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필
완득이’(47억)나 ‘우아한 거짓말’(30억)에 비할 때 예산이 두 세배에 달한다. 100억을 넘는 대작영화를 처음 경험했는데 제대로 판을 벌렸다고 할 수 있다. 이 안에서 하고 싶은 말을 잘 풀어냈는가.
이한
잘 모르겠다. 처음엔 전혀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예산 때문에 힘이 들어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들고. 꼭 만들어져야 하는 장면들 때문에 무리한 것도 있는 거 같고, 연출자로서 잘못 판단한 것도 많은 것 같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참 좋더라. 아이들과 한상렬 소위(임시완 분) 등과 함께 촬영하면서 마음만은 참 행복했고 좋았다.
이선필
흥행 여부를 떠나서 영화가 품은 감성이 좋다. 시간이 좀 지났고, 스스로 작품에 대해 곱씹기도 했을 텐데 돌이켜 보면 어떤 작품이라고 생각하는지.
이한
지금 생각해도 이건 안 바뀔 것 같은데 아이들을 통해 전쟁을 말하고 싶었다. 주변에선 전쟁을 더 다뤘어야 했다고 많이 얘기하더라.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바뀌진 않을 거 같다. 재밌는 사실이 인터뷰를 하다 보니 기자들이 말하는 가장 좋은 장면과 싫은 장면이 똑같다는 점이다. 아이들끼리 노래 배틀 하는 장면이 너무 좋다는 분이 계셨고, 또 너무 오글거린다는 분이 계셨다. 그래서 표현을 좀 중화시켰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은유보다 직유를 좋아한다. 평론가들은 좋아하겠지만 은유는 발견 못하는 관객도 많잖나. 그렇지만 나 역시 내 표현을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내 입장에서만 볼 게 아니라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연애소설’ 때도 그랬다. 기자들이 한 장면을 두고 호오(好惡)가 갈리더라. 손예진이 노래 부르는 장면이었는데 그때 감정을 다시 느꼈다. 어쩌면 이게 내 한계일 수도 있다.(웃음)
이선필
배우들의 운용이 돋보였다. 갈고리 사내 역을 맡은 이희준의 매력을 극대화시켰고, 임시완도 과감하게 다뤘다.
이한
임시완은 잘 하는 친구다. 사실 그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갈고리에 대한 애정이 컸다. 그 캐릭터가 중요하다 아니다를 떠나서 말이다. 사람들이 갈고리 이야기를 왜 그렇게 키웠냐고 한다. (악역이던 그가 착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에) 영화적 긴장감이 없어진다는 말도 들었다. 영화 속 갈고리가 무척 불쌍했다. 분량이 훨씬 더 많았는데 편집된 게 많다. 영화 흐름에 방해된다는 의견이 많아서 삭제를 많이 했다. 내 입장에선 갈고리에 대한 공감이 더 가게 하고 싶긴 했다.
이선필
그 지점에 바로 감독이 인간을 바라보는 정서가 투영된 게 아닌가.
이한
그렇다. 악인이라도 혹은 악인으로 보이는 사람이라도 변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오빠생각’에선 변화시키는 사람이 한상렬이지. 또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라도 어느 순간만큼은 착해진다. 물론 마냥 착하게 영원히 살진 않을 거다. 깨닫는 순간이 온다는 거지.
이선필
사람에 대한 믿음이 평소 굉장히 큰 것 같다.
이한
맞다.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가까이 가서 대화하고 부딪혀보면 사람 자체가 나쁘다고 하기 보단 상황이 그렇게 만드는 경우가 많더라. 사람은 선악이 공존하고 악의 시험에도 들지만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어떤 사람은 사이코패스는 어떻게 설명할 거냐 묻기도 하는데 그건 기계적으로 뭔가 잘못된 거니까 그런 사람들은 제외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이선필
평소 지론이 ‘오빠생각’에도 담긴 거 같다. 소재를 소모한 게 아니라 잘 가져와 감독의 생각을 투영시켰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전쟁영화의 전형성이란 게 또 있잖나. 실제 역사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소품과 의상이 그 전형성에 기대고 있을 법도 하다.
이한
우리 가족과 부모님은 ‘오빠생각’을 내 영화 중 제일 좋아하더라(웃음). 당시 소품 등은 기획할 때부터 철저하게 리얼리티로 가자고 얘기했다. 어떻게 보면 ‘오빠생각’ 이야기 자체는 영화적이다. 그래서 소품이든 의상이든 고증에 의존했다. 다른 한국 전쟁 영화를 참고하지는 않고, 전쟁 당시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상에 의지했다.
물론 군복은 배우에 맞게 크기를 조정했지만 디자인은 한국 전쟁 당시의 것과 같다. 지갑의 예를 들면 1950년대에 사용된 지갑 사진들을 펼쳐놓고 인물과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걸 선택했다.
이선필
소총이나 포 같은 무기도 전쟁 영화의 단골손님이다.
