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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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된 영화유산

사도

  • 감독 이준익
  • 각본 조철현, 이송원, 오승현
  • 미술(소품) 심현섭
  • 의상 심현섭
  • 출연 송강호, 유아인, 문근영
  • 제작사 (주)타이거픽쳐스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은 사도세자 이야기를 역사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점에서 가족사로 재조명한 정통 사극

기부된 <사도> 소품

기증자에게 듣는다 <사도> 오승현 대표(타이거 픽처스) 인터뷰
송순진
영화 유산 수집 프로젝트가 쉽지 않다. 최근작들은 그나마 남아있는 소품이 많은데, 옛날 작품에 대해서는 제작사에서도 가지고 있는 게 거의 없다고 하더라.
오승현
우리도 그렇다. 전에 했던 작품들 소품은 거의 없다. 내가 알기로도 <사도>의 이준익 감독 역시 소장품을 안 가지고 계시고 나도 마찬가지다. 미술팀에서 보관하기도 하는데 창고가 있는 팀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 팀일 경우 거의 없어지기 일쑤다. 지금 이런 프로젝트처럼 의미 있는 소품들을 수집해서 잘 보존하면 좋을 텐데 실정이 그렇지가 못하다.
송순진
사극의 경우 일부 의상 및 가구 같은 소품은 재활용이 가능할 것 같은데, 왜 보관을 하지 않을까?
오승현
재활용을 하긴 하는데 문제가 있다. 똑같은 이야기라면 모르겠지만 영화마다 내용과 콘셉트가 달라지니까 전에 쓰던 것들과 맞지 않는다. 의상은 조연이나 보조 출연자들이 입는 옷은 간혹 재활용을 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게, 거의 다 중국에서 싸게 대량으로 제작해서 들여오는 거라 옷이 오래 가질 않는다. <평양성>(2011)의 주요 의상이 갑옷이었다. 그런데 전시 상황이니까 병사들이 많이 입었던 흔적을 내려고 일부러 닳게 만들었다. 그러니 촬영 끝내면 옷이 쓰레기가 되어 있다(웃음). 장군복 같은 건 좀 오래 가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뭐(웃음). TV 드라마는 창고에서 관리를 잘 하니까 재활용한다는데, 우리는 거기를 임대하면 비싸서 빌려 쓸 수가 없다. 소품도 거의 그런 식이다. 보관과 관리가 안 되다 보니 주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뭐 쓰던 거 있잖습니까?” 하면 “없는데요.”(웃음)
송순진
<사도>는 소품 전체를 전주영상위원회에 기증했다고 들었다.
오승현
전주영상위원회와 전라북도의 지원을 받았는데, 영화 소품을 기증하는 조건이 있었다. 의상을 제외하고 모든 소품 일체를 기증하는 조건이다. 잘 된 일이다. 거기서 잘 보관해주고 관리해주면 감사하지. 우리 영화뿐 아니라 전주 일대에서 촬영한 영화 소품들을 수집하고 있다고 들었다. 전주영상위원회 사무국장이 안타까운 마음에 개인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서 시작한 사업이라고 한다. 옛날부터 영화인들이 모이던 ‘삼현다방’이란 곳이 있는데, 그 다방의 지하공간을 건물주가 무상 임대했고 거기 소품 전시를 해놓았다. 사무국장이 혼자 했다는데 꽤 많이 모였더라. 작품의 특징적인 소품들 위주로 되어 있다.
송순진
사극은 소품이 특별하지 않나. 고증도 해야 하고 제작비도 더 많이 들 것 같다.
오승현
미술감독들이 욕심껏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게 있다. 대부분의 소품들이 잠깐씩 비춰지고 사라지는 것이 많다. 대충 이미테이션으로 할 수도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진짜처럼 뭔가 해보고 싶은 욕심들이 있어서 병풍 하나에 500만 원, 1000만 원짜리, 가구 하나를 가져다 놔도 진짜로 몇 1000만 원짜리를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런 건 빌려온다. 영화 자막을 보면 협찬에 글씨 쓰는 분들, 수예하는 사람들 이름이 줄줄 나온다.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잠깐 빌려 쓰고 반납하는 거다. 그것도 보험 다 들고 가져온다.
