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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은 있다 2024.06.20 1848
<배신>은 있다

#1. KBS에 보관되어 있던 1960~1970년대 미보유 극영화 발굴기


글 : 김승경(한국영상자료원)
사진 : 한국영상자료원


2022년 자료원 수집팀은 그 이름도 어마무시한 <필름수집중단기계획>을 수립하였다. 아무도 시킨 사람은 없다. 필름 보존에 최적화된 온도와 습도가 지켜지지 않은 채 일반 창고에 보관되고 있는 필름이 있다면 습기와 곰팡이로 인해 필름의 산화가 진행되고 있을테니 필름이 버텨낼 수 있는 마지노선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이 이유였다. 필름 수집의 가능성은 낮지만 부서 워크숍에서 팀원 모두 누룽지 백숙을 완뚝하며 의지를 다졌고, 필름이 있을 만한 곳의 우선순위를 선정하여 문을 두드리기로 하였다.
그 중 단연 첫 번째 조사 대상은 방송국이었다. 방송국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있고, 영화는 “주말의 명화”. “특선영화” 등의 제목으로 개국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편성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JTBC가 개국했을 때 중앙일보 사옥 창고에서 1980년 KBS로 통폐합된 TBC의 방송용테이프가 다량 발견되었다고도 하고, 서울뿐 아니라 각 지방 방송국에도 다량의 필름과 테이프가 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린다. 이렇게 남아있는 자료 중에 방영하고 미처 회수하지 못한 한국영화가 있지 않을까 꿈같은 상상을 하며 가장 먼저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한 KBS에 연락하였다. 이 시기 KBS와는 16mm 필름으로 제작된 몇 편의 기록영상의 디지털화 논의가 진행되던 중이었고, 덕분에 수원센터 보존고에 16mm 필름이 보관되어 있다는 소식과 함께 방문의 기회가 찾아왔다.
방문단은 일사천리로 구성되었다. 원장님을 필두로, 수집팀 2명, 보존팀 2명, 복원팀 2명으로 이루어졌고, 2022년 5월 26일 카니발에 올라 함께 수원으로 향하였다. 사실 수원으로 가면서 두가지 상반된 생각이 교차하였다. TV에서도 영화를 필름으로 틀던 1960-1970년대면 필름인화 가격도 비쌀텐데 지방 공회당 순회상영1)을 위해서라도 제작자나 배급업자가 필름을 회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당시 텔레비전에서 방영 시점은 개봉 시점과 적어도 1년 이상 차이가 있어 희소성이 높지 않을 것이고, 그래도 국영방송인데 필름을 구입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생각이 왔다갔다 했지만 괜한 설레발로 부정타지 않을까 싶어 카니발 내에서의 즐거운 대화에 참여하지 못한 채 창밖의 풍경만 감상하며 한시간 반 남짓 과묵한 시간을 보냈다.
수원센터에 도착하니 KBS아카이브팀이 맞아 주었다. 다른 볼거리도 많았지만 바로 보존고로 향하여 자료를 확인하기로 하였다. 보존고 안에는 모빌랙이 줄지어 있었고, 8mm와 16mm 필름들을 구분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8mm 필름들은 취재용 필름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중에서 관심을 끌었던 것은 종이상자에 들어있는 16mm 필름들이었다. 시간이 지나 휘발되어 버렸지만 흐릿하게나마 싸인펜으로 쓴 제목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별히 박스에 ‘키네스코프’라고 쓰여있는 필름은 TV 브라운관을 16mm 영화 카메라로 촬영하여 필름으로 보존한 드라마들이었다. TV 방송용 테이프는 재사용을 했기 때문에 방영본 드라마를 보존하기 위한 방송국의 자구책이었다.2)  다른 모빌랙에는 ‘KBS극장’, ‘추억의 영화’, ‘명화극장’이라는 큰 제명과 함께 작품명이 쓰인 필름 박스들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바로 이 필름들이 우리가 찾던 한국고전영화 필름들이었다.

