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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 | 2025.04.30 | 206 |
“복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
1984년 연출작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복원한 배창호 감독 글: 배동미(씨네21)
사진: 오계옥(씨네21)![]() “내가 찍은 영화 중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라 너무너무 울었어요.” 일흔한살의 영화감독은 전화 너머로 울면서 복원된 자신의 영화를 봤다고 말했다. 그의 나이 서른한살에 촬영해 같은해 개봉한 영화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이후 <그해 겨울>) 이야기다. 올해 한국영상자료원에 의해 4K로 복원된 <그해 겨울>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일반 관객에게 처음으로 공개된다. 배창호 감독은 영화제 상영에 앞서 복원의 결과물을 4월 자문 시사로 처음 보았다. “처음 시작할 때 기술적인 이야기를 한두 마디 하다가 그냥 영화에 빠져서 일사천리로 봤어요. 완전히 몰입할 만큼 기술적으로 마스터링이 잘 됐고 그걸 초월해서 그냥 영화에 빠졌어요.” 그가 푹 빠져 본 <그해 겨울>은 6.25 전쟁 때 헤어진 수지(유지인)와 수인(이미숙) 자매를 다룬 가족멜로드라마다. 이목구비가 오목조목하게 생겼다고 하여 ‘오목이’란 별명으로 불렸던 어린 수인은 피난길에 언니 수지에게 버림받고 전쟁고아가 되는데, 이후 펼쳐지는 오목이의 삶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목이 생각을 쉽게 떨쳐낼 수 없을 정도다. <그해 겨울>을 포함해 그의 신작 다큐멘터리 <배창호의 클로즈업>와 절제된 미학이 담긴 <황진이> <꿈>이 5월의 전주에서 ‘배창호 특별전: 대중성과 실험성 사이에서’란 이름으로 묶여 상영된다. <그해 겨울> 시사 이후에 배창호 감독과 만나 대화를 나누려 했으나 시사 일정이 밀리면서 그가 영화를 보기 하루 전에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그러나 어쩌면 인터뷰하기에 괜찮은 시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태어난 영화를 마주하기 직전 배창호 감독이 기대하고 설레는 모습까지 담을 수 있어서다. <그해 겨울>뿐 아니라 전주에서 상영되는 세 작품에 대해서도 그와 긴 시간에 걸쳐 이야기 나누었다. ![]() 복원된 <그해 겨울>은 아직 못 보셨죠? 연기되는 바람에요. 작품은 훤히 알지. 훤히 아시겠지만 깨끗하게 복원된 버전을 보실 거잖아요. 내일이에요. 마음이 설레지. 복원한 내 작품이 여러 개 있는데 특히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잘 보여지질 않았어요. 2008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감독님의 전작전이 열렸을 때도 기회가 없었나요? 그땐 했죠. 필름으로. 그렇지만 필름으로 상영할 때만 몇 해에 한 번씩 했나? 그러니까 사람들은 모르죠. 볼 수가 없으니까. 이번에 복원해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감독님의 영화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어떠셨나요. 시초는 지난해에 내 작품의 클로즈업에 관해 박사 논문을 쓴 친구가 있어요.(그가 말하는 박장춘 관동대 교수는 배창호 감독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편집자) 이제 서로 가까워져서 그 친구가 사석에서 "감독님 다큐를 한번 하면 어떨까요?"라고 해서 내가 손사래를 쳤지. ![]() * (좌측부터) <개그맨>, <배창호의 클로즈 업> 스틸이미지 영화 <개그맨>에서 연기도 하셨던 분인데 왜 손사래를 치셨나요. 열정을 쏟아야 하고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인데 동기부여가 돼야 하죠. 그리고 방대하잖아요. 그 친구가 다시 "감독님 작품에서 공간에 포커스를 두면 어떨까요?"라고 얘기할 때 소위 '핀트'가 오더라고요. ‘아, 그렇게 좁혀서는 할 수가 있겠다.’ 그래서 공동 감독, 공동 제작하고, 내가 내레이션하면서 내가 찍은 18편 중 16편의 대표적인 장소들에 갔죠. 내 영화를 자세히 뜯어보는 사람은 알 텐데 나는 공간 변화가 굉장히 많은 감독이에요. 