송순진
<사도>에서 특별히 욕심 부린 소품이 있나?
오승현
미술감독이 항아리 같은 도자기를 하나 가져다 놓고 싶은데 그걸 못했나 보더라. 그래서 이천에 가서 직접 구워 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품은 미술감독이 거의 협찬에 가깝게 만들어 구워온 거라, “우리 겁니다. 주십시오” 할 수가 없다. 그런 소품은 미술감독이 알아서 처리하는 걸로 한다. 도자기뿐 아니라 방에 있는 가구들도 비싼 것이 꽤 많고 글씨도 대부분 협찬 받고 빌려왔다.
송순진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아직 개봉하려면 멀었는데, 연일 관련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인터뷰도 많고.
오승현
1년 동안 기다린다는 게 너무 힘들다(웃음). 후반작업도 거의 끝났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많이 했기 때문에 부담이 없다. 홍보하는 분들도 많이 하고.
송순진
개봉은 왜 늦어졌나?
오승현
요즘 개봉 스케줄이나 배급 상황이 전과 다르다. 찍어놓고 오래 기다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우리보다 먼저 끝난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도 마찬가지다. <베테랑> 찍고 나서 유아인이 합류했으니까. 6월인가 7월에 개봉한다고 한다. 우리는 9월 셋째 주 정도에 개봉할 생각이다.
송순진
추석 영화다.
오승현
맞다. 한국영화가 많이 제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개봉 시점에 대한 전략을 가져가야지. 3-4월에는 절대 관객이 부족할 때라 못 들어가고 추석으로 날짜를 맞췄다. 처음엔 빨리 개봉하자고 고집을 피워보기도 했는데, 그들만의 사정과 이야기가 있더라.
송순진
<사도>에 대한 비하인드 중 재미있는 것이 기획자, 프로듀서, 감독이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는 점이다. 직접 시나리오에 참여했다고 하던데.
오승현
지금이 삼세판 째다. 처음 시작한 것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이었는데, 그건 원작이 따로 있고 각색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송순진
프로듀서 출신인데 시나리오 작가나 연출에 관심이 있었나?
오승현
처음에는 연출부 조감독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감독을 하려고 했다. 이준익 감독이 사장으로 있는 씨네월드에서 <아나키스트>(2000)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그 후에 강제규 필름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준익 감독이 부르더라. “야, 너는 감독에 소질이 없어. 피디 해”(웃음) 본인이 피디가 필요했던 것이다. 좀 생각하다가 <달마야 놀자>(2001)로 피디를 시작했다.
송순진
시나리오는 조감독 때 공부한 건가? 대부분 감독들이 자신의 시나리오로 데뷔하니까.
오승현
아니다. <달마야 놀자>를 박규태 작가가 썼는데, 시나리오 기획 단계에 내가 깊숙이 들어갔었다. 그래서 <달마야 놀자> 안에는 나만 아는, 내 신이라고 할 만한 게 몇 개 있다. 그러다 <황산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작가로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작가와 기획자와 같이 지리산에 들어가서 전반적인 스토리 라인을 함께 잡았다. 작가가 실질적인 집필을 하고 라인은 같이 만든 셈이다.
송순진
<사도>의 시나리오 작업은 어땠나?
오승현
지금의 <사도>를 쓰기 5-6년 전 영화화를 생각해 본 적 있다. 그때는 단순하게 ‘조선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다는 것 외에 뭐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드라마가 안 생기더라. 머릿속에 드라마가 좀 들어와야 두 시간 동안 영화를 보는 사람들과 승부를 할 수 있을 텐데. 뒤주 안에서 “살려주세요!”하고, “못 박아서 죽여라”하는 거 외에는 아무 얘기도 풀어내질 못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50-60년에 걸친 3대의 이야기를 해보자고 생각하니 이야기 꺼리가 생겼다. 그 시간 안에서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푸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에게 기대했다가 실망했다가 분노하고 파국을 맞는 과정을 보여준다. 만약 그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했으면 50부작 TV 드라마가 나왔겠지. 그걸 두 시간 안에 임팩트 있게 보여주고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야기 구조를 사용했다. 사도가 실제로 뒤주에 갇힌 지 7일째 되는 날 밤, 그러니까 8일째 넘어가기 전에 죽었다고 하는데, 영화는 그 여덟 번째 날을 이야기한다. 놀랍게도 우리 시나리오 문법이 8개 시퀀스로 나눠지는데 거기 딱 들어맞았다. 시퀀스 하나 당 하루. 그 하루 안에 그들의 과거가 들어간다.
