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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카오스, 데이비드 린치 2024.07.25 2583
유혹하는 카오스, 데이비드 린치
내가 반한 데이비드 린치 영화를 소개합니다
 
글: 남선우(씨네21 기자)·박수용(씨네21 객원기자)·김성훈(씨네21 기자)

황갈색 배경 한 가운데 검게 칠한 집 한 채가 있다. 그 위아래로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가 자유분방하게 뒤섞여 배열돼있다. 끝이 살짝 찢긴 듯한 평면에 적힌 문구는 아래와 같다.

“깊은 어둠 속에 / 광채가 난다 / 그 곁에 뿌리가 보이고 / 나무가 자란다 / 별빛 아래 작은 집 / 그 안에 긴 팔의 남자는 / 주위의 광채를 보고 / 깊은 어둠으로 팔을 뻗으니 / 거기에 자신이 보인다”

빗금으로 행을 구분해 옮겨 적은 이 짧은 글은 리소그래피 작품으로 공개된 데이비드 린치의 시 < Deep Dark Darkness >(2009) 전문으로, 그 자체로 <데이빗 린치: 아트 라이프>(2017)의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주인공의 낭독도 해설도 없다. 린치가 회화를 거쳐 영화에 닿기까지의 걸음을 되밟는 이 다큐멘터리는 한 예술가가 자기 세계를 은유하는 것만 같은 텍스트를 띄워 관객을 묵독하게 한다. 낮게 깔리는 드럼 소리만이 도움을 준다. 오래 전 이미 린치의 관객이었던 이들이 기억 속 그림자를 불러올 수 있도록.

이 시를 단서로 이상하고 아름다운, 아니 이상해서 아름다운 수수께끼를 새로 마주하고 싶은 이들을 극장으로 초대한다. 8월2일부터 14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가 특별전 < Dreaming In the Dark: 데이비드 린치 특별전 >을 펼친다. 상영작은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부터 <인랜드 엠파이어>까지 총 10편의 디지털화·복원작. ‘어둠 속에서 꿈꾸기’에 앞서, 린치를 사랑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보내온 연서를 먼저 건넨다. <아카이뷰>는 이번 기획전이 마련한 장편영화 위주로 가장 좋아하는 린치 작품 선정을 부탁했으나, 린치가 연출한 드라마 시리즈에 대한 애정도 감추지 않은 그들은 저마다의 추억을 꺼내며 충격, 혼란, 그리고 매혹을 말했다. 이 고백을 엿보며 심신의 준비 운동을 해보자. 다시 한 번 깊은 어둠으로 팔 뻗을 수 있게!
 

<이레이저 헤드>


이레이저 헤드
* <이레이저 헤드>(1977)
 

<이레이저 헤드> <로스트 하이웨이> <멀홀랜드 드라이브> 등 수입한 안다미로
임나경 대표의 pick <이레이저 헤드>(1977)

“반대라서 끌리는 것이 틀림없다. 내 취향과는 가장 거리가 멀지만, 최애작을 뽑아달라는 질문을 받자마자 주저 없이 <이레이저 헤드>가 떠올랐다. 괴작과 명작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듯 어느 요소 하나 평범치 않은 이 영화야말로 데이비드 린치의 센세이셔널한 작품 세계를 가장 원초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아닐까. 한번 보고 나면 캐릭터에 대한 잔상이 적어도 이틀은 남으니 가성비적으로도 훌륭하다. (농담)”
 

<블루 벨벳>


블루 벨벳(1986)
* <블루 벨벳>(1986)

정주리 감독
* 정주리 감독 (사진=백종헌)

영화 <도희야> <다음 소희> 연출한
정주리 감독의 pick <블루 벨벳>(1986)

“15살. 처음으로 고향 여수를 벗어나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의 씨네마테크에 찾아갔다. 그리고 복사본 VHS로 <블루 벨벳>을 보았다. 괴이하고 현혹하며 일렁이는 영화 속 현실의 모든 요소에 단번에 사로잡혔다. 그날 이후 영문도 모른 채 ‘나도 그 세계로 갈 테야’하며 달리다가 넘어졌다가 허우적거리며 아직 가고 있다.”