특별한 자극보다는 변화를 통해서 관객의 주의를 끌려고 하는 편이에요. 또 내가 자연을 좋아하고 공간과 건축물을 좋아해요. 그래서 찍을 데가 많았지. 그곳들을 돌아다니면서 찍었어요. 직접 가셨군요. 갔죠. 인터뷰는 싫었거든. 같이 일했던 감독, 배우들이 자화자찬하는. 그 사람들 인터뷰를 안 해줄 수는 없이 와가지고 무슨 미화를 한다든지. 그런 건 싹 빼고 내가 느낀 걸 에세이처럼 내레이션으로 표현해서 1시간 반짜리 다큐가 나왔어요. <깊고 푸른 밤>을 찍은 미국도 40년 만에 가고, <흑수선>을 촬영했던 일본도 갔다 왔죠. 바쁘셨겠군요. 매일 촬영하는 건 아니고 6개월은 그래도 바빴죠. 그렇게 완성된 영화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네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월드프리미어로 공개하게 됐는데 전주에서 미니 특별전을 제의해 왔죠. 하는 김에 내 영화 서너편을 틀자고 하더라고요. 상의해서 세 편을 선정했고 영상자료원에서 협조해주었죠. 박완서 작가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구원의 테마 이번에 함께 상영하는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황진이> <봄> 세 편의 영화는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나요. 내가 보따리가 많아요. 디지털로 변환해서 보여주고 싶은 건 <황진이>였고, 전주 측에서 <꿈>을 얘기했어요. 영화제하고 한국영상자료원 사이에 그런 게 있는 모양이에요. 1년에 한 편을 복원해 준다더군요. 심의를 통과해서요. 그래서 내가 "<그해 겨울>이 내 아까우다. 재발견 됐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해 복원하게 됐어요. 이번에 4K로 복원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1984년 9월에 개봉했어요. 그런데 그해 3월에 <고래 사냥>이 개봉했습니다. 도대체 1984년에 감독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어떻게 두 편이나 개봉하셨어요? 아, 그때는 뭐라 그럴까. 내가 잘 나가는 감독이었으니까 한 작품을 하면서 다음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했어요. 그때하고 지금하고 영화 제작 여건이 천지 차이에요. 마음에 맞는 제작자와 이러한 영화를 하고 싶다고 크게 윤곽이 서면 "합시다"였죠. 내가 머릿속으로 준비하면서 캐스팅을 해놓고요. <고래 사냥>을 촬영하면서 안성기 씨한테 "안 형, 이러이러한 작품입니다. 하면 어떻겠어요?"하고 물었죠. 신뢰하는 사이니까 안성기 씨도 "합시다" 했죠. 또 (이)미숙씨고도 일할 테니까 얘기하고. 원작은 있겠다, 원작을 각색시키면 빠르죠. 그다음이 심사 과정인데 투자자가 수십, 수백억 들이며 위험 부담이 크지 않고 국내 시장 자본만 가지고 하니까 부담이 적었어요. 또 감독에게 창작의 역량을 거의 맡길 때고. 그래서 80년대에 소위 자기 색깔을 내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질 수 있었죠. 그때 착착착 일이 진행되어 <고래 사냥> 개봉하고 바로 <그해 겨울> 피난 신을 먼저 찍으려고 강원도 용평에 갔지. <깊고 푸른 밤>도 1984년 그해에 찍었어요. 1982년에 감독으로 데뷔하셨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작품을 동시에 하셨나요. 지금 보면 많지만 예전 우리 선배 감독님들, 이를테면 임권택 감독님도 엄청 많이 찍고 김수용 감독도 엄청 찍었잖아요? 60년대에는 일년에 열대 편 찍는 분도 계셨을 거예요. 지금과 비교하면 많지만 부지런히 일하다 보면 영화를 찍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요즘 감독하는 사람들은 안쓰럽다니까. 사람 진을 다 빼놓고 몇 년에 하나. 아이고, 그래서 안 됐어. <그해 겨울>은 소설로 먼저 접하시고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확신이 드셨나요. 제의를 받고 연출한 경우가 두세 편쯤 되는데 그중 하나가 <그해 겨울>이에요. 그 외엔 전부 내가 선택해서 연출했어요. 그 유명한 <최후의 증인>을 만든 세경 영화사에서 제의가 왔어요. 소설 <그해 겨울>이 연재된다는 건 알았어요. 1982년 한국일보에서 연재됐어요. 