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박물관

한국영화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보물창고

기증된 영화유산

한공주

  • 감독 이수진
  • 각본 이수진
  • 미술 최효선
  • 의상 김은숙
  • 출연 천우희, 정인선, 김소영
  • 제작사 리 공동체 영화사
여고생 한공주는 전학을 간다. 새학교에서 만난 친구 은희는 공주의 노래실력이 뛰어난것을 발견하고 아카펠라동호회에 끌어들인다. 그러나 공주가 노래부르는 동영상을 보고 이전 학교 학부모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리고... 과연 이전학교에서 공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여된 <한공주> 소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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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에게 듣는다 <한공주> 이수진 감독 인터뷰
“한 번은 보겠지만 두 번은 못 보겠다.”, “영화에 완전히 동의할 순 없었지만 2014년 가장 인상적인 영화다.” 이수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 <한공주>에 대한 시선은 엇갈렸다. 집단성폭행에서 생존한 10대 소녀가 자신의 삶에 다시 안착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이야기 <한공주>(2013)는 다분히는 다분히 ‘불편한 영화’였다. 그러나 이 영화가 2014년 한국영화계에서 다진 존재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마라케시국제영화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등 세계 굴지의 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 디렉터스 컷, 영화평론가상, 청룡영화상 등 국내 영화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아서도 아니다. 죄 없고 여린 영혼들을 수없이 하늘로 보내야 했던, 그 중에서도 유독 큰 상처로 남게 된 2014년의 대한민국에서 공주의 이야기를 직면한다는 것은 대단히 필요하고 또 중요했던 영화적 체험이었다.
4월 17일 개봉, 그리고 22만5천명의 관람. 여러 번의 GV를 통해 관객들은 공주와 이수진 감독을 함께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여러 관객들의 뇌리에 깊은 도장을 새긴 이수진 감독은 이제 <한공주>를 떠나보내려 한다. 누구보다도 공주의 삶과 밀착해 있었을 그는 사실 지난해 11월부터 <한공주>와 관련된 모든 인터뷰와 GV를 고사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그가 ‘영화관 옆 박물관: 한국 영화 유산 수집 캠페인’을 위해 공주의 트렁크와 교복, 그리고 무시무시했던 고릴라 탈을 갖고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공주를 완전히, 잘, 보내주기 위해서다.
세 가지 소품, 세 가지 이야기
이수진 감독이 조그마한 트렁크를 끌고 인터뷰가 예정된 상수동까페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난해 초, 마라케시국제영화제에서 금별상을 수상한 직후 가졌던 인터뷰 이후 1년만이다. 트렁크를 열자 털이 부슬부슬한 고릴라 가면과 밝은 베이지 톤의 여고생 교복이 나왔다. <한공주>에서 가장 강렬했던 소품과 공주가 입고 등장했던 주요 의상이다. 그러나 이수진 감독은 “가장 중요한 소품은 트렁큰데요”라고 말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말이 맞았다. 새로운 보금자리와 학교를 찾아온 공주의 손에는 트렁크가 들려있었다. 그 작은 트렁크에 자신의 남은 희망을 싣고 공주는 세상을 떠돌았다. 그런데 트렁크에 관한 이야기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트렁크는 할 이야기가 참 많은 소품이에요. 이게 한 20년 됐나? 우리 부모님이 쓰시던 물건이거든요. 집구석에 처박혀 있던 건데, 아내와 이걸 들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었어요. 집사람이 학생이어서 바로 신혼여행을 못 가고 여름방학 때야 돼서 떠난 여행인데, 가방을 새로 사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저걸 가지고 갔죠. 근데 엄청 창피했어요!(웃음) 요즘 트렁크는 바퀴가 소리가 안 나도록 장치가 되어 나오는데 저건 아니었거든요. 가는 곳마다 달달달 하는 소리가 나는데, 공항에서는 특히 크게 울리고 공항에서 지하철, 지하철에서 민박집으로 가는 길에도 소리가 너무 심해서 끌고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거의 일주일 동안 다녀야 했는데 손잡이까지 떨어져나가니 끌고 싶지 않아도 결국엔 끌고 갈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나중에는 이 소리를 다시 들으면 내가 여기에 왔던 기억이 떠오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행의 특별한 기억을 남게 해준 트렁크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트렁크라는 게 누구에게는 여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되는 이미지를 주기도 하잖아요. 저는 그걸 이민자들, 남루한 노숙자들의 모습에서 발견한 것 같아요.” 이수진 감독은 <한공주>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늘 어딘가로 도망치듯 이동해야 하는 공주에게 줄 특별한 이미지를 트렁크와 연결시켰다. 소리만 들어도 공주가 연상이 될 수 있는 뭔가를 고민하던 끝에 트렁크가 떠올랐던 것이다. “이동하는 느낌, 불안감. 그런 걸 줄 수 있는 게 트렁크였죠. 극 초반에 공주가 트렁크를 들고 등장할 때는 지하철 열차 소리와 오버랩 되면서 굉장히 불안한 이미지를 만들려고 했어요. 또 영화 후반부에서도 공주가 어디론가 이동을 하는데 그땐 그냥 트렁크 바퀴소리만 들려요. <한공주>를 본 사람들이 이 소리를 다시 들으면 아마 공주가 생각나지 않을까, 저에겐 그런 의미가 있었죠.”
