.
윤정희
조나단이 지중해의 꽐라섬에서 온 캐릭터라 이탈리아 같은 지중해 인근과 어울리는 색을 활용해야 했다. 다른 나라의 재벌이기에 이질적으로 보여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캐릭터라는 생각을 가지고 설계했다.
김성훈
촬영 전 피팅 과정에서 조나단의 의상을 입은 이선균의 반응은 어땠나.
윤정희
배우가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은 색감과 스타일의 의상을 처음 입었을 때 많은 웃으셨다. 원단 소재가 실크인데 하나도 덥지 않다고 하셨고.
윤정희
공명씨가 연기한 범우 의상 몇 가지를 제외하면 이선균, 이하늬씨가 입은 의상은 다 제작했다.
김성훈
이하늬씨가 연기한 황여래 또한 드레스, 정장, 영화 속 의상 등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주는데, 황여래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했나. 그리고 의상을 설계할 때 고민한 건 무엇인가.
윤정희
이하늬가 되게 예쁜 배우이지 않나. 그런데 그가 영화에서 예쁘게 나온 작품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영화에선 그를 예쁘게 만들어보자는 게 고민의 시작이었다. 극중에서 여래는 조나단에게 순종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남자의 시선으로 여자 옷이 가장 예쁜 시대가 언제일까 생각해보니 그게 1950년대인 것 같았다. 1950년대 룩은 여성의 몸을 잘 드러내면서 여성을 공주처럼 보여주지 않나. 지금 돈이 많은 사모님들도 여전히 H라인 스커트 같은 1950년대 고전적인 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옷을 입는다. 조나단과 함께 있을 때 여래의 의상을 그 컨셉으로 잡았다.
김성훈
그러면 조나단을 만나기 전 톱스타 시절의 여래는 그와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했을 것 같다.
윤정희
1950년대 스타일과 차별화할 수 있는 룩을 고민하다가 1980, 90년대 룩을 컨셉으로 다리를 좀 더 드러내고자 했다. 원래 이하늬가 바지보다는 치마가 더 잘 어울리는 배우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어른들의 동화라는 이야기의 성격에 맞게 남자가 봤을 때 여래가 진짜 공주나 왕비처럼 보이는 게 중요했다. 핑크색, 붉은색, 연두색 등을 과감하게 쓴 것도 그래서고, 또 그렇게 보여야만 영화의 후반부에 ‘여래바래’(여래의 팬클럽)가 움직이는 동력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이하늬씨가 워낙 피지컬이 뛰어나 의상을 잘 살려서 이원석 감독이 성취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과감한 의상들을 스타일링을 했는데 배우가 감량까지 하며 의상을 잘 살려주었다.
김성훈
공명씨가 연기한 범우는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의상을 입었는데, 그럼에도 맨투맨 티셔츠, 여래바래 팬클럽 티셔츠, 긴팔 피케 셔츠 등 변주를 주어서 지루하지 않게 설정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윤정희
범우 특유의 무기력함을 의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고, 체구가 좀 왜소해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범우 역시 동화 속 캐릭터인데 되게 똑똑한 인물은 또 아니어서 평범한 맨투맨 티셔츠 정도로는 재미가 없었고, 통이 큰 바지를 입혔다.
김성훈
그밖에도 ‘극열지옥’ 문구가 붙은 찜질방 티셔츠, 여래바래 팬클럽 티셔츠, 큐브릭 영화 <샤이닝>에 오마주를 바친 듯한 쌍둥이 비서의 주황색 정장 등 재미있는 시도들이 많아 재미있었다.
윤정희
쌍둥이 비서는 주황색 정장으로 설정했고, 조나단의 부하들은 점프 수트로 설정했다. 이원석 감독님이 딱 떨어지고, 약간 브라운 느낌을 좋아하시더라. 그런 취향이 의상을 설계하는데 참조가 됐다. 여래의 팬클럽인 여래바래 티셔츠는 영화의 후반부에 팬클럽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신을 찍기 위해 100장 정도 제작했었다. 찜질방 티셔츠는 미술팀이 디자인했는데 제작비가 넉넉치 않아서 소량 제작했다.
김성훈
모든 의상이 소중하지만, 그중에서 유독 애착이 가는 의상은 뭔가.
윤정희
여래가 입은 붉은 드레스와 여래와 조나단이 처음 만나는 영화의 초반부 시퀀스에서 조나단이 입었던 형형색색의 로브. 특히, 로브는 원하던 원단을 찾지 못하다가 지인 디자이너님을 통해 스카프 16장을 엮어서 제작했다.
김성훈
되돌아봤을 때 <킬링로맨스>는 어떤 작품으로 남을 것 같나.
윤정희
원없이 과감한 시도를 했던 작업인 것 같다. 다만, 이 영화 끝난 뒤 옷이 서사보다 먼저 보이는 영화를 당분간 안해야겠다 싶었고, 쉽지 않은 작업이었던 까닭에 후유증도 커서 6개월 정도 작품 제안을 받지 않았다. 물론 흥행은 되지 않았지만, 영화를 열렬히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어 다행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