이한
소품 팀이 준비한 건데 진짜 총과 가짜 총이 섞여 있다. 진짜 총이 몇 정 안 된다. 열 몇 정 정도로 기억한다. 나머지는 다 모형 총이다. 비율로 치면 2대8 정도다. 그리고 전투신이 힘든 게 의상을 매일 빨아야 한다. 바닥에서 뒹굴고 그러잖나. 로케이션 촬영 때 숙소 안에 세탁기가 있었는데 그걸 계속 돌려도 감당이 안 되더라. 세탁기 몇 대를 공수해서 빨기도 했다. 항상 우리 숙소에는 군복들이 널려있었다(웃음).
이선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함께 작업한 분들이 임승희, 권유진 선생이다. ‘광해-왕이 된 남자’(2012) ‘명량’(2014) ‘국제시장’(2014) 등을 하신 분이잖나.
이한
맞다. 베테랑이시고, 국내 시대물은 거의 다 하시는 거 같다. 그만큼 노하우도 많으시고.
이한
난 처음부터 특정한 주문을 하진 않는다. 물론 '이랬으면 좋겠다' 정도의 제시는 하지. ‘오빠생각’에선 리얼리티로 가자는 말은 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맡겼다. 이런 식의 작업을 할 때 스태프 분들도 행복해하더라. “이렇게 해주세요!” 라며 요구할거면 기술자를 써야지 그 베테랑 선생님들을 왜 모시나. 내가 그 분들 보다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물론 중요한 장면에선 분명하게 요청한다. 그게 아닌 대부분에선 톤 앤 매너 정도만 말씀드린다. 아까 말한 리얼리티와 함께 동화적이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이선필
바로 그 동화성이 전쟁영화의 전형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력 중 하나다. 개인적으론 갈고리의 의상과 소품이 거기에 해당하는 거 같은데.
이한
맞다. 그 부분에서는 내가 주장을 좀 했다. 권유진 선생은 "갈고리가 빈민촌에 사니까 후줄근하게 입고 살지 않겠나"고 했는데 난 "물론 어디선가 주워온 것이겠지만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가장 자기가 세고 돋보일만한 걸로 꾸몄을 것"이라 말했다. 갈고리의 가죽 잠바와 말 장화 등이 그래서 나온 거다. 거지 소굴에 있다고 해서 정말 거지처럼 사는 게 아니라 나름 상상한 것이지.
이선필
후크 선장 같은 느낌의 동화적 인물일 수도 있겠다.
이한
그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피터 팬’의 내용이 잘 기억 안 난다. 읽어보긴 했을 텐데 정작 난 그 내용을 잘 모른다. 갈고리가 비슷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웃음).
이선필
박주미(고아성 분)의 옷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이 옷을 가장 정하기 어렵지 않았나.
이한
일단 권유진 선생께 감사드린다(웃음). 시대물이 이래서 힘들다. 고아성의 옷은 너무 현대적이어도 안 되지만, 동시에 밝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적 있다. 그래서 오드리 헵번을 많이 참고했다. 오드리 헵번이 은퇴 이후 계속 봉사 활동을 했잖나. 그때 그가 입었던 옷을 많이 참고했다.
이선필
전쟁고아들 옷도 다양하더라. 남방도 있고, 티도 있고. 이것은 고증인가 상상인가.
이한
고증이다. 당시엔 세계 각국의 원조 물품이 많아서 아이들 옷이 굉장히 다양했다. 청바지 입은 아이도 있고, 원피스 입은 아이도 있다. 대신 크기는 좀 크지. 우리나라 아이들이 워낙 작으니까. 형형색색 다 다른데 오히려 영화에선 그걸 좀 눌렀다. 너무 애들이 멀쩡해 보이면 안 되니까(웃음). 고증에 따라 옷을 제작하기도 했고, 아동복을 사서 아주 낡은 느낌으로 탈색하기도 했다. 그런 걸 ‘간지’ 작업이라고 하는데 동구 교복(정준원 분) 같은 한국식 옷은 대부분 제작했다. 한상렬 소위 옷도 제작한 거다. 예전 군인 사진들 보면 진짜 볼품없다. 옷이 구겨져있고, 크기도 크고. 근데 우리 영화 주인공이잖나. 어느 정도 피트 감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조정을 했다.
이선필
아이들 의복 선택 기준도 궁금하다. 아이들 마다 캐릭터가 다를 텐데.
이한
그렇다. 캐릭터를 정해서 거기에 어울리는 옷을 입혔다. 멋 내는 걸 좋아하는 아이에겐 원피스를, ‘까불’거리는 아이에겐 하와이안 셔츠를 입혔다. 그 시대에 원조를 받았다면 아이들 역시 자기 성격대로 옷을 골랐을 거 같았다. 동구는 나이가 어리지만 좀 어른스러웠으면 해서 교복 스타일을 입힌 거고 순이(이레 분)는 우리나라 아이를 상징하니까 한국식 옷을 입혔다.
이선필
돌이켜 보면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오빠생각’ 모두 유니폼과 일상복이 함께 등장한다.
이한
오, 그러네. 의도한 건 아니다(웃음).
이선필
그 동안 작업했던 영화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소품이나 의상이 있는가.
