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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 감독 방은진
  • 각본 윤진호
  • 소품팀장 이정은
  • 소품팀 서민정, 오진호
  • 출연 전도연, 고수, 류태호, 배성우, 강지우, 조안나 쿠릭, 코린느 마시에로, 이동휘
  • 제작사 CJ 엔터테인먼트,㈜다세포클럽
사랑하는 남편과 딸이 세상 전부인 평범한 아내. 여권에 처음 도장이 찍히던 날, 그녀는 프랑스에서 마약범으로 몰려 교도소에 수감된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22시간, 대서양 건너 12,400km 지구 반대편 프랑스 외딴 섬 마르티니크 교도소. 말도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곳. 한 편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세상 전부인 평범한 남편. 그는 친구의 배신으로 집과 어렵사리 마련한 가게 그리고 아내마저 잃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이아나에서 프랑스로 원석을 운반한 아내. 그러나 그것은 마약이었다. 아내는 집으로 돌아올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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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진 감독, <집으로 가는 길>의 추억을 더듬다
1년 전 이맘때였다. 대낮부터 눈이 폴폴 내리던 어느 날, 방은진 감독은 경복궁역 근처 카페에서 영화 '집으로 가는 길'(2013)의 개봉 전 언론 인터뷰에 나섰다. ‘오로라 공주’(2005)와 '용의자 X'(2012)에 이어 세 번째 장편영화를 선보인 터라 명실공이 기성 감독의 입지를 다지던 시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배우 출신의 여성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장편 세 편을 만들어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언론은 그의 행보를 주목했다. 게다가 30대 한국인 주부가 마약 운반책으로 검거돼 프랑스의 외딴 섬 마르티니크 교도소에서 2년여 간 수감된 충격적인 실화, 2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전도연의 명연기, 프랑스와 도미니카 공화국을 넘나드는 방대한 로케이션 스토리까지, ‘집으로 가는 길’은 유독 화제가 많았던 작품이었다. 세간의 이목이 방은진 감독을 향해 잔뜩 기대를 품고 있었다.
벌써 1년
그 후 1년이 훌쩍 지났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휩쓸던 날, 방은진 감독은 ‘집으로 가는 길’을 다시 꺼내들고 인터뷰에 나섰다. 저녁에는 재개봉한 ‘피아노 The Piano’(1993)의 제인 캠피온(Jane Campion) 감독에 관한 GV가 기다리고 있었고 조만간 해외출장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집으로 가는 길’ 이후 일 년은 바쁜 일정의 연속이었다. “연초에는 ‘집으로 가는 길’이 한창 상영 중이었고 서울환경영화제와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등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영화제에 참석했죠. 거긴 꼭 들여다봐야 하는 곳이니까요. 또 책을 한 권 썼어요. 3월부터 5월까지인가? 한 석 달을 매달렸나봐요. 나랑 십 년을 같이 산 골든 리트리버에 대한 라이프 에세이죠. 사람과 동물을 통틀어서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살아본 상대가 없는데, 이 친구가 지금 굉장히 아파요. 14살인데 나이 때문에 지금은 거의 안 보이고 안 들리고 간 경변에다 디스크 사이에 뼈가 자라서 뒷다리도 못쓰고 있어요. 지금은 그냥 내가 열심히 모시고 있죠(웃음). 그런데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요. 그런데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해도 준비가 되질 않아요. 아마 이 친구는 다음 생에 꼭 사람으로 태어날 거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같이 배웠던 것, 나눴던 것, 그리고 반려견을 통해 느꼈던 이야기들이 기다림이라는 테마로 엮여 곧 출판을 앞두고 있다. “처음에는 애견인 필독서를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 책은 잘 안 팔린다나?”하고 너스레를 떨다가도 몸이 성치 않은 반려견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떨군다. “올해는 암중모색의 시기였어요. 뭔가 많이 왔다 갔다 한 것 같고 시나리오도 많이 받고 사람도 많이 만났죠. 그런데 에세이를 쓰게 되면서 인생을 많이 돌아본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인생의 반 이상이 훌쩍 넘어서 쓰게 된 거니까. 영화를 계속 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죠. 그래도 역작은 한 편 내야하지 않을까. 요즘엔 너무 능력 있는 감독들이 많이 나오니까, 어떻게 하면 길을 잘 비켜줄까 생각도 들고요.”