송순진
고증이라거나 역사 왜곡 같은 문제가 쉽지만은 않을 텐데.
오승현
무슨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이야기를 푸느냐는 모든 영화가 다 똑같지만 특히 사극의 경우는 생각을 잘 해야 한다. 사극은 보통 정통사극과 퓨전, 그리고 그 중간쯤에 위치한, 장르만 빌려 온 시대물이 있다. “사극이 잘되니까, 재미있는 얘기가 있으니까”라는 이유로 이야기를 가져다가 “이렇게 만들어볼까?”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 이게 가장 실패하는 경우라고 본다.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사극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해석이 아니라 왜곡을 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송순진
그런 점에서 <사도>라는 인물 자체가 왜곡의 가능성이 농후한 소재 아닌가. 사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인물이다.
오승현
학계에서는 대체로 두 개의 시각으로 나눠져 있다. 역사학자 이덕일 씨가 보는 사도는 소론과 노론의 당파싸움에 희생된 비운의 세자다. 또 서울대 정병설 교수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연구하면서 쓴 「권력과 인간」이라는 책에서, 사도가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아니고 의대증(衣帶症, 옷 입기를 싫어하는 병)과 정신분열을 앓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에, 그런 가족사 안에서 아버지가 왕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게 됐다고 사실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우리 영화에서는 단순히 인간적이었다 혹은 정신병자였다라고 딱 잘라서 얘기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당파 싸움에 희생된 비운의 천재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천재설의 경우는, 나름대로 어린이 때 누구나 반짝이고 천재적인 순간이 있지 않나. 그게 역사적으로 기록된다. “와, 이걸 읽었다네? 이런 시를 썼다네?” 이런 것들이 실록에 기록이 된 거다. 근데 그게 천재는 아니지(웃음). 오히려 사도의 내면과 그가 처한 환경, 그 환경이 내면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을 집중해서 봤다. 그래도 한 영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미친놈으로 나올 수는 없다. 이 사람이 어떻게 변해가는 구나를 보여주는 게 핵심이다. 결국엔 아버지의 무게에 눌려서 어딘가로 폭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그게 광증과 병증으로 나타나는 거다. ‘한중록’을 보면 “내 남편은 광증, 의대증이 있다”고 썼다. 그게 자기 아들과 손주를 위해 그렇게 썼다고 하는데, 실제 그런 사실은 있다. 결국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다. 노론, 소론의 당파싸움이란 것도 다만 사도의 행각이나 상태를 보고 노론과 소론이 각자의 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했던 거지, 몰아가서 죽인 것은 아니라고 봤다.
송순진
관련 자료를 검토하는 것에도 꽤 많은 노력을 들었을 텐데.
오승현
시나리오를 쓸 때 실록과 ‘승정원 일기’는 물론이고 수많은 서적이나 영상자료들을 꼼꼼하게 검토했다. 감독도 인터뷰 때 누누이 말하는데, 그렇게 검토해서 시나리오에 반영한 역사적인 사실이 90% 이상이다. 심지어 실록에 기록해 놓은 대사도 가져다 썼다. 나머지 10%는 뭐냐. 그건 우리의 해석이다.
송순진
구체적으로 어떤 해석이 들어가 있나?
오승현
사도가 정조를 낳을 때 용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뒤주에 들어갔을 때 하도 목이 말라 부채로 오줌을 받아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용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뒤주에 넣어주는 것이 우리의 해석이다. 실제로 사도가 그린 용 그림이 장인 홍봉한에게 주어지는데, 홍봉한이 받으면서 “이 그림은 제가 잘 간직했다가 나중에 사도가 아닌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부채로 바치겠노라”고 한다. 그것을 홍봉한이 나중에 부채로 만들었는데, 뒤주에 들어간 사도에게 전한다는 것이 우리의 해석이다. 또 사도에게는 세 명의 스승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정승에 올랐다가 한 달 사이에 차례로 죽는다. 자살을 한 거다. 왜 그랬냐.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하라는 상소를 쓰라며 압박을 심하게 했다. 조선시대에는 가문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녔는데, 자신이 상소를 올려 사도를 폐하면 멸문지화를 면치 못한다. 그래서 혼자 자살을 해서 가문을 지켰다고 우리는 해석했다. 이런 해석은 학계 일부에서도 추정은 하고 있지만 쉽게 단정 짓지 못하는 문제인데, 실제로 그렇게 해석하려면 논문을 내야 하니까 쉽지 않은 문제다. 이렇게 우리의 해석이 구체적인 기록들의 행간을 연결하는 지점으로 드라마틱하게 잘 붙은 것 같다.