이한
아무래도 ‘우아한 거짓말’의 실타래겠다. 영화 속 중요한 인물 같은 존재였다. 실타래 색깔을 정하는 것만 해도 진짜 오래 걸렸고, 모양과 딱딱함의 정도 역시 고민 많았다. 의상은 ‘완득이’ 속 완득이(유아인 분)의 신발? 그것 역시 고르기 어려웠다. 본래 난 신발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가 왠지 낡은 메이커 운동화를 신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아인 완득이가 한 편으론 착하잖나. 아버지 때문이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들을 위해 장사하러 가는 아버지가 분명 사준 신발일 거다.
이선필
‘오빠생각’에서도 회심의 의상이나 소품이 있을 것 같다.
이한
동구와 순이 아버지 시체를 담고 간 리어카다. 자체 제작한 거다. 남매가 아버지 시체를 끌고 가는 장면을 굉장히 좋아한다. 아버지 발이 바닥에 닿으니 순이가 잡아서 올려주잖나. 되게 슬펐다. 이 아이들이 살아갈 앞날을 상징하는 건데 꿋꿋이 걸어 나가는 모습이 먹먹했다.
이선필
아이들을 노래하게 한 그 피아노는 직접 옛날 것을 공수한 건가.
이한
그때 당시 쓰던 것 중 소리가 제대로 나는 게 없다. 예전 피아노를 갖다 놓긴 했지만 아무리 조율을 해도 소리가 안 좋더라. 근처에 새 피아노를 두고 다시 녹음했다. 덕분에 소품 팀이 두 피아노를 이리저리 옮기느라 고생 좀 했다(웃음).
이선필
인물 배치와 함께 소품 배치도 그만큼 감독의 생각이 반영될 텐데 특별히 공을 들인 장면이 있는지.
이한
고아원과 교회 장면은 공을 좀 많이 들였다. 고아원 안에 2층 침대가 있잖나. 한국전쟁 당시에도 희귀했지만 있긴 했다. 너무 안락해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는데 그게 리얼리티거든. 적어도 빈민촌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길 원했고, 아이들로 하여금 그 장소에서만큼은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주기 원했다. 교회 창문 크기를 크게 한 것도 같은 이유다. 다 세트로 지은 것이다.
이선필
빈민촌은 어떻게 구상한 건가. 특히 갈고리 방엔 굉장히 많은 소품들이 있던데.
이한
미술감독이 제안한 건데 아까와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기 공간에 누가 들어올 걸 아니까 과시하고 싶을 거다. 자신의 힘을 안 감출 거 같았다. 본래 샹들리에도 준비했는데 넣진 않았다.
이선필
공을 많이 들였지만 소품이나 의상 면에서 편집된 장면도 있을 거 같다.
이한
제일 소품 팀과 미술 팀에 미안한 장면이 있다. 쓰레기 하차장 장면이 있었다. 동구랑 순이가 쓰레기를 줍다가 누군가 순이 걸 뺏어서 동구가 그를 때리는 장면이었는데 진짜 많이 준비했다. 쓰레기 수십 톤을 쌓아놓고 오래 준비했는데 내가 연출을 잘못해서 편집하게 됐다. 그 시대의 처절함이 느껴지는 장소였는데 너무 미안하다. 얼마나 넓었냐면 한 100미터 정도 길이를 쓰레기로 꽉 채운 정도였다. 편집할 때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이선필
그만큼 영화를 위한 준비과정 모두에 애정을 쏟고 있다는 의미겠다. 연출자 입장에서 영화 의상과 소품이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한
정말 중요하다. 학생 때 단편영화를 찍는다고 치면 그 중요성을 잘 모를 때가 많은데 지갑 하나, 양말 하나 등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도 정성들여 준비하면 그런 게 하나씩 모여 리얼리티가 된다. 배우의 연기나 대사 헤어스타일 등도 중요하지만 소품과 의상 역시 그렇다.
이선필
그 동안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결국 보통 사람에 대한 보통 사람에 의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론 위대한 권력자나 재력가가 아닌 세상을 바꾸는 이들은 바로 이런 보통 사람의 선한 의지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를 스스로 어떻게 정의하는지 궁금하다.
이한
어쩜 그리 똑같나. 조금이라도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더 실력을 키워야겠다. 고민도 더 하고(웃음). 다른 감독님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한국영화 감독님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배창호, 임권택, 박광수, 장선우 감독님 같은. 이 분들은 늘 영화의 중심에 사람을 두고 만드셨다. 이에 비해 좋아하는 외국 감독은 별로 없다. 대학교 다닐 때도 한국영화에 대해선 이한에게 물어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땐 한국영화가 외화에 비해 만듦새가 떨어진다는 말이 많았는데도 난 그렇게 한국영화가 좋더라. 시간이 좀 지나선 장이모우 감독 영화도 좋아하게 됐다. 내 짧은 머리도 그 감독님을 따라한 거다(웃음).
이선필
차기작 준비는 잘 돼가고 있는지. 웹툰을 소재로 한 19금 시대극이라고 들었다.
이한
바뀌었다. 그건 좀 미루게 됐고, 다른 걸 하고 있다. 아주 괜찮은 작품을 만난 거 같다. 원작이 있는 휴먼 코미디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