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지난해 이정재 배우의 첫 장편 연출작 <헌트>에 이어 배우 정우성의 첫 장편 연출작인 <보호자>의 의상을 맡았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땠나.
조상경
(정)우성씨를 의상감독으로 처음 만났던 작품이 <감시자들>(2013)이었고, 그 뒤로 <더 킹>(2017) <아수라>(2016) <강철비>(2017) <인랑>(2018) 그리고 <헌트>까지 쭉 함께 일했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연출을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는 것도 잘 알았다. <보호자>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그와 대화를 나눈 적 있다. 그에게 ‘<보호자> 같은 범죄 영화는 레퍼런스가 많은데 왜 직접 연출하려는지’를 물었고, 그는 ‘이제는 상업 영화를 연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동시에 영화 속 주인공 수혁이 평범하게 살고 싶은 욕망에 공감한 것 같았고, 나 또한 그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고, 수혁의 욕망에도 공감했다. 이제껏 작업했던 작품들은 남들이 도와달라고 요청해와서 참여한 경우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스스로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경우다. <보호자>는 후자 때문에 참여하게됐다. 정우성 감독이 레퍼런스가 많은 소재를 전형적인 결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았고, 연출자로서 뭔가 도약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이 작품을 통해 변화하고 싶은 마음의 어떤 순간이 작용했던 것 같다.
김성훈
말씀대로 수혁은 출소한 뒤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는 캐릭터인데, 배우 정우성이 연기하는 수혁은 외모부터가 평범하기가 쉽지 않지 않나. 그런 수혁을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나.
조상경
수혁은 너무 쉬우면서도 너무 어려운 캐릭터였다. 내게 정우성씨는 배우이자 스타인데, 이 스타 배우가 감독을 맡아 그려내고 싶은 수혁은 정말 멋부리고 싶지 않다는 거다. 어떻게 멋을 안 부릴 수가 있나. 배우로서 집중했던 <헌트>와 달리 <보호자>는 본인이 감독이라 캐스팅을 돌아서 가더라.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첫 시퀀스만 봐도 이렇게 시작하는 영화가 무수히 많은데, 다른 배우도 아닌 정우성씨가 감독을 하면서 그런 장면조차 관객에게 주는 울림은 되게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정우성은 스타니까. 태생적으로 스타였고, 스스로도 스타라는 위치를 즐기고 있고, 또 그렇게 늙어가니까. 어쨌거나 후드티 차림의 수혁은 출소하자마자 옛날에 몰던 자동차의 트렁크를 열어 예전에 입던 옷을 입지 않나. 그 장면을 통해 관객은 수혁이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누아르 장르의 색을 가진 이야기라 개인적으로 <영웅본색>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수혁의 아내나 가정사가 <영웅본색> 속 장국영의 그것과 맞물리는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또 레트로가 유행이니 좀 더 클래식하게 풀어내도 되겠다 싶었고, 더군다나 그런 인간적인 질감이 우성씨에게도 되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가죽 뒷면을 보드랍게 부풀린 스웨이드 자켓을 설정한 것도 그래서고, 화면에서 좀 더 캐릭터가 어우러지고, 또 남길씨한테 밀리면 안 되니까 원색인 붉은색을 고른 거다.
김성훈
반대로 수혁의 아내인 민서(이엘리야)와 수혁의 아이는 따뜻한 톤의 의상을 입었던데.
조상경
민서도 아이도 온기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노란색, 주황색, 완두콩색 등 따뜻하고 보고 있으면 기분 좋은 색을 쓴 것도 그래서다. 수혁이 입었던 비건디톤의 자켓 또한 단순한 붉은색이 아니다. 붉은색보다 조금 더 다운된 톤이다.
김성훈
수혁은 비건디톤의 자켓뿐만 아니라 카키색 자켓도 입었던데.
