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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
하늘의 황금마차 (Golden Chariot in the Sky, 2014)
감독
오멸
각본
오멸
소품팀
강지윤, 장정인
출연
문석범, 김동호, 양정원, 이경준, 최철욱, 오정석, 서재하, 이석율
제작사
국가인권위원회,자파리필름

음악으로 성공하리라는 꿈을 품은 뽕똘은 동네 백수 동생들을 모아 밴드를 결성한다. 낡은 주황색 수레를 주워 거창한 의미부여를 하고는 밴드의 이름을 ‘황금마차’라 짓는다. 밴드 활동비가 없는 뽕똘은 아버지 유산을 기대하며 몇 년 만에 큰 형을 찾아간다. 자신과 여행을 가는 세 동생 중 한 명에게 유산을 주겠다는 말기 암, 치매 환자 큰 형의 제안. 만나면 싸우는 뽕똘의 오합지졸 황금마차 밴드 멤버들도 팀워크를 다지는 유랑 여행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치매 환자 큰 형이 사라지고 제주 일대를 뒤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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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를 말한다

<어이그 저 귓것>부터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 까지, 오멸의 영화를 읽는 세 가지 이름

오멸의 데뷔작 ‘어이그 저 귓것’(2009)은 한국영화의 해독제에 해당한다. 이미 그즈음 한국영화계는 표준적인 장르의 외향을 지닌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중의 기호에 따라 제작된, 극도로 상업적인 영화가 줄지어 양산될 터였다. 영화가 아닌 공산품을 보고 있다는 피로감은 상업영화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중적인 영향력은 미미하다고 치더라도 다른 한쪽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 영화를 해치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또한 힘들다. 예를 들어 감독의 예술적 자의식만 넘쳐나는 영화, 사회적 메시지가 영화의 본질을 잡아먹은 영화는 관객으로서의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들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본 ‘어이그 저 귓것’의 청량감은 ‘대단했다’. 단지 무공해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순수한 이야기여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오멸의 데뷔작은 위에 언급한 한국영화의 곪아 터진 문제점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영화였다. 인물과 공간과 이야기는 어떤 상업적인 손길로부터도 자유로웠고, 오멸의 신선한 시도는 더러운 때가 묻은 한국영화를 정화하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나온 인물이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냥 그렇게 담은 영화는 문자 그대로 ‘자연’이었다.

‘어이그 저 귓것’의 동네잔치 장면이 오멸 영화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술을 먹고 싶은 세 한량은 옷을 차려입고 이웃 마을의 잔치를 보러 간다. 따로 앉은 그들은 장기를 둔다. 비가 올 기미가 보이자 용필이 먼저 자리를 뜬다. 귀가한 용필은 창가에 앉아 비를 노래한다. 술 취한 하르방은 나무 아래 누워 잠을 자다 피에 흠뻑 젖어서야 일어난다. 비틀거리며 돌아오던 뽕똘은 길가에 오줌을 누다 지나가던 차를 피하지 못해 물을 뒤집어쓴다. 그들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필은 계속 노래한다. 이 장면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설명할 길은 없다. 그러므로 불가사의한 장면이라고 말할 밖에. 이렇듯 오멸 영화의 장면이 주는 기묘한 감정은 영화책에 써진 대로 만든 데서 나오는 게 아니다. 자연이 그러하듯 억지로 만들 수도 없는 것이다. 자의식도 욕망도 헛된 꿈도 모두 지워진 순수의 세계, 거기에는 정말로 잡스러운 게 없다.

