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박물관

한국영화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보물창고

기증된 영화유산

벌새

  • 제작 조수아, 김보라
  • 각본 김보라
  • 촬영 강국현
  • 음악 마티아 스턴이샤
  • 편집 조수아
  • 미술 김근아
  • 프로듀서 윤익준
  • 출연 박지후, 김새벽, 정인기, 이승연, 박수연
  • 제작사 에피파연&매스 오너먼트
  • 배급 엣나인필름
<벌새>는 열네 살 여자아이 은희에 관한 영화다. 성수대교가 무너졌던 1994년 대치동, 중학생 은희는 방앗간을 하는 부모님 그리고 언니, 오빠와 함께 살고 있다. 가족들에게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은희는 유일한 친구인 지숙과 물건을 훔치고, 날라리들의 명소 아베크 노래방을 간다. 그리고 옆 학교 남자아이, 같은 학교 여자 후배와 연이은 연애를 하며, 오지 않을 사랑을 찾아 섬처럼 떠다닌다. 이런 은희의 삶에, 그녀를 이해해주는 유일한 어른, 김영지 선생님이 찾아온다.
벌새는 꿀을 찾아 먼 거리를 날아다니는 작은 새이다. 감독은 주인공 은희가 벌새를 닮았다고 말한다. 벌새가 꿀을 찾아 끊임없이 날갯짓을 하듯 은희는 사랑을 갈구하며 헤맨다. 물론 그런 아이가 은희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가족, 친구, 선후배, 선생님에게 사랑받고 싶다. 그러나 세상은 때로 폭력적이거나 냉정하며 가끔은 어린 소녀 따위는 무시해버린다. <벌새>는 어린 시절 겪은 쓰라린 실패와 실연의 기억을 들여다보게 한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남동철]

