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최근 한반도 정세가 평화 국면으로 급변했다. 남북이 서로 신뢰해야 한다는 영화의 메시지에 기시감이 되는데(이 인터뷰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전에 진행되었다: 편집자).
양우석
너무 잘된 것 같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 또한 <강철비>에서 묘사된 모습 그대로다. 남북정상회담과 북중정상회담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여진다. 관건은 북미정상회담이 아닌가 싶은데, 아무래도 북한과 미국이 오랫동안 관계가 단절됐던 까닭에 관계 개선이 쉽지 않고 시간이 걸릴 수 있겠다(6월 1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싱가포르에서 만나 비핵화와 새 출발을 합의했다: 편집자).
김성훈
<강철비>는 시나리오 작업부터 상영까지 진행된 과정이 박근혜 정권과 문재인 정권을 관통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의 메시지인 남북 화해가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나.
양우석
그런 예상도 했지만 <강철비>는 좀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기 위해 북의 엄철우(정우성)와 남의 곽철우(곽도원)의 말싸움에 의존하지 않았나. 영화 속 김정은은 말을 못하고 가급적이면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영화는 핵 위기가 발생했을 때 미국의 매뉴얼대로 움직이되, 직접 선택하는 한국을 그려내려고 했다. 또 보수와 진보가 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면서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의 이중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싶었다. <강철비>는 한국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행복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지난 정권이었던 2017년 말에 비하면 지금은 한국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전한 것 같다. 그럼에도 2017년 말처럼 북한과 미국이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상황이고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는 6월 이후에는 한반도 정세가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 할 듯하다.
김성훈
원작이자 당신이 작업한 웹툰 <스틸레인>(양우석, 제피가루) 얘기부터 해보자.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충격을 받고 북핵 문제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했다고 들었다. 당시 북핵 위기의 어떤 점이 충격적이었나.
양우석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부 장관이 1994년 북핵 위기 때 북한과의 전쟁을 검토했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지 않았나. 그때만 해도 국제사회는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는지 아닌지 잘 몰랐고 의심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6년, 북한은 공개적으로 핵실험을 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북핵 문제를 정면에서 바라보기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하는 듯했다.
김성훈
당시 <스틸레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상 상황을 대입해가며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양우석
관련 자료를 광범위하게 모았고 묘한 결론에 도달했다. 여러 정당이 각자의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한국과 달리 북한은 매파(강성파)와 비둘기파(온건파) 같은 라인들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는 체제다. 전쟁 없이 핵을 포기하게 하는 방법 중 하나가 ‘망하기 싫으면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고 북을 압박하는 거다. 북이 마냥 버틴다 해도 북의 어떤 라인은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그들이 저항하게 된다면 북한에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방법이 세습 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폭력의 형태로 표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가정 몇 가지를 종합해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
김성훈
청와대 행정관 박재익이 혼자서 서사를 이끌어갔던 원작과 달리 영화는 남한의 곽철우와 북한의 엄철우, 두 남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는데.
양우석
원작은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남북 관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갔던 시기라 북한 사람이 꼭 남한을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쓰기가 편했다. 하지만 남북 관계가 완전히 얼어붙은 지금, 사건을 펼치려면 북한 사람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양우석
두 남자 모두 1977년생으로 설정했다. 1977년 당시, 남한과 북한에 ‘철우’라는 이름이 유행했다. 또 영화 제목 ‘강철비’를 한자로 표기하면 ‘철우’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어떤 철우를 선택하는가의 문제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우리 머리 위에서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철우를 택할 것인가, 강철 같은 친구 철우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둘의 교집합에 해당되는 또 다른 철우를 선택할 것인가.
김성훈
두 철우의 공통분모는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사실이다.
양우석
이름이 같다는 사실은 오히려 둘을 서먹서먹하게 하고 겉돌게 한다. 그러다가 곽철우가 엄철우에게 “난 13살짜리 딸과 10살짜리 아들이 있다”고 자신의 가족사를 털어놓는 순간, 둘은 사적인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아버지, 가장이라는 공통점이 두 철우의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된다.
