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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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된 영화유산

유령

  • 감독 이해영
  • 원작 마이지아
  • 각본 이해영
  • 출연 설경구,이하늬,박소담,박해수
  • 촬영 주성림
  • 조명 최종하
  • 편집 양진모
  • 음악 달파란
  • 미술 김보묵
  • 의상 함현주
  • 제작사 더 램프(주)
“유령에게 고함. 작전을 시작한다”

1933년, 일제강점기 경성. 항일조직 ‘흑색단’의 스파이인 ‘유령’이 비밀리에 활약하고 있다.
새로 부임한 경호대장 카이토는 ‘흑색단’의 총독 암살 시도를 막기 위해 조선총독부 내의 ‘유령’을 잡으려는 덫을 친다.
영문도 모른 채, ‘유령’으로 의심받고 벼랑 끝 외딴 호텔에 갇힌 용의자들.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 쥰지, 암호문 기록 담당 차경, 정무총감 비서 유리코, 암호 해독 담당 천계장, 통신과 직원 백호.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뿐.
기필코 살아나가 동지들을 구하고 총독 암살 작전을 성공시켜야 하는 ‘유령’과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들 사이, 의심과 경계는 점점 짙어지는데…

과연 ‘유령’은 작전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성공할 때까지 멈춰서는 안 된다”
(출처:kobis)

더램프(주) 기증 <유령> 의상
무라야마 쥰지(설경구)의상 세트 무라야마 쥰지(설경구)의상 세트
박차경(이하늬)의상 세트 박차경(이하늬)의상 세트
유리코(박소담)의상 세트 유리코(박소담)의상 세트
유리코(박소담)의상 유리코(박소담)의상

