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100선은 어떻게 선정되었는가?
한국영화 100선 선정위원 구성 과정과 추천 기준 등 한국영화 100선이 어떻게 선정되었는지 알 수 있고 작품의 시대별, 감독별, 배우별 분포현황을 살펴 볼 수 있다.
한국영화 100선 1위~9위작 포스터 전시
100선은 순위를 공개하지 않은 채 발표하기로 했으나 역사적인 참고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상위 9위까지 작품을 공개하기로 했다. 동률 작품을 포함하여 총 12편이며 이중 유실된 포스터 《하녀〉(김기영, '60)를 제외하고 11편이 전시되었다.
일제강점기~1950년대 - 해방과 전쟁, 그리고 한국영화 부흥의 시작
나운규의 《아리랑》(1926)을 비롯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극영화는 150편 내외에 달한다.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 짧은 무성영화의 전성기를 거친 이후 발성영화로 전환되던 1930년대 중후반, 일본의 급속한 군국주의화로 조선의 많은 영화들은 일제 지배의 정책적 도구가 된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여전히 미미한 상태에 있던 한국영화산업은 종전 후 1950년대 중후반 전후 대표적 대중매체로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1960년대 - 혁명과 함께 시작한 60년대, 그리고 한국 영화의 전성기
50년대의 부흥기는 60년대의 황금시대로 이어진다. 60년대 초 《하녀》,《오발탄》과 같은 걸작들, 신상옥, 김기영, 유현목, 이만희, 김수용 등의 한국영화 거장들이 대표작을 발표했다. 새로운 경향의 장르영화들이 탄생했고, 1969년에 이 제작편수가 200편을 넘어서고 국민 1인당 평균 관람 횟수가 5회를 상회하는 등 1960년대는 영화산업의 전성기였다.
1970~80년대 - TV 보급과 영화산업의 몰락
전성기를 구가하던 한국영화는 TV의 빠른 보급과 정부의 검열 강화로 1970년대 초 이후 빠르게 쇠퇴했고, 쇠퇴기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1970년대 청년문화를 이끌었던 하길종, 이장호, 김호선 등이 등장했고, 그 뒤를 배창호가 이었으며, 1980년대 초중반 임권택과 이두용이 세계영화제에 진출했다. 1980년대 후반 등장한 박광수, 정지영, 장선우, 이명세등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들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었다.
1990년대 - 새로운 시대, 새로운 영화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진출했다. 충무로는 빠르게 합리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젊은 영화인들이 세대교체를 주도했다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들의 영화와 함께 상업적으로 잘 만들어진 기획영화가 등장했고, 이는 1990년대 후반 《쉬리》와 〈공동경비구역JSA〉의 대형 흥행으로 이어진다.
2000년대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통장과 글로벌 한국영화
멀티플렉스의 등장과 관객수의 확대, 《쉬리》 이후 한국영화 점유율이 50%를 넘어서는 등 2000년대 한국영화계는 1960년대 이후 다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초, 홍상수, 박찬욱, 이창동, 봉준호, 김기덕, 류승완, 장준환 등 현재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한국영화의 위상을 높였으며 2014년 현재까지도 한국영화는 여전히 그 전성기의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영화 100선 명대사 명장면
주옥같은 한국영화의 명장면을 감상하고 《박하사탕》 주인공과 함께 찍은 사진속 빈 말풍선에 나만의 명대사를 직접 넣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