만감이 교차하는 방은진 감독에게 ‘집으로 가는 길’에 대해 다시 물었다. 여러모로 그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작품이었을 테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영화를 다시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배우들은 자기가 출연한 영화의 시사회도 못 보겠다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게 굉장히 낯선 경험이에요. 감독도 마찬가지죠. 지금 보이는 화면에는 없지만 화면 저 깊은 곳에 있는 내가 보이거든요. 프레임 바깥의 상황들이 다 같이 펼쳐지니까 영화가 영화로만 보이지가 않아요. 그래서 이 영화를 되새겨보는 일도 좀 더 시간이 흐르면 해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 영화에서 무엇을 다시 발견하게 될지, 지금은 의문으로 남기고 싶어요. 오늘 ‘피아노’ 재개봉 기념 GV로 제인 캠피온 감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한 편 봤는데, 거기서 ‘피아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나도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내 영화에 대해 굉장히 객관적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또 순간순간 놀라웠던 일들에 대해서도 좀 더 편안하게 말할 수 있겠죠.” 지금은 ‘집으로 가는 길’이 얼마만큼의 평가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방은진 감독의 말에 수긍이 간다. 바로 지난달에 열렸던 제5회 천안여성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개막작으로 상영됐기 때문이다. 개봉이 한참 지난 이후에 각종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집으로 가는 길’은 어찌보면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인 영화일 수도 있다. “사실 개봉 당시에는 기대처럼 관객이 많이 들지 않았어요. 지인 중 어떤 분은 영화가 너무 힘들어서 감당이 안 될 것 같다며 못 보겠다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하지만 천안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될 때 객석을 보면 몇 백 명씩 꽉꽉 차거든요. 그래서인지 지금은 이 영화가 어떤 경계에 있는 듯한 느낌이에요. 과연 시간이 지나서도 사람들이 찾아볼 수 있는 영화가 될지 안 될지는, 일단 시간이 자나봐야 알겠죠.”
지도 위에 그려진 집으로 가는 머나먼 여정
“평범한 여자의 이야기에 끌렸어요. 더불어 주인공인 송정연(전도연 분) 뿐 아니라 그의 남편과 아이까지 한 가족이 겪게 되는 이야기에 끌린 거죠. 만약 나나 내 주변 누군가에게도 벌어질 수 있었던 이야기라는 것, 아직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에 저 스스로 공감했어요. 이 이야기는 객관적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리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도 영화는 허구를 가미하기 마련이지만 정말 불과 얼마 전에 벌어졌던 사건이라는 게 충격적인거죠.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이 영화에 담겨있어요.” 1년 전 인터뷰에서 방은진 감독은 ‘집으로 가는 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머나먼 이국땅에서 재판도 없이 범죄자로 낙인찍힌 보통의 여자 송정연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작은 인형 하나 가지길 소원하는 어린 딸과 마냥 사람만 좋은 남편을 바라보며 생활고에 고심하던 정연은 급기야 밀수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정연이 운반하려던 물건이 마약인 것이 밝혀지면서 졸지에 정연은 마약 운반책으로 낙인찍혀 즉시 수감되고 만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스물두 시간, 대서양 건너 12,400km에 위치한 프랑스의 외딴섬 마르티니크 교도소가 그 곳이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곳에서 심지어 한국대사관마저 외면한 그녀는 재판 일정마저 기약하지 못한 채 집으로 가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을 벌이게 된다.