함현주 의상감독 인터뷰
이해영 감독이 연출한 영화 <유령>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항일 영화나 드라마와 많이 다르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박차경(이하늬), 유리코(박소담), 쥰지(설경구), 카이토(박해수), 천계장(서현우) 등 다섯 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밀폐된 공간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두뇌 싸움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서스펜스가 구축되는 스파이물이다. 함현주 의상감독이 설계한 이들의 의상은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자신의 의중을 꽁꽁 감추는 캐릭터들의 성격과 색깔을 표현해낸다. 관객 입장에선 함 감독의 의상이 캐릭터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서사의 긴장감을 쌓아올리는데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해준다.
김성훈
작업실 이사는 잘했나.
함현주
전에 쓰던 작업실은 단독 주택을 임대해 마당도 있고, 요리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빨래도, 염색할 것도 많고, 뭘 많이 말려야 하니 마당에 널고 그랬는데 주택이라 관리할 게 너무 많았다. 힘이 좀 들어서 공간이 조금 넓은 아파트로 옮겼다. 아파트 공간을 오피스 느낌이 나게 인테리어를 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10월 내내 했는데 인테리어가 어렵더라.
김성훈
얼마 전에 촬영이 끝난 작품이 뭐였나.
함현주
<인터뷰>라는 제목의 영화다. 반나절 동안 밀폐된 공간에서 연쇄 살인마를 인터뷰하는 기자의 이야기 정도로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성훈
<유령>은 시대극이자 스파이물이라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 같다. 이해영 감독으로부터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의상감독으로서 무엇이 관건이었나.
함현주
인물(박차경(이하늬)과 유리코(박소담) 두 여성 캐릭터)과 형식(심리전, 육박전의 긴장감 있는 길항과 반전의 서사) 두 가지 맥락에서 캐릭터를 정확하게 그려낸다면 시대와 배경 그리고 소재를 초월해서 서사 안에서 캐릭터를 재미있게 표현하는 재미가 있겠다 싶었다.
김성훈
촬영 전, 이해영 감독이 함 감독님께 주문한, <유령> 속 인물들이 입는 의상에 대한 컨셉은 무엇이었나.
함현주
이해영감독은 여태의 항일영화에서 보여줬던 비주얼을 철저히 배제하고 새롭게 보여주길 원했다. 본 적 없는 컨셉이라는 시작점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이해영감독의 캐릭터 설명은 추상적 언어로써 명확했다. 다만, 극 안에서 챕터별 각 캐릭터들이 수행해야 하는 장면의 기능적 역할 속에서 그장면의 의상이 그 기능의 일부를 수행해야하는 장치에 대해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했고, 그가 설명한 장치와 위트 있는 의상으로 풀어내고 싶어했다. 가령, 호텔 액션신에서 바 안쪽에 숨어 있던 유리코가 불을 질러 일본군의 시건을 돌리고, 그 사이 탈출할 때 유리코의 의상 중에서 너구리 꼬리가 달린 털모자를 설정했고, 모자에 붙은 너구리 꼬리를 뜯어내 도수가 높은 양주병에 꽂은 채로 허공에 던진 뒤 총을 쏘아 화재를 일으키는 장면이라든가, 유리코의 의상을 잘라 도화선을 만들어 지하 무기 창고를 폭파시킨다건가, 그런 식으로 장치들이 현실적으로, 수학적으로 논리에 어긋남이 없는 아이템과 디자인 소재여야 하고, 거기다가 위트 있는 재미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다섯명의 캐릭터를 시대 배경에 맞게, 당시 복식사의 트렌드 안에서 디자인적인 몇 가지 키를 잡아 고증에 충실하되, 그외에 나머지는 캐릭터와 극적 리얼리티에 충실하게 따랐다. 극에서 납득하고 몰입하는데 방해되지 않는 거라면 유리코의 핫핑크 컬러, 하이힐 같은 현대적인 요소도 과감하게 반영하고, 일본군의 옐로우 계열의 머스터드 컬러 군복 같은 시대적 고증이 백번 맞더라도 캐릭터의 설명과 설정에 방해되면 그것이 고증에 충실해야 하는 제복일지라도 철저하게 배제했다. 소재적 측면에서 쥰지와 유리코의 의상은 가죽, 스웨이드, 퍼 같은 동물적인 소재를 많이 사용해서 호텔에서 본능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육박전을 펼치는 원초적인 생존 이미지를 구현하려고 했다. 동물적인 소재 중에서 유리코는 퍼, 쥰지는 가죽 소재로 각각 구분했다. 유리코의 퍼는 광택감이 전혀 없는 따뜻한 모피 위주에 동물의 얼굴이나 꼬리, 다리가 박제 형태로 의상에 붙은 머플러나 숄을 설계했다. 쥰지의 가죽은 광택감 있는 가공된 그린 컬러의 가죽에 매회차 왁스칠을 해서 반질반질하게 표현했다. <유령> 전체 컬러톤을 날것의, 생동감 있는 캐릭터로 표현하는데 적합하도록 비비드톤 컬러를 과감하게 쓰자는 기본 원칙이 있었고, 정체가 ‘유령’이던 두 여성 캐릭터는 난색 계열, 쥰지와 카이토는 한색 계열로 각각 구분했다.
김성훈
여성 캐릭터의 난색과 남성 캐릭터의 한색은 어떤 식으로 구체화했나.
함현주
여성 캐릭터의 경우 유리코와 차경을 구분해 반영했다. 유리코는 뜨겁고, 상황에 따라 감정적인 대응이 격한 캐릭터라 핫핑크 같은 강하고 비비드한 컬러를 다양하게 사용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반대로 차경은 차갑고, 상황을 대하는 감정적 태도가 차분한 캐릭터라 버건디, 와인, 퍼플톤으로 한정해 단조롭게 컬러를 사용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남성 캐릭터의 한색 계열의 경우, 카이토 군복은 그린톤이 강한 카키색으로 설정했다. 나머지 남성 캐릭터들은 색상이 수반하는 감정이 차가운 청록, 녹청색 등에서 출발한 한색으로 세팅해 구분했다. 그중에서 쥰지는 남성 캐릭터 중에서 거의 유일한 사복 설정이라 컬러가 과감해도 부담이 없을 수 있어서 비비드한 그린톤을 선택했다. 소재로는 동물적이면서도 광택이 있어 더 차가운 이미지가 있는 레더 소재를 썼다.

