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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봄, 강원도 산골 밤을 환하게 비춘 '찾아가는 영화관' | 2024.05.30 | 842 |
꽃피는 봄, 강원도 산골을 환하게 비춘 '찾아가는 영화관'
<꽃피는 봄이 오면> 개봉 20주년 특별상영 참관기 글 : 남선우 (씨네21) 사진 : 최성열(씨네21), 남선우(씨네21), 송태호(한국영상자료원) ![]() 관객이 영화관을 찾기 어렵다면 영화관이 관객을 찾도록,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상자료원) 스크린은 언제든 여행할 준비가 되어있다. 목적지는 ‘찾아가는 영화관’ 서비스를 신청한 지역 공동체가 머물고 있는 곳. 지난해에만 전북 남원의 대강중학교, 경남 밀양의 안태예술촌, 경기 고양의 한 아동센터 등 수많은 곳에 영상자료원의 발자국이 찍혔다. 부처님 오시기 하루 전날이었던 5월14일, 어디에 사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문화적 경험을 선사하고픈 영상자료원의 긴 여정에 동행했다. 여행지는 강원도 도계읍. 삼척시에 속하나 태백과도 맞닿은 이 동네는 언젠가 영화의 배경이 된 적이 있다. 류장하 감독, 최민식 주연의 <꽃피는 봄이 오면>(2004)에서 트럼펫 연주자 현우(최민식)가 오디션 낙방과 이별을 차례로 통과한 채 저벅저벅 걸어 들어간 마을. 자기 무대를 찾아 헤매길 그만두고 중학교 관악부를 지도하기로 결심하면서 접어든 마을. 그곳이 바로 도계다. 작품의 스무 돌을 맞아 오래된 로케이션의 새로운 주민들부터 만났다. 그 전에 점심을 먼저 해결했는데, 정선이 고향인 사진기자가 메밀 막국수와 견주다 최종 낙점한 메뉴는 곤드레밥. 1인용 돌솥을 열자 뽀얀 기장밥 아래 푹 익은 나물이 숨어있었다. 첫눈에 알아보기 힘들었던 그 자태처럼, 처음 걸음한 동네의 매력도 차분히 음미하기로 했다. 되직한 찌개에 밥을 비벼 먹고 나니 그럴 자신이 생겼다. <하녀>가 상영된 ‘가장 높은 곳’ ![]() *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에서 바라본 전경 (사진: 남선우) 부른 배를 두들기며 산허리를 넘고 또 넘자 비로소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 정문이 보였다. ‘공기가 다르다’라는 감탄이 육성으로 뱉어졌다. 홀로 캠퍼스 투어에 나서고픈 마음을 누르고, 오후 수업에 들어갈 채비 중인 학생에게 길을 물어 종합강의동 내 극장에 도착했다. 연극영화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녀>(1960)를 상영한 후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의 해설을 듣는 것이 이번 ‘찾아가는 영화관’ 첫 행사. 젊은 관객들은 도서관 카페에서 사온 차가운 카모마일 차로 식곤증과 싸워가며 영화를 본 나와 달리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스크린과 눈 맞추고 있었다. 이어진 김홍준 원장의 강의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여기가 <하녀>를 튼 곳 중 가장 높지 않을까요?” 상영작으로 <하녀>를 고른 장본인인 김홍준 원장의 추측은 정답에 가까울 테다.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는 실제로 해발고도 804m에 달해 국내 교육기관 중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늦지 않게 물었다. 그럼 왜 김기영을, 그 중에서도 <하녀>를 이 자리에 데려온 걸까? “60년대부터 70년 사이, 그러니까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엔 영화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에 있었죠. 그러한 토대 위에서 훌륭한 영화들도 나왔지만, 영화를 찍는 환경 자체는 많이 열악했어요. 