김성훈
북한 1호가 남한으로 피신하는 상황은 어떤 배경에서 구상한 설정인가.
양우석
실제로 박근혜 정권 때 개성공단에 한국 기업만 참여하게 하지 말고 중국 같은 제3국도 들어가게 하자는 의견이 심각하게 고려됐었고 몇 개의 중국 기업이 초청돼 개성공단으로 가기도 했다. 중국이 미국과 지금보다 더 대립하게 되어 ‘북한에 신경 꺼라’라는 입장으로 나오게 되면 중국 기업이 개성공단에 들어갈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개성공단과 남북출입사무소까지 거리가 7km에 불과하니 북한에서 쿠데타가 발생해 개성공단에서 영화 속 상황이 벌어지면 무조건 남으로 피신하는 게 안전하다.
김성훈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저마다 다르다. 최근 급변하는 국제 정세가 시나리오를 쓰고 현장에서 연출하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양우석
국제 정세보다 한국 정치 상황이 오히려 더 급변했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대통령 탄핵이 있었으니까. 북한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의 움직임은 웬만해선 예측이 가능하다. 외교는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까닭에 변수가 생기더라도 이익의 관점에서 본다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는 외교를 이익의 관점이 아닌 정치공학적으로, 감정적으로, 심리적 방어기제로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논란이 생겼다면 그건 우리가 아닌 우리의 세월이 왜곡시킨 거다. 그렇게 발생한 오해의 벽을 뛰어넘는 것이 <강철비>의 숙제다. <변호인>(2013) 때도 했던 얘기인데, 문학이든 영화든 사회에 공헌해야 할 의무 중 하나는 사이렌 역할이다. 불이 나면 불을 꺼야 하지 않나. 그러려면 사이렌이 울려야 한다. 북핵 문제는 환기되어야 하는 것으로, 영화로 접근하는 편이 오히려 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강철비>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너무 어렵지 않나’라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분들이 없다. 뉴스에서 우리 영화와 관련된 얘기를 너무 많이 해줘서.
김성훈
주변에서 ‘밀리터리 덕후’라는 얘기가 나올 만큼 미사일이 발사되는 과정이 매우 세세하게 묘사됐다.
양우석
한반도에 핵 전쟁이 벌어진다고 가정하면 당연히 고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쏘는 미사일 종류와 위치를 선정하고 북한 미사일도 정확하게 보여주는 건 관객에 대한 성의 문제였다. 무성의하게 글을 쓰거나 준비하진 않았다는 것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김성훈
<강철비>는 시대를 앞서나간 영화 같다.
양우석
쉽게 만들 수 없었던 까닭에 이 영화는 인생 마지막 영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북한과 미국이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는 게 아니라 한국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그 같은 가정에서 우리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거다. <강철비>는 445만여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의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한반도가 분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이용당해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 보람이 있다.
김성훈
개봉 당시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여러 의견이 나오지 않았나(웃음).
양우석
예상대로 양쪽 모두에게 껄끄러운 내용이었던 것 같고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웃음). 메이저 언론은 이 영화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선 욕하기도, 언급하기도 애매하고 껄끄러운 게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에게 닥친 상황이기도 하고. 북핵 문제나 한반도 정세는 국내 진영 논리에 따라 벌어진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 어느 편을 들려고 이 영화를 만든 건 아니지만 조금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진영 논리만으로는 북핵 문제나 한반도 정세를 풀지 못한다. 상업영화를 하는 주변 사람들은 이를 두고 바보 같은 판단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느 쪽을 편들었다면 좀 더 많은 관객들을 불러모을 수 있었을 거라고 아쉬워하셨다(웃음).
김성훈
한국영상자료원 수집 캠페인에 참여해주신 소감을 말씀해달라.
양우석
늦은 감이 있는데, 기증할 수 있게 돼 너무 잘됐다. 의상감독이나 미술감독이 만든 것들이 영구적으로 보존될 수 있으니까. 다음 영화도 촬영이 끝난 뒤 얼마든지 기증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