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순진
<똥파리>로 돌아가 보자. 영화를 완성한 이후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었다고 들었다.
양익준
초반에는 이유를 모르고 시간만 보냈다. 어느 날 강수연 선배가 “너 왜 이렇게 무식하냐”고, “아프면 빨리 병원에 가야지” 하시더라. 그래도 계속 안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화를 좀 내시면서 병원 예약을 잡아주셨다. 아무래도 강수연 선배가 워낙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하다 보니 나 같은 증상을 가진 분들을 많이 본 모양이다. 이제 데뷔작 하나 찍은 놈이 골골대고 있으니까 걱정도 되고. 그래서 병원에서 MRI도 찍고 검사를 했는데 증상이 안 나왔다. 우울제 처방을 해주셔서 3개월 정도 약을 먹었는데 효과도 없고. 다른 병원에 가서 딱 하나 증상이 나왔던 게 있는데, 뇌파가 주기적으로 3-10초 정도 끊긴다고 하더라. 컴퓨터가 다운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았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면 좀 낫다.
양익준
그때에 비해서는 많이 좋아졌다. <똥파리> 직후에는 뭘 하고 싶다는 욕구 자체가 다 달아나버린, 무 감흥상태에 빠졌었으니까. 그때는 어느 기자와 인터뷰에서 “양익준이 영화, 연출 다 때려치우고 죽었다고 써 달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런 때가 있지 않나. 평범하게 살다가도 한계치에 도달하는 순간들. 그때 내가 딱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좀 여유가 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고 할 수는 없다. 원래 그렇지 않았는데 진짜 예민해졌다. 두 가지 이상 신경 쓰이는 게 생기면 아무것도 못한다. 연기할 때도 제작진들 외에 제 3의 인물이 시야 안에 들어오면 불편할 정도로 예민해졌다. 한번 그렇게 변해버리니까 원상복구가 안되더라.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그냥 다들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 더 둔해지고 더 초연해질 것 같은데 아닌가 보다. 나이가 들면 더 예민해지니까 자기가 가는 식당, 만나는 사람들, 자기의 세계를 더 알차게 만들고 불편함이 없게 만들어나가는 게 아닐까 싶다.
송순진
<똥파리>의 여파가 너무 심했다. 혹시 후회하지는 않나?
양익준
후회란 단어가 머릿속에 없다. 후회할 시간도 없이 ‘훅’ 지나갔다. 어차피 한 번 큰 변화가 있었어야 할 나이기도 했고, 아예 싹 갈아엎어지는 상황이 오니까 이런 증상이 오나 보다 싶다. 또 데뷔작 찍고 주목도 많이 받았잖나. 그러면서 내가 겪어보지 않았던 현실을 겪었는데, 꼭 판타지를 겪는 것 같다. 현실감각이 없다. 요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고 있는데, 「1Q84」를 보면서 되게 공감했다.
송순진
건강 문제로 공백이 길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2010년에 <집 나온 남자들>에서 연기로 빨리 복귀했다. 각종 드라마와 영화 등 배우로서는 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듯하다.
양익준
이런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요즘 연기는 온전히 일로 한다. 나는 영화 연출과 연기를 무척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내 안의 답답했던 것들을 쏟아내고 싶었는데, 그 매개체가 연기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매개체가 내 안의 무엇을 받아주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쏟아낼 수 있으려면 내가 맡은 역할이 나와 비슷하거나, 또는 지르고 ‘지랄’할 수 있는 역할이어야 하는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단역, 조, 조연까지 두루 하다가 “그래도 연출은 그래도 내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글도 쓰고 단편도 연출했다. 그러다 <똥파리>로 내 얘길 픽션으로 만들면서 다 쏟아냈고 연기에서 연출로 자연스럽게 넘어왔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 이제 다 하기 싫은 거다. 연기, 연출뿐 아니라 제작까지 하면서 혼자 회사를 운영하고 경비 처리며 돈 관리도 다 했더니 그 경험에 너무 지쳐버려 일시적인 염증이 생긴 것이다. 감응이든 감흥이든 못 느끼는 상태가 계속됐고 공황장애도 6-7년이 됐다. 그런데 쭉 해왔던 일이라서 그런지 연기할 때만은 증상이 없다. 딱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현장이 연기에 집중하기 좋은 환경을 못 만들어준다고 하면 마찬가지로 힘들어지겠지만, 지금까지는 크게 그런 문제가 없어서 종종 연기는 할 수 있게 됐다.
송순진
한창 힘들었을 땐데, <집 나온 남자들>은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양익준
처음에 <집 나온 남자들>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지쳐있는 상황이었고 그 얘길 다 이하 감독에게 했다. 지금 아무 감흥도 못 느끼고 어지럽고 뭐 그런 얘기들. 그런데 감독이 다 받아주더라. 본인이 힘들었던 당시의 상황들 얘기도 해주고. 그게 서로 맞았던 것 같다. 물론 하고 싶다 아니다를 떠나서 일단 참여한 작품은 열심히 하니까, 촬영 당시에는 즐거웠다. 흥행성과는 좋지 않았지만(웃음).