처음부터 부모님이 쓰시던 이 낡은 트렁크를 그대로 쓸 생각은 아니었다. 미술팀에 부탁해 여러 가지 샘플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한공주>가 워낙 저예산으로 제작되다 보니 그럴 상황이 못 됐다. 그래서 사진으로만 여러 트렁크를 봤는데 영 느낌이 살지 않았다. 소리도 문제였다. “요즘에는 아무리 싼 것도 그렇게 소리가 나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걸 떨어진 손잡이도 보수하고 스티커도 붙여서 쓰게 됐죠.” 만약 이 트렁크가 공주의 부모님이 신혼여행을 갔을 때 썼던 것이라면? 그런 상상과 느낌을 살려가며 미술 팀이 손을 본 끝에 <한공주>에서 가장 중요한 소품이 완성됐다.
트렁크가 공주의 원치 않는 이동, 떠돌이 삶 같은 것들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공주의 교복은 변화를 나타내는 소품이다. 여학생 교복은 두 종류가 제작됐다. “교복과 관련해서도 기억에 많이 남아요. 의상 팀이 거의 30∽40벌을 제작하느라 촬영 10회차 까지도 한쪽 방에서 계속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거든요.” 사건에 휘말리기 전 공주가 다니던 학교의 회색 교복과 공주가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되는 전학간 학교의 베이지색 교복은 공주의 심상이 반영된 선택이었다. 이중 기증품으로 내놓은 것은 후자. 회색과 대비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새출발을 꿈꾸는 공주의 마음을 닮아있다.
그러나 <한공주>를 본 관객들이라면 대부분 이 소품을 단번에 떠올릴 듯하다. 바로 고릴라 가면이다. 고릴라 가면은 공주와 화옥을 유린한 남자아이들을 상징한다. 1년 전 인터뷰에서 이수진 감독은 인상적인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성폭행을 저지른 이들을 대변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요. 하지만 나 역시 남자로서 그 아이들처럼 중,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왔거든요. 나의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인지 알고 있어도, 여러 명이 모여 군중심리가 생기면 이성을 잃고 휩쓸려 갈 때가 있었던 것 같아요.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인 상태죠. 반인반수(伴人伴隨).” 이수진 감독은 가해자들의 그런 상태와 이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시나리오에 고릴라 가면을 등장시켰다. 워낙 강렬하고 의미도 남다른 소품이었기 때문에 가면도 신중하게 결정됐다. “고릴라 탈이 두 종류가 등장하는데 지금 가지고 온 것이 화면에선 메인으로 잡힌 거예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특수분장 회사인 제페토에서 제작을 했어요. 사실 저는 제작한 탈을 메인으로 쓰고 싶었어요. 일반적인 고릴라 탈과 다른 느낌이 있었거든요. 너무 거북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귀엽지도 않고, 고릴라 같으면서 원숭이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다 제작하고 나니까 지금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더라고요. 결국 완전히 제작한 건 극중 민호가 쓰고 나오게 됐죠.” 영화와 어울리게 다듬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미국 사이트에서 알맞은 고릴라 가면의 이미지를 찾고 비슷한 것을 구입해서 한국에 들여왔다. 그런데 시커먼 털이 삐죽삐죽 나온 것이 무척 흉측했다. 거부감이 너무 든다는 판단 아래 미술 팀과 의상 팀에서 얼굴 부분만 살리고 털을 다 제거한 뒤 다른 털을 붙였다. “무척 중요한 소품이었고 의미가 큰 씬이었기 때문에 공을 많이 들였어요. 스태프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
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공주 이야기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 2004년 <아빠>를 시작으로 2006년 <아들의 것>, 2007년 <적의 사과> 등 세 편의 단편을 통해 연출가로서의 궤적을 만들어가던 이수진 감독이 첫 장편영화의 주인공으로 공주를 만나게 된 계기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 처음 접했을 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30대 남자의 입장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그러고 있는데 유사한 사건이 계속 일어났고 혼자서 분노와 한탄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고 나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창동 감독의 <시>(2010)나 황동혁 감독의 <도가니>(2011), 이준익 감독의 <소원>(2013) 등 현실의 아픈 이야기들이 하나 둘 스크린을 통해 관객과 만났다. 이수진 감독도 다시 이야기를 마음속에 품게 됐다. “한번은 나 자신에게 되물어봤어요. 