방은진 감독이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한 프랑스어판 세계지도는 주인공 정연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소품이다. 마르티니크 교도소에서 출감 후 보호감찰을 받게 된 정연은 정부에서 내준 누추한 쪽방의 문을 열고 들어와 맨 처음 이 지도를 벽에 붙인다. 영화 속에서는 생략됐지만, 사실 이 세계지도는 정연이 처음 만나게 된 보호감찰관의 사무실 벽에 붙어있는 것을 얻어온 것이다. 한국에서 마르티니크까지, 그 어마어마한 거리를 손가락으로 어림하면서 정연은 막막한 거리감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감옥에 있을 때 남편에게 전화를 받고 나면 벌써 영화 속에서는 5~6개월이 흐르죠. 그러고 나서 겨우겨우 감옥에서 나와 보호감찰 아파트로 들어가는데, 감옥에서는 먹여주고 재워주기나 하지 여기서는 먹을 것도 스스로 해결해야 해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아파트를 떠나선 안 된다는 등의 규율도 엄격하고 남편에게 연락하기도 더 갑갑해지는 상황이에요. 점점 더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그 까마득한 거리감을 느끼게 되요.”


여러 가지 프랑스어 버전의 세계지도 가운데서 미술감독과 심혈을 기울인 끝에 결정한 이 세계지도에는 두 개의 버전이 있다. 하나는 미술감독이 볼펜으로 서울과 마르티니크 섬을 길게 줄쳐둔 것, 그리고 하나는 볼펜자국 없이 깨끗한 것이다. “세계지도는 2D잖아요. 그래서 지구 반대편이라는 느낌이 명확하게 들지 않는다는 생각도 했어요. 지구본이 있었더라면 정말로 정연이 지구 반대편에 있다는 것이 훨씬 더 잘 드러났겠지만 지구본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너무 쌩뚱맞고요(웃음). 마침 너무 마음에 드는 세계지도를 발견해서 결정하게 됐죠. 이 장면을 찍을 때 약간 헤매는 듯 짚어달라고 주문했어요. 서울에서 파리는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파리에서 마르티니크를 그렇게 쉽게 찾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세계지도로 보는 세계는 너무 작은 것 같기도 하고 훌쩍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그 엄청난 거리감이 새삼스럽기도 한 느낌을 받게 되죠.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요. 정연의 복잡한 생각들이 그 장면 안에 농축되어 있는 셈이에요.” 이 세계지도는 방은진 감독이 ‘집으로 가는 길’의 슬레이트와 함께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영화 소품이기도 하다. “색깔이나 크기 같은 것들이 너무 압도적이지 않게, 또 그 공간에 맞아야 했는데, 미술감독이 이 지도를 가지고 왔죠. 너무 예쁘다고, 잘 뽑았다고 칭찬했더니 촬영이 끝나면 드릴게요, 하는 거에요. 포스터 촬영할 때도 이 지도를 쓴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이거 잘 챙겨서 다시 나한테 줘야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다른 하나는 언젠가 내 사무실을 꾸릴 때 액자로 잘 만들어서 걸려고 가지고 있고요."
