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900만 관객돌파 축하드린다. 소감부터 들어봐야할 것 같다.
이상근
관람해주신 모든 관객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반대로 반응이 안 좋았으면 큰일 날 뻔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흥행이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첫 상업영화 연출 작품인데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반갑고 기쁘다. 개봉하고 어안이 벙벙하고 현실적인 감각도 없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 와서 보면 정말 대단한 여름을 보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좋은 데뷔였다고 생각한다. 주변에서도 다들 좋아해주었다.
김성훈
많은 관객이 본 만큼 관객들 평도 다양하지 않았나? SNS나 영화 관련 커뮤니티에 올라온 평 중에서 맘에 들었던 평이 있나.
이상근
너무 많아서 하나를 정하긴 어렵다. (웃음) 매차 관람하면서 영화에 심어둔, 계산된 미술적인 장치들을 찾아내 트위터에 올리는 관객들이 있다. 대체로 연출한 장치들도 있지만 개인적인 재미를 위해 심어놓은 장치도 있다. 이름, 의상, 색깔 이런 데에 의미를 부여한 것들이 있는데 관객들이 그런 것들을 다 알아보고 의미부여도 많이 해주셔서 놀랐다. 이것이 쉽게 접근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데 꼼꼼히 찾으려고 하는 관객들이 놀이 문화 같은 재미를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김성훈
자신을 의무소방 출신이라고 소개한 관객이 남긴 관람 후기가 인상적이었다. 재난영화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재난 안전대책 현황’ 같은 메뉴얼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싶은 의도도 있었나.
이상근
적극적으로 관객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의도는 없었지만 영화에서 인물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다. 용남(조정석)과 의주(김윤아),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남게 할 것인가라는 면에서 현실적인 방안을 강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설정이다. 평소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지하철 바닥에 표시된 안내 점자블록 같은 것도 의미가 있고, 방독 구호함 같은것도 사진으로 찍어놓고, 위급 상황에 따라 생존 방식에 대한 조사도 따로 했다. 민방위 훈련에 가서 강사에게 연락처를 물어 따로 조사도 했다.
김성훈
민방위 훈련에서 강사 분들이 심심한 얘기를 하는 것보다 <엑시트>를 틀어주면 어떨까? 라는 생각도 했다. (웃음) 가령 어린이집에서 <엑시트>를 교육용으로 틀어주면?
이상근
사실 현실에 안 맞는 부분이 더 많다. 이를테면 방독면 정화통 같은 것도 교체할 때 10분 이라는 시간제한도 설정을 한 것이고, 어떤 가스인지에 따라 다르고 하루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방독면도 있다고 한다. 영화에서 보여준 방식들이 정확하기 보다는 영화를 위한 개연 성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김성훈
처음 이야기의 출발이 궁금하다. 어떻게 가스테러 재난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게 되었나?
이상근
예전 옴진리교 사건도 있었고, 사회적으로 유독 가스가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전문가들이 유독가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걸 들었다. 유독 가스 종류에 따라, 공기와 무게의 차이에 따라 10미터 이상 안 올라가고 깔리는 가스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더라. 그때 딱 떠오른 이미지들이 있었다. 안개 도시같은 느낌과, 그 위에 있는 사람들이 갇혀있으면, 그 속에서 방독면을 쓴 청년들이 뛰어다니는 그런 생경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 아이디를 메모해 놨다가 점차 발전시켜나갔다. 보통 한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글을 쓰기 시작하는 편이다.
김성훈
용남 어머니(고두심)의 환갑잔치 시퀀스는 지금까지 봐왔던 한국영화 속 환갑잔치 중에서는 가장 한국적으로 묘사한 것 같다. 이 장면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어떤 고민을 했나.
이상근
식구가 많은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친척들이 다 모이면 난리가 났다. 할머니 환갑잔치 때 땀 흘려가며 춤추고 놀고 그랬다. 우리집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잔칫집에 가보니 다 그렇게 하더라. (웃음) 내 경험을 반영해 설계한 장면인데 그게 굉장히 한국적인 정서로 받아 들여진 것 같다. 그런 공간에서 드레스를 입고 스테이크를 썰면 이상하지 않겠나.