이 분노가 진짜인지, 아니면 가십거리처럼 지나가는 것인지. 만약 피해자든 가해자든 내 주변에 있었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그때 나의 분노들이 표피적인 반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사건에 대해 더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거기서부터 영화가 시작된거죠.” 이수진 감독은 기존 영화가 보여준 것과는 다른 방식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자신이 처음 느꼈던 것처럼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가르고 구분해 공분을 일으키는 영화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소녀가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과정과 그 소녀를 둘러싼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한공주>에는 더불어 다양한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주에게 새로운 거처를 제공하는 선생님과 그의 어머니, 새로 전학간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은희와 친구들은 공주가 만나는 새로운 세상의 사람들이다. 같은 공포와 폭력을 당하고 홀로 죽음을 선택한 화옥과 사건의 발단이 된 동윤, 그리고 자식 일 앞에서 이기적으로 변하는 동윤의 아버지와 돈 앞에서 자식을 지켜주지 못하는 공주의 아버지까지, 이수진 감독은 다양한 인간군상을 묘사하며 입체적인 시각을 유지하고자 한다. 대학에서 다큐 사진을 전공했다는 그의 영화에서 일관적으로 엿보이는 어떤 시각과 태도다. “사실은 다큐보다는 순수사진을 더 좋아했어요. 다큐가 저에겐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어떤 거리감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거든요. 거기서 윤리적인 딜레마를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제 사진에는 늘 인물은 없고 풍경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진을 할 때는 못했던 부분들이 영화를 하면서는 가능해진 것 같아요. 배우와 협의가 되어있으니까, 대상에 다가가는 게 편하더라고요. 결과적으로 사진이 영화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죠.” 이수진 감독의 이야기들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갈등이 절정에 오르는 순간보다는 그 이후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춘다. “청개구리 심보 같은 게 있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이 부분에 주목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 비껴나가는 방법을 선택해요. 비껴나가서 그 얘기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다른 그림이 만들어지거든요. 그게 제 영화가 가지는 차별점인 것 같아요.”
더불어 ‘한공주’는 공주가 당한 폭력에 대해 과감한 묘사를 선택했다. 사실 이러한 묘사는 비슷한 소재를 다룬 기존 영화들이 일부러 피해왔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꽤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들이기에, 그 충격을 스크린에서 재현해내기란 쉬운 선택이 아니다. “저 역시 자극적인 영상으로 충격을 준다거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액션보다는 리액션을 보여주려고 했죠. 선풍기가 돌아가는 장면으로 옆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떠올리게 하는 식으로 말이죠. 사건 현장에서 동윤이 빠져나가는 장면도 덜 자극적으로 보이게 구성을 하려고 했어요. 그때 사실 저는 동윤 아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어른의 냉정함과 비열함, 우선 내 자식을 보호하고 싶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모습들이요. 그렇게 인물들의 리액션을 통해 관객이 상상하게끔 하는 것이 더 영화적인 언어라고 생각했고, 그 마음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그러나 이수진 감독은 <한공주>가 어떤 메시지를 담은, 어떤 영화라는 것만큼은 명확히 하고자 했다. “공주가 집단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가장 먼저 찍었어요. 그 이유는, 나도 스태프들도 우리가 무슨 영화를 찍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이 영화를 만들 때 단 한 컷도 쉽게 찍어서는 안 된다, 그게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이러이러하니까 이렇게 해석하면 돼, 라고 관객에게 말하지 않고 한 컷 한 컷 최선을 다해서 보여주고 싶었죠.”
