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정
전작인 를 만들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영화는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개인적으로 '그것이 알고 싶다'나 와 같이 사회 고발적이면서 시사성이 강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제작사로부터 의 원작 줄거리를 처음 들었을 때, 코미디의 방식을 통해서 내가 다루고 싶었던 사회의 부조리함과 권력자들의 만행을 풍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거기간에 대통령 후보가 거짓말을 못 해서 벌어지는 이야기'란 한 문장을 듣는 순간 확 꽂힌 것이다.
황민진
그럼 그 한 문장을 듣고 바로 연출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인가.
장유정
그렇다. 원래 결정하기까지 오래 걸리고 그 이후에는 뒤를 안 돌아보는 스타일인데 이렇게 한 번에 마음이 가는 때도 있더라. (웃음) 아무튼 연출을 하겠다 하고 처음 번역된 초고를 읽었을 때 정말 많은 부분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브라질에 갔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우리와는 웃음 코드도 도덕관념도 정치판도 너무 달라서 에피소드를 그대로 가지고 올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장르보다도 특히 코미디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과 맞닿아 있을수록 재미있기 때문에 각색은 필수적이었다.
장유정
가장 큰 변화로 일단 주인공을 남자에서 여자로 바꾸었다. 주상숙도 원작의 주인공처럼 많은 잘못을 하지만 나중에 용서가 되는 이유는, 그녀가 갑이면서도 또 다른 슈퍼 갑들에게는 을이기 때문이다. 형사가 치킨집 사장이 되거나 할머니가 소녀로 바뀌는 간극의 차이가 웃긴 것처럼, 거짓말을 잘하던 사람이 거짓말을 못 하게 되면서 계급이 전복되는 순간들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많은 며느리들처럼 시어머니 앞에서는 슈퍼 을이었던 상숙이 진심을 숨기지 못하는 장면이 웃긴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나 관심이 많은 정치를 소재로 하기 때문에 리얼리티를 살릴 수 있도록 크게 노력을 했다.
황민진
정치인의 자녀 군 입대, 원정 출산, 재단 비리부터 선거 유세 현장까지, 한국의 정치 현실을 낱낱이 담아낸 요소들이 눈에 띈다. 제작 단계에서의 사전 조사 과정이 궁금하다.
장유정
가장 먼저 여의도 의원회관에 가서 보좌관, 부대변인부터 전현직 국회의원, 당 대표까지 여덟 개의 정당 관계자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제작에 들어가고 나서도 정치선거 자문팀을 두고 뉴스 대사 등 세부 설정에 대해 계속해서 조언을 받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도 많은 자문을 받았는데, 이미 도장이 찍힌 선거 포스터를 중간에 바꿀 수 없다는 선거법에 따라서 영화의 내용과 세부적인 사항들을 세팅했다. OBS 차윤경 기자님, 100분 토론 김준영 작가님과 같이 도움 주신 분들의 실명을 등장인물 이름으로 쓰기도 했다.
황민진
출연하는 모든 배우에게서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기 디렉팅에 있어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
장유정
라미란 배우는 워낙 훌륭한 배우여서 내가 특별히 세세하게 디렉팅하진 않았다. 따로 요청한 점은, 주상숙이 나쁜 면이 있기는 해도 캐릭터 자체가 너무 얄밉거나 잔혹해 보이지 않도록 신경 써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후반부에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장면에서 라미란 배우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선함과 따뜻함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했다.
황민진
김무열 배우가 연기한 희철은 어떻게 디렉팅했나.
장유정
김무열 배우의 경우, 예전부터 콜린 퍼스를 떠오르게 만드는 위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희철을 연기함에 있어서도 웃기려고 노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하자고 했다. 다만 한 가지 부탁한 것은, 주상숙을 어른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여고생 조카처럼 챙겨줘야 하는 사람,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어린 천재를 대하는 것처럼 연기해달라고 디렉팅했다.
황민진
영화 속에 선거와 관련된 다양한 공간들이 나오는데 특별히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공간 세팅과 미술은 무엇인가.
장유정
선거사무실이다. 실제로 2019년에 창원 성산에서 14일 동안 보궐 선거 과정을 취재하면서 많은 부분을 참고했다. 각 정당마다 선거사무실 분위기가 굉장히 다르지만 가장 활기찬 정당 사무실을 참고한 것이다. 사실 이길 것 같으면 사람들이 많이 온다. (웃음)
황민진
개인적으로 주상숙 선거사무실의 회의 책상 수납식 화장대가 인상 깊었다.
장유정
실제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것을 본 것은 아니고, 여성 의원들을 취재하면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선거 기간 동안 후보들은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온종일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완벽한 화장과 머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렇게 바쁜 시기에 매일 미용실을 갈 수 없으니 3선 국회의원 주상숙으로서는 개인 헤어와 메이크업 담당을 부를 것이라 생각했다. 가짜 집에 살고 있으니 집으로는 부를 수 없어서 선거 사무실로 오게 했을 것이고, 외부인들에게 화장대를 보여주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회의 책상에 수납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화장대를 제작한 것이다.
