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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느끼는 자연, 영화로 건네다 | 2025.06.30 | 41 |
몸으로 느끼는 자연, 영화로 건네다
프로그래머 최영진의 기획노트 + <스윗그래스> <리바이어던> GV 대담 수록
글: 최영진(한국영상자료원) ![]() ‘자연에 깃든 시선’은 자연으로부터 단절된 감각에서 자극을 받아 출발한 상영 프로그램이다. 자본주의의 벅찬 속도와,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 자극적인 기술들이 일상을 지배하면서, 정신적 피로감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어떤 날은 인공적인 환경에 잠식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생물학적 리듬에 조응하며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감각을 다시 찾고 싶은 갈망이 마음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갈망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 준 책이 있다. 데이비드 에이브럼의 『The Spell of the Sensuous』는 우리가 지구와 맺는 관계를 개념적 이해가 아닌, 몸으로 느끼는 경험으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동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통해 자연과의 감각적인 관계를 다시 일깨울 수는 없을까? 우리가 자연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몇 해 전, 런던에서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감독의 작품들을 본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특히 <일 부코>를 관람할 때 극장 안에 앉아 있었지만, 마치 넓은 들판을 스치는 바람이 피부를 간질이고, 동굴 속의 습기가 온몸에 와닿는 듯한 생생한 감각을 경험했다. 영화라는 매체가 자연과 나 사이에 감각적인 연결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때의 깨달음이 바로 ‘자연에 깃든 시선’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기획전은 생태학적 교육이나 환경 위기에 대한 경고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연의 리듬과 결을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관객을 초대하는 것이 그 목표다. 이 영화들은 자연을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느껴보라’고 속삭인다. 속도를 늦추고, 감각을 열며, 우리가 광대한 생태계의 일부임을 다시금 몸으로 깨닫게 해주는 체험이다. 최종 상영작으로는 이 프로그램에 영감을 준 프라마르티노 감독의 두 작품을 비롯해 디그나 신케, 기요르기 폴피, 감독니콜라우스 가이어할터, 스캇 발리, 감독샤론 록하르트,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베레나 파라벨, 일리사 바바시, 제니퍼 레인스포드의 작품들을 선정했다. 이들 영화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생태적 감수성을 전달한다. 생명체 간의 상호 연결성을 비추고, 자연의 힘을 통해 영화적 숭고함을 일깨운다. 그리고 자연의 이미지와 소리를 통해 관객에게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이번 기회에 루시앵 카스타잉-테일러 감독님을 시네마테크KOFA에 초청하여 그의 작품 <스윗그래스>(2009)와 <리바이어던>(2012)에 대해 관객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번 프로그램의 취지를 고려할 때, 하버드 감각민족지연구소의 작업을 포함시키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카스타잉-테일러 감독님이 상영 후 직접 통찰을 나눠주신 것은 큰 영광이었고, 그 대화를 이 자리를 통해 공유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 ‘자연에 깃든 시선’을 기획하는 과정은 프로그래머로서 가장 보람된 경험 중 하나였다. 이 조용한 재연결의 행위에 함께해 준 관객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이 영화들이 여러분의 기억뿐 아니라 감각 속에도 오래도록 머무르기를 바란다. <스윗그래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감독 관객과의 대화
인간과 자연이 상호 공존하는 세상을 그리다진행 최영진 프로그래머 · 정리 배동미 씨네21 기자 최영진 | 감독님의 가장 최근작 <인체해부도>는 작년에 한국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상영됐고 여기 계신 분들 중 관람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다. 특히 <인체해부도>에 대한 뜨거운 반응이 생생히 기억난다. <스윗그래스>와 <리바이던>의 경우, 저희 극장에서 처음 상영하는데 감독님이 자리해주셔서 정말 영광이다. 내한을 확정짓자마자 감독님께서 이 영화를 관객과 함께 관람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오랜만에 이 작품을 감상한 느낌이 어떠했나.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이 다큐멘터리는 25년 전에 촬영되었고 나 자신도 10여 년 만에 다시 보았다. 바깥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듯한 외부적 시선이 느껴졌고, 동시에 소박한 영화, 간결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고 이 작품은 영화적인 감각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이 영화만의 순수, 겸손, 그리고 허세 부리지 않는 태도가 여전히 마음에 든다. 최영진 | 감독님 말씀과 달리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자연 한 가운데 있는 느낌이 정말 생생했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후속작 <인체해부도>와 <리바이어던>은 훨씬 더 본능적이며 강렬하다. 