1983년도에 KBS가 6.25 이산가족 재상봉 프로그램을 방영해 전국적인 이슈가 됐거든요. (KBS 1TV에서 1983년 6월 30일부터 1983년 11월 14일까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편집자) ![]() 박완서 선생이 거기서 모티프를 잡았는지 모르지만 그 시점에 이산가족에 대한 소재로 소설을 쓰셨어요. 소설을 읽어봤는데 상당히 고민됐어요. 연출을 할 고민하던 작품이 몇 가지 있었는데 이 영화가 제일 심했어요. 박완서 선생의 소설은 6.25 이산가족을 소재로 했지만 수지와 오목이 자매의 질투심 얘기에 포커스가 가있어요. 언니가 동생 탄생으로 인해서 관심을 뺏겨서 동생을 질시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전쟁이란 상황을 이용해서 동생을 버려요. 그 부분이 참 고민됐어요. 또 마지막 대목에서 박완서 선생과 나의 포커스가 나중에 영화가 좀 달라지는데, 원작에는 용서해 주는 게 없어요. 요즘 말로 하면 ‘쿨하게’ 끝나요. 소재와 이야기가 좋고 나한테도 맞는데, 개인의 심리로 들어가기에는 서사적이었어요. 밀도 있게 좁혀서 개인의 복잡한 심리로 들어가는 영화가 아니라. 그리고 마지막에 구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고민을 많이 하다가 내가 결말을 바꾸면 되겠다 생각했죠. 그래서 회사에 얘기 안 하고 원작자한테도 얘기 안 하고 결말을 바꿨어요. 원작자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요? 영화의 범인도 바꾸는데 원작자가 팔 때는 각오해야지. 나중에 박완서 선생이 시사 때 오셨는데 문인들 몇 사람이 있었어요. 문인들은 다 좋다고 박완서 선생이 좀 난처하셨던 것 같아요. 원래 원작자는 난처하게 돼 있어요. 제가 본 <그해 겨울>은 참 영화적이었어요. 환한 낮에 소녀들이 뛰어노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어두컴컴하게 비가 내리는 장면으로 들어간 다음에 새하얀 눈이 내린 흑백의 플래시백이 시작돼요. 빛과 어둠, 다시 빛과 어둠이 교차하면서 밀도 있고 빠르게 영화가 진행됩니다. 소설과는 달라야 한다는 영화감독으로서 의도가 들어간 것이죠? 그럼요. 소설은 덩어리에요. 그걸 영화라는 표현으로 다시 바꿔줘야죠. 소설이 주는 큰 덩어리들을 가져오지만 영화에선 바꿔야죠. 달라야죠.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 처음엔 안 알려주잖아요. 안 알려주지요. ![]()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스틸이미지 수지가 흰 외투를 입고 있어서 의사인가 궁금해하면서 봤어요. 그런데 의사가 아니라 실려 온 여성의 보호자란 사실이 밝혀지고,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 알려주는 흑백의 플래시백으로 밀고 들어갑니다. 둘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알려주지 않고 과감하게 시도하신 이유가 있으셨을까 궁금했어요. 영화적인 호흡으로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벌써 전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죠.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서 하나씩 하나씩 관객들이 따라오게 하는 거지. 빨리 알려줄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았어요. ‘뭔가 사연이 있구나’, ‘뭔가 연관관계가 있겠구나’ 생각하며 관객들이 점점점 들어오게 되는 거죠. 그리고 시작된 흑백의 플래시백을 보면 엄청난 몹씬입니다. 저는 감독님의 영화들을 인간의 감정을 잘 다루는 세련된 멜로드라마로 기억하고 있는데 규모 있는 몹씬이어서 감탄했습니다. CG 하나 없이 촬영했죠. 용평 사람들 500명을 동원하고 소달구지에 짐까지 이어지니 줄이 엄청 길더라고. 지금은 세상을 떠난 곽지균 감독이라고 있어요. <겨울 나그네> 감독인데. 이 사람이 조감독을 해줬어요. 내가 영입했어요. 그 사람이 영화 현장 경험이 나보다 더 많았어요. 나이는 나보다 적은데. 그 사람의 활약이 아주 많이 컸죠. 그리고 또 정광석 촬영감독이라고 우리나라에 전설적인 촬영 감독이 촬영했어요. 이 양반은 경험이 엄청 많아서 전쟁 영화, 코미디 영화, 공포영화, 사극까지 다 하셨어요. 특히 6.25 참전 참전도 하신 분이고 전쟁영화를 잘 촬영하셨어요. 그런 전문가들의 도움을 다 받아서 어렵지 않게 촬영했던 거 같아요. 단지 애들을 내가 너무 고생시켰구나 싶어요. 애들이 얼마나 그렇게 잘 따라왔는지 새삼 새삼 고마워요. <배창호의 클로즈업> 준비하면서 그 장면을 다시 보니까 전쟁 당시 촬영된 다큐처럼 생생하더라고요. 