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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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된 영화유산

탐정 홍길동

  • 감독 조성희
  • 각본 조성희
  • 소품 유청(드림아트센터)
  • 의상 최의영
  • 출연 이제훈, 김성균, 박근형, 고아라, 노정의, 김하나, 정성화, 유승목
  • 제작사 ㈜영화사비단길
파겁 없고, 정 없고, 기억 없고, 친구 없고, 자비도 없지만 사건 해결만큼은 99%!
사람 찾는 데 하루를 넘기지 않고, 실패한 적도 없는 탐정 홍길동이 20년간 찾지 못했던 단 한 사람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를 죽인 원수 김병덕. 오랜 노력 끝에 드디어 그를 찾아낸 순간, 그는 간발의 차로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간 이후이고 그의 집엔 두 손녀, 동이와 말순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느닷없이 껌딱지처럼 들러 붙어 할아버지 김병덕을 찾아달라는 두 자매를 데리고 사라진 김병덕의 실마리를 쫓던 중 대한민국을 집어 삼키려는 거대 검은 조직 광은회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 홍길동. 조용히 복수만 하고 돌아서려 했건만, 성가시게 자꾸 판이 커져만 가는데…
2016년 5월, 나쁜 놈 위에서 노는 새로운 놈이 온다!
- 출처 : KOFIC

조성희 감독 기증 <탐정 홍길동>소품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주)영화사비단길) 조성희 감독 인터뷰
개성이 넘치는 작품을 만드는 감독에게는 남다른 수식어가 붙는다. 조성희 감독도 그런 감독 중 한 명이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영화에 ‘조성희 월드’라는 말이 사용되는 중이다. 이번 인터뷰에서 조성희 감독 자신은 그 표현에 거부감을 표현했으나, 지금까지 그가 만든 장단편 영화가 보여준 강렬한 존재감은 부정하기가 힘들다.
조성희는 상업영화 ‘늑대소년’(2012)으로 데뷔하기 전, 한국영화아카데미와 동 기관의 장편제작과정에서 만든 ‘남매의 집’(2009)과 ‘짐승의 끝’(2010)으로 일찍이 주목을 받았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으나 조성희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는 출발점은 ‘남매의 집’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앞서 만든 두 편의 영화를 보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번 글은 세 파트로 나누어 썼다.
첫 번째 파트에선 ‘남매의 집’과 ‘짐승의 끝’를 소개했고, 두 번째 파트에선 2016년 6월에 조성희와 가진 인터뷰를 실었다. 마지막 파트에는 그가 좋아하는 영화 속 소품 다섯 편을 간략하게 들어봤다.

조성희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는 길.
‘남매의 집’
철수와 순이는 반 지하에 위치한 누추한 집에 산다. ‘절대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진 아버지는 오랫동안 소식조차 없고, 아이들의 호졸근한 몰골은 그들이 어른의 보호 없이 방치되어 왔음을 말한다. 소년은 풀었던 문제지를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풀기를 반복하고, 절을 하고 싶다며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소녀는 하릴없이 크레용으로 벽을 칠한다. ‘별 대왕’을 그려놓은 순이는, 창밖의 사람들이 그를 대장으로 추종하는 걸 보았다고 일러준다. 그 때 벨이 울린다. 낯선 남자는 물을 달라고 했다. 5분만 머물다 나가겠다던 그는 다른 두 악당을 불러들인다.