시점은 더 불안정하고 낯설며 카메라의 위치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어떤 관객은 <리바이어던>에 대해 마치 세계가 스스로를 촬영하거나, 물고기의 시선처럼 느껴진다고 표현했다. 인간이 시선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이다. 하지만 <스윗그래스>에서는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최영진 프로그래머가 언급한 느낌은 아마 사운드와 이미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 같다. 나도 오늘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사운드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일리사 바바시 감독과 나는 사운드에 공을 많이 들였고, 무선 마이크를 최대 8까지 사용해 사람들의 소리를 기록했고 때때로 말이나 양의 소리를 녹음했다. 양을 붙들어두는 게 쉽지 않을뿐더러 3000달러짜리 마이크를 채우는 건 그보다 두 배 더 어려워서 많이 시도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시도가 성공할 때면 사운드와 이미지 사이에 묘한 조합이 일어났다. 롱숏으로 자연 속의 말과 양 떼가 담겨 관객은 거리를 둔 채 그 풍경을 바라보지만, 사운드는 아주 가깝고 친밀하게 들려온다. 영화에서 때때로 이미지와 사운드 사이에 긴장감이나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고, 모순적일 수도 있지만 거기에서 흥미로운 마찰이 발생한다. 나는 이 영화가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겸손한 척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해 관객이 재밌다거나 재미없다고 말하는 것이 감독보다 더 정확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최영진 | 이미지는 낭만적이지만 사운드는 그렇지 않을 때 발생하는 이미지와 사운드 간 콘트라스트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젊은 양치기가 산꼭대기에서 어머니와 통화하며 분노를 토로할 때 카메라는 아름다운 산을 천천히 보여준다. 관객은 낭만적인 이미지를 보면서 사운드를 통해 안쓰러운 현실을 듣는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울면서 어머니와 통화하는 그를 계속 촬영하는 것이 사실 부끄러웠다. 그때 사용한 카메라는 요즘에는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카메라였는데, 해상도는 낮고 무게가 약 20kg에 달했다. 그에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 내가 바로 옆에 있는 게 맞지만 그를 촬영하는 게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그는 그 장면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학적으로 보자면 화면과 사운드 간 불일치가 있지만, 산을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이미지로 다룬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의 다른 순간들, 예를 들어 초반에 목장에서 양을 함께 돌보는 장면들에서는 또 다른 에너지가 느껴진다. 양과 양치기가 함께 노동의 무게를 나눠진다는 감각이 든다. 양과 양치기 사이에 친밀함과 폭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복합적인 관계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 관계는 단지 시각만이 아니라 소리를 통해서도 전달된다. 최영진 |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스윗그래스>라는 작품을 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언제부터 목축업자들의 전통, 동물들과의 관계에 관심을 두게 됐나.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내 영화는 많은 과정을 거쳐 초기 아이디어와 전혀 닮아있지 않다. 나는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산업화 이후 가난해진 도시 리버풀에서 자랐는데, 주말이면 그곳에서 탈출해 양 떼가 많은 영국 북부의 레이크 디스트릭트로 향했다. 그래서 양 자체가 내게 이미 전원적이나 목가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다.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오늘 영화를 보면서 양이 1만 년 전 인류가 처음으로 또는 가장 먼저 길들인 동물 중 하나란 얘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쯤 미국 역사의 마지막 장을 목격하고 있다고 느꼈다. 여름에 양 떼를 목초지로 데려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이동 목축'은 이제 더는 행해지지 않는다. 일식처럼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 인간이 처음 길들인 동물 양을 더는 그런 식으로 기를 수 없다는 건 일종의 알레고리처럼 다가온다. 물론 영화를 처음 촬영하기 시작했을 때 그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았다. 최영진 | 인간과 동물 그리고 그들의 환경이 공존하고 상호 연결되는 테마들은 기존에 생각했는지 영화를 촬영하면서 다듬어졌는지 궁금하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이 영화는 내 파트너 일리사 바바시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아내는 뉴욕 출신이고 나는 리버풀 출신이다. 우리 둘 다 목가적인 곳에서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특히 나는 목가적인 장소를 낭만화한다는 데 죄책감과 동시에 매혹을 느꼈다. 언급한 테마는 촬영 과정에서, 특히 편집 과정에서 느꼈던 대목이다. 그리스부터 워즈워스까지 유럽 문학에서 목가적 장르는 기본적으로 육체와 동떨어져 있고, 놀랍도록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장르다. 두 사람의 양치기 중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을 닮은 나이가 많은 양치기가 한 손으로 소변을 누다가 다른 손으로 권총을 꺼내는 장면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목가적 장르 역사상 양치기가 소변 누는 모습을 목격할 일은 거의 없다. 