조상경
수혁은 스웨이드 재질과 함께 골덴 자켓, 골덴 트렌치 코트도 입었다. 그 자켓들은 의상팀이 워싱 작업을 거쳐 빈티지한 느낌을 많이 드러냈다. 우성씨가 체격이 좋고, 멋진데 걸을 때 특유의 바비브 때문에 의상에서 나오는 특유의 선이 있다. 항상 그 선에 맞춰 캐릭터의 기본 실루엣을 정리했다. 트렌치 코드 길이를 조금 짧게 변형을 준다거나. 그때는 또 우성씨께서 감독하랴, 해외에 광고를 찍으러 나가랴 하면서 본의아니게 감량을 한 상태였다.
김성훈
김남길씨가 연기한 우진은 캐릭터도 다소 독특한데. 덩달아 그가 입은 의상 또한 특히했다. 자켓 상의의 위쪽은 패턴화된 무늬가 새겨져있고, 아래 쪽은 천을 덧댄 것 같은 의상인데.
조상경
우진은 박유나 배우가 연기한 진아와 함께 2인조처럼 붙어다니는 캐릭터이지 않나. 영화에서 이 둘은 재개발 지역의 교회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우진은 대사를 치고, 진아는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의상감독으로서 작업할 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게 이미지 메이킹인데, 이들이 처음 등장할 때 어떻게 관객에게 소개할 것인가. <펄프픽션>처럼 둘이서 수다를 떨면서 등장하는 걸 떠올리면 이 영화에서 이들은 마치 타란티노 영화 속 인물 같더라. 김남길씨는 <모던보이>(2008) 이후 15년만에 처음 만난 건데 그때와 지금이나 한결 같아서 깜짝 놀랐다. 실제로 남길씨보다 박유나씨가 먼저 캐스팅이 됐었다. 영화에서 우진과 진아는 사용하는 무기도 신박하고, 남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중학생 같은 과거에 머물러서 수영장이 있는 놀이동산 같은 공간에서 살지 않나. 그게 나름 귀엽잖아. 과거 올리버 스톤 영화에서 볼법한 유아기 성향의 해맑은 킬러들인 셈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이들의 이미지를 상상했을 때 천사였던 것도 그래서다. 루시퍼 같은 타락천사 말이다. 얘네들이 폭발을 시키고, 불을 내는 범죄가 놀이 개념처럼 보이지 않나. 그런 맥락에서 진아가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모습이 깃털을 날렸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녀에게 퍼를 입힌 거다. 그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퍼를 더 많이 붙여서 길이를 늘리는 방식으로 퍼를 리폼했다. 이 둘의 룩을 패션으로 보면 그런지 룩이라 할만한데, 예산은 엄청 들었다. 남길씨 옷 한벌에 무려 천만원이 넘는다. 그 비싼 옷을 캐릭터에 맞게 막 망쳤다. 우진은 서사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녀야 하는 캐릭터라 컨버스 운동화를 신겼고. 우진이 걸친 옷들은 다 명품이다. 그런데 저는 명품을 함부로 쓰진 않는다. 왜냐하면 명품을 사면 일부로 영화에 맞게 망가뜨려야 하니까. 그런데 우진이나 진아는 명품을 막 입는 캐릭터들이라 되게 패셔너블하게 보여도 된다고 생각했다. 패션을 잘 아는 관객들이 이 캐릭터들을 보면 패셔너블하게 보일수도 있고, 특정 브랜드의 시그니처를 확인할 수 있으니 스타일링 개념으로 의상을 설계한 경우다. 영화의 후반부 시퀀스에서 진아의 퍼 코트 뒤에 날개를 단 것도 그래서다. 남길씨는 본인의 의상이 마음에 들어서 촬영이 끝난 뒤 한벌 챙겨갔다.
김성훈
성준(김준한)과 응국(박성웅)은 정장 차림인데, 정장 마이와 와이셔츠 사이에 정장 조끼를 하나 덧댄 게 인상적이었다. 특히 응국의 호피 무늬 넥타이도 강렬했고.