‘남매의 집’은 단편영화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다. 이질적인 장르들을 놀랍도록 응집한 뒤 폭발시킨 조성희는 제한된 시간을 충만의 양식으로 꽉 채운다. ‘남매의 집’은 두려움의 근원에 접근하는 공포영화이고, 현실의 폐소공포증을 미래사회의 묵시록으로 뒤바꾼 공상과학(SF)영화이고, 한정된 공간 속에 극단적으로 기괴한 인물들을 몰아넣은 실험극이고, 인간본성의 기저에서 윤리를 질타하는 드라마이고, 몸과 이성과 의지를 박탈당한 인간들의 코미디다. 불현듯 미래의 기억처럼 보이는 ‘남매의 집’이 정말로 무시무시한 이유는, 이 영화가 어쩌면 까맣게 잊힌 과거의 상처를 저장고에서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불한당들의 세계사’에서 ‘범죄적인 것이 구원과 역사로 칭송받게 되는 그런 반란’을 언급했다. 선한 아이들을 구원할 구세주의 자리에 사기꾼, 살인마, 정신병자가 침입해 위협하는 형세는 한국 근대사회의 비극을 암시한다. ‘수퍼맨’의 상징이 박힌 티셔츠를 입었으나 동생은커녕 자신도 지키지 못한 철수는 죽었다 살아난 새를 멍하니 쳐다본다. 약 기운으로 부활한 새는 과거의 새와 동일한 생명체일까, 그리고 새장 속의 새를 과연 새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남매의 집>은 ‘아기 돼지 삼형제’에서 읽은 동화 같은 일들이 현실에선 벌어지지 않음을 다시금 깨우쳐 주는 잔혹한 동화다.
‘짐승의 끝’
을씨년스러운 겨울의 벌판, 순영은 택시를 타고 시골의 엄마에게 가고 있다. 엄마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집으로 오라고 편지했던 터다. 순영이 전단지 문구를 웅얼거리는 사이, 야구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택시에 합승한다. 그는 무례하고 섬뜩한 남자다. 택시 기사와 순영의 전력을 다 안다는 듯 까발리던 그는 곧 세상의 전기가 다 나가버릴 거라고 말한다. 마침내 그가 장담한 순간이 오자 순영은 정신을 잃는다. 얼마 후 깨어난 순영은 휴게소를 찾아 길을 떠난다. 야구모자 남자가 때때로 던지는 메시지를 무시한 채, 순영은 길을 가다 외로운 소년을 만나고, 불친절한 커플을 만나고, 사악한 아저씨를 만난다. 사건의 연속과 시간의 흐름 속에 아무리 애써도 휴게소에 접근하지 못하는 순영은 점차 두려움에 빠진다.
일군의 작가에게 디지털은 응시와 명상, 그리고 관찰의 무기다. 그들은 흐르는 시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 담기를 즐긴다. 예를 들어 장 끌로드 루소가 16mm 카메라로 찍은 ‘폐쇄된 계곡’(1995)의 낯선 풍경은 디지털영화 시대에 이르러 아주 낯익은 것이 됐고, 관객은 모호한 것의 의미를 읽도록 종용하는 디지털의 폭력 앞에서 상상력을 검증받는다. 조성희의 디지털은 그런 경향에 역행한다. 그는 '짐승의 끝'의 배경인 겨울날의 오후를 체감 상 수십 시간에 이르도록 늘여놓는다. 덕분에 짧은 겨울의 오후는 끝나지 않을 악몽의 시간으로 버티고 선다. 어둑어둑한 저녁이 밤으로 넘어가는 장면에서도 조성희는 영화적 트릭을 구사한다. 단 몇 분에 걸쳐 급박하게 시간을 돌려 새까만 밤을 문득 스크린 위로 투사한다. 그가 시간을 뒤트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미지와 이야기의 짜임새를 갖추기 위해서다. 낮은 채도의 차갑고 눅눅한 질감으로 스릴러와 드라마의 극한을 시험하는 조성희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동행을 여전히 믿는 사람이다.
붕괴에 이른 세상을 그린 '짐승의 끝'은 묵시록의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세상의 마지막 아이를 잉태한 소녀의 이야기에서 잠시 '칠드런 오브 맨'(2006)이 연상되지만, '짐승의 끝'은 아이의 탄생을 도울 원군은커녕 붙잡을 만한 마른 가지조차 구할 길 없는 건조한 영화다. 그나마 가까운 친척은 미하엘 하네케의 ‘늑대의 시간’(2003)일 것이다. ‘늑대의 시간’에서 시골 별장을 방문한 부르주아 가정이 이내 피난처와 물을 찾아 헤매는 유랑자 신세로 전락하는 것처럼, ‘짐승의 끝’에서 아이의 쉼터가 필요해 시골로 내려간 소녀는 곧 생사의 기로에 맞닥뜨린다.