다 아날로그로 찍었으니까. 정말 생생하더라고요. 몇 일간 찍으셨나요. 비용 때문에 오래는 못 찍었을걸요. 그리고 내가 가성비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한 나흘 찍었나 싶어요. 피난 행렬이 긴 몹신은 하루에 찍었고요. ![]()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스틸이미지 엄마를 잃은 수지랑 오목이가 둘이 남아 피난을 가는 장면을 독일 표현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기괴하고 공포스러워요. 버려진 치매 노인과 갓난아기가 주는 위태로운 느낌이 있어요. 원작엔 없는 장면이에요. 영화적인 어떤 걸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쟁을 보여야 하니까 탄생한 장면이죠. 그 당시 보면 이산가족들이 생이별하기보다 버려진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해요. 그러니까 치매 할머니도 버려진 거지. 수지도 동생을 버리잖아요.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인간의 본능을 간접적으로 묘사했어요. 이산가족들의 뒷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죄책감이 있어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자기라도 살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벌어진 일들. 그런 미장센의 한 디테일이죠. 감독님은 한국 전쟁 때 태어나셨죠? 1953년 5월, 휴전 두 달 전에 태어났어요. 나는 전쟁은 모르지만 전쟁이 끝난 서울에서 살았어요. 대구에서 태어나서 1년 후에 서울로 왔으니까 전후에 공기는 마셨지. 그때 가난이라든지 한국의 전후 현실을 알죠. 빛과 어둠으로 시작한 영화는 전후 달라진 수지와 오목이의 계급 차이와 두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의 차이를 계속해서 강조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의도는 없었어요. 내가 가고자 하는 영화의 방향이 무엇이냐에 달린 거예요. 인물에 대한 강조는 있죠. 수지는 동생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오목이는 버림 받았다. 버림받은 사람으로서의 인생유전은 뭐가 있을까. 어떠한 삶을 겪었는데 톤에 맞는 장소가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보면 염전도 나오고 광산도 나와요. 거기에 내가 겪은 경험, 내가 목격했던 삶, 내가 좋아했던 영화의 장면 그런 것들이 같이 합쳐져 장면들이 이루어지는 거죠. 둘의 대조가 있어야 어우러지면서 마지막에 화해하겠죠. 계급 차이의 경우, 내 영화 18편을 보면 아웃사이더를 많이 그려요. <꼬방동네 사람들>도 <고래 사냥>도요. <철인들>도 기능공들에 대한 얘기거든요. 특별히 아웃사이더한테 감정이 가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80년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때예요. 한국이 선진국 얘기를 못 듣던 개발도상국 시절이고. 상류층을 표현해서 관객들이 그들을 동경하게 하는 현실 도피적인 영화들은 있겠지만 그런 영화를 하기 싫었어요. 인간의 심리를 하고 싶었지. ![]()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스틸이미지 주인공 수지와 오목이 중에 분명히 감독님은 오목이한테 더 감정이입하면서 연출하셨지요? 그 당시에 유지인 씨한테 내가 참 미안했어요. 관객들은 약자한테 마음이 쏠리는 모양이야. 수지로서의 입장을 전하려고 내레이션을 수지에게 줬잖아요. 근데 워낙 오목이 쪽이 파란만장하기도 했고 오목이가 표현하는 감정 스펙트럼이 다양했고 수지는 감정을 누르니까 좀 답답했죠. 좀 미안했는데 유지인 씨가 잘 해줬기 때문에 반대쪽이 잘 살았지. 당시 분위기가 어땠기에 미안했다고 표현하시나요. 관객 반응도 그렇고 포스터에도 동생 얼굴을 더 크게 그리니까. 내가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미안했죠. 사람 심리가 비슷하군요. 2025년에 본 저도 오목이한테 감정이 가더라고요. 오목이가 주문처럼 자주 하는 말이 "난 대갓집 딸이야"입니다. 