양치기로 살아가는 건 정말 어렵다. 미국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양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다. 훨씬 더 교육을 많이 받은 환경운동가들은 다른 정치권력 기관과 결탁해 양치기들이 더는 양을 기를 수 없도록 막고 있는데, 그들은 양 목축이 인위적인 산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양치기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들처럼, 자신들은 국가와 세계의 변화로 피해를 보고 있으며, 어떤 기관도 자신들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최영진 | 이 영화의 촬영 방식이 궁금하다. 특히 이 영화는 영상과 사운드가 중요한 작품이다. 감독님이 3개월 동안 양치기들과 함께 지내며 촬영한 것으로 알고 있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맞다. 영상과 사운드를 모두 내가 담당했다. 당시 일리사와 나는 어린 자식 둘을 키우고 있었고 아이들까지 포함해 가족 모두가 산에 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두고 양치기 팻과 존이 우리와 동행했는데, 참고로 사촌지간인 팻과 존은 얼굴을 본 지 오래되었지만 영화 작업을 흥미로워하면서 빠르게 가까워졌다. 내가 영상과 사운드를 두 담당했지만, 서로 다른 최대 8개의 무선 마이크로 여러 다양한 포유류의 사운드들이 담아내면서 풍부한 사운드와 감각적인 경험이 가능해진 것 같다. 최영진 | 양치기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문구가 영화 막바지에 나온다. 일반적으로 배경을 설명하는 문구는 영화 초반에 등장하곤 한다. 이를 뒤에 배치한 건, 관객이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감독의 의도였나.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정확히 그 의도였다. 우리는 관객이 미국 서부의 마지막 양몰이라는 걸 미리 알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 정보로 인해 영화가 감상적인 볼거리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영화 자체가 담고 있지 않은 감정과 정동으로 관객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 픽션은 관객의 지성을 얕보지 않고 관객이 작품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한다면, 다큐멘터리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할지 미리 제시한다. 다큐멘터리는 관객을 믿고 그들의 삶을 지켜보게 하기보다 사후 논평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사람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자의식을 더 강하게 만들거나 부정직하게 만들지 않고 그들의 삶을 촬영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다큐멘터리 속 정보를 역사적 사례로 환원하고 싶지 않았고, 실존 인물을 감상적으로 묘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최영진 | 자연 다큐멘터리의 경우, 자연의 신비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이 필수적이다시피 등장한다. 생명체를 의인화하는 관습도 있다. 이에 관한 감독님의 생각은 어떠한지, 왜 자연 다큐들이 내레이션과 의인화 관습에 의존하는지 궁금하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나는 영화사를 연구한 학자도 아니고 영화 이론가도 아니기 때문에 과감하게 말씀드린다. 저는 영화의 80%는 사람들이 서로를 때리거나 맞을까봐 겁에 질린 모습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섹스하는 모습을 재현한다고 말하고 싶다. 자연 다큐멘터리의 경우 그 비율이 90%라고까지 생각한다. 우리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이 겁을 먹고 서로 상처를 입히는 모습을 즐기고, 다른 사람이 섹스하는 것을 보는 것을 즐긴다면, 당연히 다른 동물의 그런 모습을 즐길 것이다. 90살에 이른 훌륭한 자연 다큐멘터리스트인 데이비드 애튼버러의 작품을 보면 상징적인 포유류를 특권화하고 있다. 그 포유류들은 대부분 인간처럼 생각하는데, 2.5개 정도의 생각만 하는 것 같다. 하나는 어떻게 짝짓기할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죽일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지 않을 것인가. 0.5 정도는 어떻게 먹을 것인가인 듯하다. 동물 의식의 주관성을 매우 얕게 재현하고 있다. 최영진 | 말씀하신 내용을 들으니 <스윗그래스>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양 한 마리가 풀을 씹어 먹다가 카메라를 발견하고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되자 행동을 멈춘다. 양을 사람처럼 의인화하지 않더라도 양에게 의식이 있다는 걸 간결한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25년 전이지만 당시 너무 추워서 죽을 뻔한 기억이 난다. 그때 손가락도 동상을 입었다. 15초 혹은 12초란 짧은 시간 동안 양이 나를 바라봤는데 그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는 알레고리를 통해 양을 가장 바보 같은 동물로 표현한다. 지도자가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양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순진하다고 불리는 동물이 당신을 바라보고 마치 시선을 받는 대상이 된다고 느껴지게 할 때 뭐라고 표현해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게끔 한다.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이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양도 특별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 있겠으나, 우리는 다른 종과의 상호주관성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을 것 같다. 우리가 다른 동물과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그들의 사고를 상상하려 노력하는 건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리바이어던>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감독 관객과의 대화