김성훈
용남과 의주가 대피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간판, 포근터들이 눈에 띄었다. 촬영하기 전, 채경선 미술감독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
이상근
간판과 포스터들에 대한 것들은 미술감독님과 협의를 했던 부분이다. 육교를 넘어갈 때 “수고했어” 이런 문구도 넣고. 지금 시대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감사했던 감정들을 표현하고 싶다. 미술감독님이 아이디어를 주면 함께 고민해 디테일을 보태는 방식으로 협업했다. 혼수를 마련하는 상가에서 인력 시장으로 넘어가는 장면들도 의미가 있다. 외다리를 넘고 인력사무소로 들어가는 청년의 모습들도 이 같은 논의를 거쳐 신중하게 배치했다.
김성훈
위기에 처한 아이들이 건물 밖으로 나오지 못해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보습 학원 시퀀스는, 영화가 재난 상황을 얼마나 윤리적으로 보여줄 것인가를 신중하게 접근해 보여준 장면이라 인상적이었다.
이상근
정말 신중히 접근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머릿 속에 그림이 있었다. 부담이 됐던건 사실이지만, 이미 한국에서 세월호의 트라우마는 지워질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피해갈 수 없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때문에 보다 극적으로 앵글을 구성하고 감정을 강요하는 건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촬영 전 제작회의를 할 때 스탭들에게 ‘카메라가 여기서는 저쪽(보습학원)으로 넘어가지 않게 찍겠다”고 미리 전달했다. 콘티를 정할 때 또한 “이쪽(보습학원)에서 어느 시점 이외에 더 깊게 많이 들어가는 걸 지양 하면서 찍고 싶다”고 동의를 구했다. 세월호 사건이 연상돼 마음에 상처가 나거나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학생들이 극적으로 구조되는 이미지들을 보여주고 싶은 바람도 컸다.
김성훈
의상과 관련된 질문도 드리자면, 등장인물들이 입은 의상마다 영화의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상근
의도적으로 설정한 의상도, 그렇지 않은 의상도 있다. 용수의 마이크 같은 것은 처음엔 단추를 가리다가 씬이 넘어갈 때마다 하나씩 풀어나갔다. 일종의 슈퍼맨처럼 보였으면 하는 컨셉이 있었다. 슈퍼히어로 코스튬의 재미를 용수에게 부여해봤는데 많이 알아봐주셔서 좋았다.
김성훈
용남과 의주가 입은 쓰레기 봉투 수트가 인상적이었다.
이상근
처음 생각했던 이미지가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부터 정해져 있었다. 쓰레기 봉투를 입고 열심히 뛰는 모습이 눈물 나는 생경한 모습들이 그것이다. 쓰레기를 입고 있는 청춘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었다. 쓰레기봉투는 동네마다 색깔이 다양하지 않나. 유독가스가 흰색이고 밤이 배경이었기 때문에 흰색과 검은색 봉투는 시각적으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영화의 색감이, 간판들도 알록달록하고 색감이 많아 어둡거나 단순한 색으로 가는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핑크색으로 쓰레기 봉투 수트를 제작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재난영화의 무거운 톤에발랄한 느낌을 줘서 중화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김성훈
쓰레기 봉투 수트는 실제로 제작한 의상인가.
이상근
전국에 쓰레기봉투 중에 핑크색이 알아본 바로는 강원도에 있더라. 어차피 영화에서 가상의 도시이기에 만들어버렸다. 기본 제작이 1천장 이어서, 프로토타입으로 색과 재질을 달리 만들어봤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동시녹음과 입고 벗고의 편의를 위한것들까지 고려해 테스트를 했다. 연출부들이 처음에 입고 벗고 테스트를 해봤는데 굉장히 힘들었다. 바람이 안통하니 땀이 엄청찼다. 8월에 찍었으니 얼마나 더웠겠나. 배우들이 고생이 많았을거다.
김성훈
용남과 의주가 전력을 다해 달리는 영화의 후반부는 온갖 감정이 올라와 울컥했다.
이상근
이 영화에서 단 한장면을 꼽으라면 바로 그것이다. 제작진끼리 ‘런 구간’이라고 불렀던 시퀀스였다. 건물과 동네를 각각 옮겨다니면서 찍었는데, 단순히 달리는 것만으로 감정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멋진 액션보다는 치열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애쓰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
김성훈
한국영상자료원 수집캠페인을 통해 귀중한 의상과 소품을 기증해주셨는데.
이상근
사라져가는 것들, 사라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런 일을 해주시는게 소중한 것 같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만추> 필름은 아직도 못 찾지 않았나. 참 안타깝다. 이제 우리나라가 힘들지는 않으니까 보존을 잘 하고 후세들이 새로 발견하고 인정해주는 이러한 일들은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영화의 코스튬이 캠페인에 선정되어서 보존된다고 생각하니 참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