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모처럼 한국영화가 크게 흥행하고 있다. 기분이 어떤가.
곽정애
옛날에 미국 대사관에 비자 심사 받으러 갔을 때 못 받으면 어떻게 하나하며 긴장을 엄청 많이 했었다. 그만큼 절실했었는데, 영화가 개봉한 지금이 그때보다 더 떨리는 것 같다. 코로나 19 이전에는 친구, 연인, 가족을 만날 때 기본 코스가 있지 않나. 극장에 가서 개봉 영화를 함께 본 뒤 술을 마시러 가거나 커피를 한잔 하고 헤어졌는데 그런 익숙한 풍경이 지금은 사라졌으니까. 코로나19 이후 식당이나 술집은 많이 회복된 것 같은데 여전히 극장은 원래 풍경대로 돌아오지 않아 절망적이었는데, 간만에 내가 참여한 영화가 이렇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김성훈
김성수 감독님으로부터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의상감독으로서 어떤 도전이라고 보았나.
곽정애
12·12 사태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당시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세부적으로는 잘 알지 못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뭔가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거다. 실제 사건을 좀 찾아봐야겠다 싶어서 공부했더니 그 사건에 금새 빠져들었다. 역사가 무서운 게 공부할수록 빠져든다. 처음 김성수 감독님으로부터 제안을 받았을 때 군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 여성으로서 군복을 제대로 표현하고 구현할 수 있을지 자신이 잘 안 섰다. 그래서 감독님께 ‘저, 이거 못합니다.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김성훈
아, 김성수 감독님한테 그렇게 답변했나. 그랬더니 반응이?
곽정애
김 감독님이 잘 하시는 거 있지 않나. 웃으면서 쳐다보는 거. (웃음) 한쪽 마음 구석에선 이 이야기에 너무 이끌려서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처음에는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컸는데 생각을 좀 바꿔서 여성 입장에서 이 군인들을 어떻게 표현할까, 여성의 시선으로 봤던 참군인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관객도 여성들이 더 많을 거잖아. 그래서 감독님한테 하겠다고 말씀드리니 감독님께서 ‘너, 표정을 보니 그럴 줄 알았어’ 하시더라. 감독님도 여성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군복이나 군인이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해하셨던 것 같다.
김성훈
등장인물 대부분 군복을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부대마다 계급마다 디자인이 천차만별이지 않나. (웃음)
곽정애
촬영하는 내내 헬이었다. (웃음) 현장에서 군사 자문하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계급, 견장, 부대 마크 등 디테일한 설정들을 일일이 확인받는 과정을 거쳤다. 현장에서 그 분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하면 맞나요?’ ‘와서 좀 봐주세요’하면서 되게 귀찮게 했던 것 같다. 심지어 정해인씨가 베레모를 쓸 때 눈썹 끝에서 몇 도 정도 내려야 하는지까지 확인했다. 군인들이 정석으로 쓰는 방법이 있으니까. 그만큼 관객들의 눈을 신경썼다.
김성훈
말씀대로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했고, 배경이 군인데다가 등장인물이 많아 많은 군복을 고증에 따라 복각하는 게 중요한 과제였을 것 같다.
곽정애
영상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어 찾아봤다. 책이나 논문도 많이 봤고. 우리 의상팀장이 남자인데 군 생활을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에서 했더라. 다행스럽게도 팀장이 수방사의 기본적인 규칙 같은 걸 잘 알고 있었다.
김성훈
영화에 등장하는 군복은 전부 제작했나. 제작 수량이 얼마나 되나.
곽정애
전부 제작했다. 특전사, 공수부대, 미군 등 부대별, 계급별 군복들을 일일이 다 제작했다. 계급장도, 이름도, 군번도 제각각이라 일일이 설정해서 군복에 새겨야 했다. 보조 출연자의 군복까지 포함해 총 270벌 정도 제작했었다.
곽정애
<인간중독>(2014, 감독 김대우)에서 송승헌씨가 입었던 군복. <서울의 봄>은 그보다 훨씬 많은 군복을 제작해야 했는데, 처음에는 군복은 다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김성수 감독님께서 그렇지 않다고 알려주셨다. 대장, 중장, 소장 계급이 다르듯이 군복 또한 계급, 부대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하시더라. 옷감의 재질도, 무늬도 제각각이라고 했다.
김성훈
촬영 전, 김성수 감독님과 함께 정한 이 영화의 의상 컨셉의 원칙은 무엇이었나.