소녀는 세상이 왜 종말에 처했는지 짐작하지 못하며, 간혹 마주치는 사람들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 두렵다. 기껏 하는 짓이라곤 하염없이 걷는 것뿐인데, 주인공 순영이 터득하는 단 하나의 진실은 회귀하지 못할 여정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순영을 포함한 각각의 인물들이 곤두박질하게 되는 상황은 딱히 잘못 행동한 결과라고 볼 수 없고, 인물들은 도덕적 판단이나 얄팍한 동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런 까닭에 ‘짐승의 끝’은 ‘비장감 없는 비극성’이라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세상 끝에서 도착한 하드보일드 스릴러 ‘짐승의 끝’이 어떠한 희망도 약속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를 지닌 소녀가 “아무도 믿지 말자”라고 다짐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닌 거다.
두 편의 영화 ‘남매의 방’과 ‘짐승의 끝’에서 추출 가능한 조성희 영화의 비밀은 ‘변증법적 드라마’다. 동시대의 영화들이 일상의 인물과 평범한 이야기의 시시한 둥지에 머물 동안, 조성희는 일상의 인물을 신화적 이야기 속에 집어넣는다. ‘남매의 방’이 ‘실패한 영웅의 신화’를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짐승의 끝’은 ‘수태고지’와 ‘오디세이’와 ‘빨간 망토(소녀의 분홍색 더플코트를 기억하라)’와 ‘처녀의 샘’을 뻔뻔하게 뒤섞은 반죽 위로 21세기의 동정녀를 장식한다.
곧이어 그녀에 대립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양 극단에 배치된 인물들은 고유한 성격을 전혀 손상당하지 않은 채로 각자의 극점을 향한다.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용서하지 않으며, 기이한 폭력 앞에서도 좀체 주눅 들지 않는 극점의 인물들은 서로를 지양하는 무시무시한 영화적 존재들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엔딩 직전에 ‘변증법적 프로세스’를 뒤집어버리는 행위다. 일종의 허무에 가까운 조성희 영화의 엔딩은 자기 드라마의 기본인 변증법의 생산적 가치마저 뒤흔든다. 중용을 불허하는 조성희는 알프레드 히치콕 유의 스릴러는 결코 만들지 않을 것 같다.
Props Talk : 소품 프로젝트의 특성을 살려 이번 인터뷰에서는 소품에 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제작과 개봉이 한참 지난 한국영화의 경우
소품을 찾는 게 쉽지 않다. 독립영화라면 더하다.
이용철
‘조성희 월드’라는 표현이 사용되더라.
조성희
딱 10년 됐다.(웃음)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시작은 그리 인상적이진 않았다. 강예원이 여자 주연 배우로 캐스팅된 것을 시작으로 영화사 대표가 오랫동안 어렵게 준비했던 작품이었다. 감회가 새롭다. 독선이나 아집도 부리지 않고 열심히 했다. 이유가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제작사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배우들과의 호흡도 최대한 맞췄다. 과거와는 다르게 접근해서 힘을 빼고 연출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10년 전 영화와 다르게 접근하고 있어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이용철
타협 혹은 성숙, 어느 쪽인가?
조성희
연속으로 만든 두 영화의 무드랄까, 그런 게 약간 비슷해서 그렇게 봐주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상업영화를 두 편 만들었을 뿐이고 앞으로 해야 할 영화들이 더 많다. 그런 상황에서 ‘조성희의 세계’ 같은 게 있다면 오히려 부수고 다른 곳으로 가야 된다. 가지고 가야 할 것, 앞으로 만들 영화에 일관되게 유지될 것은 아직 없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잘못된 표현이라고 본다.
이용철
영화의 속도가 빨라졌다.
