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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역사: 한국 영화에 비친 식민지 시대의 다양한 얼굴들 | 2024.11.26 | 1045 |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역사:
한국 영화에 비친 식민지 시대의 다양한 얼굴들 VIENNALE(VIENNA INTERNATIONAL FILM FESTIVAL) 한국영화 특별전 글: 헤르빈 탐스마 Gerwin Tamsma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강대국과 강력한 문화권 사이의 교차로에 있는 많은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한국의 역사 또한 파괴적인 침략과 고립, 그리고 평화의 시기를 거치며 형성되었다. 서쪽으로는 중국과 몽골 왕조가 있었고,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이후의 소련이 있었다. 더 멀리 바다에서는 난파된 네덜란드의 선원들을 시작으로 서양인들이 바다를 건너 들어왔으며, 동쪽으로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유럽 열강들이 세계의 많은 지역을 식민지화하던 수 세기 동안, 조선왕조와 일본은 모두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1853년 미국의 군함에 의해 일본이 서구에 교역을 개방해야 했을 때, 그 이후의 급속한 근대화는 이 지역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50여 년 후, 산업화하고 군사화한 일본제국은 러시아 동방함대를 격파하고 조선 땅에서 청 왕조의 잔재를 상대로 팽창주의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으로 한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는 한반도에 수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식민제국의 건설은 자신들의 종말을 상정하지 않고서 진행된다. 그렇게 영속화하려는 의도 때문에 이 특정한 점령의 영향은 깊고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일본인들은 이를 위해 심오하고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 '역사에 홀리다(Haunted by History)'라고 이름 붙인 이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12편의 영화는 일본 점령이 한국인들의 삶에 미친 영향과 유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한다. 오랜 시간 국내외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고 접근이 어려웠던 한국영화사는 최근 한국영상자료원과 여러 기관의 지속적인 노력 덕분에 점점 접근 가능해졌다. 1940년대부터 70여 년의 기간에 걸쳐 제작된 이 프로그램의 선정작들은 오리지널 프린트로, 혹은 새롭게 복원되어 자막이 입혀진 디지털 버전으로 상영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상영작들은 모두 한국 영화지만, 가장 오래된 작품인 <수업료>(최인규, 방한준, 1940)는 조선이 일본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있을 때 제작되었다. 과거의 많은 한국 영화들처럼 이 작품 역시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수년 전 중국전영자료관에 의해 베이징에서 다시금 발견되었다. <수업료>는 얼핏 보면 아이가 수업료를 모으려고 노력하는 귀여운 어린이 영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선전의 목적은 부인할 수 없다. 식민지 점령자들의 관점에서 교육이란 한국 어린이들을 열성적이고 충성스러운 일본 시민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이 영화를 제작한 조선 영화인들은 당시 가능한 한계를 뛰어넘어 원래 일본어로만 써진 대본에 한국어를 포함하는 등 다양한 저항적 요소들을 담으려 했다. ![]() * <수업료> 스틸이미지 진행 중인 치유의 과정<수업료>가 고통스러운 민족의 과거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면, 이 프로그램의 다른 영화들은 같은 역사를 다루되 각기 다른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다루려고 시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각 영화는 그 치유 과정의 각기 다른 단계를 보여주는 어떤 역사적 순간들을 담고 있다. 한국의 위대한 감독들은 이 트라우마를 치유할 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했고, 전쟁영화에서 스파게티 웨스턴까지, 공포영화에서 갱스터 영화, 다큐멘터리에서 에로틱 코미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작업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 시대가 막을 내리자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불과 몇 년 후, 한국전쟁(1950-1953)으로 인해 나라는 둘로 갈라졌고,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일제가 건설한 기반 시설을 포함한 국토 대부분이 황폐해졌다. 학계와 대중 토론에서 식민주의, 특히 탈식민화라는 개념만큼이나 치열하게 논의된 주제도 드물다. 탈식민화란 주로 동시대의 관점에서 식민지 권력구조 및 유산을 해체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그러나 탈식민화는 특히 한국의 전후 발전이나 영화사에 있어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한 국가가 독립을 되찾았을 때 마주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무엇이 한국을 한국답게 만드는가?" 또는 "무엇이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의 일부는 끊임없이 다시 쓰이고 있지만, 결코 지워낼 수 없는 고통스러운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 프로그램에 선정된 작품들과 그 작품들이 다루는 다양한 역사적 주제들은 감독의 아이디어와 비전뿐만 아니라, 기술적, 경제적 가능성, 탈식민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검열 등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의 요구에 의해서도 형성되었다. 