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영상자료원 수집캠페인에 가장 많이 기증에 참여한 사람은 조상경 의상감독이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인 <화란>을 포함해 넷플릭스 영화 <전, 란>, 영화 <리볼버>, tvN 드라마 <정년이>가 조 의상감독이 작업한 작품들이다. <에이트 쇼> <파묘> <탈주> 등 스튜디오 곰곰이 기증한 의상으로 범위를 넓혀보면 더 많다. 그만큼 대중적으로나 작품적으로나 의상으로 각인된 작품이라는 얘기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작품이 많은 조상경 의상감독과 <화란> <전, 란> <리볼버> <정년이> 네 편의 작업에 대한 얘기를 서면으로 주고 받았다.
김성훈
김창훈 감독이 쓴 <화란>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떤 이야기라고 생각하셨나요.
조상경
신인 감독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느꼈다. 감독이 직접 느낀 감정들이 이야기로 잘 표현됐다. 어떤 시각에선 영화 속 거친 감정들이 식상하다고 느낄 수는 있으나 첫 작품에서 할 수 있는 적당히 솔직한 이야기였다.
김성훈
이 영화는 이야기 안에서 리얼리티를 구축하는 게 중요한 관건으로 작용하는 장르 영화라고 생각한다. 연규(홍사빈), 치건(송중기), 하얀(김형서) 세 인물의 의상 컨셉을 설계할 때 어떤 고민을 하셨나.
조상경
이야기의 전체적인 톤앤매너가 10대(연구와 하얀 모두 고등학생)의 누아르라고 보았다. 경력이 많지 않은 신인 배우들에게 영화의 톤이 어울릴 수 있도록 설계해야 했다. 가장 많은 이미지 변신을 해야 하는 송중기 배우가 맡은 치건은 여느 소도시에서 존재할 법한 인물로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도록 여러 벌의 의상 피팅을 통해 배우가 이제껏 보여주지 않았던 이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치건은 잿빛 하늘에 날지 못하고 바닥에서 서로 쪼아대는 비둘기 이미지처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불편하고 초라하며 퀭한 룩으로 설계했다.
김성훈
이야기 안에서 연규는 치건을 만나기 전과 후로 큰 변화를 보여주는 캐릭터다. 연규의 의상 또한 이 변화를 표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치건을 만나기 전에는 후줄근한 티셔츠, 자켓, 청바지, 캡모자 등으로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치건을 만나고 난 뒤 화려한 패턴의 자켓을 걸치는 모습을 드러낸다. 연규의 의상을 설계하고 구축한 작업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린다.
조상경
연규 의상은 전형적이고 설명적으로 김창훈 감독님의 눈높이에 맞춰 캐릭터의 상황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기 때문에 관객이 의상만 보고 연규라는 캐릭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교복을 벗은 연규는 얼굴에 흉터를 갖고 어른들의 세계에 어색하게 합류해서 언뜻 봐선 섞여보이도록 설계했다.
김성훈
송중기 배우가 연기한 치건은 어두운 색상의 자켓, 후드티를 통해 표현하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조상경
앞서 말씀드린대로 송중기 배우가 갖고 있는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하기보다는 톤다운 된 거친 피부, 일상의 노동으로 단련된 근육 등이 부각될 수 있도록 표현했다. 의상은 두드러지지 않게, 넥라인을 최대한 풀어 느슨한 태도에서 나오는 여유가 리더로 보이게 하고, 그가 감추고 있는 혹은 포기한 욕망은 캐릭터가 보여주도록 했다.
김성훈
김형서가 맡은 하얀은 교복, 블라우스 등 사실적인 의상으로 표현했더라.
조상경
상황묘사라는 기본에 충실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김성훈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강렬하게 다가왔던 캐릭터는 김종수씨가 연기한 중범 캐릭터다. 기존의 김종수씨가 맡았던 인물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는데, 그 원인이 뭘까 고민하니 김종수씨가 입은 와인색 자켓이 평소 느꼈던 김종수 배우의 이미지와 많이 달라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조상경
김종수 배우도 이번 의상들을 만족스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하이엔드 브랜드이지만 어느새 조폭들이 많이 입는 브랜드 등을 사용했는데 악역일수록 튀지 않는 조용한 룩을 착용하면 훨씬 인상적으로 무섭게 보일 수 있으니 김종수 배우의 이미지와 조율하면서 정리했다.
김성훈
이 영화는 저예산 영화이지만, 신인감독의 재능이라든가, 송중기 배우의 새로운 도전, 홍사빈 배우의 새로운 얼굴 등 주목할만한 포인트가 여럿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조상경 의상감독에게 <화란>은 어떤 의미가 있는 작품인가.
조상경
<화란>을 작업한 게 지난 2022년 여름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고, 송중기 배우님이 이미지 변신을 해야 해서 흥미로워서 참여했다. 저는 많은 감독들의 첫 작품을 참여하는 게 개인적으로는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화란>은 영화로 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봐왔고 어쩌면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표현의 양식을 갖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이 함께 만드느냐는 늘 중요하다. 십대들의 감수성은 예민하고 섬세하니 많은 주의가 필요해서 신중하게 작업해야 한다. 그동안 작업을 허투루하지 않는 박민정 피디의 태도, 여전히 시나리오를 보고 설레서 선택하는 한재덕 대표, 드라마로 빅히트를 치고도 차기작으로 저예산 영화를 선택한 송중기 배우님….참 영화라는 게 뭔지 가끔은 진짜 낭만적이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