송순진
또 다른 주요 인물이 영조다. 영조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했나?
오승현
영조의 성격을 드러내는 일화가 있다. 영조가 무수리도 아니고 각심이의 아들이라는 걸 엄청난 콤플렉스로 안고 살아간다. 무수리가 궁에서 궁녀들의 심부름을 하는 하녀라면 각심이는 궁에서 묵지도 못하고 출퇴근 하는 종이다. 그런 각심이 아들이란 콤플렉스를 안고 사는 영조가 첫 번째 부인 정성왕후를 맞는다. 그런데 첫날밤에 영조가 “손이 참 곱소” 하니 정성왕후가 “귀하게 자라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데, 그 말을 들은 후 영조가 죽을 때까지 그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나중에 정조보다도 더 어린 애를 낳을 정도로 늘그막에 소원 문 씨(훗날 숙의가 되는 영조의 후궁. 노론과 결탁해 사도세자를 모략한 인물로 유명하다)를 보게 된 거다. 그 정도의 콤플렉스 덩어리라면 아들과도 충분히 갈등할 수 있다고 봤다.
송순진
그런 두 사람의 갈등이라니 흥미진진하다.
오승현
그렇다(웃음). 아들은 궁궐 후원에 무덤처럼 지하를 파고, 그 속에 들어가서 “여기가 제일 편하구나” 하며 기생과 놀았다. 아버지 영조는 아주 큰일에는 화를 안 내고 스윽 지나가면서 조그만 일은 쥐 잡듯이 잡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이상한 걸 알고 있다면? 사도가 실제로 못 살겠다고 칼을 들고 영조를 찾아간 적이 몇 번이 있었다고 한다. 갔다가 돌아오고 또 갔다가 돌아오고, 물이 불어서 돌아오고 뭐 그런 식이었던 거다.
송순진
한 편의 사이코드라마다.
오승현
그렇다. 나중에 정신과 의사와의 GV도 생각하고 있다(웃음). 영화라고 하면 액션도 좀 있고, 러브라인도 좀 있고 종합선물세트처럼 되어야 하는데, 그거보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송순진
희극적인 요소가 있다던데?
오승현
들어가 있다. 또 그런 건 뺄 수 없다(웃음).
송순진
송강호 캐스팅 때문인가?
오승현
그렇다고 코미디가 나오는 건 아니다. <왕의 남자>(2005)의 카피로도 썼지만 비극도 화려할 수 있고 희극도 비극적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희극이 있다는 거지. 송강호가 안 웃길 듯 하면서 웃기는 면이 있지 않나.
송순진
송강호는 많은 영화에서 소시민 이미지를 보여줬다. 그래서 영화에 신선함을 불어넣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다.
오승현
송강호는 희극적인 면이 장점인 배우다. 그러나 그걸 거꾸로 말하면 희극을 계속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비극 역시 잘 소화한다는 말이다. 아니,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참 연기를 잘해서 캐스팅 한 거다(웃음). 소시민의 이미지라는 건 그 사람을 가둬놓고 보는 거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늘 왕 같은 사람을 캐스팅하는 것도 역시 캐릭터를 가둬놓고 보는 것이다. 최고의 배우가 영조를 연기하면 대체 어떤 왕이 나올지 아무도 모르겠다, 이런 기대가 있었다. 대부분 왕 연기를 많이 한 어떤 배우를 생각하면 ‘아, 저 사람은 이렇게 연기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지 않나. 그런데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할지 아무도 예측을 할 수 없더라. 감독도 모르겠다 하고, 송강호 본인도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했다. 그렇게 크랭크인에 들어갔는데, 감독이 자기가 생각지 않았던 모습을 보면 너무 행복해 하고, 그걸 잡아내면서 굉장히 재미있었다고 한다.