그럼에도 김기영, 이만희, 유현목 같은 분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영역을 구축했는데, 그 중에서도 김기영 감독님은 당시에도 굉장히 특별한 존재였어요. 초창기부터 직접 제작사를 차려 기획자이자 투자자이자 시나리오 작가이자 미술감독이었던 연출자였어요.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내가 만들고 싶지 않은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내 돈으로 내가 원하는 걸 만들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하신 분이에요. 그렇게 해서 흥행에 성공하면 수익은 고스란히 감독에게 돌아오겠죠? 그 유일한 성공 사례가 <하녀>였습니다.” ![]() * 강원대 연극영화과 학생 대상 <하녀> 해설상영. 김홍준 원장(우)은 <하녀>가 제작된 1960년대 영화제작 환경과 김기영 감독과의 개인적인 일화를 소개했다. (사진: 최성열) 김홍준 원장은 그 이유가 다가 아니라는 듯 오래 전 김기영 감독과 대면한 일화도 전했다. “생전에 김기영 감독님께 본인의 대표작 한 편을 꼽아달라고 부탁드릴 때면 <하녀>라고 답하셨어요. 평단으로부터 예술적으로 인정받아 만족스러운 점도 있으셨다지만 무엇보다 ‘원 없이 찍은 작품’이기 때문에 맘에 든다고 하시더라고요. 바꿔 말하면 다른 작품들은 뭔가 부족하고 흡족하지 않은 상황에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는 건데, 그에게 더 좋은 환경이 주어졌다면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생깁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시절 김기영 감독의 자택을 찾았던 에피소드를 꺼낸 그는 김기영이 박찬욱, 봉준호와 같은 비디오 세대 영화광들에 의해 재발견 된 스토리, 영상자료원이 세계영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하녀>를 복원한 경위까지 들려줬다. 강의는 <하녀>에 반한 관객을 위한 큐레이션으로 마무리되었다. “제 추천작은 공교롭게도 그저께 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채널(https://www.youtube.com/@KoreanFilm)에 올라왔습니다. 김기영 감독이 <하녀>로 번 돈을 갖고 찍은 <현해탄은 알고있다>라는 영화인데요, <하녀>와는 다른 스펙터클을 지녔습니다. 조선 청년과 일본 여성의 사랑을 다룬 전쟁 로맨스지만, 감독님 스타일은 어디 가지 않아서 정말 충격적인 장면들이 있어요. 특히 마지막 장면은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라스트 신 베스트 10에도 들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밖에도 김기영의 컬트적인 면을 보고 싶다면 <육식동물>과 <충녀>를 권합니다.” 천 년 된 느티나무 곁에서 축하하는 <꽃피는 봄이 오면> 20주년 * <꽃피는 봄이 오면> 행사 전 긴잎느티나무 공원. (사진: 송태호) 김기영과의 오후가 저물자 학생들은 각자 하교와 다음 강의를 위해 흩어졌다. 그 틈에서 산 공기를 들이마시고 나도 다음 장소로 향했다. 오늘의 메인이벤트가 열리는 긴잎느티나무 공원은 강원대 도계캠퍼스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다. <꽃피는 봄이 오면>에 영감을 준 곳이자 또 다른 주인공에 다름없는 도계중학교가 그 옆에 있기도 하다. 공원에 도착하자 근방이 영화 촬영지임을 알리는 빛바랜 간판과 더불어 ‘광산근로자 복지센터’ 간판이 보였다. 그 앞을 지키는 듯 우뚝 솟은 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 제95호. 마을 어른들 사이에서 지주처럼 여겨진다는 이 천년 살이 나무는 이제 넉넉한 터를 두르고 공원의 등대처럼 서있다. ![]() * 긴잎느티나무공원 입구에 설치된 <꽃피는 봄이 오면> 촬영지를 알리는 간판(좌) (사진: 남선우). 