오페라의 라이트 모티프(오페라에서 특정의 인물이나 상황 등과 결부되어, 반복해 사용되는 짧은 주제나 동기를 가리킨다. -편집자)처럼 잊을 만하면 오목이가 "난 대갓집 딸이야"라고 하는 대사를 하고, 언니가 준 징표를 붙잡고 살아간다고 느껴져요. 그래서 수지보다 오목이가 많이 세공됐다고 느꼈어요. 대갓집 딸이란 말은 자기 출신에 대한 프라이드죠. 자기도 참 귀여움받던 딸이었다고 말이에요. 자존심이자 자부심이었겠지. 일단 오목이가 장면도 많고 드라마도 더 많잖아요. 이미숙 씨가 잘해줬고. 나는 눈물 연기를 좀 절제하고 싶었어요. 전작 <꼬방동네 사람들>도 보면 김보연씨가 워낙 잘 울어요. 그래서 ‘우는 클로즈업 몇 개만 좀 잘라냈으면 좋았는데’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해 겨울>에선 울음을 절제하려고 했는데 이미숙씨가 워낙 잘 우니까 그 순간순간에 빠져서 지금처럼 완성됐어요. 이번에 복원된 <그해 겨울>은 감독님의 18편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작품인가요. 이 영화로 낭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을 받았어요. 특별언급은 본상으로 칠 수도 있고 특별상으로 치기도 하지만, 내 최초의 해외 영화제 수상이었어요. 그 이후에 다른 국제영화제에서 본상도 받았죠. 2008년도에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내 영화 전작전을 했어요. <여행>만 빼고 내가 모조리 다 봤어요. 엉엉 울고 나온 건 이거 한 편이야. 딴 건 울지도 않았어요. 슬픈 사연 아니에요? 지금은 더 성숙해졌고 인생을 더 알게 되지 지금 보면 더 올 것 같아. 내가 많이 울만큼 <그해 겨울>은 내 영화 중 가장 감정이 풍부해서 관객들한테 다가가는 영화가 아닐까요. 원석을 곱게 갈듯이 <황진이> ![]() * <황진이>(배창호, 1986) <황진이>를 배창호 감독님의 분기점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의하시나요? 그럼요. 어느 면은 그렇죠. 그전에는 힘 있게, 감정이 거칠면 거친 대로 표현했는데 이젠 영화를 정제해야겠다 생각했어요. <황진이> 때부터는 조금 더 갈았지.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낯설어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간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금을 만들 때 그 원석은 돌이죠. 돌을 갈아내고 끓여서 액기스만을 뽑잖아요. 그렇게 정제하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압축적이고 더 시적으로 가게 돼죠. 시라는 게 그렇거든요. 산문으로 길게 할 수 있는 것 중 에센스만 뽑아내죠. 그리움, 외로움, 사랑 이런 정서만. <황진이> 때 그같이 변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추구하고 싶은 영화의 방향이 좀 많았어요. 그중 하나가 더 깊이 있게 표현하는 방향이었어요. 이제 스토리텔링은 할 수 있겠고, 그 다음 감정 표현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압축적으로 연출하고 싶었어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압축적인 장면들이 있잖아요. 그전에 로베르트 브레송도 그런 시적인 영화를 했죠. 앙드레 바쟁은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를 보고 너무너무 갈아서 일종의 부호화가 됐다고 얘기해요. 대중적인 면에서 그러면 좀 곤란하지. 고체화되어 만질 수 있어야 하는데 너무 기화돼 버리면 조금 그렇죠. <황진이>는 갈아서 표현하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영화로서 하나의 분기점이 됐고 다시 돌아왔어요. '아 이것에만 빠져서는 안 되는구나' 깨달았죠. 왜 그렇게 느끼셨나요. 대중의 반응을 다 느꼈어요. 상업 영화를 하는데 투자자하고도 마음이 맞아야지. 물론 전작 <깊고 푸른 밤>으로 영화사에 이익을 냈기 때문에 <황진이>로 이렇게 손해 보지는 않았을 거예요. 흥행도 그래도 그 해 8위는 했어요. 상업 영화란 상업적인 걸 추구한다는 뜻이 아니라 투자자가 있어서 투자자의 돈을 회수하게끔 해줘야 하는 상업 행위잖아요. 그만큼 책임감이 따르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다시 돌아가고 합쳐지면서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는 또 달라졌어요.