"<리바이어던>은 배이며, 바다이며, 바다 생물이다"진행 최영진 프로그래머 · 정리 배동미 씨네21 기자 최영진 |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감독님이 어제 상영한 <스윗그래스>에 이어 <리바이어던>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하셨다. 개인적으로 <리바이어던>을 극장에서 본 건 시네마테크 KOFA에서 이번 상영이 처음인데 굉장히 감각적인 체험이었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이 작품을 선정해 주신 한국영상자료원과 최영진 프로그래머에게 감사드리며, 참석해 주신 모든 분께도 감사하다는 말씀드린다. 최영진 | 오랜만에 관객과 함께 이 영화를 보셨는데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궁금하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언제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감상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보았다. 그리고 관객과 함께하면 언제나 다른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영화를 보게 되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루함, 반복성, 피상성 같은 걸 느꼈다. 최영진 | 지루함을 느끼셨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 어떻게 이 영화를 처음 구상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어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그들을 둘러싼 바다, 그리고 생명체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에 관한 아이디어를 어떻게 떠올렸나.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솔직히 말하면, 그때를 정확히 떠올리기 어렵다. 다만, 일리사 바르바시 감독(*루시엔 캐스터잉 아내)과 함께 만든 다른 영화인 <스윗그래스>를 막 마무리했었다는 것은 기억난다. 그 영화는 미국 서부의 로키산맥에서 촬영했다. 그리고 그 영화 작업이 끝날 쯤, 우리는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 주의 보스턴에 살았었다. 두 지역은 꽤 먼 거리였다. 그 당시 우리는 어린 자녀 둘을 키우고 있었던 터라 (멀리 팀북투나 서울, 또는 달나라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보스턴 근처에서 작업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어젯밤에도 말했지만, 나는 보스턴에 살고 있었지만 미국인은 아니다. 나는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내 아버지는 리버풀 항구에서 일했다. 아버지의 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항구라는 공간에 대해서는 항상 흥미를 느껴왔다. 항구는 떠남과 돌아옴이 교차하는 장소이자,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여러 생명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다큐를 제작하기 수년 전에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을 읽고 소설이 전하는 엄청난 감정에 사로잡힌 적 있다. 소설 속 픽션이란 틀을 넘어 현실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 감정이었다. <모비딕> 속에 등장하는 뉴베드퍼드 항구는 보스턴에서 출발해 약 45분에서 1시간이면 닿는 곳에 있어서 일하지 않고 쉴 때면 언제든 쉽게 가볼 수 있었다. 그래서 보스턴에서 일하면서도 다큐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바바시의 초기 아이디어는 바다나 대양에 관한 영화, 그리고 인간과 대양의 깊은 곳과의 관계를 다루는 영화였지만, 결코 바다를 보여주지 않는 콘셉트였다. 촬영을 시작한 첫 6개월 동안 나는 바다를 담지 않고 육지에서 어업과 관련된 다양한 산업, 얼음 제조나 그물 수리 작업 등을 홀로 촬영했다. <스윗그래스>와 마찬가지로 <리바이어던>의 영상과 사운드를 저 혼자 담당했는데, 뉴베드퍼드 항구를 찍는 게 정말 쉽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주로 겨울에 항구를 촬영했는데 정말 추웠다. 촬영 도중 추운 겨울 바다에 빠질 뻔한 사건이 여러 번 있었고,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졌고 촬영도 즐겁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이자 공동 감독인 베레나 파라벨 감독에게 도움을 요청해 함께 몇 달간 육지를 촬영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어업은 정말 남성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산업이다. 공동 감독이 한 사람은 여성이기 때문에 선장들과 함께 배를 타는 초대를 많이 받곤 했고 우린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 우리는 한 번도 바다 한가운데에 가보지 않았지만 인간이 바다와 맺는 관계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배에라도 올라타서 바다로 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처음 바다 한가운데 갔을 때 정말 압도적이었다. 나는 리버풀 항구에서 자랐고, 베레나 파라벨 감독은 프랑스 남서부 해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낚시한 경험이 있지만, 우리 두 사람 다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해본 적 없다고 느꼈다. 촬영 기간 우리는 6번 정도 배를 탔고, 가장 길게 바다에 머문 건 3주 정도 되었다. 