천연기념물 제95호 느티나무(우) (사진: 송태호) 그리고 오늘 밤, 이 공원은 영화관이 되었다. 영상자료원 트럭에 설치된 스크린이 산세를 뒤로한 채 펼쳐졌고, 나무 곁에는 수 백 개의 캠핑용 의자가 즐비했다. 소박한 스낵 코너도 마련됐다. 입구에서 솜사탕, 뻥튀기, 아이스크림을 파는 상인 두 어 명이 도계 어린이들의 쉴 새 없는 환영을 받았다. 그 중 한 어린이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영화를 보러 왔냐고 묻자 “엄마가 놀러가라고 해서 왔다”는 대답이 나왔다. 옛날에 이 동네에서 영화를 찍었다고 알리자 운동기구를 흔들던 열 살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요?”하고 놀라는 아이에게 영화를 한 번 지켜보라는 말을 남기고 어르신들에게 가자 “여기서 영화를 찍었다는 건 기억하지만 실은 바쁘게 살다 보니 그 영화를 보러 먼 극장까지 가볼 생각을 못했다”라는 얘길 들을 수 있었다. ‘찾아가는 영화관’의 존재 의의를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 * 강원도 도계중학교 관악부의 공연. 도계중학교 교가와 임영웅의 노래를 연주하여 주민들의 큰 호응를 받았다. (사진: 최성열) 그동안 공원 중앙에서는 상영 전 행사가 진행됐다. 도계 주민들의 ‘보이는 라디오’로 시동을 건 무대는 도계중학교 관악부의 공연, 최민식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이재건 선생님의 트럼펫 연주로 달궈졌다. 영월, 강릉으로 체험학습을 다녀와 피곤한 상태지만 공연을 위해 달려왔다는 도계중 학생들의 백스테이지는 느티나무 바로 아래. “악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됐지만 연주를 잘 마쳐서 기분이 너무 좋다”는 알토 색소폰 연주자에게 <꽃피는 봄이 오면>이 도계중 학생들의 필수 관람작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학기 중에 한 번쯤은 선생님께서 꼭 틀어주신다고. 그 시작점을 찍은 이재건 선생님에게도 짧은 대화를 청했다. <꽃피는 봄이 오면> 수록곡이기도 한 ‘옛사랑을 위한 트럼펫’을 도계 주민들 앞에서 연주한 그는 이 곡에 얽힌 마음을 풀어놓았다. “이 곡은 제가 도계중학교 학생들과 같이 한 생활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연주를 잘 못했어요. 곡을 불기 시작해도 끝까지 연주하지 못하고, 옛 기억에 빠져들었거든요. 추억이 주는 뭉클함이 커서요. 도계중을 떠나고 10년이 지나고서야 제대로 연주할 수 있게 됐습니다.” ![]() * <꽃피는 봄이 오면>에서 최민식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도계중학교 전 관악부 이재건 선생님. (사진: 최성열) 오랜만에 도계 땅을 밟은 그의 눈엔 새 건물들이 가득 들어왔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며 회한에 빠지기보다 활력을 느낀다는 그는 트럼펫을 고이 싸들고 돌아섰다. 그 뒷모습의 배경이 되어주듯, 20년 전 영화의 오프닝이 주민들과 재회하고 있었다. 도시를 떠난 주인공이 마침내 도계에 발 딛자 “우리 집이 저기 있잖아”라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악부 학생들을 꾸짖는 대사들이 오가자 한 아이는 “딴따라가 뭐야~?”라며 어른의 코멘터리를 졸랐다. 이 산골 극장은 이렇게 128분이 흐르도록 맑은 기운을 유지했다. 어디 영화 찍은 곳 아니랄까봐, 영화보다 정다운 밤이 공원을 가득 채웠다. ‘찾아가는 영화관’의 다음 행선지는 제주와 무주. 영화가 있어 더 깊은 하루는 어디에서고 계속될 것이다. ![]() * 이번 <꽃피는 봄이 오면> 개봉 20주년 행사는 강원도 도계읍 주민 215명이 참석하여 영화를 관람했다. (사진: 최성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