제주
오멸은 제주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 내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나는 오멸이 구체적으로 제주의 어떤 것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가 만든 영화를 통해 제주에 관한 어떤 것을 하나씩 알거나 느끼게 될 뿐이다. 오멸에게 제주는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다. 제주는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그 누구도 제대로 읽지 못한 땅이자 시간이자 역사이자 신화이자 인간의 이름이다. 간혹 제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육지인도 있으나, 실제로 우리가 제주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제주는 그저 머릿속에 품고 있는 관념 중 하나로 존재한다. 오멸의 영화를 통해 제주는 숨겨진 얼굴을 하나씩 드러낸다. 이어 무형에 가까웠던 제주가 유형의 성격을 지닌 존재로 복원되고, 관객은 제주라는 존재에 대해 의미를 조금씩이나마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오멸이 로컬시네마의 태도로 영화를 만드는 것 같지는 않다. 지역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로컬시네마가 변경의 영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일까, 오멸은 단지 자신이 태어나 살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곳에 대해 영화를 만들 따름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는 “내게 서울은 중요하지 않다. 나의 중심은 제주다”라고 말한다. 로컬시네마라는 화두를 꺼내기에 앞서, 그의 제주 중심적인 태도에 대해 어떤 의문을 품을 법하다. 제주를 예술의 중심에 두는 태도가 제주 밖의 것을 역으로 주변화할 수도 있다는 혐의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
오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육지와 동떨어진 공간인 제주에서도 비주류, 아웃사이더로 분류될 성 싶은 자들이다. 그러니까 오멸의 영화는 비주류 가운데 비주류의 이야기인 셈이다. 설령 그들을 중심에 모은다고 한들 다른 자들이 주변으로 밀려날 일은 없다는 이야기다. ‘어이그 저 귓것’의 첫 등장인물인 용필은 서울에서 꿈을 펼치다 실패하고 고향 제주로 내려온 가수다. 다리를 절고 목을 다친 그는 아무도 살지 않는 집으로 돌아온다. 가족은커녕 반기는 이조차 없는 용필의 초라한 신세는 오멸 영화에 나오는 인물의 한 전형이다. 용필뿐만이 아니다. ‘어이그 저 귓것’의 네 주인공은 모두 ‘바보 같은 녀석’으로 불린다. 제 어미의 무덤도 찾지 못하는 용필에게 마을 하르방이 ‘바보’라 부르고, 동네 슈퍼의 할망은 가게 담벼락에 붙어 자는 하르방에게 “바보”라 놀리며, 용필은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졸졸 따라다니는 두 놈팡이 뽕똘과 댄서김을 역시 ‘바보’라 꾸짖는다. 온통 바보가 득실거리는 이야기는 ‘뽕똘’(2009)로 여지없이 이어진다. 바뀐 게 있다면 노동하지 않는 네 남자의 이야기가 생각하지 않는 두 남자의 이야기로 변한 게 전부다. ‘뽕똘’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영화를 만드느라 스스로를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현장에서 배우가 연기할 동안, 소풍 온 학생들이 비웃듯이 대하는 자세는 그들의 궁색한 형편을 시사하고도 남는다. 끝내 배우는 창피하다는 이유로 연기하기를 멈추지 않던가. 명확한 시간과 사건을 이야기 속에 품은 ‘이어도’(2011)와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이하 ‘지슬’)의 주인공들도 무명의 존재에서 탈피하지 못한다. ‘이어도’에서 갓 태어난 아기와 홀로 집을 지키는 새댁에게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으며, 흔적도 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촌사람들로 득실대는 ‘지슬’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오멸의 영화는 버려지고 소외된 제주 사람들을 기록하는 장인가. 그가 품은 의도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그것과 비슷한 작업임에는 분명하다. 