한국의 권위주의 통치자들은 한국이라는 국가를 한국 문화의 맥락 속에 이으려 노력하는 한편, 한국 국민이 친일 성향으로 기울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일본과 관련된 모든 것에 한국인의 눈길이 닿지 못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금지의 목록에는 일본에서 생산한 이미지와 문화상품뿐만 아니라 일본 자체의 이미지까지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 국민이 자국으로 송환되어 한국에서 사라진 것처럼 일본 통치의 유산 역시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일본 자체도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은 여전히 가까운 이웃으로 남았고, 냉전 시대의 동맹국이자 무역 상대였으며, 또한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도쿄에서 교육받은 신상옥이나 김기영 같은 영화감독들이 어떻게 일본의 특정한 전통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좌측부터) <족보> 포스터, <태> 포스터 일본의 식민지 동화 시도와 한국인의 정체성창씨개명과 같이 식민지 동화를 위해 일본이 제정한 정책들은 한국인의 정체성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임권택의 <족보>(1978)에서 다루는 것이 바로 이 창씨개명이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일본인 소설가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 주인공은 한국과 한국의 풍경에 매료된 젊은 일본 관리다. 이 일본 관리는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집성촌의 종손의 딸에게 끌리게 된다. 임권택은 일본인 작가가 "석양의 사라져가는 빛과 같이" 한국을 바라보던 시각을 "봄날 들판에서 웃는 어린 소녀들처럼 생기와 기쁨이 가득한" 자신만의 독특한 비전으로 바꾸었다. 또 다른 주요 총독부령은 1910년 일본어를 국어로 도입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교사들과 학생들은 시골로 가서 농촌 주민들을 '계몽'하기 위해 한글을 가르쳤는데, 이 계몽운동이 신상옥의 고전적인 멜로드라마 <상록수>(1961)의 줄거리가 된다. 이 영화가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박정희, 양측의 권위주의 지도자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양측 지도자 모두 (민족주의적)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 최고의 의무이며, 개인적 욕망은 (일본 식민지배자 때문에) 비극적인 끝을 맺는다는 이 영화의 메시지에 분명히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농촌은 쉽게 잊을 수 없는 김기영의 작품 <고려장>(1963)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일본의 고전영화 <나라야마 부시코>(기노시타 게이스케, 1958)에서 영감을 일부 받았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한국에서 일본 관련한 것은 무엇이든 거의 용납되지 않던 시기였다. 이 영화는 고려 시대, 궁핍한 시기에 노쇠하여 생산성 없는 이들을 산으로 데려가 유기하는 전통을 배경으로 하지만, 분명한 은유적 평행선을 통해 식민지 시대를 암시한다. 최근 복원된 하명중의 영화 <태>(1996)가 보여주듯이, 일본의 통치에도 옛 관습과 봉건적 관행은 지속되었다. 이 영화는 기근에 직면한 외딴 어촌의 여성 학대, 악덕 선주, 바다의 혼령, 화려한 한국의 무속 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명중은 훌륭한 배우였으며(이 프로그램의 상영작 가운데 <족보>의 주연이기도 하다), 유명 영화감독이었던 형 하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감독이 되었다. 식민지 시대 여성들의 암울한 상황은 <뽕>(이두용, 1985)에도 나타나 있다. 이 영화는 억압적이었던 1980년대에 인기를 얻었던 농촌 에로틱 '코미디' 장르의 우아한 사례일 텐데, 당시 성애 영화는 대중을 달래는 데 유용한 수단이라 여겨졌다. <뽕>의 아름다운 여주인공은 1920년대, 고립된 마을에서 남편이 집을 비운 상황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녀에게는 마을의 모든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밖에 다른 생존 수단이 없다. ![]() * 영화제 공식카탈로그, <월하의 공동묘지> 페이지 귀신 이야기, 갱스터 영화, 그리고 웨스턴저예산 공포영화 <월하의 공동묘지>(권철휘, 1967)가 유쾌한 과장미를 앞세운 독특한 매력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의 귀신 이야기들이 분명히 끔찍한 식민지 과거를 비유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로 작동했던 것이 명확해 보인다. 이 영화는 살해당한 여성 유령이 복수하고 자신의 아이를 지키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인기를 끌었던 (일본) 영화의 고도로 양식화되고 연극적인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이 영화의 오프닝 장면에는 한때 수려한 외모의 변사였지만 지금은 괴물 같은 외모를 지니게 된 한 남자가 등장해 40년 전에 일어난 끔찍하고 두려운 이야기에 대해 경고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최근의 K-호러 작품인 <기담>(정식, 정범식, 2007)은 플래시백 구조를 사용하여 1979년이라는 영화 속 시점에서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이 영화는 1942년 서울의 한 일본인 소유 병원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을 보여준다. 거기서 억압되고 해결되지 않은 과거는 초자연적 공포의 원천이 된다.