류성희 미술감독
* 류성희 미술감독 (사진=백종헌)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 드라마 <작은 아씨들>, 영화 <헤어질 결심> 미술을 작업한
류성희 미술감독의 pick <블루 벨벳>(1986)

“영화에 한창 빠져들던 20대 시절, 데이비드 린치의 거의 모든 작품이 내게 크나큰 영감을 주었고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 나아가서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까지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렬한 영화적 경험을 안겨 주었다. 그 중에서도 <블루 벨벳>이 안겨준 충격은 기묘하고도 가히 설명불가 하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완성도 있는 작품은 <멀홀랜드 드라이브>라고 생각하지만 <블루 벨벳>이 내 피부 깊숙히 남긴 신비로운 매력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는, 그렇다고 믿는 사물들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 점점 기묘한 모습들을 드러내고, 눈 앞에 펼쳐지는 몽환적이고도 너무도 어두운 이면들은 피할 길이 없다. 보여지는 것이 다가 아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불편함을 안기지만 린치가 인도하는 현실과 환상 사이의 신비로운 틈새에 내 감각을 내맡기면, 용감하고 독창적이며 기묘한 방식으로 당신의 영혼을 뒤흔드는 경험을 얻을 것이다. 어딘가 불완전한 느낌마저도 이 영화의 기묘한 매력을 더하는 것 같기만 하다. <블루 벨벳>이라는 시각적이고도 촉각적인 제목에서부터 이미, 린치의 모든 영화들이 그렇듯 이해하려 하기보다 느끼고 경험해야하는 영화.”
 

<트윈 픽스>


트윈픽스
* <트윈 픽스>(1990~1991)
신우석 감독
* 신우석 감독 (사진 제공=신우석)

뉴진스의 < ditto > < omg > 뮤직비디오 연출한 돌고래유괴단 대표
신우석 감독의 pick <트윈 픽스>(1990~1991)

“살인사건이고 나발이고 이상한 인물만 잔뜩 등장하는 미친 캐릭터 쇼. 이만한 코미디도 드물다. Invitation to love.”
 

<로스트 하이웨이>


로스트 하이웨이 스틸이미지
* <로스트 하이웨이>(1997)

유지태 배우 및 감독
* 유지태 배우·감독 (사진=오계옥)

디즈니+ 시리즈 <비질란테> 주연, 단편영화 <톡 투 허> 연출한
유지태 배우·감독의 pick <로스트 하이웨이>(1997)

“20대 초반 무렵 몽상에 빠져 있기를 좋아했던 나는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를 보고 감독이라면 저렇게 자유롭게 상상하며 영화를 만들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감각적인 영상과 매력적인 음악이 영화 속에서 만나면 관객이 현실을 환상과도 같게 느낄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영화이기도 하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멀홀랜드 드라이브 스틸이미지
*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윤아랑 영화평론가
* 윤아랑 영화평론가 (사진=최성열)

「(이전)같지 않으리-데이빗 린치론」으로 2020 신춘문예 평론 부문 수상한
윤아랑 영화평론가의 pick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환상과 현실의 낙차가 아닌, 상이한 세계들의 긴장이 여기서 펼쳐진다. 그런데 우리가 출발한 그 세계는 대체 어디였던가? 또 우리는 정말 거기서 출발했던가? 발을 내딛으면 내딛을수록 우리는 혼돈에 빠진다. 아마 앞으로도 내게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하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린치의 작품은 <트윈 픽스 시즌 3(Twin Peaks: The Return)>이지만, 이번엔 장편 영화 중에서만 꼽아달라고 요청을 받았기 때문에 대신 차선으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꼽았습니다)”
 