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심플하게 하면서 커트 수도 절제하면서 감정 표현도 절제했어요. 그러니까 <황진이>가 분기점이 됐다고 할 수 있죠. ![]() * <황진이> 스틸이미지 <황진이>에서 롱테이크가 늘고 카메라 움직임도 줄고 많이 절제하셨어요. 황진이를 다룬 야사들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스토리의 즐거움보다는 황진이 시조에 나타난 사랑과 정을 표현하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갔죠. 절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어요. 다만 너무 친절한 쇼트들은 좀 빼자는 생각이었죠. 당시 관객들은 이해를 못 했나요. 답답하죠. 좀 친절하게 안내하고, 이동도 하고, 커트도 빨리빨리 해야 할 텐데…. 내가 봐도 좀 심해요. 절을 하는 장면도 황진이(장미희)가 서 있다가 아주 천천히 앉는 걸 다 찍었어요. 지금 일 같으면 그렇게 안 찍어요. 지금은 자르지. 근데 그땐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 템포니까. 그러니 세상 답답하지 않았겠어요, 일반 관객들은? 그러나 그걸 집중해서 보는 사람들은 그 재미를 느꼈겠죠. <황진이>는 그럼에도 이동이 많아 단순한 기생이 아니라 구도자처럼 보입니다. 역사에 한두줄로 남은 인물에게서 어떻게 구도자 이미지를 끌어내셨나요. 그게 문제지. 내가 이상화했어요. 단점이면 단점이죠. 내가 추구하고 싶은 삶의 형태를 <황진이>에서 이상화한 건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한테 낯설고 잘 와 닿지 않았어요. <황진이>는 사랑의 이야기인데 세 가지 톤으로 잡았어요. 하나는 파괴적인 사랑. 갖바치(안성기, 과거 가죽신을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편집자)의 사랑이죠. 두번째는 소유적인 사랑, 벽계수(신일룡)와 사랑이죠. 인간이 서로 일시적인 기호에 의해 좋다가 헤어지고 또 좋아지는. 세번째가 그냥 사랑인데, 소위 말하는 이타적인 사랑이죠. 이생(전무송)과의 사랑이죠? 이생에 대한 사랑이죠. 사당패한테 자기를 팔아서 받은 돈을 건네주고 장옷도 벗어주는 사랑. 세 가지 단계로 황진이는 완성의 단계를 밟아요. 황진이는 스스로가 죽어가는 건 알았으니까 그런 모성애적인 사랑을 주는 거죠. 관객들은 황진이의 희생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황진이>가 1986년 추석 때 명보극장에서 개봉했어요. 내 영화를 명보극장에서 많이 공개했어요. 배창호 감독의 영화가 재밌다고 소문이 나서 영화를 안 보던 사람들까지 명절에 극장을 찾은 거예요. <황진이>라면 한복 입고 춤추고 재밌는 얘기가 나오겠다 생각했겠지. 그런데 웬걸 영화는 답답하고 어둡지 동작은 느리지 사건은 없지 얼마나 지루했겠어요. 어떤 중년 남자가 영사실에 올라왔다니까요? 고장 난 거 아니냐고요. 하도 느리다고. 직접 항의도 많이 받았어요. 영화로 사람 스트레스받게 만드냐고요. 나도 미안하더라고요. * <황진이> 스틸이미지 영화 초반 스님이 등장해요. 황진이가 보시하자 "앉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누울 자리에 눕지 못하는구나. 본 뒤 육신의 자리란 없는 것이니 마음의 중심을 잘 잡으소서."라고 합니다. 황진이는 중심을 잘 잡고 있으나 세상이 혼란한 게 아닌가요? 황진이도 방황하죠. 황진이가 자기 옷을 벗는 장면이 세 번 나와요. 처음에 갖바치의 혼령에게 치마를 벗어줬어요.(황진이를 사랑한 갖바치가 계급 차이를 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그의 관이 움직이지 않자 황진이는 치마를 벗어 갖바치의 혼령을 달랜다. -편집자) 이 이야기는 야사에 많이 나와요. 치마를 벗어줬다는 건 당시 여성에게 엄청난 거예요. 그러니까 스스로 머리를 올리고 기생이 됐죠. 두번째로 벽계수와 사랑인 줄 알았죠. 그래서 찾아갔더니 벽계수가 지난번에 송도까지 왔으면서 황진이를 만나지 않고 그냥 간 걸 알게 돼요. 배반당했구나 깨닫고 자신을 가리고 있던 너울을 버렸죠. 너울 없이 지방의 천기가 됐죠. 이전엔 기생으로서 손님을 가려서 받았지만 그것도 자신의 오만이란 걸 안 것이지. 너울을 버리며 ‘나를 또 하나 버리자, 그리고 방랑하자’ 생각하는 것이죠. 산과 들에서 방황하던 황진이가 바다에서 눈을 감습니다. 왜 바다였나요. 초고는 더 드라마틱하고 스토리텔링적이었는데, 거기선 산에서 황진이가 죽어요. 눈이 많이 오는 날, 시신이 안 보이게 눈이 소복이 덮여요. 