세계지도 속의 로케이션 비하인드
세계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집으로 가는 길’의 고된 로케이션 뒷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게 됐다. 프랑스 오를리 공항과 도미니카 공화국에 위치한 실제 교도소에서 진행된 촬영은 개봉 당시에도 많은 화제를 낳았다. 특히 실제 사건이 벌어진 오를리 공항에서의 촬영을 위해 로케이션 준비에만 1년 반을 투자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오를리 공항에서 주어진 12시간 동안 낯선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정연의 불안한 표정과 사건의 시작을 모두 담아내야 했다. “공항은 정말 지긋지긋해요(웃음).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사건이 벌어진 오를리 공항에서 꼭 찍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고집을 부렸어요. 사실 프랑스에서 촬영을 하려면 예산이 4.5배 정도 더 드는 상황이었는데 라트비아 공항 등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고 나서기도 했거든요. 그렇지만 정연이 아예 못 알아보고 듣는, 프랑스어 간판이 즐비한 풍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무리했지만 시도를 했고, 물론 시간적인 제약이 있어서 힘들었어요. 특히 세관 장면을 찍지 못한 게 아쉬워요. 동선까지 다 잡아뒀는데 불가 통보를 받았거든요. 정연이 여권을 보여주고 나올 때 세관이 흘깃 쳐다보고 전화를 걸면 누군가 와서 딱 잡는 장면이었는데, 그걸 원래는 세관이 해야하지만 경찰이 잡는 걸로 변경했죠. 또 비행기에서 트렁크들이 내려와서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도는 걸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허락이 안 떨어져서 못 찍었고요. 하지만 그들이 허용해주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을 찍어냈다고 생각해요. 또 오를리 공항을 선택한 것도 후회는 없어요.” 배우들은 점심도 못 먹고 열두 시간을 공항 안에서 꼬박 자리를 잡고 촬영에 임해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실화가 된 사건과 정연의 심리에 사실성을 부과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이해해줬다고 한다. “막판에는 한 2, 3분만 더 있으면 되는데 촬영을 막는 바람에 전도연 씨가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고요.(웃음)”


공항 촬영분 가운데서 정연의 여권에 도장이 찍히는 장면에는 또 다른 숨은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여권에 도장을 쾅 내리찍는 손은 연출부 중 한 명의 것인데, 촬영 시간상의 문제로 한국에서 따로 촬영해야만 했던 것이다. 더불어 구식 여권을 재현하는데도 손이 많이 갔다고 한다. “미술감독이 ‘집으로 가는 길’ 소품 중에서 옛날 여권 만드는 게 제일 어려웠다고 하더라고요. 2004년에 벌어진 사건이라 당시의 여권을 재현해야 했는데, 이 여권이 두 번인가 바뀐 디자인이거든요. 다행히 미술감독이 옛날 여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게 샘플이 있다고 그대로 제작이 되는 물건인가요? 또 함부로 제작할 수 없는 물건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종이 질감하며 두께하며, 어찌 보면 세계지도보다 손이 더 많이 가는 소품이었죠. 촬영할 때도 애먹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스탬프는 한 번 찍으면 끝이잖아요. 그걸 하는 연출부 스태프가 얼마나 떨렸겠어요. 그런 와중에 익숙하게 쾅! 찍어야 했으니 손은 사시나무 떨 듯이 떨리고(웃음).”


정연이 극한 고통 끝에 마주하게 되는 카리브 해의 푸른 바다도 영화 속에서 인상적으로 남는 장면이다. 무자비한 교도소장에게 강간의 위협까지 당하게 되는 상황에서 정연은 목숨을 걸고 도망쳐 산기슭을 헤매다 절경의 해변에 다다르게 된다. 도무지 긍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이 그녀를 압도한다. “가장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그 바다를 보게 하고 싶었어요. 절망도 주지만 동시에 힘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곳에서 정연이 느끼는 감정은 복잡해요. 지금 수갑을 차고 있고 범법자로 살고 있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자연에는 경도되죠. 또 바다가 거대한 물로 만들어진 벽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요. 그러나 그 한 순간의 아름다움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더욱더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를 찾아내야 했다. 제작팀은 카리브 해변가에 위치한 열한 개의 섬나라 가운데 가장 비현실적인 공간을 가까스로 찾아냈다.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낼 야자수는 기본이고, 물빛과 햇빛마저 태초의 그것처럼 다른 색이어야 했다. “그런데 마침 그런 곳이 정말 있더라고요. 모래가 너무 맑고 고왔던 기억이 나요. 또 수평선이 쭉 연결되어 보인 덕분에 지구는 둥글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들더군요. 지구는 둥그니까 언젠가 집에 갈 수 있을 거다, 뭐 그런 의미도 줄 수 있었죠(웃음). 이런 여러 가지 조합이 정연으로 하여금 다시 독방에 쳐 박히더라도 살고자 하는 의지를 만들어 줄 거라고 봤죠.”


