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랜드>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가족의 탄생> <만추> 등을 연출한 김태용 감독의 신작이다. 이 영화는 죽은 사람, 내지는 죽음에 준하는 상태에 놓인 환자들을 인공지능(AI)로 복원해서 가족, 친구, 연인과 연결해주는 ‘원더랜드’ 서비스를 다룬 SF물이다. 함현주 의상감독은 탕웨이, 수지, 박보검, 정유미, 최우식 등 영화 속 다양한 인물들의 의상을 서사에 맞게 빚어냈다. 영화가 SF물이지만, 보편적인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도 그의 섬세한 의상 설계 덕분이리라.
김성훈
<원더랜드>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이야기가 어땠나.
함현주
촬영을 시작하기 2, 3년 전에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다. 그때 읽었던 시나리오와 지금의 시나리오는 드라마 내용도 캐릭터 설정도 달랐지만, 그러한 변화와 무관하게 의상의 톤앤매너는 일관적이었다. SF 장르물이지만 지금의 의상 룩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함현주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이 우리 생활을 이렇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될 줄 몰랐었다. 자율 주행 차량이 도로에서 운행되고, 화성에 가는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회사도 버젓이 실제하는 데다가 사람들이 돈을 내고 미래의 화성 여행을 꿈꾸며 줄을 서는 풍경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처럼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실제 우리가 입는 의상은 시시각각으로 트렌드가 바뀌긴 하지만, 큰 변화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 우리가 상상하던 ‘스타워즈’ 속 우주시대를 대변하는 메탈릭한 사이버룩은 그저 1970, 80년대가 상상했던 미래였고, 막상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지금 상상하는 미래 모습은 현재에서 조금 더 진일보한 현실 안에 있을 거라는 해석이었다. 현재 을지로 골목은 20, 30년 전 풍경을 박제한 듯 그대로 그 자리에 있고, 과거 동대문운동장은 지금 DDP라는, 기존 건물의 틀을 깬 건물이 도시 중앙에 등장하는 등 과거와 현재가 한 도시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이처럼 가까운 미래에도 변화하지 않고 과거를 박제한 공간(자장면 집, 자장면 집 골목)과 상대적으로 기술적인 발전의 상징이 된 공간(원더랜드 회사)이 공존할 거라고 해석했다.
김성훈
이 영화는 ‘바이리-딸 지아’, ‘정인-태주’ 그리고 원더랜드 서비스를 운영하는 해리와 현수, 크게 세 가지 플롯이 교차로 진행되는 서사다. 특히, 바이리와 태주는 원더랜드 속에서 고고학자, 우주인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원더랜드 속 인물이 입은 의상은 캐주얼하고, 편안하며, 꽤 현실적인 컨셉으로 설계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인물들의 의상을 설계할 때 어떤 고민을 했나.
함현주
<원더랜드>는 생경하고 새로운 의상 컨셉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시대물이든 현대물이든 미래 이야기든 시대적 배경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인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캐릭터의 비주얼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비주얼의 연장선이어야 관객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성훈
박보검씨가 연기한 태주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원더랜드 세 가지 시공간 모두 등장하는 캐릭터다. 각기 다른 세 시공간 속 인물을 구분하기 위해 각기 다른 톤의 의상을 설계하신 것 같다.
함현주
박보검 배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이라서 의상감독으로서 작업하는데 정말 유리했다. 우주선 안의 태주는 설정상 매체나 뉴스를 통해 익숙한 우주복의 룩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 관객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공감할만한 우주인 룩을 보여주고자 했다. 과거 속 태주는 정인(수지)과 마찬가지로 스튜어디스 유니폼이 주였다. 그리고 현재 태주는 트레이닝 팬츠, 후드짚업 혹은 무지 티셔츠로 설계했다. 세 시공간 속 태주 모두 태주이다. 정인의 시점에서 세 사람 모두 회상에서 등장하는 태주가 아닐 수도 있다. 과거 속 태주와 원더랜드 속 태주는 설정이 정확했고, 이후 깨어난 태주는 실내복 차림의 티셔츠만 간단하게 입는 설정이다. 엉뚱한 행동만 하는 태주는 정인이 기다리던 그 태주의 모습과 가장 거리가 멀고 누추하게 보이는 게 중요했다(그럼에도 박보검 배우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졌다! 최고!).
김성훈
원더랜드 속 바이리가 입은 의상은 해외로 간 고고학자라는 설정이기 때문일까, 꽤 이국적인 톤이 인상적이었다.
함현주
원더랜드속 바이리는 설정이 마지막 순간까지 정해지지 않았다. 바이리가 간 해외가 내 기억으로는 인도네시아의 밀림이기도 했다가 어디 다른 나라이기도 했다가 결국 코로나19 상황에서 촬영이 가능한 해외 컨디션에 맞춰서 사막 지형의 어느 나라 정도로 설정했다. 한국에서 거리, 사막의 막사 등 일부 세트를 만들어 인물을 촬영한 뒤 해외에서 배경을 촬영해 후반작업에서 합성하는 공정을 거쳐 구현됐다. 아마도 코로나19 상황이 아니라 현지 해외촬영이 가능했다면 지역색이 강한 에스닉한 의상을 지금처럼 강하게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한국에서 만들어서 찍는 해외라는 강박이 있어서 사막 느낌이나 아랍 느낌이 나는 전통적인 스카프나 다른 출연자들은 철저히 아랍 국가들의 전통 복식으로 많이 구성했다. 촬영 컨디션에 맞춘 무난한 설정이었다.
김성훈
해리와 현수는 업무 공간에선 정장 차림, 밖 공간에선 일상적인 캐주얼한 회사원 복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원더랜드 서비스 종사자인 이 둘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나
함현주
현수와 해리는 캐주얼한 워크웨어룩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기술과 인간 사이의 통역사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엔지니어적인 측면도 있지만 고객을 취재하고 그들의 상실한 가족들과 연인의 캐릭터를 의뢰자의 기억을 통해 구현해내면서도, 생전에 상실한 가족이 충족해주지 못한 캐릭터의 요소도 덧붙여서 의뢰자의 판타지를 어느 정도는 충족해 주어야 하는 창의성도 있어야 하는 직업이기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영화 캐릭터 만드는 일과 비숫한 직업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접근했다. 미래 사회에서 가장 하이테크놀로지의 엔지니어지만, 기능사로써보다는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이여야만하는 캐릭터를 자유롭고 현장감이 느껴지는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는 캐릭터 창조자의 이미지에서 출발했다. 캐주얼한 워크웨어컨셉으로 구현이 되었던 것도 그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