디자인적인 측면으로는 복식사에서 당시 트렌드를 조선이라는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유럽, 미국 등 서양 복식사의 해당 시대의 다양한 트렌드를 차용해서 스타일을 구성했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배우들의 신체 조건이 훌륭해 큰 어려움 없이 작업했다.
김성훈
참고했던 자료들은 무엇인가.
함현주
유리코는 동시대 유럽의 배우, 가수 등 셀럽을 참조했고, 차경은 퀴리부인 같은 당시 유럽의 학자나 지식인을 참조했다. 쥰지는 탐정물에서 볼 법한 캐릭터 비주얼을 바탕으로 만들었고, 카이토는 영국 로열패밀리의 귀족 같은 비주얼을 레퍼런스로 삼았다. 천계장은 프랑스의 살롱 문화를 기반으로 한 섬세한 감성의 신사복 컨셉이다. 군복은 파쇼 체제의 이탈리아군이나 독일군의 상징인 컬러나 벨트 디자인 같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재해석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사회복지 고아원을 운영하던 프랑스 샬트르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 및 수도사복 이미지를 참고하여 유리코와 차경의 위장복을 만드는데 활용했다.
김성훈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복식사에서 1930년대야 말로 오히려 지금보다 더 과감한 패션들이 선보일 때가 아닌가. 그점에서 이 시대의 의상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의상감독으로서 어떤 쾌감도 기대했을 것 같다.
함현주
시대가 거슬러 올라갈수록 의상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는 게, 참고할만한 자료라고는 활자로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이 더 확장된다. 가령, 1950, 60년대 이전은 흑백 자료만 남아있고, 그보다 더 이전인 1900년대 이전은 그림 자료로만, 그리고 그 보다 더 이전은 활자로밖에 기록이 남지 않으니까. 일제 시대라고 하는 이 구한말은 한복이라는 전통 복식과 서양 복식이 혼재된 시대라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복식이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고, 대부분 흑백 자료라 컬러를 구현하는 확장성도 그만큼 넓어진다. 그점에서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컸던 것 같다. 특히 컬러를 사용하는 재미!
김성훈
당시 복식사를 공부하는 과정이 재미있었을 것 같다.
함현주
복식사를 들여다보는 일이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잘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계기로 자료들을 많이 봤고, 원하는 컨셉을 찾는 재미도 있었고, 한국과 일본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지역의 자료들을 많이 찾았다. 가장 도움이 됐던 작품은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캐롤>(2016)이었다. 물론 <유령> 속 시대와 다르지만, <캐롤>이 현재 미국에서 과거를 구현하는 시대물 장르라고 보았을 때 그 시대를 얼마나 자유롭게 바라보고 구현했는가, 라는 점에서 <캐롤>이 그 형식만큼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고, 시대를 아우르면서 표현하는 솜씨가 매우 빼어났다. 테레즈 역할을 맡은 루니 마라에게 입혔던 의상은 당시 소개되지 않은 복식이었는데도 과감하게 입히더라. 그걸 보면서 시대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그 시대에 국한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김성훈
설명대로 <유령>은 다섯 인물이 끊임없이 서로를 겨냥하며 시각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그러면서 각각의 인물의 캐릭터와 성격이 드러나는 이야기다. 앞에서 의상의 전반적인 컨셉을 설명해주셨는데, 그중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쥰지는 어떤 고민을 했나.
함현주
설경구 선배님의 시각적인 멋짐은 변성현 감독의 작품(<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2017) <킹메이커>(2022))을 통해 구구절절하게, 구비구비 펼쳐놓는 바람에 나는 <유령>에서 불편한 아우라를 표현하는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메인 의상으로 설정한 비비드한 그린은 생경했을 것이고, 진짜 가죽에 허구한 날 왁스칠을 해대서 무지하게 무거운 의상을 입고 어마무시한 활극을 불평 하나 없이 소화해주신 배우님께 감사드린다.
김성훈
이하늬씨가 연기한 박차경은 기존에 한국영화에서 보여주었던 배우 이하늬의 이미지와 아주 상반된 캐릭터인 것 같다.
함현주