1) 1990년대 후반까지 영화개봉관이 거의 없는 지역민들을 위해 휴대가 가능한 16mm 필름 영상기를 가지고 주민센터 등에서 유료상영을 하는 전문 상영업자들이 존재하였다. 현재 자료원에서 진행하는 ‘찾아가는 영화관’ 사업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2) TV방송용 유매틱(U-matic) 테이프 역시 영화필름과 마찬가지로 전량 수입품이었다. 필름은 한번 인화하면 재사용할 수 없으나 방송용테이프는 재사용이 가능하여 최종방영본까지 재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아씨>(TBC, 1970)나 <여로>(KBS, 1972) 등의 당해 최고흥행드라마도 1회나 마지막회 정도만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국에서는 키네스코프 방식을 통해 방송프로그램을 필름으로 전환하여 보존하기도 하였다.

 
* KBS 수원센터에 보관되어 있는 한국영화 16mm 필름들 중 선명하게 제목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좌측)
* 필름의 내용과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 보존팀과 복원팀 직원들(우측)

단 하루의 조사만으로 무려 88편의 한국영화를 찾을 수 있었다. 이 필름들은 <마부>(강대진, 1960), <팔도강산>(배석인, 1967) 등 자료원이 기보유한 영화가 절반 정도를 차지하였고, 16편은 미보유, 18편은 자료원이 보유하고 있으나 사운드가 없거나 일부 결권이 있거나 필름상태가 좋지 않아 영사가 어려운 이른바 불완전판 보유필름들이었다. 이러한 극영화 발굴을 시작으로 KBS가 보유하고 있는 기록영상 필름을 포함한 영상자료들의 디지털 변환과 상호활용을 위한 업무협약(MOU)이 체결되었고, 2022년 9월 14일 88편의 필름 모두를 영상자료원 파주보존센터로 이관해 왔다. 이후 필름의 정밀 점검과 보수를 마치고, 미보유 필름부터, 디지털화가 시급한 필름부터 순차적으로 디지털 변환을 진행하여 2024년 6월 발굴복원전에서 6편을 공개할 수 있었다. (대표작 <배신>과 공개된 6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2. 시네마테크KOFA 발굴복원전 수집 x 복원 Talk – 정진우 <배신>에서 다룬다)

이 중에서 가장 뿌듯했던 점은 1964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청춘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과 비견되었으나 필름이 유실되어 확인할 수 없었던 <배신>(정진우, 1964)을 발굴하여 61년만에 재상영 할 수 있게 되어 1960년대 중반 유행한 청춘멜로장르에 대해 다시 연구하고 논의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앞으로 5년간 88편 모두 디지털화와 복원을 진행하고, 미보유와 불완전판 보유 영화를 중심으로 KOFA 프로그램을 통해 상영할 예정이다. (기보유 영화에 대해서는 상영본과 방영본의 판본 비교를 통해 동일 작품에 대한 매체 간의 차이를 분석할 예정이다.) 

 
*디지털 스캔과 보정작업을 진행한 미보유 영화 <배신>(정진우, 1964)의 두 주연배우 엄앵란과 신성일
 
* 필름 확인을 위해 스텐벡(steenbeck)에서 키네스코프 방식으로 촬영한 불완전판 보유영화 <빙점>(김수용, 1967)의 두 주연배우 김지미와 이순재

언젠가 원장님께서 수집팀을 향해 탐정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소개하신 적이 있다. 아마도 의문을 품고 추적해 나가는 과정에 관심을 두셨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때로 수집은 망태기 하나 둘러메고, 산삼이 있을 법한 곳을 찾아 헤매는 심마니 같다는 생각을 한다. 수많은 자료의 더미 속에서, 필름의 더미 속에서 미보유 작품을 찾아내면 모든 팀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심봤다”를 외친다. 아날로그 필름시대가 종말을 고한 이후 필름 발굴의 “심봤다”를 외칠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이 조금있라도 있다면 자료원의 두드림은 계속될 것이다. 필름발굴의 낮은 기대치를 “배신”하는 영화가 계속 발굴되기를 희망한다.
 
* 2024년 6월 13일 발굴복원전 ‘아카이브 이야기:수집x복원 Talk’에서 발표하고 있는 수집팀, 복원팀, 연구자의 모습.