도미니카 공화국에 위치한 나야요 교도소에서 촬영된 장면들도 세심한 연출이 필요했다. 실제 수감자들과 교도관들이 엑스트라로 출연하고 그들이 생활하는 교도소 내부가 배경으로 사용돼 더할나위 없이 사실적인 조건이 충족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술팀과 감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독방에 있는 매트리스까지도 우리가 다 만들었죠. 이런 색감, 이런 무늬, 이런 크기까지도 결정해서 또 공간이 정해지는 것에 따라 바꿔야 했어요. 특히 정연이 감옥에 있는 동안 쓰게 되는 매트리스는 한국에 와서 남은 촬영분을 찍는 동안 또 써야 하기 때문에 미리 준비한 소품이에요. 이 뿐이겠어요? 정연의 딸 혜린이가 그린 그림은 어떻고요. 이 아이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더라는 걸 미리 알고 미완성본 몇 개를 준비해요. NG가 나면 거기서부터 다시 그려야 하니까, 엄마만 안 그린 그림만 몇 개가 되는 거죠. 정연의 일기는 또 어떻고요. 자세히 보면 글씨체가 조금씩 달라요. 미술부가 돌아가면서 열심히 쓰는 거죠.”
방은진의 영화, 그리고 소품
그러고 보니 방은진 감독의 전작들도 모두 소품이 중요한 영화였다. 데뷔작인 ‘오로라 공주’에서는 오로라 공주 스티커가 그랬다. 연쇄살인마 정순정(엄정화 분)이 잔혹한 살인 현장에서 부러 힌트를 주듯이 흩뿌리고 떠나는 오로라 공주 스티커는 이 영화의 숨은 진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소품이다. 오로라 공주 스티커에도 남다른 사연이 있다. “오로라 공주가 원래 애니메이션 ‘별나라 손오공과 오로라 공주’의 그것인데, 그 캐릭터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쓸 수가 없었어요. 로열티 문제죠. 그래서 오로라 공주와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여주인공 메텔을 섞어서 새로운 캐릭터를 그렸어요. 이지현이라는 화가의 작품인데, 내 포즈와 표정 등에서 힌트를 얻어서 만들었어요.”


두 번째 영화 ’용의자 X'까지 잇달아 범죄 스릴러를 연출한 탓에 그의 영화 속 중요한 소품들은 언제나 사건의 단서가 되는 것들이었다. ‘용의자 X'에서는 소품이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 뿐 아니라 캐릭터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독한 삶을 홀로 꾸리고 있는 수학교사 석고(류승범 분)는 짝사랑하던 옆집 여인 화선(이요원 분)의 우발적인 살인을 덮어주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모든 일에 철두철미하고 본능적이고 정확한 수학적 계산에 능하면서도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이 고독한 남자를 관객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관건이었다. 때문에 석고를 둘러싼 모든 소품들이 그를 말해주는 것이어야 했다. “이 작품에서는 하다못해 이 사람이 어떤 커피를 마시느냐, 잔은 뭘 쓰느냐 까지 의미가 있었으니까요. 처음에는 미술감독이 욕심을 부렸는지, 석고의 집을 너무 고급스럽게 꾸며내서 여러 번 바꾸기도 했어요. 사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집안 이곳저곳에 써둔 수식 같은 것이었어요. 또 석고의 집에 걸어둔 심해의 바다사진이 기억에 남네요. 살인사건을 쫓는 수사관 민범(조진웅 분)이 석고의 집에 찾아와 대화를 하는데, 석고의 뒤에 그 사진이 걸리게 두었죠. 또 화선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도 어떤 색깔, 어떤 디자인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한 것 중에서 가장 가까운 것을 협찬사 제품에서 고르기도 했고요. 인물의 정서와 생활습관이 소품과 얼마나 맞아떨어질 것인지를 프로덕션 디자인과 함께 고민하는 거죠.”