이후 영화 편집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육지에서 촬영한 푸티지를 많이 사용할 줄 알았다. 프랑스 영화인인 친구에게 러프 컷을 보여주기 위해 편집하면서 육지 장면은 없고 낮 장면도 거의 없는 3시간 분량의 영화가 나왔다. 초기 아이디어라면, 바다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그 웅장함을 포착하는 것 외에 중요한 건 없었던 것 같다. 오늘 이 작품을 보면서 진실로 이 작품이 표면적이고 지루하게 다가왔다. 그때 우리가 경험한 강렬함의 아주 작은 부분만 포착하고 있다고 느꼈다. 최영진 | <리바이어던>이 순수하게 바다만 촬영하겠다는 목표로 시작한 게 아니라 바다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바다와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고자 했던 작품이었다니 지금의 버전으로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3사간짜리 러프 컷을 보고 싶어 할 것 같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초기 기획과는 달리 결국 우리는 육지 장면을 편집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대부분 전문 어부가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는 어업에 대해 욕망하고, 어업에 친숙함을 느낀다. 19세기 사진이 발명된 이래로 인류가 가장 많이 촬영된 직업인은 어부라는 말이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인간이 땅에서 행하는 일이 익숙하다면 어업은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무언가였다. 바다에 나가 우주적인 측면을 도입하고 자연 요소들을 경험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육지 푸티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최영진 | 이번 기획전 제목이 '자연에 깃든 시선'이기도 해서 <리바이어던>의 시선에 관해 질문하고 싶다. 이 작품을 두고 어떤 관객들은 "물고기의 시선으로 만든 영화" 혹은 "바다의 시선으로 완성된 영화"라고 말한다. 감독님께서는 이런 해석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우리는 의도적이나 지적인 영화 제작자도 아니며, 초기 아이디어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경험을 위해 바다로 나갔을 때 겪은 경험은 너무 강렬하고 압도적이라고 느꼈다. 종종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작은 배에 탄 우리 자신들이 너무 작고 미미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바다와 자연의 힘에 완전히 압도당하거나 작아진 느낌을 받았고, 우리 자신의 무력함, 우리 자신의 작음, 심지어 우리 자신의 무의미함을 느꼈다. 이런 저속하고 폭력적인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죄송하지만 우리는 바다를 강간하고 있으며 그것을 우리의 소비를 위한 자원으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과도한 어업은 지속 가능성에 대한 형식적인 약속조차 무너뜨리고 있었다. 우리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작고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압도적인 느낌이었고 이 영화는 아마도 그 느낌을 포착했을 것이다. 비록 물고기나 갑각류의 시점으로 촬영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매우 센 편이다. <리바이어던>은 배이고, <리바이어던>은 바다이며, <리바이어던>은 바다 생물들이다. <리바이어던>은 다양한 모습으로 현현한다고 생각한다.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시점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가 처음 바다에서 촬영할 때, 카메라들을 바다에 빠뜨려 모두 잃어버렸다. 그래서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출항할 때 익스트림 스포츠용 카메라 고프로(GoPro)를 몇 대 가져갔다. 기존에 내가 본 고프로 영상들은 그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의 업적을 영웅화하거나 과대포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뛰어난 스키 선수인지, 얼마나 뛰어난 스노보드 선수인지 과장하는 데 쓰였고, 비윤리적인 목적을 가진 스너프 필름에 고프로가 이용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카메라는 항상 얼마나 인간이 기이한 존재인지와 연관되어 있다. 몇몇 사람들은 이 영화가 마치 물고기가 촬영한 영화, 또는 비인간 존재에 의해 촬영된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인간 신체에 의해 촬영되지 않은 숏은 네 개뿐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나 죽은 물고기에 카메라를 부착한 적 없으며 네 개의 숏을 제외하고는 살아있는 신체에 카메라를 달아 촬영했다. 물론 어부들의 머리, 가슴, 손목에 매단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을 처음 봤을 때 우리도 놀랐다. 오늘 영화를 보면서 매우 평면적이고 단조로우며, 어부의 경험을 전달하는 데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다랐고, 다른 종의 일원으로서 경험을 말하는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어부의 신체에 달린 카메라에 포착된 영상을 처음 봤을 땐, 주관성과 객관성이 결합된,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영상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시네마 베리테나 주관적인 다큐보다 더 주관적이지만, 어부들은 일하면서 배에서 떨어지거나 다치거나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촬영 중이란 사실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숏들이 이전에 본 적 없는 신체화된 주관성을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감독의 의도나 특별한 촬영 기술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놀라운 객관성이 포착됐다고 생각해 매우 강렬하고 엄청나게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 영상은 내가 이전에 본 적 없는 어업의 방식으로 어류의 세계, 바다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있었다. 