지금껏 오멸이 연속적으로 만들어온 작업을 보면서 떠오르는 이름은 ‘발자크의 인간 희극’이다. 발자크가 19세기 프랑스 사회를 자기 소설 안에서 완벽하게 구현하려 했던 것처럼, 오멸은 20세기 제주의 풍경을 영화라는 그릇에 담으려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발자크가 사회의 대표적 인물을 표본으로 삼은 것과 달리, 오멸은 비표준적인 인물로 버려진 풍경을 그린다. 그 안에서 제주의 예술이 불려 나오고, 사회가 불려 나오고, 신화가 불려 나오고, 역사가 불려 나온다.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는 알 수 없으나, 시간과 공간과 인물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는 어느 순간에 잊힌 자들의 역사가 거대한 모자이크 벽화처럼 기록되리라는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의 작업을 통해) 짐작 가능하다. 그 벽화는 오멸이 생각하는 제주의 정체성을 오롯이 반영할 것이며, 그 벽화가 형태를 갖추는 날 한국의 로컬시네마는 하나의 전범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예술
‘어이그 저 귓것’의 하르방은 젊었을 적에 예술을 한답시고 싸돌아다녔던 인물이다. 남들은 딴따라라고 놀렸겠지만 그는 소리 예술에 몸을 맡기고 살았을 터, 늙은이가 된 그에게 주어진 건 쓸쓸함과 빈곤이다. 밭 매던 아낙들의 낮참 자리에서 노래 한 곡 불러 주고 막걸리를 대접받으면 그 날은 그나마 불콰한 낯짝을 지을 수 있는 날이다. 용필도 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가수가 되려고 서울에서 세월을 보냈으나, 그의 노래와 외모는 현란한 조명과 어울리지 않았을 게다. 그는 골방에 틀어박혀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 그나마 노래 실력을 갖춘 하르방과 용필에 비해, 뽕똘은 노래를 전혀 할 줄 모른다. 그러나 뽕뽈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 용필을 계속 괴롭히며 따라다닌다. 두 사람이 실패한 예술가라면, 다른 한 사람은 실패가 불을 보듯 빤한 예술가다. 오멸은 묻는다. 중요한 것이 예술인지, 아니면 성공인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예술가는 성공한 예술가이며, 우리는 그들의 예술을 보며 저것이 성공한 자의 예술이라고 칭송한다. 예술의 본질보다 산업적인 측면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조건인 시대에 영화라는 예술은 타락이 필연일 수밖에 없다.
오멸은 두 번째 작품 ‘뽕똘’에서 다시 영화라는 예술에 대해 질문한다. 이번에는 감독으로 나선 뽕똘은 음유시인의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다. 모진 자연을 이기고 살아남고자 모두 노동에 몰두하던 중세에, 악기 하나 둘러메고 세상을 떠돌며 이야기와 노래를 전하던 음유시인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답은 하나다. 그런 운명을 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음유시인이 그러하듯, 뽕똘도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는다.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카메라도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는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수중에 있는 돈은 고작 3천원. ‘뽕똘’은 뽕똘이 극 중 ‘전설의 물고기’라는 정체불명의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영화다. 실로 놀라운 것은 ‘전설의 물고기’라는 영화가 찍는 과정만 있지 실체가 없는 영화라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테이프를 넣지 않고 돌린 카메라에 영상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뽕똘은 영화를 찍었으나 영화를 남기지 않은 이상한 감독이며, 복제의 가능성이 없는 유일한 일회성 영화는 그렇게 탄생한다. 오멸은 괘씸하고 당돌하게도 관객을 지워버릴 것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리고 자유롭게 예술을 꿈꾸는 자의 행복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연극이라는 예술에 오랫동안 몸담아온 데서 나온 흔적처럼 보인다. 