김보라 감독 기증 <벌새> 의상, 소품

김보라 감독 인터뷰
몇 번을 봐도 여운이 깊고 오래 간다.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1994년을 배경으로 한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의 성장담이다. 그의 부모도, 학교 선생님도 그에게 “놀지 말고 좋은 대학 가라”고 잔소리를 하고, 성적에 예민한 수험생 오빠는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집안에서 골칫거리인 언니는 ‘비행’을 심심찮게 저지른다. 숨이 턱턱 막히는 집을 나오면, 절친인 학교 친구와 남자친구, 그를 좋아하는 여자 후배가 있다. <벌새>는 1994년이라는 시대적 풍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만, 그보다 은희를 둘러싼 세계를 겹겹이 쌓아올리는데 더욱 많은 공을 들인다. 그 덕분일까. <벌새>는 지난 1년 동안 많은 해외 영화제들을 돌며 무려 40개의 상을 탔다. 마침 청룡영화제 신인감독상을 타고 난 다음날인 지난 11월22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김보라 감독을 만났다.
김성훈
청룡영화상 수상 축하드린다.
김보라
이제 상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좋은 쪽으로 생각을 했다. 수상하게 되어 기쁘다.
김성훈
많은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지 않았나. 해외에선 이 영화를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궁금하다.
김보라
우리나라 관객들과 비슷한 맥락에서 보는 것 같다. <기생충>도 한국적이라고들 많이 하지만 해외에서 인정받지 않았나. 영화는 보편적인 언어같다. 예술 작품은 결국 보편적 언어로 닿는 것 같다. 꼭 어떤 지역에 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인 것 같다. 또 해외에서 ‘영화를 참 잘 만들었다’, ‘첫 영화같지 않다’, ‘스토리텔링이 성숙하다’, ‘내가 은희가 되어서 영화를 봤다’, ‘약간 홀린 듯이 봤다’ 같은 반응들이 주로 많았다. 앨리슨 벡델 이라는 만화작가와 인터뷰를 한 적 있다. ‘스펠바운드(spellbound, 마음을 다 빼앗긴)’라는 표현을 해주어서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김성훈
알려진 대로 <벌새>는 당신의 전작인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벌새>를 준비하기 전에, <리코더 시험>의 주인공 막내 은희 이야기를 확장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나.
김보라
<리코더 시험>을 본 관객분들이 은희가 어떻게 성장할지 궁금하다고 정말 많이 이야기해주셨다. 그냥 지나가는 질문이나 예의상 묻는게 아니고, 쪽지도 받고 많은 질문을 진지하게 받았다. 그래서 ‘진짜 이 아이를 성장시켜 볼까?’ 라는 마음이 생겨 2011년부터 구상을 해 2013년에 초고를 썼다. 그리고 <리코더 시험> 시나리오를 읽은 주변분들이 장편 해도 재밌을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해준 영향도 있다.
김성훈
<벌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2000)을 레퍼런스로 삼은 이유가 뭔가. 주인공의 연령을 고려했을 때 에드워드 양의 치정극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1991)을 먼저 떠올릴 법도 한데.
김보라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경우, 주인공이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를 죽인다? 그 점에서 동의가 쉽게 되지 않았다. 윤리적으로 옳은가, 아니면 그른가를 따지는 건, 영화가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만 어쨌거나 그 영화는 굉장히 남성의 서사인 것 같다. 실제로도 많이 일어나는 치정극이니까. 영화 자체는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많은 현실과 흡사해 훨씬 더 공포영화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 그리고 둘>은 에드워드 양이 좀 더 성숙해져서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세계가 그저 좋았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비해 러닝타임이 짧아서 되게 자주 본 영화이기도 하다.
스크린에 담긴 햇빛 하나까지 버릴 게 없을 만큼 완벽한 그림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벌새>에서 은희와 지환이 극장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을 찍을 때 실제 극장을 대관했다. 현장 프로듀서가 내가 <하나 그리고 둘>을 좋아하는 사실을 알고 그 극장에서 틀어주었는데, 촬영을 하는 도중에 <하나 그리고 둘>에 빠진 거다. 진행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가운데 영화에 감동받으니 스크립터가 ‘감독님, 영화에 완전 빠져들었죠?’라고 말하더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웃음)
김성훈
은희가 자신의 집을 잘못 찾아가는 <벌새>의 오프닝 시퀀스는 은희라는 소녀가 가진 불안감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점에서 꽤 의미심장하다.
김보라
첫 문장의 중요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오프닝 시퀀스를 정하는 과정에서 꽤 많은 고민이 있었다. 학교에서 시작하자, 성수대교 사건을 먼저 보여주자 같은 의견들이 있었는데 모두 오프닝 시퀀스로 적합하지 않는 것 같았다.
김성훈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또 어떤 오프닝 시퀀스가 있었나.
김보라
아주 초창기에는 은희가 벌을 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지각한 벌로 넓은 운동장에서 토끼 뜀을 하는 장면이었다.
김성훈
그것도 괜찮은 것 같다. (웃음)
김보라