조성희
앞서 만든 작품들의 경우 복잡한 얘기가 아니었다. 단순하고 스트레이트했기에 느리게 느껴졌다면,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하 ‘홍길동’)은 캐릭터나 사건이 많고 복잡해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전개된다. 한정된 시간 내에 관객에게 전달해야 할 것들이 많아 바쁘다는 인상을 준 것 같다. 애초 첫 번째 편집본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전체적으로 느리다는 것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편집 기간이 길었는데, 모니터 시사를 통해 관객의 반응을 들어본 결과를 편집 과정에서 압축하는 쪽으로 반영했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훼손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나리오를 쓰고 고치는 과정처럼 받아들였고, 현재 한국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 중의 하나로 판단했다.
이용철
제목에서부터 캐릭터 영화임을 선언한다.
조성희
‘홍길동’은 캐릭터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영화다. 주인공의 이름이나 별명이 곧 영화의 제목이 되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부러웠다. 소위 ‘맨’이 제목에 들어가는 영화들, 영화보다 인물 자체에 관객들이 영화하는 영화를 한국에서 시도해 보고자 한 게 이번 영화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제목에서부터 전면에 내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기보다는 기존의 인물을 가공하는 쪽이 편하겠다 싶더라. 홍길동(이제훈 분)을 선택한 이유는 재미있는 요소가 많은 인물이어서다. 도술을 부리고 적에게 환각을 보게 해 위기를 모면하고 속임수를 쓰는 반면,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려는 거대한 야망을 지녔다. 또한 자기 출신에 대한 엄청난 콤플렉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분노, 어릴 적 가출로 인한 어머니에 대한 염려가 여러모로 충돌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예전에 ‘다크맨’을 보던 중에 “나는 어디에나 있으면서 아무데도 없다”는 대사를 인상적으로 들었다. 한국에서 흔한 이름인 홍길동이 주는 느낌이 그랬다.
이용철
제목이 너무 예스럽지 않나.
조성희
사극, 애니메이션, 아동용 영화로 여러 번 만들어진 소재다. 그래서 구식 인물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은데, 제작하는 당사자로서는 그런 것들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초고부터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정해져 있었다.
이용철
언젠가 게임이나 만화에서 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레퍼런스로 삼은 작품이 있나.
조성희
요즘 미국 드라마나 만화책을 보면, 시청자나 독자들이 열광하는 특이한 지점이 있다. 주인공이 좋은 사람은 아닌데 다행스럽게 우리 편이다. 그러한 반영웅 캐릭터를 시도했다. 남성으로 완성되지 않아 딱히 멋있지 않은 남자, 싸움을 엄청 잘하거나 초인적이고 근사한 육체를 지니지도 않은 남자는 생각하지 않았다. 부를 축적했다거나 왕년에 무슨 요원이었다는 식의 설정을 피해, 인격적으로 좀 결함이 있고 철딱서니 없으며 도덕적으로도 조금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 인물. 그런데 불리한 점이 많다 보니 주인공으로 위험했다. 영화 주인공으로서 자격이 없어 보이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작품을 쓴 나 자신은 그의 매력을 너무 잘 알고 있으나 그게 영화에 어떻게 담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레퍼런스는 일일이 밝히기 힘들 정도로 많다.
이용철
캐릭터의 특성 상 연작을 염두에 두었을 거 같다.