곽정애
고증은 당연히 기본이자 필수였다. 영화 속 캐릭터를 화면에 살아나게끔 하는 과제가 있었다. 근현대사를 다루는 이야기지만 지금 봐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도록 디자인해야 했다. 평소 시대물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관객들이 의상을 봤을 때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면 안 된다는 거다. 젊은 관객들이 봐도 친근하고 세련된 느낌을 받는 게 중요했다.
김성훈
정우성이 연기한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의 군복은 조명 때문인지 매우 따뜻하게 보인다.
곽정애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이태신 장군은 아버지 같은 인물로 느껴졌다. 올곧고, 정의로우며, 포근한 느낌의 인물. 정말 군인다운 군인. 그래서 그가 입은 군복을 보통 카키색보다 좀 더 브라운 톤을 넣어서 조명을 받았을 때 부드럽게 느껴지도록 설계했다. 겉에 입은 털 카라 달린 자켓은 옷 사이즈도, 카라 털도 좀 더 크게 디자인해서 이태신 장군이 크게 보이도록 했다.
김성훈
사석에서도 이태신 장군이 입은 사복은 마름모 패턴이 들어간 가디건과 그 안에 와이셔츠 그리고 넥타이가 겹친 조합이 따뜻하더라.
곽정애
마름모가 올바르고, 선을 딱 지키는 느낌을 주는 도형이라 가디건 패턴으로 넣었다.
김성훈
이태신 장군이 행주대교에서 반란군을 맞는 시퀀스는 울컥하더라.
곽정애
촬영할 때도 굉장히 슬펐다. 이태신 장군 혼자서 외롭게 사투를 벌이는데 눈발이 세차게 날리지 않나.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현장에서 그의 옆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성훈
반대로 반란군의 수장 전두광(황정민)이 입은 야전 자켓은 보통 군복의 카키색보다 더 짙은 남색으로 보이더라. 전두광의 의상들을 설계할 때 고민했던 건 무엇인가.
곽정애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접한 전두광은 ‘내가 제일 잘 나가’ 캐릭터였다. (웃음) 상관의 상관(정상호)이 있는데도 합동수사본부장이라는 이유로 어깨에 힘주고 다닌 거 아닌가. 말씀대로 일반 카키색보다는 좀 더 어두운 톤으로 설계했다.
김성훈
전두광의 군복 안에는 와이셔츠나 다른 옷이 없어 추워보이던데.
곽정애
합동수사본부장이라 항상 근무복을 입는 설정이었는데 처음에는 근무복 안에 다른 의상을 넣었었다. 그런데 황정민 선배가 “전두광이라면 이런 거 안 입을 것 같아”하면서 다 벗더라. 전두광 캐릭터라면 거추장스럽게 여러 겹의 의상을 안 입을 거라는 배우의 판단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판단이 맞는 것 같다.
김성훈
군복 일색의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달리 이성민씨가 연기한 계엄사령관 정상호는 사복을 주로 입더라.
곽정애
한남동 공관이 정상호 캐릭터의 주요 공간이라 사복을 많이 입혔다. 군에서 사복을 입는다는 건 계급이 가장 높은 것을 의미하니까.
김성훈
특전사 오진호 역할을 맡은 정해인씨는 <D.P.> 시리즈에 이어 또 군복을 입었는데 군복이 참 잘 어울리더라.
곽정애
오진호는 김성수 감독님이 유독 애착을 많이 드러낸 캐릭터 중 하나였다. 참 군인이라 군복도, 베레모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정석대로 입혔다. 정해인씨가 군복을 정말 멋지게 소화하더라.
김성훈
되돌아보면 <서울의 봄>은 곽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나.
곽정애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군복을 이렇게 많이 제작한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여성이어서 선뜻 도전하기 쉽지 않았지만 <서울의 봄>을 통해 자신감을 많이 얻었고, 정말 많은 군복을 제작하면서 내 결과물이 확장되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곽정애
신인 김판수 감독의 액션 활극 <열대야>. 보통은 의상감독이 작품의 선택을 받는데, 현재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은 시나리오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제작사에 먼저 연락해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합류한 작품이다. 프리 프로덕션 중인데 감독님과 계속 만나보니 믿음이 갔다. 유학생활을 오래 하신 분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상대방의 말에 굉장히 귀기울이고, 같이 만들어가려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함께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어서 젊은 관객들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에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