그 다음 이야기
해외에서 총 14개의 상을 받았고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1년 동안 출장을 다니듯 전 세계 각국의 영화제들을 바쁘게 다녔다. 개막작으로 상영됐던 베를린한국영화제 때에는 한국의 개봉일정과 맞물려서 고작 하루 반나절 만에 돌아와야 했던 기억도 있다. “하도 일정이 빡빡해서인지 출장 다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정신이 멍해질 때도 있고.” 영화제 순회를 겸해서 머리를 좀 식혀야 했을 텐데 그럴 짬은 도무지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극장에서 개봉한 이후, 이미 영화는 관객들의 손으로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한공주>에서 완전히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듯하다고 했다. “약이라도 사다 먹어야 할 것 같아요(웃음).” 농담을 건넨 그가 멋쩍게 웃었다. 사실 그는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는다거나 하는 일로 크게 흥분하거나 들뜨는 성격은 아니다. 잇달아 수상소식을 들으면서도 오히려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강렬한 인장을 남긴 장편데뷔작이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 역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개봉하고 나서 다른 영화를 준비하다 보면 잊혀지겠거니 생각했어요. 일부러 다른 생각도 많이 하고 다른 이야기도 쓰고요. 그런데 시간이 좀 필요하긴 한 것 같아요. 유독 오래 갈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웃음)
최근 그는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위플래쉬 whiplash>(2014)를 인상 깊게 봤다고 한다. “이런 말 하면 사이코라고 할텐데(웃음), 공감이 많이 갔어요. 이쪽 일을 하는 사람들과 많이 닮아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요. 교수의 모습에서 감독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요, 학생의 모습이 감독이 되기 위해 나아가려는 저의 모습과 닮은 것도 같고요. 영화에서는 극단적으로 사이코처럼 묘사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것도 하나의 열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죠. 물론 영화도 훌륭했고요. 작은 영화처럼 보이지만 촬영, 미술, 조명, 연기할 것 없이 모든 게 조화롭고 알차요. 어느 관객이 봐도 이해하기 쉽게, 하지만 인물의 깊이감이 인상적이었어요.”
이수진 감독은 이제 그만의 길을 향해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쏟아낸 만큼 재충전을 하기 위해 책을 읽고 최근에는 새로운 이야기도 시작했다. 세 번째 단편 <적의 사과>를 끝냈을 때, 되도록이면 상업영화를 해서 스태프들과 도와주신 분들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한공주>를 통해 작가의 역량을 증명한 만큼 놓치고 싶지 않은 지점도 생겼다. “상업과 독립의 범위를 떠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게 상업적인 틀 안에서 만들어지면 너무 좋겠고요.” ‘한공주’ 개봉 즈음엔 뱃속에 있던 아기가 태어나 이수진 감독은 아빠가 됐다. 어느덧 쑥쑥 자라 걸음을 뗀 아이처럼, 그의 영화들도 계속해서 자라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 속 최고의 소품
1
8월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in August(1998)
감독_허진호
출연_한석규, 심은하
장르_로맨스, 드라마
<한공주>가 프랑스에서 개봉했을 때, 이수진 감독은 파리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꿩’이라는 소도시에서 대학생 관객들과 만난 적이 있다. 그 때 자신이 좋아하는 두 편의 한국영화, <학생부군신위>(1996)와 <8월의 크리스마스>를 소개했다. 그 중에서도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애정을 가진 영화다. “아들이 늙은 아버지에게 리모컨 조작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을 정말 좋아해요. 영화의 가장 큰 힘 중의 하나가 공감대를 만든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장면이 나에게 그랬기 때문이에요..