어떤 징벌의 의미에서 시작을 하는 거죠. <리코더 시험>도 징벌에서 시작한다. 은희가 리코더를 안 가지고 와서 손을 들고 있는 장면으로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귀여워 보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질적인 어떤 불안감을 내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람들 앞에서 징벌을 받는 건, 그 아이에게는 되게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행위니까. 대학 시절 수학 과외 선생님이자 친오빠의 친구에게 오프닝 시퀀스에 대한 얘기를 해드린 적 있다. 그랬더니 그가 자신이 군 입대 시절 휴가 나온 이야기를 해주는 거다. 휴가를 나와 집을 찾아가 벨을 눌렀는데 집 안에서 강아지 소리가 들리니 ‘어, 우리 집은 강아지를 안 키우는데’라며 ‘가족들이 나를 버리고 떠났구나’라고 생각을 했다더라. 보통은 손님이 강아지를 데리고 집에 놀러왔거나 어머니가 반려동물을 입양하기로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나. 그때 그 오빠는 그 상황이 되게 절망적이었다는 거다. 그런데 자신의 어머니가 강아지를 안은 채 문을 열어주었다고 하더라. 이 얘기를 듣고 이런 설정으로 시작하자고 생각했다.
김성훈
오프닝 시퀀스로 달리는 장면을 선택하지 않은 건 청춘영화나 성정담의 클리세라고 판단했기 때문인가.
김보라
그렇다. 학원물로 시작하는 느낌이 드니까. 후반작업하는 과정에서 현재 영화 속 오프닝 시퀀스를 빼자는 의견도 있었다. 모니터링을 하는 과정에서 줌아웃되는 카메라의 움직임 때문에 공포영화냐는 지적도 있었다. (웃음) 강국현 촬영감독님 또한 자신이 찍어 놓고 ‘이거 진짜 잘 찍긴 했는데, 너무 힘준 거 같으니까 빼셔도 된다”고 뒷걸음질 치려고 하는 것 같더라. (웃음) 원래 현장에서 그 줌아웃 숏을 찍을 계획이 없었는데 강 촬영감독님의 주문에 따라 찍었는데, 나중에 후반작업에서 보니 정말 좋더라.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오프닝 시퀀스에서 등장하는 줌아웃 숏을 좋아해줘서 촬영감독님께 되게 고마웠다.
김성훈
이 오프닝 시퀀스가 중요한 건 영화의 주요 배경인 아파트가 어떤 구조인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김보라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복도형 아파트를 염두에 두었다. 아파트를 찾는 전담 스탭이 한 명 있었다. 대학교 강의하던 시절 제자가 있었는데 그가 방학 때 영혼을 다 바쳐 아파트만 구하러 서울을 헤집고 다녔다. 얼마나 돌아다녔으면 한 달이 지난 뒤 보니 그의 팔이 새카맣게 타 있었다. 미안한 동시에 감동적이었다. 서울 시내에 있는 재개발 아파트를 모두 뒤진 덕분에 이야기의 실제 배경인 대치동 은마아파트, 미도아파트를 찾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김성훈
박지후와 김새벽의 어떤 점에서 은희와 영지 선생님에 각각 적합하다고 판단했나.
김보라
김새벽 배우와의 첫 만남에서 대본 리딩을 했다. 박지후 배우와 함께 하는, 가볍게 시작한 리딩인데 나와 스크립터가 감동해 울었다. 리딩만으로도 폭풍 감동을 받다니. 김새벽, 박지후 두 배우가 대사를 하는데 ’내가 쓴 대사에서 살아있는 냄새가 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사무실에 온기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 신기한 경험이라 집에 와서 페이스북에 이 아름다운 예술의 감동에 대해 글을 올리기까지 했다.
김성훈
김새벽씨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내내 동선과 행동 그리고 대사의 톤 때문인지 유령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보라
그런 의견을 많이 들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영지는 이세상 사람이 아닌, 비현실적인 인물 같다는 의견도 많이 들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느낌을 갖고 자살할 줄 알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감상들이 영화에 녹아들 수 있는 것은 배우의 몫이다. (김)새벽씨는 시나리오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지문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배우다.
촬영 당시 새벽 씨가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당시에 참 안타까웠지만 영화에서는 아이러니하게 더욱 역할에 잘 맞아졌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원래 상태로 돌아와 줘서 다행이다.
김성훈
정인기씨는 성미산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공부하지 말고 신나게 놀아라’는 내용의 자작곡을 들려주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런 그에게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은희의 아버지 역할을 맡기게 된 이유가 뭔가.
김보라
(웃음) 실제로 가부장적인 사람이 가부장 연기를 하면 별로다. 그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가부장적인 역할을 하면 뭔가 더 싫어 보이는 느낌이 있다. <리코더 시험>때와 똑같은 배우와는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아빠역할 만큼은 정인기씨 말고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김성훈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김보라
말로만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웃음) 여러 제안이 들어오고는 있다. 마음을 다하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김성훈
한국영상자료원 수집캠페인을 통해 귀중한 의상들을 기증해주셨다. 소감이 궁금하다.
김보라
<벌새>의 자료들이 영구보존 된다니 감사할 뿐이다. 수집캠페인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이런 아카이빙 활동이 더 활발해진다면 많은 창작자들이 촬영 전에 미리 아카이빙 계획을 세울 것 같다. 제작사와 제작자가 체계적인 아카이빙을 준비하면 좋겠다. 다음 영화도 자료원에 기증하겠다.
글 김성훈(<씨네21> 기자) ㆍ 사진 김성백(스튜디오 “오늘의 나” 작가) ㆍ 편집 수집팀 홍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