 
#2. 시네마테크KOFA 발굴복원전 수집 x 복원 Talk – 정진우 <배신>


글 : 박수용(<씨네21> 객원기자)
사진 : 최성열(<씨네21>) 

참석: 김승경(한국영상자료원 수집팀), 남형권(한국영상자료원 디지털복원팀), 오영숙(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 시네마테크KOFA 2관 상영관 앞 원로영화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정진우 감독

2024년 6월 13일 18시, 시네마테크KOFA 2관. 중절모를 쓴 정진우 감독이 천천히 걸어나온다. 환갑을 넘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어떻게 가닿을지 모르겠다며, 그럼에도 촬영과 조명 모든 것이 자랑스러운 당신의 대표작이라며 필름이 엮어낸 인연과 열정을 이야기한다. 이어 방송국 보존고에 잠들어있던 1964년의 어느 기억이, 서서히 은막을 물들인다.
2022년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방송공사(KBS) 수원센터 보존고에서 자료원 미보유 영화 16편을 포함 총 88편의 한국영화 필름을 입수했다. 시네마테크KOFA는 이중 디지털화가 완료된 6편과 기타 국내외 영화 발굴복원 사례를 모아 오는 8월 1일까지 ‘발굴, 복원 그리고 KOFA 50주년 Part 1’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특히 지난 6월 13일 정진우 감독의 <배신> 첫 상영 후에는 이른바 ‘KBS 필름’의 수집, 복원의 과정과 의의를 논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KBS 필름의 수집 과정을 담당한 수집팀 김승경 연구원, 색보정 전문가이자 디지털화 공정을 담당한 디지털복원팀 남형권 연구원, 발굴작의 연구를 진행한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오영숙 교수가 이날 나눈 ‘아카이브 이야기: 수집 x 복원 Talk’의 일부를 전한다.


60년대 브라운관과 영화의 만남

김승경/ 이번에 필름을 발견한 곳이 영화사나 극장이 아니라 어째서 텔레비전 방송사인 KBS인지,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오영숙 교수께 설명을 부탁드린다.

오영숙/ KBS TV 방송이 개국한 1961년부터 1967년경까지는 자체제작 프로그램이 미비했다. 때문에 전체 송출시간의 30~40퍼센트 분량을 채운 것은 ‘KBS 시네마’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된 동시대 한국영화였다. 그렇다면 분명 영화사에서 방송국으로 보낸 필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고, 당시 내부 아카이빙 체계의 부족으로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작품들을 이번에 발굴한 것이라 보면 되겠다. 다만 극장 상영 원본과 같은 버전은 아니다. 방송용 영화는 분량과 수위 조절 등을 위한 재편집을 거치기도 했기에 기존 심의서류에 첨부된 시나리오보다 조금씩 짧은 경우가 많다. 유실 작품의 발굴이라는 의미에 더해, 비슷한 시기에 체계가 잡혀가던 한국영화와 한국 TV드라마가 상호 교류하며 발전해 나간 과정을 추측할 수 있는 사료가 되어 줄 것이라 기대한다.

김승경/ <배신>은 흑백영화이지만 이번에 수집한 영화들 중 개봉당시에는 컬러로 제작된 영화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확보한 KBS 필름은 모두 흑백이다. 이는 컬러 전환이 1980년으로 비교적 늦었던 TV 방영 환경 때문으로, 영화관 상영용 35mm 컬러 필름을 방송용 16mm 흑백 필름으로 축소 복사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필름 디지털화 복원 전체 공정을 설명하는 한국영상자료원 남형권 연구원(중앙)

데이터 시대가 흑백필름을 매만지는 법

김승경/ 그런데 흑백 필름 이야기를 하는데 왜 컬러리스트이신 남형권 연구원이 이 자리에 나와계시냐는 의문이 드실 수도 있겠다. (웃음) 하지만 흑백 필름의 복원 과정에서도 색의 개념이 무척 중요하게 작용한다는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청하고 싶다.

남형권/ 필름을 포함한 모든 영상물의 색보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세 가지가 밝기, 콘트라스트(대비), 채도다. 이 중 흑백 영상은 채도 없이 오직 밝기와 콘트라스트의 정보만 있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인간의 눈은 밝기, 콘트라스트, 채도의 순서대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때문에 흑백영화는 밝기나 콘트라스트의 밸런스가 조금만 틀어지더라도 보는 입장에서 큰 차이가 느껴진다. 이런 점에서 흑백 영화가 컬러보다 색보정이 용이하다는 오해에 대해 컬러리스트의 시각에서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승경/ 그렇다면 KBS 필름을 비롯해 지금까지 복원을 진행한 여러 작품 중 가장 안타까웠던 실패 사례가 있다면 무엇이었나.