조성희
지금 상황으로는 후속편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한데, 처음 시작할 때는 연작을 의도했다. 탐정이란 수식어가 앞에 붙는 홍길동을 빌려, 제임스 본드나 스파이더맨 같은 조금 과장된 캐릭터를 한국에서 도전해 보겠다는 야망은 컸다. ‘홍길동전’을 보면 홍귀동, 홍일동이라는 이복형제가 있다. ‘홍길동’의 강성일(김성균 분)은 둘째 형인 홍일동에 해당한다. 속편에서 맏형인 홍귀동을, 이어지는 3편에서 아버지인 홍지상에게 도전하는 설정이었다. 영화에 담지 못한 밑 배경을 따로 소설 형식으로 써두었는데 그게 무지 재미있다. 이번 영화에 등장하는 김병덕(박근형 분)이 길동의 아버지인 홍상지를 어떻게 만났고, 그가 왜 충성을 맹세했으며,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뒤에 왜 그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 다 써뒀다. 황회장(고아라 분)이 고인이 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게 된 사연 등도 나온다. 우습게 들리겠으나 우리끼리는 엄청난 작품이라 여겨 흥분했었다. 속편에서 그런 것들을 단서 삼아 꺼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마음이 아프다
이용철
장르는 누아르다
조성희
캐릭터 영화라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출발점으로 삼은 게 누아르 스타일이었다. 험프리 보가트가 출연하던 시절의 옛날 흑백영화가 멋있다고 생각해 그런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주인공, 그림자가 많이 나오는 영화. 그런 영화에 대한 포부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용철
결과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누아르가 아니다.
조성희
영화의 내용 말고 표현하려는 부분을 누아르에서 빌려오되 한국의 예전 분위기랑 맞게 변형시켰다. 말은 간단한데 많이 고민하고 공을 들인 부분이다.
이용철
왜 성인 남성들이 항상 나쁘게 표현되나.
조성희
이야기를 구상하고 시나리오를 쓸 때 그런 의도를 한 적은 없다. 쓰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게 있다. 그 말인즉 내가 성인 남성의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게 아닌가 싶다. 남자의 향기가 나는, 완성된 남자에 대해 잘 몰라서 못 쓰는 이유도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고 개인적인 문제인 셈이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면서도 극중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찍는 게 어색하고 욕을 하는 장면을 찍는 게 어렵다. 성인 남성에 대한 거부감 같은 건 없다. 오히려 그런 게 잘 표현된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 가까운 시일 내에 어른스러운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
이용철
남자 주인공이 소년 같아서 짝도 매번 순진한 소녀다.
조성희
머릿속이 단순해서 그런지 다양하지 못한 점은 인정한다. 꼭 그런 구조로 하겠다는 개인적인 룰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다 보니 그렇게 되니까 공교롭다. ‘늑대소년’(2012)과 ‘홍길동’에서 인물간의 관계가 상승하는 구조였지만, 정작 하고 싶고 매력을 느끼는 건 하강하는 관계다. ‘스카페이스’(1983) 같은, 혹은 ‘친구’(2001)나 ‘파수꾼’(2010)처럼 둘 중 하나가 폭주한다거나 관계가 뒤틀리면서 비극을 만드는 영화가 재미있지 않나.
이용철
상대가 소녀이어서 그럴까, 홍길동이 착한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조성희
캐릭터 영화이므로 관객이 인물을 어떻게 볼지, 얼마나 호감을 가지고 볼지가 숙제였다. 그 와중에 인물의 특성을 어느 정도로 조정할지가 고민이었다. 예를 들어, 길동이 인신매매단의 손가락을 자르려는 부분을 보고 거부감을 표하는 반응이 있었다. 그 시퀀스만 보고 앞으로 길동이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없이 보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블라인드 시사에서 고문하는 장면에서 반응이 확 떨어지기도 했다. 제가 의도한 건 방어적이지 않고 공격적인 캐릭터였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안 해도 되는 짓도 하는, 하나를 받으면 둘을 돌려주는,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악당들을 처치하는 캐릭터. 웃으면서 고문하는 그런 게 재미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니터 결과는 그것을 혐오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런 부분들이 많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용철
매번 시골 자연을 영화의 배경으로 삼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성희
시골에 산 적이 없으므로 향수가 있는 건 아니다. 이유라면, 아무래도 도시를 아직 잘 모르겠고 한국의 도시가 예쁘지 않아서다. 구글에서 한국의 도시를 검색해서 보면 예쁘지도 않고 너무 번잡해서 제대로 표현하려면 너무 많은 제작비가 든다. 예쁜 영화를 찍는 게 목적은 아니지만 건물과 컬러가 중구난방이고 아름답지 않는 게 거슬린다. 온갖 안 어울리는 색깔들이 뭉쳐 있는 느낌이어서 제대로 표현할 자신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도시를 보여주려면 심사숙고를 해야 하는데, 그걸 피하려다 보니 자꾸 시골로 가게 된다.