송순진
당대 최고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과정은 순탄했나?
오승현
2주 정도 걸렸다.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일주일이 채 안되어 감독과 미팅을 했다. 감독 이야기 들어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외국 스케줄을 소화하고 나서 “고민해 봤는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나는 그게 흔쾌한 수락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사석에서 한 번은 이런 말을 했는데, “TV를 틀면 방송 3사에서 사극을 하는데, 나도 왕을 한 번 해봐야 안 되겠나 생각했다”고. 그렇게 보면 참 잘 한 결정이다(웃음).
송순진
사도 역의 유아인과 혜경궁 홍씨의 문근영, 카메오로는 소지섭까지 나온다고?
오승현
감독이 <소원>(2013) 때부터 한 캐스팅 방법이라는데, 핵심적인 캐스팅을 먼저 하고 그 캐스팅과 궁합을 봐서 다음 배우를 캐스팅하는 방식이다. 영조가 캐스팅이 되고 난 후 이제 20대 배우를 캐스팅해야 하는데, 그 적격자가 유아인이 된 거지.
송순진
<사도> 캐스팅의 기준은 송강호와 붙였을 때 잘 싸울 것 같은 느낌인가?
오승현
지든 안지든, 지금은 유아인이 아닌 전혀 다른 배우는 상상할 수 없다. 이 친구가 너무 잘했다. 유아인도 <베테랑>을 찍고 있을 때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너무 좋다고 하고 싶다고 강력하게 의지를 표현했다. 또 언젠가 사도가 다시 나올 것 같지 않다고도 하더라. 사도세자 연기는 이제 한 명뿐이다, 그래서 하고 싶다는 거다. 정조든 영조든, 어떤 역사적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그 시대, 그 나이 때 딱 한 번뿐이잖나. 결과적으로 유아인은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숙종도 했고 <사도>에서 사도도 연기했으니, 할아버지도 하고 손자도 한 셈이다(웃음).
송순진
문근영은 <사랑따윈 필요없어>(2006) 이후 굉장히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한다.
오승현
송강호, 유아인을 캐스팅한 후 비로소 문근영을 캐스팅 했는데, 사실 혜경궁 홍씨가 영화 전면에 나와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사람이 아니다. 미리 배우와 매니저에게 말한 내용이기도 한데, 그래도 우리 영화에서는 꼭 필요하다고, 도움을 달라고 해서 캐스팅 했다. 문근영도 혜경궁 홍씨를 꼭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지금 아니면 안 할 것 같다면서 비중에 관계없이 출연했다. 미안한 게 영화를 보면 영조와 사도만 보인다. 다른 인물은 뒤에서 받쳐주고 밀어주는 역할 밖에 없다.
송순진
<사도>에서 기증하는 소품이 세 가지 의상이다.
오승현
영조의 용포와 사도가 입는 무명옷, 그리고 혜경궁 홍씨의 평상복이다. 영조의 용포는 영화에서 늘 입고 등장하는 옷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의미를 부여하자면 아들 죽인 아비가 입었던 옷이다. 두 번째 기증품은 사도의 평복인 무명옷이다. 사도가 무명옷을 마치 상복처럼 입고 살았다고 한다. 영조가 호출할 때만 그 위에 용포를 걸치고 나타났다. 사도는 의대증이 있었다. 옷을 입으면 갑갑해서 옷 입는 것 자체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병이다. 그런데 옷 때문에 영조가 꼬투리를 많이 잡았고 사도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 자기 후궁도 죽이고 그 아들도 연못에 던져버리고, 거의 100명 가까이 죽였다고 한다. 죽을 때도 무명옷을 입고 갇혀 죽은 것 같다. 또 혜경궁 홍씨의 의상은 본인 입으로 늘 검소하게 살아온 사람이니까 그런 콘셉트에 맞춰 제작했다.
송순진
의상과 소품, 세트의 콘셉트가 절제라고 하던데.