남형권/ 필름이라는 물리적 매체의 특성상 온습도에 굉장히 민감하다. 손상 정도가 심하거나 어떤 복사나 현상의 과정을 거쳤는지 알 수 없는 상태의 필름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모든 복원 작업에 최선을 다하지만 역시 아쉬움은 언제나 남는다. 마찬가지로 KBS 흑백 필름은 대부분 손상 정도가 굉장히 심해 디지털 데이터로 스캔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옷의 구김이나 음영 등의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무리 조정해도 디테일이 잘 살아나지 않는 장면이 많다.

 
* 영화 <배신> 해설 중인 오영숙 교수

<배신>, 60년대 한국 청춘영화사를 다시 쓰다

김승경/ 오늘 상영한 정진우 감독의 <배신> 이야기로 넘어가려 한다. 이 작품의 의미와 성취에 대해 오영숙 교수의 해설을 부탁드린다.

오영숙/ 1964년 개봉 당시 <배신>에 따라붙었던 홍보 문구는 “경이로운 흥행 성적”이다. 사실 개봉 당시의 핵심 극장이었던 국도극장은 영화가 이상하다며 <배신의 상영>을 거부했다고 한다. 때문에 좌석수가 적은 아카데미극장에서만 상영했는데, 예상외로 연일 매진을 기록한 덕에 일 상영 회차도 늘어나고 홍보에도 뒤늦게 박차를 가했다고 전해진다.
흥행의 이유로는 먼저 정진우 감독이 천착한 시네포엠(영상시), 즉 이야기와 감정을 이미지로 보여주고자 한 방식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진우 감독은 “압도할 듯한 박력”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불리곤 했다. 그러한 별명에 걸맞게 이 영화에서도 그는 영상의 탐미적 가능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극장 관계자들이 보고 질색했다는 장면인 큰 톱으로 통나무를 두 동강 내는 숏을 이용한 몽타주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또 한 가지는 사랑의 강렬함인데, <배신>이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이유는 60년대 멜로의 원형이 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50년대 영화 속 사랑이 어디까지나 생활적 감각을 유지한 욕망이었다면, 60년대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주체의 열정이 강조되는 시기였는데, <배신>이 그 ‘목숨 건 불 같은 사랑’의 시작점 역할을 한 것이다.
이에는 정진우 감독 본인의 의지가 큰 역할을 했다. <배신>의 각본을 쓴 김강윤 작가는 당시 <상록수>(신상옥, 1961)로 아시아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거장이었는데, 그의 원안은 지금보다 더욱 플라토닉한 사랑에 가까웠다. 그런데 스물넷짜리 젊은 감독이 시나리오를 현장에서 자기 맘대로 바꿔버린 것이다.

김승경/ 속도감 있는 전개도 그렇고, 특히 절벽에서 떨어지는 오프닝의 프리즈 프레임 연출을 보고는 컴퓨터가 고장났나 생각할 정도로 놀라웠다. 또 오늘 상영을 찾아주신 정진우 감독께서 원본 영화에는 더욱 격정적인 장면이 많았지만 이번에 발굴된 필름은 몇몇 신을 잘라낸 방송용 편집본이어서 아쉽다고 말씀하셨다.

오영숙/ 실제로 당시 신설동 동보극장 안에서 여대생이 시체로 발견되자 뉴스에서는 아마 <배신>의 정사 장면을 보고 쇼크받아 자살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다. 그만큼 <배신>이 당시 사회에 충격을 전했다는 증거인데, 아마 이 정사 신이 TV판에서 삭제된 장면을 지칭하는 것 같다.