소위 감각적이었죠. 그런데 영화를 찍어나가고 찍어나가면서 더 낮은 곳에서 가자는 생각에 다다랐어요. 황진이가 마지막 시도 그렇게 짓는 걸로 표현했어요. "지는 바다해야, 명월이 잠기도다." 내가 영화를 위해 지은 시죠. <황진이>를 분기점이라고 하셨는데,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나요. 언젠가 재평가될 거라고 늘 생각했어요. 물론 그동안 <황진이>가 좋다는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긴 했어요. 그러나 많은 숫자는 아니었죠. 나에게 <황진이>는 그때 좋은 기회를 가지고 좋은 환경으로 만들 수 있었던 영화요. 카메라도 해상력이 좋은 파나비전으로 했어요. 특별한 화면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 렌즈가 낡았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파나비전이라고 광고도 했지. HMI 조명(플리커가 눈에 띄는 텅스텐 조명과 달리 플리커가 없는 태양광과 유사한 색상의 조명. -편집자)도 처음 썼을 거예요. 기술적으로도 정성을 많이 들였죠. 미장센에도, 장소들에도. "삶이 슬퍼요. 근데 진짜 슬픈 건 아름다워요." ![]() 마지막으로 <꿈>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 꿈>이란 이야기에 착안해 소설가 이광수가 <꿈>을 썼고, 그를 원작으로 한 시나리오를 이명세 감독님과 같이 쓰셨죠. <꿈>은 두 차례 영화화됐어요. 신상욱 감독님에 의해 1955년에 흑백으로 있었고, 1967년에 컬러 영화도 있었어요.(신상옥 감독이 최은희 배우와 결혼한 후 처음으로 찍은 영화가 <꿈>이다. 신상옥 감독은 1967년에 같은 작품을 컬러로 리메이크했다. -편집자) 국도극장에서 보고 소재가 참 이색적이다 생각했어요. 연출할 생각은 없다가 최인호 선배(배창호 감독은 대학 선배 최인호 작가와 연출자, 시나리오작가 콤비로 활약하며 <적도의 꽃>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황진이> <안녕하세요 하나님> <천국의 계단> 5편의 영화를 함께했다. -편집자)가 "배 감독도 <꿈> 그거 다시 한번 하면 또 어떻겠냐"고 했어요. 불교 소재고 소재가 테마가 깊잖아요. 인생무상에 관한 이야기죠. 내가 서른몇 살 총각 때라 자신이 없다고 했죠. 뭐든지 테마가 손에 잡혀야 거든. 내가 느끼지 못하는 걸 어떻게 관객들한테 느끼라 해요. 그러다 1988년에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 출연을 끝내고 미국 산호세대학에 석좌 교수로 갈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다음 작품을 뭘 할 고민하다 역시 한국적인 걸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꿈>을 떠올렸고 불교적 깨달음보다 욕망으로 소재를 좁히면 연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귀국하자마자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께 얘기했더니 흔쾌하게 해보자고 했죠. 내가 <황진이>이란 시대극을 흥행 못 시켰는데 다음 작품 <기쁜 우리 젊은 날>로 회복했거든요. 여우처럼. (웃음) 그러니까 신뢰를 했죠. ![]() ![]() * <꿈> 스틸이미지 <꿈>은 사계절로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속에서 한국적인 경관, 한국적인 것을 찾는 게 참 어려웠지만요. 그때 장이머우 감독을 비롯한 중국 5세대 영화들이 막 세상에 나왔어요. <붉은 수수밭>, 정말 감각적이잖아요? 폭포 하나도 엄청나고 술을 만들어도 막 펄펄! 일본영화도 벚꽃 하나 흔들어도 사람 눈을 홀릴 정도로 만들죠. 근데 한국적인 맛은…. 결국 자연스러운 것이에요. 튀지 않고 자연스러워요. 나중에 새삼 깨달은 거지만 영국박물관에 가보면 중국과 일본관은 감각적이고 묘사적이고 아주 그래요. 한국관 가면 작은 석상 있고, 옷감들이 있어요. 수수해요. 사실 그게 한국적이에요. 자연스러운 맛. 그래서 사계절의 특징을 잘 잡아내자고 결론 내렸죠. 또 인생유전의 테마가 필요하니까 1년에 걸쳐서 촬영했죠. 실질적으로는 한 10개월 걸렸어요. <꿈>에서 안성기 배우의 다채로운 면을 본 것 같아요. 그가 연기한 조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했던 승려였다가 욕망에 눈이 먼 남자였다가, 질투가 눈이 멀어서 친구까지 죽이는 인간입니다. 