<유령>의 서사는 일제로 인해 강제적으로 실연을 경험한 멜로의 주인공인 차경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이야기 초반 차경의 의상은 쉬폰 소재의 보라색 블라우스에 리본 타이가 바람에 흩날리며서 연인을 잃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퀴리부인처럼 이성적이고 차가울 것 같은 그녀가 연인을 잃고 감정적 미련과 풀 길 없는 애정을 흩날리는 리본과 스카프로 보여주길 바랐다. 그 대상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기본적으로 차경은 당시 부유하고 이성적인 지식인층이 맞다. 스트라이프 정장을 딱딱하게 차려입은 것도 그래서다. 극 초반에 연인을 잃은 상실감과 감정적인 미련 그리고 애수 같은 정서를 보드라운 쉬폰 소재와 날리는 리본 스카프로 시작했다.
김성훈
박소담씨가 맡은 유리코의 의상은 화려하고 세련됐다.
함현주
유리코는 컬러감을 화려하게 가려고 했고, 박소담씨의 피부톤이 맑고 흰편이라 컬러를 사용하는데 큰 제약이 없었다. 의상감독으로선 감사한 환경이었다. 초반에는 박소담 배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요소를 꽉꽉 채운 화려한 의상을 부담스러했으나, 그러한 컨셉의 의상 역시 유령임을 감추기 위한 유리코 나름의 위장 방법으로 생각하고 잘 소화해주었다. 더군다나 신체 라인이 드러나는 의상들이 많아서 정말 힘들었을텐데 군소리 없이 다 입고 연기해줘서 고맙다. 그녀가 얼마나 털털한 성격의 배우이고 평소에도 몸을 조이지 않는 헐렁한 츄리닝만 입고 다니는 줄 너무 잘 알기에 처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
김성훈
호텔 액션신에서 유리코가 쓰는 털모자도 재미있더라. 그 시대 삽화들을 보면 신여성들이 즐겨쓰던 모자 아닌가. 그러고보면 유리코는 머리에 뭘 많이 쓴다.
함현주
유리코는 호텔 안에서 유일하게 의상이 계속 바뀌는 인물이다. 의도적으로 밤낮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 당시 모자는 정장의 부속으로서 갖춰야 하는 아이템 중 하나였다. 일제 시대, 조선총독부의 조회 사진들을 보면 하나같이 남자들은 중절모를 쓴 채로 일렬로 섰고,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영국 황실에서 예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모자를 안 쓴 사람이 없는 것처럼 모자는 정장에 포함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인 셈이다. 유리코의 경우, 의상 착장에 맞춰 모자 종류가 계속 바뀌는 거다.
김성훈
박해수씨가 연기한 카이토는 군복도 그렇고, 굉장히 격식을 갖춘 의상들인데.
함현주
영국 로열 패밀리의 귀족 비주얼을 많이 차용했다. 군복을 제외하더라도 사복에서는 실크햇을 반드시 착용하고, 타이가 없을 때는 스카프로 타이를 대신했다. 가문의 문장이 군복의 뱃지에도, 사복의 벨벳 구두에 금사인 자수형태로도 빼곡히, 반드시 표현했다.
김성훈
실제로 일본 군복은 황토색이었는데, 이 영화에선 카키색으로 표현하니 독일이나 이탈리아 파쇼 군대도 덩달아 연상시키는 효과가 확실히 있더라. 일본 군복을 황토색 계열로 표현하지 않았던 이유도 앞에서 말씀주신대로 좀 더 차가운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나.
함현주
우리나라 군복도 아닌 남의 나라 군복이고, 호텔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드라마를 풀어가는데 일본 군복이 방해만 안 되면 된다고 생각했다. 캐릭터를 구분하기 위해 기능적으로 컬러릴 선택하면 된다고 단순하게 접근했다. 사건이 벌어지는 호텔에서 황토색은 굉장히 따뜻하고 중성적인 색깔이라 일본 군인들이 쫙 깔려있을 때 황토색이 배경색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배경이 너무 밝아지는 거다.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 배경이 그렇게 밝을 필요가 없으니까. 카이토를 포함한 일본 군복을 짙은 카키색으로 설정해 배경을 어둡게 누르는 역할도 하고, 카이토의 차가운 면모를 부각시키는 효과도 기대했다. 일본 군복을 카키색으로 설정한 것을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건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김성훈
그래서 확실히 타란티노의 영화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속 독일 나치 같은 느낌이 나더라. (웃음)
함현주
어떤 일본 육군 대장이 망토를 휘날리면서 나타나겠어. (웃음) 군복의 경우 예산이 많이 허락되면 더 좋았겠지만, 어떤 영화든 비용과 시간의 제약 안에서 효과적으로 표현해야 하기에 모든 부분을 다 바꾸는 대신 단추, 계급장 같은 디테일한 부분을 잘 살리려고 노력했다.
김성훈
확실히 군복에 붙어있는 패치, 단추, 계급장들을 보는 재미가 있더라. 작업할 때 즐거웠겠다.
함현주
일제 시대 군복에 들어간 배지, 단추, 계급장을 아주 상세하게 도식화해서 데이터 베이스로 정리한 논문이 있어서 그 논문을 참고 삼아 한치도 틀림없이 다 주물로 떠서 제작했다. 독일에서 액세서리 디자인을 하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이 한국에 잠깐 들어왔을 때 우리 영화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해서 그 분이 와서 직접 계급장을 본드로 붙이고 그랬다.
김성훈
천계장은 세련된 신사복이 눈에 띈다.
함현주