황민진
당연히 실제 선거사무실에서 쓰는 아이템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리얼한 소품이다.
장유정
캐릭터에 대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중요한 소품이기도 하다. 영화의 시작인 해당 장면에서 주상숙은 자신이 가진 욕망을 끊임없이 숨긴다. 홍보 영상을 계속해서 수정하고 원래 신고 있던 굽 높은 반짝이 신발에서 낮은 굽의 신발로 갈아신는 것처럼, 자기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책상 밑에 숨기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소품인 것이다.
황민진
주상숙의 당 컬러를 보라색으로 정한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장유정
우선, (제작 당시) 10개 원내 정당의 당 컬러는 피하고자 했다. 한 개인이나 당을 비방하거나 대표하려고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도 그러하듯, 보라색이 제1야당과 여당의 컬러인 파란색과 빨간색을 합친 색이라는 점에서 의 컬러로 적합하다고 보았다. 한편으로는 보라색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고귀함이라는 점에서, '정직함'만큼 고귀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정직함'에 대해 너무나 쉽게 듣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나이가 들수록 '정직하다'는 말은 칭찬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표현할 때 '그 사람 참 정직하더라'고 말한다면 바로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꽉 막혔다는 것을 돌려서 말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지금은 퇴색되었지만 '정직함'이 가지는 고귀한 가치를 보여주고자 고귀함을 의미하는 보라색을 선택했다.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건, 라미란 배우에게 보라색이 너무 잘 어울렸다. (웃음)
장유정
선거 유세용 점퍼에 아들, 남편이라고 쓰여있는 의상이나 꽃 머리띠, 완두콩 인형 머리띠 등은 모두 실제 선거 유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선거 유세에서는 일단 눈에 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보니 정말 재밌는 소품이나 아이디어들이 많이 쓰인다. 선거 마크와 문구도 모두 실제로 제작했다. 대한당이라는 당명으로부터 건곤감리 마크를 생각해냈고 '올바른 선택의 길'이라는 문구와 잘 보이지는 않지만 길을 형상화한 아이콘까지도 미술팀에서 만든 것이다. 실제 선거사무실의 홍보마케팅팀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글씨체부터 번호의 컬러까지 모든 부분을 고민해서 만드느라고 미술팀이 정말 고생이 많았다. 영화를 마치고 나서 미술팀에서 이제 실제 선거 홍보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리얼리티를 위해 힘썼다.
황민진
주상숙의 의상에 있어서는 어떤 부분을 신경 썼나.
장유정
주상숙의 슈트는 컬러와 패턴에 따라서 다른 느낌을 주고자 했다. 예를 들어 초반부에 주상숙이 처음으로 거짓말을 못 하게 되었을 때 라디오에 출연하는 장면에서는 짙은 보라색에 카라가 있는 슈트를 통해 강하고 힘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반면에 후반부에 그간 숨겨왔던 아들에 대한 비밀로 인해 기자들 앞에서 쓰러지는 장면에서는 연한 보라색의 슈트를 입는다. 다른 의상과 대비되어 부드러운 인상을 주고 여리여리해 보이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입힌 것으로, 이는 영화 속의 주상숙과 박희철의 전략이기도 하다. 스트라이프 슈트는 거짓말을 못 하게 된 것을 활용하여 선거 운동 컨셉을 바꾸는 장면에서의 강한 결심과 터닝 포인트를 보여주고자 했다.
장유정
상숙이 슬기 어머니에게 "죄송합니다."라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이 영화를 만든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이다. 실제 정치인들도 많은 사과를 하지만 어떻게든 표를 더 얻기 위해서거나 진심 없이 궁여지책으로 사과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상숙의 사과는 계산적이지 않은, 진심을 담은 사과이기 때문에 슬기 어머니조차도 뭉클하는 것이다. 상숙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나면서 "다시 올게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진정성 있는 사과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는 것이다. 이후 슬기가 퇴원하고 나서도 평생 장학금을 줬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상숙의 사과는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보여준다. 원작에는 아예 없었던 설정으로 저한테는 굉장히 소중한 장면이다.
황민진
영상자료원에 의상 소품을 기증하신 소감이 어떠한지.
장유정
영광스럽다. 평창 올림픽 당시 스위스 로잔의 올림픽 박물관에 간 적이 있는데 정말 사소한 것들까지 올림픽에 관련한 모든 것이 아카이빙되어 있는 것이 놀라웠던 기억이 났다. 내가 연출한 영화가 앞으로 오랜 시간동안 아카이빙된다고 생각하니 기쁘고 영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