한국에서 갱스터와 영화의 관계는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임권택의 화려하고 역동적인 전기영화 <장군의 아들>(1990)의 멋진 영화적 배경이 되었다. 당시 주먹 패거리들은 종종 자신들이 '보호'하는 극장의 이름을 따서 불렸는데, 한국의 전설적인 주먹 김두한의 경우에는 종로의 우미관이었다. 김두한은 두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말년에 자신의 격동적인 삶을 자서전으로 풀어냈다. 이 자서전을 바탕으로 수많은 만화와 영화에서 김두한은 항일 애국자로 그려졌다. 덕분에 김두한은 사후에 기회주의적 정치 폭력배가 아니라, 애국자의 롤 모델로 기억됐다. <장군의 아들>은 김두한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제목을 <장군의 아들>이라고 선택함으로써, 그의 아버지가 실제로 1930년 한 공산주의자에 의해 살해되기 전까지 만주에서 일본군과 성공적으로 싸운 아나키스트 장군 김좌진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당시 만주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으로, 법과 질서가 무너진 혼란의 땅이었습니다. 이곳은 한국 독립운동가, 갱스터, 기회주의자, 중국 군벌, 러시아 백군의 잔당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군과 서로를 상대로 싸우며 피신한 곳이었다. 1960년대에 스파게티 웨스턴이 한국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만주 웨스턴'이라고 불리는 변종 장르가 생겨났다. 1960년대 한국의 영화감독 가운데 아마도 가장 예술적인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이만희는 이 새로운 장르에 <쇠사슬을 끊어라>(1971)라는 작품을 추가시켰다. 이 영화는 분명히 <황야의 무법자>(세르지오 레오네, 1966)를 참고한 것처럼 보이는데, 영화의 사운드트랙마저 비슷하다. 세 모험가가 개인적 명예, 부 또는 명성을 위해 (값을 매길 수 없는 불상이라는) 보물을 차지하려 한다. 마지막 반전에서 아마도 검열 당국을 만족시키기 위해 추가된 것처럼 보이는데, 세 모험가의 궁극적인 동기가 갑자기 애국심으로 바뀌기도 한다. ![]() ![]() * <현해탄은 알고 있다> 스틸이미지 2차 세계대전의 종전부터 현재까지한국의 식민지 시기는 2차 세계대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이 식민지 시대의 종식을 알리는 시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조선인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다. 백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일본군 편이 되어 싸우도록 강요받았고, 지상에서는 일본의 학대를, 하늘에서는 미군의 폭격을 견뎌야 했다. 이러한 현실은 김기영 감독의 걸작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에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1965년, 한일 양국의 외교 관계 복원을 위한 조약의 일환으로 일본은 한국 군인들의 처우에 대해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오늘날까지도 (완곡하게 ‘위안부’라 불리는) 전시 일본군의 성노예 사용 문제는 비극적이고 매우 정치화된 금기 사항으로 남아있으며, 이는 영화 발표 이후 사회 각층에 많은 영향을 줬던 변영주의 감동적인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1995)의 주제가 되었다. 이 영화가 공개되기 이전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매주 수요집회에서 주장하던 배상 요구는 국내외에서 대부분 무시되었다. 1998년 10월이 되어서야 한국은 53년간 지속된 일본문화 수입금지 조치를 마침내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식민지 시대와 그로 인한 일본과의 관계는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감자이다. 2016년, 각본가이자 감독인 신연식은 여전히 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라가며 대답했다. 그는 『버라이어티』지에 이렇게 말했다. "식민지 시대는 영화 각색에 적합한 인물들과 사건들로 가득하지만, 과거의 영화제작자들은 고통스러운 역사와 관련한 민족 감정 때문에 그 특정 시대를 다루기를 꺼렸다. 하지만 과거 사건들의 진실이 밝혀지고 입증되면서 최근 한국 사회는 트라우마에서 회복되기 시작했고 식민지 시대를 다루는 영화를 보는 것이 덜 어려워졌다." 같은 해에 나온 박찬욱의 <아가씨>(2016)는 식민지 시대가 환상적이고 대단히 인기 있는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증명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국 소설을 각색한 이 작품은 일본 백작으로 위장한 사기꾼, 그의 하녀로 고용된 아름답고 젊은 한국인 소매치기, 그리고 수상쩍은 삼촌에게 지배당하는 외로운 일본인 상속녀가 등장해 펼쳐지는 로맨스와 배신으로 가득한 이야기다. <아가씨>는 이 시대에 대한 모든 통념을 요약하고, 전복하고, 왜곡하는 기념비적인 선언이다. 박찬욱은 인종, 계급, 권력, 젠더, 섹스, 평등, 국적, 정치, 예술, 문화적 전위에 관한 생각을 (스포일러이지만) 두 여주인공이 상하이를 향해 함께 항해하는 마지막 장면 하나로 모아낸다. 과거의 많은 영화가 시도했던 것처럼 민족적 진실을 건네고, 무언가를 입증하는 대신, 박찬욱은 그들에게 집 밖의 집,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 그대로 될 수 있는 여정을 떠날 기회를 선사한다.
헤르빈 탐스마는 1996년부터 2023년까지 로테르담 국제영화제(IFFR)에서 선임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수년간 그는 영화제의 많은 정기 상영 프로그램과 다양한 주제별 프로그램 및 회고전을 기획하고 발전시켰다. IFFR의 휴버트 발스 기금 선정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네덜란드 영화기금과 암스테르담 예술기금의 자문위원으로도 일했다. 현재 그는 프리랜서 프로그래머, 작가이자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