또한 그 영상들은 상업적 어업의 폭력성, 인간과 다른 종들 간의 폭력성을 포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더 자세히 보면서, 어부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까지 체감할 수 있었다. 어부들은 사람들에게 식탁에 올릴 생선을 제공하기 위해 몸을 희생하며 일하고 고통받았다. 그들은 어업으로 피해를 입는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희생을 치르고 있었다. 최영진 | 최종적으로 촬영 분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하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350시간이 조금 안 되는 방대한 분량이었는데 그중 절반이 육지를 촬영한 푸티지였다. 바다에서 촬영된 건 150시간 정도였다. 관객 | 대부분 고프로로 녹음된 사운드일 텐데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들렸다. 예를 들면, 바람과 갈매기 소리가 그랬다. 고프로로는 이 같은 소리를 잘 담아내기 어려울 텐데 어떻게 녹음한 것인지 궁금하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사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정말 나쁜 편이다. 엉망이다. 오늘 DCP 파일에서 메인 트랙이 빠진 채로 도착한 게 아닌지 궁금할 정도로 사운드가 얇고 약하다고 느꼈다. 실제로 현장에서 우리가 들은 소리는 훨씬 풍부했다. 관객 여러분이 이 영화의 사운드를 웅장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상상으로 완성된 사운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녹음 상태가 매우 나빴기 때문이다. 녹음기로 녹음했지만 전문적이지 못했고, 바람이 너무 강해서 모든 장비가 젖고 소금, 피, 물고기 등으로 덮였다. 전문적인 음향 녹음 기기로 녹음한 대부분의 파일은 버려야 했을 정도였다. 사운드는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뇌가 이미지와 결합해 창조한 것들과 결합된다. 하지만 사운드 그 자체만 놓고 말하자면, 정말 형편없다. 우리는 품질이 뛰어난 마이크가 아닌, 저가의 모노 마이크로 사운드를 녹음했고, 대부분의 음향은 고프로 카메라에 내장된 마이크로 수집됐다. 모든 장비는 방수 플라스틱 케이스에 넣어야 했기 때문에, 음질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일부는 영화에 사용할 수 있었다. 고프로의 마이크는 카메라 본체에 붙어 있기 때문에, 카메라가 물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물 밖으로 나올 때마다 압력 변화로 인해 인위적인 소리가 발생했다. 이 음향은 보통의 다큐멘터리 제작이라면 잡음으로 간주해 제거했을 텐데, 우리는 오히려 그 소리를 조금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편집했다. 결과적으로 단순히 음향적으로 더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이 영상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녹음되었는지를 더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영화를 다시 보면서 내용 면에서는 꽤 실망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이미지에는 마음이 끌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초기 고프로는 '고화질'이라고 불리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해상도 720p 수준이었지만, 오히려 그 거칠고 노이즈 낀 화면이 묘하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관객 | 감독님이 소속된 하버드 감각민속지연구소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하버드 대학 내에 있는 작은 연구소다. 정말 정말 작은 연구소라서 펀딩이 없고 장비도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작업, 주류 다큐멘터리와 다른 방향성을 가진 작업, 그리고 영화, 비디오, 사운드, 사진 등을 통해 현대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작업을 지원하려 노력한다. 우리가 현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소비하는 작품보다 현실에 기반을 둔 작품들이다. 최영진 | 마무리로 감독님께 간단한 소감 그리고 혹시 차기작을 준비 중이라면 알려주시면 좋겠다.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 내가 협업한 작품이나 내가 만든 작품들은 항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로 변형되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딱히 신작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이 자리에 함께 해준 여러분과 최영진 프로그래머, 그리고 영상자료원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스윗그래스> <리바이어던> 두 영화 모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품성이 약하고 흥미가 떨어진다고 느꼈고 겸허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작품을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두 영화를 만드는 데 들어간 노력이 적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관객을 찾을 수 있다는 데 기쁨을 느낀다. 이렇게 작품을 보러 와주신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