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잘 알려진 대로 <증인>은 제5회 롯데시나리오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당시 공모전에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바 있는데, 시나리오의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나.
이한
공모전을 심사할 때는 영화화 가능성보다는 이야기가 던지는 주제가 좋았다. 순호(정우성)와 지우(김향기), 성향도, 나이도 다른 두 사람이 어떤 사건 때문에 만나 조금씩 가까워지고,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주제 말이다. 제작자나 프로듀서라면 이런 이야기가 상업성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나는 주제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기획자(프로듀서)라면 끌렸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김성훈
연출을 맡기로 하면서 각색을 했을 것 같은데 어떤 고민들을 했는지 궁금하다.
이한
감독이 시나리오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쓰는 경우도, 원작 소설을 각색하는 경우도 있다. 이 시나리오를 봤을 때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렇게 좋은 의미를 가진 이야기라면 연출자로서 적어도 손해 보지는 않겠다 싶었다. 전작 <우아한 거짓말>(2013)이 그랬듯이 저예산이라도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각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어떻게 하면 남녀노소,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볼 수 있을까‘ 였다.
김성훈
영화 속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미스터리 구조를 서사의 한 줄기로 선택한 것도 보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하게끔 하는 것을 위한 목적인가.
이한
미스터리 구조가 아니면 영화 속 범죄 사건이 부각되지 않고, 서사가 긴장감을 유지한 채 전개되기가 어렵더라. 미스터리 구조는 사람들을 따라오게 하는 동력이라 할만하다.
김성훈
김향기가 연기하는 지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겪고 있는데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 장애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을 것 같다.
이한
아스퍼거 증후군, 우울증, 공항장애 등 이러한 장애들은 사람마다 증상도, 정도도 제각기 다르다. 그 형태가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특징짓기 힘들고, 여러 자폐 증상들을 한데 모아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서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자폐 증상들을 공부하고, 치료해온 천근아 의사 선생님을 만나면서 우리나라는 자폐를 너무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들은 자폐가 사회로 드러나 있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자폐 스펙트럼 장애 환자도, 일반인들도 자폐 증상에 대해 학습하면 자폐는 나아진다. 그러한 학습 덕분에 자폐에 대한 내 편견을 깰 수 있었고, 그러한 경험을 영화로 일반 관객들에게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김성훈
김향기의 어떤 점에서 지우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이한
<우아한 거짓말>을 함께 해보니 다른 배우들에 비해 감정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흔히 감정을 잘 드러내면 과잉이고, 덜 드러내면 재미가 없는데 (김)향기는 지문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을 만큼 감정을 민감하게 표현한다. 함께 작업하면서 쌓은 믿음감 때문에 출연을 부탁하게 됐다.
김성훈
순호는 민변 출신의 변호사로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가진 정치적 올바름과 여러모로 잘 어울렸다.
이한
배우가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보여줬는지 만큼이나 평소의 모습 또한 유심히 지켜보는 편이다. 평소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정)우성씨의 모습으로부터 순호를 발견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툭툭 던지는 말 속에 따뜻함과 선함이 있는데 그러한 모습이 순호를 잘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김성훈
순호와 지우 뿐만 아니라 순호와 아버지(박근형), 순호와 수인(송윤아), 순호와 희중(이규형), 지우와 엄마(장영남) 등 다양한 관계를 촘촘하게 그려내는데.
이한
사람이 어떤 신념을 가지는 건 그가 만나는 사람, 좋아하는 책, 영화 등 여러 외부적 환경이 총체적으로 작용해 형성한다고 본다. 순호가 민변을 떠나 대형 로펌에 일해도 쉽게 때가 묻지 않는 건, 그가 만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덕분이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하게 얘기할 수 없지만 그러한 관계가 영화의 법정신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김성훈
특히, 순호와 아버지의 관계가 애틋하다.
이한
개인적으로 부모님이 사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십여 년 전 이 시나리오를 썼다면 지금처럼 아버지 역할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최근 한국영화 속 아버지는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영화 속 순호의 아버지는 순호가 앞만 보고 달려갈 때마다 중요한 깨달음을 툭툭 던진다.
김성훈
법정 장면 비중이 꽤 큰데, 굉장히 리얼하면서도 효율적으로 그려내더라.
이한
법정 시퀀스를 다시 볼 때마다 후회가 되는 게 빈구석이 많아서다. 현직 변호사들로부터 많은 자문을 받아 설계했는데 현실적으로 묘사할수록 재미가 없더라. 하지만 이 영화 속 법정 시퀀스는 감정이 클라이막스에 이를 때 등장하는 까닭에 감정을 많이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개연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포기할 건 포기하고, 취할 건 취하는 게 중요했다.
김성훈
한국영상자료원에 의상을 기증해준 소감을 부탁드린다.
이한
촬영이 끝나면 의상이나 소품은 창고로 들어가거나 사라지기 마련인데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돼 영구 보존할 수 있게 돼 영광이고 감사하다. <증인>의 수명이 그만큼 길어지는 것 아닌가. (‘다음 영화도 기증하실 의향이 있냐’는 질문에) 물론이다. 기꺼이 기증하겠다.
김성훈
현재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은 무엇인가.
이한
오늘 아침에 시나리오를 다 썼다. (웃음)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없지만 차기작은 멜로 장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