한량을 기록한 가난한 예술가의 영화라는 점에서 나는 오멸의 영화를 뤽 뮐레와 알랭 기로디의 영화와 곧잘 비교해왔다. 오멸의 작품을 순서대로 보면서 생각이 바뀐 부분도 없지 않으나, 나는 여전히 그들이 영화적 동지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한량이라는 천상의 미덕을 지닌 자들과 그들을 뒤따르는 카메라가 자연 속에서 어슬렁거릴 때, 그들 셋은 하나로 묶인다. 자연은 가난한 자들의 영화를 위한 터전이다. 뮐레의 ‘밀수범들’에서 한 남자와 두 여자가 가상의 황량한 국경지대를 두고 기이한 모험을 벌일 때, 기로디의 ‘용감한 자에게 휴식은 없다’에서 잠들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소년이 시골 마을과 꿈과 현실 사이를 끊임없이 오갈 때, ‘뽕똘’의 감독과 배우들이 전설의 물고기를 쫒아 산과 바다를 정처 없이 떠돌 때, 그들의 뒤를 자연의 신이 뒤따른다. 자연의 신은 느리고 유쾌하며 자유롭다. 그리고 ‘광기의 땅’에서 또 괴상한 영화를 찍었다며 뮐레의 아내가 노 감독을 혼낼 때, 기로디의 ‘도주왕’에서 농기구 판매사원인 뚱보 남자가 실적보다 사랑을 좇을 때, ‘뽕똘’에서 뽕똘이 3000원이라는 잔고를 확인하고 쓸쓸하게 돌아갈 때, 그들의 곁엔 가난의 신이 머문다. 가난의 신은 너그럽고 착하며 순수하다. 기로디와 뮐레에게 자연이 궁극적으로 미스터리와 혼란의 배경이라면, 오멸에게 자연은 그냥 떠다는 길과 같다. 자유롭게 길을 떠나는 자는 앞에 놓인 길이 어떤 모양일지 어디로 향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오멸의 영화는 무정형이다. 모험의 길을 어디로 어떻게 떠나느냐에 따라 영화의 모습이 갖추어지기에 그의 영화에서 어떤 정해진 형식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무정형의 영화를 다르게 표현하면 변증법의 형식을 지닌 영화라 하겠다. 그의 영화에서 지속적인 정은 없으며, 오멸은 영화 전체에 걸쳐 반과 부딪히는 영화를 만든다. 이것은 일회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새로운 스타일로 만든다는 것과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오멸의 작품은 정과 반과 합을 통해 전체적으로 연결되며, 그런 점에서 오멸의 영화 한 편을 보고 섣불리 해석했다가는 다른 영화를 보고 당황하거나 혼란을 겪기 십상이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오멸이 기존의 예술, 대중문화와 다른 지점에서 자신의 작업을 펼친다는 것이다. 뮐레가 언젠가 ‘영화 속에서 한 공간의 매력을 보여주고 그것을 정의하는 것이 영화 만들기의 으뜸가는 추동력’이라고 말했다는데, 오멸은 심지어 그런 계산도 하지 않은 채 공간의 매력을 전한다. 담벼락 곁으로 난 작은 길, 신선한 냄새가 느껴지는 맑은 공기, 문득 저 편에 자리한 푸른 하늘, 차가운 기운을 전하는 물, 스산한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는 오멸의 영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그로테스크
오멸 영화에서 그로테스크의 미적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뽕똘’이다. 영화 작업이 끝날 위기에 처하자 울적해진 성필에게 용필이 다가와 산방산 전설에 대해 말한다. 그 순간 영화는 난데없이 산방덕이 에피소드를 삽입한다. 산적으로 분한 성필이 산방덕이를 업고 도망치고, 뽕똘이 그 뒤를 따른다. 산적에게 업혀 쫓기는 까닭에 불안해진 덕이의 몸은 점차 무거운 돌로 변하고, 덕이를 업고 가던 산적은 그 무게에 눌려 죽는다. 이야기로 치면 절박하고 무시무시한 사연인데, 이야기를 재현한 방식으로 인해 웃음이 터질 지경이다. 검댕인지 구두약인지 모를 것을 덕지덕지 칠한 덕이는 부자연스럽게 누워 눈을 감고 있고, 눈물이 아닌 그냥 물이 살찐 얼굴의 원만한 곡선을 타고 줄줄 흘러내린다. 이어 벌떡 일어선 덕이가 행복한 표정으로 말한다. “눈물 때문인가. 행복해. 즐거워. 날아갈 것 같아.” 이 장면은 초반에 나온 낚시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해안 바위 위에 선 성필이 반팔만 입은 채 낚시를 한다. 감독 뽕똘은 실제로 고기를 낚을 때까지 가만히 서 있으라고 주문한다. 고기가 잡히길 마냥 기다리다 몸이 점점 얼어붙어가는 성필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흐른다. 추워서 흘리는 건지 기다림의 감정에 치우쳐 그러는 건지 영화는 말을 하지 않지만, 영화의 기괴한 상황은 여지없이 웃음을 유발한다.