김승경/ 사실 우리에게 <배신>의 기억이 옅은 이유는 필름 유실 외에도 <배신> 한 달 뒤에 개봉한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의 존재감 때문인 것 같다. 당시 엄청난 흥행을 이끌었던 <맨발의 청춘>에는 이른바 ‘신성일-엄앵란 콤비’를 탄생시킨 작품이라는 수식어가 달렸는데, 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오영숙/ 두 배우의 조합도 그렇고, 비록 일본 소설을 따왔지만 사랑을 위한 자살이라는 소재 역시 <맨발의 청춘>이 먼저 아니냐는 인식이 많다. 하지만 <맨발의 청춘>이 제작 신청을 했던 시점은 <배신>의 완성 이후이고, 자료를 보면 처음에는 신성일과 엄앵란을 캐스팅할 계획도 없었다. <배신>을 본 후 배우를 교체해 아주 빠르게 찍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또 <맨발의 청춘>은 개봉 당시부터 신성일과 엄앵란을 ‘콤비’로서 홍보했다. 이 둘이 이미 다른 멜로 작품에서 함께 출연해 대중에게 인상을 남겼다는 방증이다. 그렇기에 <맨발의 청춘> 이후에 청춘영화 붐이 일었다는 명제에 대한 수정의 필요성이 <배신>의 발견을 통해 제기되지 않는가 싶다.


화면비와 복원의 원칙

김승경/ 복원 과정의 기술적 논의로 다시 넘어가고자 한다. 이강천 감독의 <생명>(1958)부터 한국영화계에 시네마스코프(2.39:1 화면비)의 시대가 시작된다. <배신>도 당시 기록에는 시네마스코프였다고 확인되지만, 이번에 입수한 필름은 시네마스코프가 아니었다. 디지털 복원본을 확인하신 정진우 감독께서도 원래 촬영하신 화면비와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KBS 필름에서 발생하는 화면비 문제에 대해 잠깐 소개해주셨으면 한다.

남형권/ KBS 필름 복원의 난점을 꼽는다면 앞서 소개했던 과한 손상도와 화면비 불일치의 문제다. 35mm 원본을 방송용 16mm 프린트로 축소 복사하며 화면의 상하단이 잘려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축소본을 원본 화면비인 시네마스코프로 복원하면 오프닝 크레딧 등 지금 남아있는 부분의 좌우가 추가로 잘려나가게 된다. 이에 복원팀 내부에서 시네마스코프에 맞추어 복원할 것인지, 시네마스코프가 아니더라도 그나마 남아있는 정보를 최대한 살리는 화면비로 복원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정답이 있는 논제는 아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시네마스코프에 맞춘 해상도 안에서 2.77:1 화면비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복원의 의미와 방향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자료원이 복원 작업에 임할 때 지키는 대원칙이 있다. 원본을 훼손하지 말 것, 그리고 개봉 당시의 상태를 최대한 많이 보존할 것이다. 이러한 대원칙을 최대한 지키되, 이번처럼 화면비가 원본과 다르더라도 대중과 학계에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방향의 복원 또한 바람직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사될 기억들

김승경/ 마지막으로 오영숙 교수께 이번에 상영되는 KBS 필름 복원작 여섯 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린다.

오영숙/ 먼저 <배신>과 함께 60년대 멜로드라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어머니의 힘>(안현철, 1960)이 있다. <서울로 가는 길>(이병일, 1962)은 당시 휴전선 최전방에서도 2km 더 들어가 촬영해 미군이 수상하게 여길 정도로 당시의 분단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접근한 작품이다. 황순원의 단편 소설을 영화화한 <잃어버린 사람들>(1967)에서는 전조명 감독의 시적인 영상미가 돋보인다. <목메어 불러봐도>(김기, 1968)는 가난한 해안마을 부부의 꿈이 좌절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석녀(김수용, 1969)는 70년대 <야행>(김수용, 1977) 등의 영화에서 본격화되는 서사인 남성의 욕망에 대응하는 여성을 다루고 있어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발견이 될 듯하다. 여기에 더해 이번에 상영하지는 않지만 임권택 감독의 <비나리는 선창가>(1970)를 소개하고 싶다. 굉장히 특이한 액션 멜로다. 복원 후 언젠가 꼭 보셨으면 한다.

김승경/ 남형권 연구원께는 인사와 함께 향후 KBS 필름의 디지털화 계획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남형권/ 향후 5년간 순차적으로 복원을 진행할 예정이다. 미보유 한국영화 발굴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디지털복원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료원이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보유한 중복 필름들이 더욱 흥미롭다. 다음 디지털화 예정작인 <아빠안녕>(최훈, 1963), <절망은 없다>(전조명, 1968) 등이 이러한 예시다. 컬러 오리지널 네거티브가 어떤 과정을 거쳐 KBS의 16mm 흑백 프린트로 복사되었는지를 역추적하는 연구를 진행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