조상경
촬영 전 의상 PT를 하며 캐릭터의 컨셉들을 잡을 때 인물의 그룹을 나누며 감독님한테 그런 얘기를 했다. 조폭을 미화하고 싶지 않ㄴ다, 조폭이 멋지게 보이는 게 싫다. 예전에 <신세계>를 작업했을 때 어떤 마음이 있었냐면, 좀 다른 누아르 장르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 마침 기사를 보니 조폭이 주식을 한다는 거다. 그러면 조폭을 회사 직원처럼 묘사해도 되겠다 싶었고, 인물들의 의상 컨셉을 ‘하이(high)’로 잡은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보호자>는 인간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고, 수혁이라는 남자가 평범하게 살기 위한 삶을 선택하고, 본인도 몰랐던 딸의 존재도 알게 되고, 그러면서 아빠가 될 수 있는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진보하지 않나. 이런 성격의 이야기에서 조폭들의 룩이 더 고급스럽거나 멋지거나 누군가가 매력을 느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성준이나 응국은 만나면 불쾌하고, 그래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이어야 했다. 박성웅씨 헤어 스타일 보라, 처음에는 어떻게 하지
김성훈
정우성 배우와 함께 작업한 건 <헌트> <인랑> <강철비> <아수라> <더 킹> <감시자들> 등 정말 많지 않나. 배우와 의상감독으로서 함께 작업했던 것과, 감독과 의상감독으로 함께 일해보니 어떤 점에서 다르던가.
조상경
<아수라>에서 정우성이라는 배우는 외모 때문에 연기력이 평가 절하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아수라>의 첫 컷을 매우 좋아한다. “하, 인간들이 싫어요”라는 대사로 시작하는 내레이션이 지나면 도경(정우성)이 휴대폰을 보면서 웃는 장면. <아수라>는 시나리오보다 훨씬 더 잘 나온 영화다. 김성수 감독님께서 수정을 많이 하셨고, 그래서 편집본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아수라> 얘기를 하는 이유가, <아수라> 때 우성씨의 연기가 너무 좋았고, 첫 컷부터 눈에 딱 들어왔고, 휴대폰을 보는 뒷모습도 너무 좋았다. 저는 뒷모습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뒷모습이 그림자가 되고, 그게 배우를 신뢰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수라>를 할 때 우성씨가 처음으로 저한테 전화를 했다. 사실 배우 대부분 의상을 주는대로 입는다. 우성씨도 <더킹> <강철비> 때 제안드렸던 의상들을 잘 받아주셨으니까. 낯가림이 다소 심했던 배우가 (이)정재씨였는데, 정재씨의 경우 <신세계>때 처음 만나면서 정우성, 이정재 두 배우를 모두 만난 거다. 낯가림이 심했는데도 의상 얘기도 나누고, 시나리오 얘기도 했던 정재씨와 달리 우성씨하고는 대화가 거의 없었다가 <아수라>때 연락을 먼저 해왔다. 통화 내용이 우성씨가 아는 빈티지 숍 사장님이 있는데 소개해줄까요? 였다. 너무 귀엽잖아. (웃음) 그때는 우성씨가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가 좀 궁금했었던 것 같다. <보호자>하기 전에도 먼저 전화가 와서 얘기를 나누게 된 거다. <보호자>는 코로나19 때 촬영을 한 뒤 팬데믹 때문에 한참 뒤에 개봉을 하게 되어 아쉽다. (정)우성씨가 매우 속상해했을 것 같다. 프로덕션도 너무 힘들게 했고. 어쨌거나 배우와 의상감독으로 일하다가 우성씨도, 정재씨도 그들의 장편 연출 데뷔작에 불러주어서 다행이고 감사하다. 다만, 두 배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연기와 모습을 큰 스크린에서 만나고 싶고, 그게 훨씬 더 즐거운 것 같다. 그들이 제작자로서 연출자로서 도전을 하고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배우를 그냥 화면에서 보고 싶은 마음도 크니까.
김성훈
<보호자>는 감독이 전형적인 범죄 소재의 영화의 법칙대로 만들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을 과감하게, 또 자유롭게 시도한 흔적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품이다.
조상경
주변에서 들었던 얘기인데, 어떤 프로듀서가 <보호자>는 희한한 영화라는 거다.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물었더니 그 프로듀서가 하는 얘기가 영화가 너무 좋았다고 하더라. 이 영화는 전형적인 상업영화의 잣대로 볼 수 없는 영화라고 해서 우성씨의 진심이 통했나 싶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