안성기 배우와 워낙 신뢰가 두터웠지만 당시 조신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게 있을까요. 시나리오에 이미 다 있는데 뭘…. 배우와의 의사소통은 이미 시나리오에 다 나와 있어요. 어느 누구한테도 신인에게도 저 사람만의 느낌이 있다면 다 내버려뒀어요. 이를테면 <젊은 남자>의 이정재에게도 대사만 좀 바꿔주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그랬어요. <꿈>도 세세하게 디렉션 안 하고 골라는 냈죠. 찍고 나서 "안 형, 조금만 느리게"처럼 강약은 조절해야 해요. 연기는 피아노 연주와 똑같아요. 좀 강하게, 느리게, 천천히. 연기는 결국 그 사람이 연주해야 되거든요. 그런 면에서 요즘 연기를 잘한다 못한다 판가름하는 게 상당히 어려워요. 묘사를 적당히 한다고 해서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에요. 요샌 그럴듯하게 하잖아요? 그런 묘사적인 연기도 필요하지만, 베토벤의 <월광>을 연주한다면 곡에 담긴 감정을 느껴야죠. 지금 배우들이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묘사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죠. <꿈> 속 달례(황신혜)의 이야기가 너무 슬펐습니다. 조신의 인생유전도 있지만 달례란 여성에게 닥친 일이 너무나 가슴 아파요. 배창호 감독님의 영화에는 기본적으로 슬픔의 정서가 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왜 이렇게까지 슬프게 표현하세요? 삶이 슬퍼요. 근데 잘 들여다보면 진짜 슬픈 건 아름다워요. 일찍이 세상을 떠난 <필름 2.0>의 이지훈 기자라고 있어요. 나하고 좀 가까웠는데 이 사람이 <정>이라는 영화를 보고 그 얘기를 했어요. 메밀꽃이 피어 있고 두 사람이 아주 평화롭게 걸어오는 장면을 보고 "감독님, 왜 아름다운 장면에서 눈물이 나죠?" 그러더라고. 내가 "아름다우면 원래 눈물이 나요" 그랬어요. 감격하면 울잖아요. 그건 슬픔이 아주 승화된 거죠. 인간의 삶에서 슬픔을 느낄 줄 알아야죠. 슬픔을 안 느끼는 게 문제지. 물론 슬픔을 너무 자극적으로 그려도 안 되고. 내 영화 중엔 웃기는 것도 많아요. 슬픈 것과 웃기는 영화가 교차해요. <그해 겨울> <황진이> <꿈>을 연달아 보니 굉장히 깊은 슬픔이 느껴졌습니다. 요즘은 영화를 보고 슬퍼도 잠깐 슬프고 금방 잊는데, 이 작품들은 다 보고 난 뒤 생활 속에서도 계속 인물들의 아픈 삶이 생각나는 거예요. 배창호 감독님은 어떻게 이렇게 슬픈 영화를 많이도, 그리고 잘 그렸을까 생각했어요. 감독님이 내린 답변은 ‘인생은 원래 슬프다’군요. 사람이라면 ‘아, 저 사람은 슬프겠구나’라는 걸 느낄 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달례의 삶이 그렇게 된 건 조신의 탐심 때문이죠. 그 탐심에 그 시대적인 배경과 자기 처지도 있지만 달례란 사람을 파멸시켜 버렸죠. 하지만 다행히 꿈이잖아요? ![]() 다행히 꿈이죠. 그런데 꿈이어서 속았다가 아니라 너무나 다행이란 생각했어요. 그게 놀라운 거예요. 어떻게 ‘속았다’가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감정에 도달했을까요. 당시엔 관객들이 많이 웃었어요. 영화 막바지에 느낀 그 안도감은 달례가 살아있고, 조신의 꿈이었다는 사실 자체겠죠. 달례가 간 다음 평목(최종원)이 그러죠. "아무리 봐도 말이야. 두견새가 비단 폭에 피를 토하는 듯한 아름다움이란 말이야"라고 말할 때 조신이 득도한 듯 웃거나 그러지 않아요. 씁쓸한 얼굴로 끝을 냈어요. 그렇게 하룻밤을 꾸고 깨달았다고 한들 그 사람이 진짜 득도했을까 일종의 물음표를 던진 거예요. 이 사람 조신한테 화두가 남겨졌지, 중이든 관객이든 우리 삶에서 또 그런 욕망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의미죠. <꿈>을 볼 때 아주 먼 곳까지 갔다가 돌아온 느낌이었습니다. 꿈에서 깬 듯했어요. 영화 <꿈>에 관해 이야기한 김에 질문드리면, 평소 꿈도 자주 꾸시나요? 연출하는 꿈도 꾸세요? 대부분 개꿈이지만, 돌아가신 기사들이 현장에 나타나는 꿈도 꾸죠. 마지막으로 <배창호의 클로즈업>, <그해 겨울>, <황진이>, <꿈>을 가지고 전주국제영화제에 가시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공감해 주는 관객이 좋잖아요? 젊은 새로운 관객들이 얼마나 많이 공감해 줄까 기대돼요. 또 얼마나 디테일한 것들을 찾아낼까 궁금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