박홍열 촬영감독
* 박홍열 촬영감독 (사진=백종헌)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연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등 촬영한
박홍열 촬영감독의 pick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이 영화는 혼란스러운 내용과 달리 한 신 안에서 액션 컷과 리액션 컷은 정확하고 친절하게 보여준다. 다만 그 두 반응 컷이 일반적 영화와 달리 정보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인물들의 행동과 반응으로만 매칭되어 현실과 판타지의 세계의 혼동을 주는 요소로 작동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꿈과 현실 두 세계를 다른 질감으로 친절하게 보여주는 지점도 흥미로웠는데, 영화의 대부분을 자치하는 꿈의 세계는 카메라 필터를 사용해 부드럽고 몽환적인 클래식 헐리우드 영화들처럼 보여주고, 현실 부분은 필터 없는 깨끗한 질감으로 보여준다. 꿈 장면들에서 필터 효과는 전체적인 소프트함과 함께 가로등과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같은 광원들을 십자모양으로 번지게 하면서 기술적 에러인 색수차를 강조한다. 기술적 오류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표현, 꿈의 세계를 현실과 확실히 구분하여 보여주는 대담한 시도들이 흥미로웠던 영화.”

남화연 작가
* 남화연 작가 (사진 제공=남화연)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교수
남화연 작가의 pick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꿈의 이미지를 얼마만큼 신뢰해야 하는지 또는 그것이 현실에 어느 정도의 자력을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 속 현실, 꿈, 환상, 기억 등이 등가로 존재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당기는 시간 구조를 이룬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한 구조 안에서 꿈, 환상, 기억 등이 현실을 파열하거나 도리어 의심하도록 힘을 발휘하는 사태에 매혹되었다.”

이원석 감독
* 이원석 감독 (사진=오계옥)

영화 <남자사용설명서> <상의원> <킬링 로맨스> 연출한
이원석 감독의 pick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내가 생각하는 데이비드 린치 최고의 작품은 <멀홀랜드 드라이브>다.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이게 뭐지? 토탈 카오스!’ DVD로도 다시 봤는데, 다른 DVD들과 달리 신 셀렉션(scene selection)이 제공되지 않는 점도 신기했다. 원래 카오스의 대마왕이신 데이비드 린치의 마스터피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각 신의 대화가 하나도 연결되지 않는다. 인물들이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여서 자기 이야기만 하는 우리의 일상이 그렇듯 말이다. 그렇게 린치는 완벽히 계산된 이상함으로써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인간을 묘사한다. 그 카오스의 하모니에서 답을 찾으려는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처럼 길을 잃게 되고, 폭발하는 기괴함과 미스테리를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볼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영화이기도 하다.”
 

<인랜드 엠파이어>


인랜드 엠파이어 스틸이미지
* <인랜드 엠파이어>(2006)

전하영 작가
* 전하영 작가 (사진=오계옥)

제12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자이자 소설집 『시차와 시대착오』 출간한
전하영 작가의 pick <인랜드 엠파이어>(2006)

“2006년 12월 뉴욕의 IFC센터에서 <인랜드 엠파이어>를 처음 보았다. 영화학교에서의 혹독한 시간을 뒤로 하고 나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무엇보다 영화를 사랑했지만, 앞으로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보러 간 데이비드 린치의 신작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필름 룩을 어설프게 따라 하던 영화학교 학생들이나 쓰던 소니 PD-150으로 영화 전체를 촬영했다는 사실도 솔직히 마음에 안 찼다. 상영 후 토크를 위해 무대에 올라선 배우 저스틴 서룩스는 작품이 난해하다는 반응에 자신도 <인랜드 엠파이어>가 어떤 영화인지 모르겠고, 촬영할 때도 무엇을 찍는지 잘 몰랐으며 그때그때 주어지는 영화적 프로세스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상영 중에 20분쯤 (더 길지도 모른다) 정신을 잃었던 나 역시 복잡한 이야기에 쉬이 접속하지 못하고 그저 당혹스러움만을 한가득 품고 돌아와 짧은 단상을 일기에 적어놓았다. 2024년,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영화를 보고 오래된 일기를 펼쳐보았다. 이제 어쩐 일인지 나는 누군가의 악몽처럼 여겨졌던 영화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안에는 수없이 많은 시간대를 살아가는 여러 모습을 한 나 자신이 있고, 그들은 따로 떨어져 있으나 동시에 존재하며, 기록과 기억과 상상이라는 문과 통로를 거치면 기적처럼 재회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극장에서 (그리고 어디에선가) 영화를 경험하듯 그렇게…… 잠들었던 20분을 거의 20년 만에 되찾은 기분이다. 그것은 저 먼 곳이 아니라 내 안에서, inland에서 발견되었고, 발견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