웃음과 눈물이 부조리하게 충돌하는 상황은 오멸의 영화에서 여러 차례 나온다. 오멸은 첫 번째 영화의 도입부에서 자기 영화의 인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서울에서 내려온 용필은 어머니 묘를 찾는데, 들짐승이 그랬는지 어머니의 묘는 움푹 파헤쳐져 있다. 어미의 몸을 잃어버린 묘 앞에서 용필은 곡을 하고 감상적인 음악이 흐르던 중, 하르방이 다가와 “네 어머니 묘는 저기에 있지 않냐”고 일러준다. 죽음과 몸을 두고 벌이는 부조리한 유머의 세계는 아마도 신화와 전설의 땅인 제주의 원시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김녕 뱀굴’ 전설 - 굴속에 사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뱀이 내리는 저주가 두려워 사람들은 매년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했다. 마을에 새로 부임한 어린 판관이 용감한 기백으로 뱀을 찔러 죽였다. 무당이 판관에게 다가가 빨리 피하되 절대 뒤를 보지 말라고 일렀으나, 피신 도중 피의 비가 온다는 말에 뒤를 돌아본 판관은 죽고 만다. 죽은 뱀이 피의 비가 되어 젊은이의 뒤를 쫓아온 것이었다. - 이 대표적인 예다. 뱀이 죽어 마을 사람들은 안도하고 행복할 수 있겠지만, 피를 뒤집어쓰고 죽은 젊은 남자의 이야기는 그들의 안도감을 뒤집고도 남는다. 오멸 영화에서 그로테스크적인 특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영화는 ‘이어도’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이어도’는 중반에 이르기까지 젊은 촌부의 일상을 무던히도 뒤따르던 작품이 아니던가. 그녀의 일상에서 고독을 시리도록 그리던 영화는 종결부에 이르러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았을 정도의 충격을 안겨준다. 그러니까 반복되는 선율과 일상은 마침내 다가올 공포를 밀어내려는 지연의 기도 혹은 폭력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장면’이 나온다. 두 명의 병사가 아이의 몸을 푹 고아 뜯어먹는 장면. 그들은 굶주림에 지쳐 걸신들린 듯이 먹지 않는다. 그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다른 인간의 살을 먹는다. 인간의 몸을 먹는 인간의 무표정. 그들은 인간이기에 인간을 먹는다는 듯이 군다. 이런 지옥 같은 상황은 ‘지슬’의 클라이맥스에서 다시 반복된다. 정길은 김상사를 가마솥에 넣고 불을 지핀다. 김상사는 산 채로 끓여지는 것이다. 나는 또 한 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전작들과 비교해 ‘이어도’와 ‘지슬’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어떤 시선이나 입장이 반영된 작품인데, 두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은 몸,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몸을 먹는 것과 관련된 것이니 말이다. 오멸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알지 못했던 역사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관객의 머리를 통째로 뒤흔들어놓을지 고민했지 싶다. 그는 역사를 상세하게 기술하거나 역사를 변형시키는 대신 그로테스크의 미학으로 표현하고 그 결과로 주목받기를 원한다. 김상사의 살아있는 몸을 삶는 가마솥 장면은, ‘지슬’의 도입부에서 김상사가 여자 시체 옆에서 웃으며 과일을 깎아 먹는 장면과 연결된다. 흡사 인간이 인간을 먹는 긴 연쇄 고리라도 있는 것처럼 영화는 역사를 적는다. ‘어이그 저 귓것’과 ‘뽕똘’이 웃음과 눈물의 부조리한 충돌을 빚었다면, ‘이어도’와 ‘지슬’은 유머를 밀쳐낸 자리에 그로테스크의 정치성을 끌고 온다. 자, 생각해보자, 카니발리즘은 실제의 서술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들이 대놓고 사람을 먹었겠나. 그러나 그들이 인육을 먹는 인간으로 그려지면서 ‘지슬’은 기존의 세계를 서늘하게 풍자하는 영역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풍자는 실제의 세계에 대한 통념을 뒤집어버린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 왔던 것을 뒤집어 보여주면서 “이건 어때?”라고 물으며, 가만히 고여 있던 우리의 가치관을 들쭉날쭉한 무기로 들쑤셔 놓으며, 우리가 두려워하던 것과 욕망하던 것에 욕지거리를 걸어보고 급기야 우리가 두 눈과 하나의 머리로 보지 못하는 세상을 상상하고 통찰하려고까지 시도한다. 나는 오멸이 진정으로 꿈꾸는 게 어쩌면 익숙한 이데올로기의 전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글.사진 : 이용철(영화평론가)