프랑스 살롱 문화에 기반한 섬세한 감성의 신사복 컨셉으로 설계했다. 매우 섬세하게, 고양이와 교감하듯이 암호를 해독하는 남자. 살롱에서 여자들과 대화가 통하는 남자. 그런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반지나 기타 액세서리를 많이 가미하고 싶었는데 여러 사정 때문에 표현하지 못해 많이 아쉽다. 가장 아쉽다.
김성훈
김동희씨가 연기한 이백호 역할은 지금 유행하는 듯한 코트를 입혔는데, 카라처럼 보이는 흰색 부분이 눈에 띈다.
함현주
정확하게 설명하면 블라우스 셔츠인데, 카라가 없는 셔츠다. 백호는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젊은 세대고. 20대는 각 직업에서 최전방에서 가장 많이 뛰는 나이이지 않나. 어떻게 보면 희생양인 거지. 그런 점에서 백호는 가장 연약하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다. 이해영 감독님도 모자를 삐딱하게 쓰거나 신문을 돌려서 읽는, 귀엽고 반항적인 이미지로 그려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남성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감독님의 첫 번째 주문이었다. 남자지만 남성미가 많이 보이지 않고, 다소 중성적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셔츠에서 카라의 크기가 커질수록 남성성이 강조되는데, 백호가 있는 셔츠는 과감하게 카라 같은 강한 이미지들을 뺐다. 셔츠 안에는 베이지, 약간의 핑크톤의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패턴을 입혔고, 따뜻하게 양털이 좀 있는 코트를 겉에 설정했다.
김성훈
되돌아보았을 때 <유령>은 어떤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나.
함현주
고생을 가장 많이 했지만 재미도 있었던 작품.
김성훈
개인적인 질문도 여쭙고 싶다. 대학 시절 의상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릴 때부터 어떤 계기로 옷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
함현주
원하는 대학에 줄줄이 낙방하고 담임 선생님의 추천으로 3차 지망으로 가장 안전하게 입학하면서 의상학을 전공하게 됐다. 딱히 패션, 옷, 트렌드와 상관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의도치 않게 거듭된 낙방 끝에 입학하게 된 학교와 학과라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한 뒤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장학금에 매달려 학교 생활에 매진하던 대학교 3학년 때 정구호 미술감독(당시엔 각광받던 신인 패션디자이너)을 강사로 만나서 <텔 미 섬딩>(1999, 감독 장윤현)이라는 영화를 졸업하기 전 학창시절의 추억 혹은 이색적인 경험으로 삼아 해보자는 것이 여태 직업이 되었다. 사건의 발단이자 영화계로 나를 끌어들인 정구호 미술감독님은 지금은 영화를 안하시지만 예나 지금이나 내겐 여전히 존경하고 애정하는 아티스트다. 40대 중반이 되기 전에는 언제라도 이직이 가능한 임시직이라고 생각하고 이직하면 혹은 결혼하면 당장 그만할거라고 생각했으나, 이직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여태 이어가고 있다. 지금으로선 65세까지, 더할수 있으면 70세까지 열심히 하고 싶은 생각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만큼 고생스러운 직업도 없지만 이만큼 재미있는 직업도 없구나 싶다.
김성훈
<텔 미 썸딩>으로 영화 의상 경력을 시작했고, 의상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이 <킬러들의 수다>(2001, 감독 장진)였다. 신현준, 정재영, 신하균, 원빈 등 네 명의 주요 등장인물을 캐릭터마다 각기 다른 의상으로 표현하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당대의 스타배우들이기도 했고.
함현주
그 당시 2월 졸업을 앞둔 겨울이였고, <텔 미 썸딩>으로 영화를 경험해보니 도저히 나와는 맞지 않는 직업이라 취업을 준비하던 중 작품 제안이 들어오면 취업을 했을 때 촬영을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취업은 취업대로 의류 업체에 면접을 보면서 촬영은 촬영대로 진행했던 작품이었다. 되는대로 했고, 당시에는 배우들이 스타인지는 안중에도 없고 취업을 못하면 겨울이건 여름이건 길바닥에서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고 하루 일과 중에 대기시간이 반 이상인 영화일을 어쩔수없이 계속 해야하는건가 싶고, 취업..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김성훈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개인적으로 기억에 많이 남는 작품 속 의상 다섯 가지만 꼽아달라.
함현주
일단 정구호 감독님을 따라 시작한 <텔 미 썸딩>. 영화 인생 사건의 발단이지만 촬영장에 간식 먹으러, 밤12시가 넘으면 귀가비 받는 재미로, 졸업도 하기 전에 참여한 작품이지만 아직도 장윤현 감독님도, 작가님도 자주 뵙고, 당시 연출부, 제작부 스텝들과는 아직도 가족처럼 지낸다. 실제로 가족 같기도 하다.