그토록 세심한 의도와 계산을 집중해 제작하는 것이지만 방은진 감독은 자신의 영화 소품들을 일일이 간직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오로라 공주’도 ‘용의자 X'도, 가지고 있는 것은 DVD와 포스터, 보도자료 등 뿐이다. 영화 속에 이미 다 나와 있으니 그걸 굳이 보관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영화 소품들은 투자사나 제작사가 가지고 가지만 대부분은 유실된다고 봐야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영상자료원 같은 곳에서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죠. 한국영상자료원에는 ’오로라 공주‘ 필름은 물론이고 내가 만든 단편영화들도 다 가지고 있거든요. 물론 나한테도 필름이 있지만 언제 그걸 한번이라도 꺼내보겠어요. 사실 필름은 여는 순간 다시 상영을 할 수 없으니까, 잘 보관하는 것뿐이죠.”


방은진 감독은 내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코미디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 감독 방은진이 스릴러, 미스터리에 이어 신파와 코미디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슈퍼초딩 김을분’이라는 가제로 한창 작업에 가속도가 붙은 이 작품은 내년 봄에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올 한해, 우리 모두가 너무 마음이 무겁고 심란했잖아요. 위로를 좀 해주고 싶더라고요.” ‘집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모두의 머리 위에 날리는 눈꽃이 창가로 조금 비쳤다.
글 : 송순진(영화저널리스트) | 사진 : 이준구(포토그래퍼)

내가 생각하는 영화 속 최고의 소품
1
스타워즈 Star Wars (1977)
감독_조지 루카스
출연_마크 해밀, 해리슨 포드, 캐리 피셔
지금 젊은이들은 ‘스타워즈’가 뭔지도 모른다고 한다는데(웃음). 저한테는 아직도 다스베이더의 검이 사운드와 함께 기억 속에 남아있어요. ‘스타워즈’를 너무 좋아하는 팬이거든요. 사이언스 픽션 중에서는 ‘스타워즈’와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빼놓을 수 없죠.
2
아웃 오브 아프리카 Out Of Africa (1985)
감독_시드니 폴락
출연_로버트 레드포드, 메릴 스트립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등장하는 턴테이블이 기억에 남네요. 서사를 함께 말해주는 소품은 언제나 중요하죠.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고요.
3
피아노 The Piano (1993)
감독_제인 캠피온
출연_홀리 헌터, 하비 카이틀, 샘 닐, 안나 파킨
‘피아노’ 재개봉 GV를 위해 어제 영화를 다시 봤는데, 주인공 에이다(홀리 헌터 분)의 페티코트가 인상에 남아요. 또 하비 카이틀의 문신도요. 감독이 되기 전에 ‘피아노’란 영화를 봤는데 그게 칸에서 여성 감독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작품이잖아요. 지금도 ‘제로다크서티’의 캐서린 비글로우 같은 감독이 있지만 여성 감독의 명작이기 때문에 더 마음이 가는 것 같아요.
4
살인의 추억 Memories Of Murder (2003)
감독_봉준호
출연_송강호, 김상경, 박해일
미술감독들이 대단하다는 걸 많이 느껴요. 한 프레임을 책임지는 게 감독이자 미술감독의 역할이죠.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 류성희 미술감독이 일일이 과자 상자며 엽서 등을 만들었다고 해요. ”어떤 종이로 할까요? 무슨 사이즈로 할까요? 색지를 붙일까요? 말까요? 사인펜으로 쓸까요?“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감독과 상의해가면서 준비한 거죠.
5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2008)
감독_스티븐 달드리
출연_케이트 윈슬렛, 레이프 파인즈, 다비드 크로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한나(케이트 윈슬렛 분)가 항상 입고 다니는 코트가 있어요. 그 컬러감과 또 목도리와의 조합이 인상적이었죠. 스토리텔링을 위해서 중요한 소품이 있는가 하면, 아마 저건 분명히 배우가 설정했을 거라고 생각되는 소품들이 있잖아요. 그런 소품들이 눈에 많이 남는 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