우리들도 스마트폰 사용법을 부모님께 설명해드릴 때, 부모님들의 연세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습득력이 굉장히 더디다는 것을 느끼게 되잖아요. 한번 가르쳐 준 것을 또 물어보고 또 물어보시니까. 그러다 보면 슬퍼져요. 부모님의 지각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구나, 늙어가고 계시는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이 굉장히 슬프잖아요. 그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소품이었죠.”.
2
섬 The Isle(2000)
감독_김기덕
출연_김유석, 서정, 서원
장르_드라마, 스릴러, 로맨스
소품이 인상적인 영화를 말해달라고 하니 이수진 감독은 가장 먼저 김기덕 감독의 <섬> 속 낚싯바늘을 말했다. “정말 강렬한 영화 속 소품이었던 것 같아요. 낚싯바늘이라는 것 하나로 많은 것들의 연상 작용을 일으키니까 말이에요.”
3
행복 Happiness(2007)
감독_허진호
출연_황정민, 임수정
장르_드라마, 로맨스
이수진 감독은 <행복>에서 연출부 미술소품 담당을 맡았었다. 그런데 기억에 남는 건 죄다 실수한 거라고 한다. 그 중 하나가 은희(임수정)의 영정사진이다. “은희의 영정사진을 준비해야 하는데 촬영 날짜는 다가오고 소품 팀에서는 나한테 빨리 컨펌을 내려달라고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정작 감독님께선 좀 더 고민해보라고만 하시는 거에요. 소품팀과 다양한 의견을 나누다가 ‘희망의 집’ 요양원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은희의 얼굴을 확대해 쓰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감독님도 한번 해보라고 하셔서 진행을 했는데, 막상 해보니 화질도 그렇고 뭔가 생각처럼 잘 나오지가 않는 거예요.” 결국 사진관에 가서 증명사진을 찍는 방법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다. “사진관 사장님이 유리는 어떻게 할까요? 했을 때 제가 필요 없다고 한 거죠. 어차피 촬영할 땐 유리가 반사 돼서 안 쓸게 뻔하니까. 근데 촬영에 들어가니 감독님이 “이거 왜 유리가 없냐? 유리에 빛이 반사되는 느낌이 잡혀야 하는데?”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차 싶었지만 그 곳은 장수였고 이미 밤이었다. 사진관은 당연히 문을 닫았고 촬영은 빨리 진행해야 했고, 비슷한 사이즈의 유리를 찾으려고 장수군에 있는 마을을 다 뛰어다녔지만 결국 유리를 빼고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허진호 감독님이 소품 하나도 꼼꼼하게 신경 쓰시는 분인데, 정말 죄송했어요.”
4
생선 쿠스쿠스 La Graine Et Le Mulet(2007)
감독_아브델 케치치
출연_사브리나 오아자니, 앨리스 하우리
장르_드라마
<한공주>는 지난해 11월 프랑스에서 개봉했다. 당시 프랑스 배급사 대표가 아브델 케치치 감독의 <생선 쿠스쿠스>의 DVD를 선물로 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 전에야 영화를 보게 됐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쿠스쿠스를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모로코에 갔을 때 먹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낯선 음식이라 손을 대지 않았던 게 지금 생각하니 아쉽기만 해요. 다음에는 꼭 먹어볼 테다!”
5
적의 사과 Enemy’s Apple(2007)
감독_이수진
출연_유승목, 이종필, 김기천
장르_드라마
이수진 감독의 단편 <적의 사과>는 시위대 진압에 나선 말단 전경과 시위대 중 한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서 대치하는 기묘한 풍경을 다룬 작품이다. 전경과 시위자는 잔뜩 긴장한 채로 전투태세를 갖추지만 늘어지는 시간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어버린다. 시위자는 전경에게 빼앗은 헬멧으로 위협을 가하는데, 전경으로서는 목숨처럼 소중한 헬멧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시위자의 모습이 코믹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그려진다. 감독 역시 <적의 사과> 속 헬멧을 중요한 소품으로 꼽았다. 이 헬멧은 자체제작이 아니라 의상업체에서 대여한 것이라 더 소중했다고.
By 송순진(영화저널리스트) | 사진_이준구(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