이용철
시골과 비슷하게, 시간 배경도 가까운 과거로 설정되어 있다
조성희
스태프 사이에 표어로 삼는 문장이 있다. ‘현실에서 60 허구에서 40’ 진짜 같은 거 60 퍼센트에 가짜 같은 거 40 퍼센트라는 점을 못 박아놓고 제작한다. ‘홍길동’이 198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한다지만 사실 고증에 안 맞는 부분이 많다. 시대적 고증은 물론 국적도 안 맞다. 진짜 같으면서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해놓고 제작하려고 한다. 1990년대 이후는 기억이 너무 선명하니까, 기억이 약간 닿지 않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했다. 단, 드라마 ‘응답하라 1988’처럼 정확한 고증 아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이야기 자체가 현실에서 발을 조금 뗀 것이기에 그것에 맞춰 표현을 해야 했다. ‘늑대소년’도 마찬가지였다.
이용철
역사와 사회의 은유로서 영화를 읽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조성희
작가와 감독이 영화를 만든 의도나 생각과 관계없이 보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해석해야 한다. 단, ‘홍길동’의 경우, 나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의도가 전혀 없다고 말하기엔 직접적인 단어 같은 것들이 많이 삽입되어 있다. 그걸 보고 다양하게 해석하는 건 당연하다. 예전 한국에서는 그런 일들이 아주 많이 벌어지지 않았나.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 말이다. 길동의 매력 중 하나는 나 내신 손을 더럽히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래서 극중 격하게 해서라도 되갚아 주도록 설정했다. 종교단체로 묘사된 광은회 같은 비밀단체가 존재하나, 그런 사람들의 명단이 있냐고 묻는다면, 하나회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게 사실이다. 단지 공포로 사람들을 다스리려는 그런 역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게 아니므로, ‘홍길동’이 그런 것을 의도했다고 말하기에는 부끄럽다. 또 하나, 그것은 ‘홍길동’에서 제일 중요한 주제가 아니기도 하다. 중요한 이야기는 그런 거다. 길동이 복수를 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낯선 공간을 여행하면서 자기 룰을 파괴하게 되고 캐릭터도 무너진다. 복수하려고 했던 사람은 복수의 고리를 자기 대에서 끊으려고 했던 자였다. 그런 것들이 이번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었다.

조성희 감독이 선정한,(순서는 영화 제작 년도를 기준으로 했다) 미술과 소품이 인상적인 영화 BEST 5
1
'나막신 나무 The Tree Of The Wooden Clogs‘(1978)
감독_에르마노 올미
출연_뤼기 오르나히, 프란세스카 모리기, 오마르 브리그놀리
장르_드라마
“업체 소품실에서 대여해 온 물건들이 아니다. 모든 것이 그 곳 그 시절의 진짜들”
2
'캐스트 어웨이 Cast Away'(2000)
감독_로버트 저멕키스
출연_톰 행크스, 헬렌 헌트
장르_드라마, 어드벤처
"다른 세계에서 다른 의미로 다시 태어나는 지극히 평범한 물건들."
3
'데스티네이션 Final Destination'(2000)
감독_제임스 왕
출연_데본 사와, 알리 라터, 커 스미스
장르_공포, 액션, 스릴러
"모든 소품들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그게 무엇이든 그걸로 죽는다."
4
'수면의 과학 The Science of Sleep'(2005)
감독_미셸 공드리
출연_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샤를로트 갱스부르, 알랭 사바
장르_코미디, 드라마, 판타지
상상력 넘치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의 축제
5
'마더'(2009)
감독_봉준호
출연_김혜자, 원빈, 진구
장르_범죄, 미스터리, 드라마
"골프공, 사과, 핸드폰, 쌀, 침 등 모든 극적인 순간에, 어떤 물건이 그곳에 있다"
By 이용철(영화평론가) | 사진_이상엽.최금자(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