오승현
이런 비극에 화려한 색깔을 입힌다는 게 이상하잖아.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 그것도 왕가에서 아들을 죽인다? 이건 유럽이나 어느 나라 역사를 찾아봐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얘기다. 우리야 널리 알려진 우리 역사이기 때문에, “아, 그런 일이 옛날에 있었대. 뒤주에 가둬 죽였대”라고 쉽게 얘기하지만 만약 유럽 역사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영화 수십 편이 만들어졌을 것이다(웃음). 이런 이야기에 화려한 배경을 입히면 그 화려함이 배우들이나 이야기를 묻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대한 빼는 걸 콘셉트로 잡았다. 아니, 미술 감독이 처음부터 그렇게 콘셉트를 잡았다. 미술감독, 의상실장, 분장, 특수분장 등 관련 팀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하는데 빼는 것, 절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인물의 방에도 포인트만 주자고 했다. 옷장, 문갑, 화장대 다 놓지 말고 간단하게. 그래서 이야기와 드라마와 인물에 집중하자. 그러니까 결국 본인들이 뒤로 후퇴한 거다. 대신 한정된 공간을 심도 있게 보여주기 위해서 좋은 장비를 썼다. 애너모픽이란 렌즈가 있는데, 영상을 좀 더 깊이 있게 다른 느낌으로 보여준다. 지금 D.I 해서 나온 화면을 보고 왔는데 아주 만족스럽다.
송순진
절제를 콘셉트로 한 덕분에 소품 제작비가 절약되진 않았나?
오승현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런 콘셉트가 생기면 안 들어가는데 더 들어가는 경우가 생겨서 결과적으로 비슷하다. 아니, 화려하게 하는 게 어쩌면 더 쉬울 수도 있다. 소품이 너무 잘 보여서 뭘 하더라도 제대로 된 걸 만들어야 하니까. 글씨 하나를 하더라도 정식으로 의뢰해서 가져왔고 용포나 혜경궁의 의상에 들어간 자수도 일일이 손으로 만든 거다. 한국에서 하면 너무 비싸서 베트남으로 보냈는데 수공으로 한 달인가 두 달 걸렸다. 재봉틀로 ‘드르륵’ 박아서 화려하게 할 수도 있지만 손으로 하면 색이 ‘쑥’ 들어간다. 비교치가 없으면 아무 상관없지만 비교해 보면 금방 보인다.
송순진
또 중요한 소품이 뒤주일 텐데.
오승현
뒤주는 세 개 만들었다. 유아인이 들어가서 촬영할 것과 겉에서 보여주는 것 두 개. 들어가서 촬영한 것은 한쪽 면이 없는 것이고 겉면을 보여주는 것은 무게감을 줬다.
송순진
이준익 감독의 작품들은 물론이고 그 밖에도 <궁녀>(2007) 등 타이거 픽처스는 유독 사극을 많이 제작했다.
오승현
우리 회사가 역사물에 관심이 많다. 소재가 많기 때문이다. 또 실화를 바탕에 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있는 얘기를 드라마틱하게 풀면 평가도 받고 흥행도 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사극을 한다. 이준익 감독도 많이 하다 보니 편하고(웃음). 현대극을 하다 보면 장르에 매이게 된다. 또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90% 이상이 소재인데, 이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 들어간다는 게 어렵다. 들어간다 해도 워낙 개성의 시대라 한계가 있다고 본다. 또 현대극은 도심에서 찍어야 하는데, 그럼 정신 사납다. 사극은 딱 우리만의 공간에서 찍으니까 집중도가 굉장히 높다는 장점도 있다.
송순진
씨네월드, 영화사 아침과 공동제작도 많이 했는데.
오승현
이준익 감독, 조철현 감독, 고(故) 정승혜 대표 세 분이 영화 동지다. 각자 회사를 하나씩 가지고 계셨고 그게 씨네월드, 타이거 픽처스, 영화사 아침이다. 이 세 개를 모으면 ‘리퍼블릭 오브 시네마’다(웃음). 같이 모여서 한 작품만 하긴 그러니까 각자 기획해서 거의 공동 제작한다. <사도>도 씨네월드와 공동제작이다.
송순진
타이거 픽처스의 차기작은 뭔가?