송순진
<똥파리> 이후 출연한 상업영화와 드라마에서 공교롭게도 상훈의 재해석으로 보이는 캐릭터가 많았다.
양익준
그런 캐릭터가 계속 온다. 사실 나는 아주 착한 사람인데!(웃음) 현실의 양익준은 기본적으로 즐겁고 편안하고 재미있고, 약간 바보 같이 실수도 하고 이런 타입이다. 요즘 예민해져서 조금 까칠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화를 내는 타입도 아니다. 그런데 <똥파리>에서 그렇게 나와 버리니까 그런 캐릭터들이 제안이 오는 거다. 일본영화 <가족의 나라>(2012)에서는 항상 째려보는 감시원, 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2012)에서는 건달, <감격시대: 투신의 탄생>(2014)의 캐릭터는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어쨌든 조직의 대장, <괜찮아, 사랑이야>(2014)에서는 머리까지 허옇게 해가지고 완전 미친놈으로 나온다. 하긴,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범도 완전히 나쁜 놈은 아니고 그 안에 고통과 아픔이 있어서 다른 식으로 막 나오는 것이긴 하다. “아파요!”라고 울부짖고 있는데 주변에서는 알아주지 않고, 안 들어주니까 화가 나는 상황. 그렇게 따지면 비슷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연기도 했었다. 일본영화 <중학생 마루야마>(2013)라고, 배우 겸 가수 초난강과 같이 출연했다.
양익준
부천국제영화제에서 한 번 상영했는데 초난강 팬들이 엄청 왔었다. 팬 미팅 현장 같았다. 연출은 쿠도 칸쿠로라고 유명한 드라마 작가 겸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 거기다 음악과 연기도 종종 하시는 분이 했는데, 그 분의 세 번째 작품인가 그렇다. 나는 일본에서 가전제품 수리공으로 일하는 한국 남자로 등장했다. 주인공은 중학생 남자애고 그 가족들이 또 못지않은 캐릭터들인데, 그 중 엄마가 한류 드라마에 빠져 있어 집에서 내내 한류 드라마를 본다. 그런데 어느 날 DVD가 씹혀서 멈춘 거다. 그때 보고 있던 드라마가 <사랑의 창란젓>인가? 그런 웃기는 제목의 이상한 드라마였다. 그래서 수리공을 불러 고치고 있는데, 알고 보니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 수리공과 동일인물인 거다. 사실 내가 맡은 인물이 욘사마 같은 유명 한류스타인데, 그 생활이 싫어서 일본에서 전자제품 수리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설정이다. 그 엄마가 나를 알아보고, 그래서 썸씽이 일어나고(웃음). 또 중학생 주인공의 판타지 속에서는 킬러로 나오는데 이름이 ‘불고기’다. 팔뚝에 ‘남대문’이란 한글로 문신 그리고(웃음).
양익준
이 양반이 굉장히 골 때리는 영화를 많이 만든다. <한밤중의 야지 기타>(2005), <소년 메리켄사쿠>(2008) 등이다. 에도 시대 게이 커플이 현실에 나타나 오토바이 타고 가는 그런 영화인데 정말 웃긴다(웃음). 일본에서도 ‘병맛’ 영화 중 최고라고 하더라. 웬만한 연기자보다 더 유명하고 심지어 그를 신격화 하는 사람도 있다. ‘병맛’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밤중의 야지기타>, <소년 메리켄사쿠>, <중학생 마루야마> 이렇게 세 편을 보시면, “아, 이런 영화도 있구나” 할 거다.
송순진
일본과 교류가 많은 듯하다. <똥파리>가 일본 개봉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그게 계기가 됐나?
양익준
일본의 문화인과 영화인들이 <똥파리>를 많이 봤다. 일반 관객은 얼마나 봤는지 정확한 수치는 잘 모르겠지만 4~5만 명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에 일본에서 한국영화가 하향세에 접어든 시기였기 때문에 그 정도면 매우 흥행한 셈이었다. DVD 샵에서 렌탈도 좋았고 공중파에서도 계속 소개를 해줬다. 그렇게 두루두루 영화를 많이 본 덕분에 인연이 많이 생겼다. 일본 영화 출연도 그 덕에 한 셈이다. 그래서 2011년부터는 거의 1년에 3개월씩은 가 있었다. 두 달, 세 달 정도 해서 다 합치면 거의 1년은 될 거다. 영화제나 일이 생기면 1년에 4-5개월 있을 때도 있었고.
송순진
최근에 김태용 감독의 <거인>(2014)에도 잠깐 출연했다. 김태용 감독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양익준
김태용 감독이 <똥파리>의 제작부 스태프였다. 스태프의 학교 후배라는 이유로 억지로 데려 온 것 같더라(웃음). 그런 인연으로 <거인> 때 나한테 연락이 왔다. 그때가 드라마 <감격시대: 투신의 탄생>을 찍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시나리오가 좋았다. 이야기에 맺음이 없는, 무척 묘한 시나리오였는데, 뒤에 여운이 남는 게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