두 번째 영화는 <발레 교습소>(2004, 감독 변영주). <밀애>(2002)을 연출했던 변영주 감독님과의 두번째 작품인데 아무리 핑계를 대도 의상을 너무 생각 없이 못해서 감독님을 뵐 면목이 없다. 왜 그렇게 생각없이 못했을까 싶다. 의상을 너무 못해서 기억에 남는 영화다.

세 번째 영화는 <말아톤>(2005, 감독 정윤철). 정윤철 감독도 데뷔 감독이었고, 나도 애송이 의상감독이었고. 뭘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던 시절에 그냥 맨땅에 헤딩하듯이, 난이도가 높은 몹신들을 겁없이, 치밀한 준비없이(뭘 몰라서 치밀하게 준비할 생각도 못했다) 찍었던 작품이었다. 여자라 군필은 아니지만 정윤철 감독님이 군대 동기같다. 감독님과는 다시 만나도 군대 얘기하듯 당시 너도나도 애송이 시절 말도 안되었던 촬영장 얘기를 나눈다.

네 번째 영화는 <죽여주는 여자>(2016, 감독 이재용). 예산도 시간도 여러가지로 작았지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시간과 비용 낭비 없이 알차고 재미있게 만들었던 영화. 그리고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2020, 감독 이경미). 감독님이 너무 사랑스러운 아이디어가 넘쳤던 터라 그거 따라가다가 보니 드라마가 끝나고 촬영이 끝났던, 시간 가는줄 모르고 하하 호호 재미있게 만들었던 작품.

마지막으로 <유령>. 굽이굽이 펼치지도 못했는데 시간과 비용이 바닥이 나버리는 바람에 아쉬움이 많은 작품.
김성훈
차기작은 무엇인가.
함현주
변영주 감독님의 드라마를 하게 될 것 같다. <발레 교습소>처럼 후회를 안 하려면 뒤돌아 볼 일 없도록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김성훈
마지막으로 영상자료원의 수집캠페인에 참여하신 소감을 여쭙고 싶다.
함현주
영광이다. 영화 의상은 작품이 끝나면 본연의 역할을 다 한 거다. 그래서 의상들이 폐기되거나 어딘가에 묻혀 있거나. 영화 의상은 스크린으로, TV 화면으로만 남는 거지, 그 기능이 다 소멸되는 거다. 의상감독들이 모여서 아카이빙을 전문적으로 하면 참 좋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들지만, 한국영상자료원이 아카이빙을 해서 후대에 남긴다는 것 자체가 너무 반갑고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글 김성훈(<씨네21> 기자) / 사진 김성백(스튜디오 '오늘의 나' 작가) / 편집 정연주(한국영상자료원 수집카탈로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