소품으로 보는 <하늘의 황금마차>

오멸 영화의 소품 중 남아 있는 건 드물다. 대개 현장에 있던 걸 그대로 사용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배우들의 의상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도 평소 입던 옷을 입는다. 당연히 촬영 도중에는 배우들이 각자 의상과 소품을 챙긴다고 한다. ’하늘의 황금마차‘에서 맏형으로 분한 문석범도 집에서 가져온 의상과 따로 구한 조끼 한 벌로 의상 준비를 마쳤다.

막내 뽕똘 역의 이경준은 동료 성민철 소유의 추리닝을 빌려 입고 나왔다(소품 사진 2).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 후줄근해 보인다. 이런 태도가 가난한 제작 여건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하늘의 황금마차‘의 권미희 프로듀서는 “실제 삶에서 나온 인물에 맞게 소품도 그가 지닌 것이나 지녔을 법한 것들을 주로 사용해요”라고 답한다.
간혹 소품을 별도 제작하기도 하는데, ‘하늘의 황금마차’에서 밴드 ‘킹스턴 루디스카’가 몰고 다니던 ‘황금 마차’가 대표적인 예다. 제주에 살며 폐자재로 악기를 만드는 ‘루나(본명 윤주현)’가 마차 및 여러 소품들을 손수 만들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도 악기를 만들고 공연도 하고 그러신대요. 오 감독님 소개로 연락드렸더니 수레와 악기, 건반 테이블 등을 흔쾌히 만들어 주셨고요. 원래는 촬영 후 킹스턴 루디스카에게 선물로 줘 공연에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전기와 배터리 같은 현실적인 문제로 실현은 안 됐어요” 권 프로듀서의 말이다. 킹스턴 루디스카가 입고 다닌 러닝셔츠와 잠옷 하의는 시장에서 싸게 구입한 것으로, 지금은 뜯어진 자국은 물론 땀 냄새까지 짙게 밴 상태로 보관 중이다

작년 제주는 유난히 더웠는데, 영화에 첫 출연한 밴드의 멤버들은 무던히 뛰어다녔던 모양이다. 멤버들의 등에 붙여둔 천사 날개는 제작하려다 문방구에서 파는 걸로 대신했다 날개를 접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구사되는 등 의외로 알찬 소품이다. 흰 바탕이라 사진이 잘 찍히지 않아 권 프로듀서가 살짝 걸쳐봤다.

예쁘다. 끝으로 소개할 소품은, 평소 여행을 자주 다니는 오멸의 아이디어로 짐작되는 비닐 텐트 텐트폴이 없어 반듯한 모양새가 안 나와 아쉽지만, 영화를 본 관객은 이 기상천외한 소품을 보는 것만 으로도 웃음이 나올 게다. 눈비가 섞여 내리던 날, 피사체로 놓인 텐트를 보다 문득 ‘오멸 영화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 속 최고의 소품

best 1
데드맨 Dead Man (1995)
  • 감독_짐 자무시
  • 출연_조니 뎁, 게리 파머, 랜스 헨릭슨

윌리엄 블레이크가 마지막 여정을 떠날 때 탔던 배. 배 자체는 무척 평범한 카누지만, 또 다른 세계 - 죽음 - 으로 가는 수단으로서 신비롭게 다가왔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죽음이 삶의 한 과정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best 2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Black Cat White Cat (1998)
  • 감독_에밀 쿠스트리차
  • 출연_스디안 토도로빅, 브랑카 카틱, 루비카 아조빅

그르가가 타고 다니던 차(?). 움직이는 게 신기할 만큼 낡고 기묘한 이동수단이지만, 그르가가 그것과 함께 등장할 때면 어떤 화려함으로도 채우지 못할 묵직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best 3
초콜릿 Chocolat (2000)
  • 감독_라세 할스트롬
  • 출연_줄리엣 비노쉬, 주디 덴치, 알프리드 몰리나

초콜릿의 매력을 이토록 치명적으로 표현한 영화가 또 있을까. 영화는 초콜릿 자체를 아름답게 표현하기보다 그것이 가진 의미와 미치는 영향에 더 집중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쌉싸름한 맛과 향이 진동한 기분이다.

best 4
오아시스 Oasis (2002)
  • 감독_이창동
  • 출연_설경구, 문소리, 안내상

공주의 방 벽에 붙어 있는, 야자수를 수놓은 그림 -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그림이 아니라 바닥에 까는 천 같은 - 이 인상적이다. 어렸을 적 이모님 댁에 보았던 것 같은, 오래되고 촌스러운 털실로 짠 그것이 공간과 자연스럽게 조화되면서 동시에 많은 걸 얘기해줬다. 아픈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best 5
수면의 과학 The Science of Sleep (2005)
  • 감독_미셸 공드리
  • 출연_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샬롯 갱스부르, 알랭 사바

영화에 나오는 모든 소품들이 어딘가 ‘자파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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