오승현
이준익 감독이 열한 번째 작품을 찍고 있다. <동주>라고 시인 윤동주를 다룬 작품이다. 그냥 노는 사람이 아니다. 너무 심심해서 영화를 찍는다(웃음). 그러고 보니 <사도>가 딱 열 번째 작품이다. 또 <몽유도원도>라고, 전 타이거 픽처스 대표였던 조철현 감독이 CJ E&M과 올해 찍으려고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 지금 시나리오 단계인데 계속 고치고 있다. 이건 완전히 정극이다. 주인공은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인데, 그림 <몽유도원도>를 중심으로 권력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참이다. 약간의 판타지도 들어가 있다.
송순진
앞으로 제작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오승현
장르에 구애 받지 않고 재미있는 영화, 소재가 훌륭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준비 중인 것 중에 사극도 있지만 현대극도 있고 공상과학(SF)도 있다. 원작들을 계속 발굴하고 판권 구매도 열심히 한다. 작가들 만나서 오리지널 시나리오도 준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공포영화를 싫어하고 휴먼이나 드라마에 집착을 하는 편이다. 또 코미디도 좋다. 근데 공포, 멜로, 에로에는 영 소질이 없다. 그건 내가 잘 안다(웃음).

내가 생각하는 영화 속 최고의 소품
1
황산벌 Once Upon A Time In The Battlefield(2003)
감독_이준익
주연_박중훈, 정진영, 이문식
장르_역사, 코미디, 드라마
“소품이 기억나는 영화 하면 가장 먼저 <황산벌>이 생각난다. 세트 자체가 소품이었으니까. 목책으로 백제와 신라를 갈라놓은 거 아닌가! <황산벌> 안에는 아이디어가 빛나는 소품들이 많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게 진흙 날렸던 포차인데, 내 기억으론 <황산벌>이 사극 붐을 시작케 했던 작품이라면 포차는 대한민국 사극 최초로 만들어진 대규모 소품이었다.”
2
왕의 남자 King And The Clown(2005)
감독_이준익
주연_진영, 감우성, 이준기
장르_역사, 드라마, 멜로
“<왕의 남자>의 그림자 인형이 인상적이었다. 그 인형극에 관한 아이디어가 현장에서 즉석으로 이준익 감독님이 생각해 내신 거다. 종이를 오려 붙여서 진짜 간단하게 만든 건데,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고.”
3
날아라 허동구 Bunt(2007)
감독_박규태
주연_정진영, 최우혁
장르_드라마, 코미디
학교를 좋아하는 아이큐 60의 열한 살 소년 동구와 아들이 초등학교만 무사히 졸업하길 바라는 아버지 진규의 이야기를 그린 <날아라 허동구>. 오승현 대표는 이 영화에서 동구가 늘 들고 등장하는 물주전자를 기억하고 있다. “아이큐 60의 허동구에게는 물주전자가 사회(친구들)와의 유일한 소통의 통로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소품이라 기억에 남는다.” <달마야 놀자>에서 각본을 썼던 박규태 작가가 이 영화로 연출 데뷔했고, 오승현 대표는 프로듀서로 활약했다.
4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Blades Of Blood(2010)
감독_이준익
주연_황정민, 차승원, 한지혜
장르_역사, 드라마, 멜로
임진왜란 직전, 혁명을 꿈꾸는 이몽학(차승원)과 그를 저지하려는 맹인 검객 황정학(황정민)의 이야기다. 오승현 대표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시나리오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잊지 못할 소품으로 황정학이 썼던 대나무 칼을 꼽았다. “고수의 향기가 나는 소품”이라는 이유다. 황정학의 대나무 칼은 후계자인 견자(백성현)을 가르치는 교편이 되기도 하고 맹인인 자신을 지키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5
관상 The Face Reader(2013)
감독_한재림
주연_송강호, 이정재, 백윤식
장르_역사, 스릴러, 드라마
<관상>은 최근 한국의 사극열풍을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송강호, 이정재, 백윤식이라는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들이 각자 관상가, 수양대군, 김종서로 변해 칼에 베일 듯한 기 싸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승현 대표가 이 영화의 기억에 남는 소품으로 꼽은 것은 호랑이 모형이다. “비싸다고 하더라. 3000만 원!” 다분히 제작자다운 이유다.
By 송순진(영화저널리스트) | 사진_이준구(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