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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은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다 2025.06.30 31
극장은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다
영자원 최초로 공간을 기록하는 한국영화현장기록사업 

글: 조준형(한국영상자료원)
 
이제는 많이 알려진 사실일 텐데, 한국영상자료원에는 영화자료(필름과 디지털시네마 파일)만 있지 않다. 포스터, 시나리오, 스틸사진과 같은 영화 관련 직접 자료는 물론이거니와 영화 잡지, 도서, 논문, 원로영화인들의 구술기록, 검열서류를 비롯한 영화 관련 공문서, OST 음반, 의상, 소품, 장비, 영화제 프로그램북, 영화사 장부, 심지어 홍보용 굿즈 등에 이르는 다양한 관련 자료들이 보존되고 있다.
 
영화 관련 거의 모든 자료를 보존한다는 영상자료원이지만, 유달리 찾기 힘든 자료가 있다. 바로 일제강점기 이래 1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극장에 관한 자료들, 특히 사진들이다. 왜 극장 사진이 없을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극장 사진만 없는게 아니다. 이제는 사라진 현상소, 제작사, 영화 스튜디오들의 사진도 거의 없다. 일회적으로 극장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사라질 것 같은 영화와 달리, 항상 있던 곳이라 앞으로도 계속 남아있을 거라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당장 보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겠다. 아니 좀 더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공간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사는 영화로 구성된다. 맞는 말이다. 영화가 없는 영화사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영화사는 영화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산업이나 기술, 문화, 수용자들의 감성 구조 등 어떤 체제가 낳은 산물이며, 그 체제를 재생산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사는 단순히 영화 텍스트(와 창작자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산업사, 정책사, 기술사, 수용사, 문화사, 나아가 영상사회사나 영상민속사로 분화되기도 한다. 단순히 영화사의 하위 분류를 나열한 것이 아니다. 영화사라는 전체가 매우 복잡한 요소들의 총합(이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예컨대 영화관은 그곳을 둘러싼 지리문화적 배치, 도시 정책과 건축 정책, 영화의 최종 윈도우로서 영화산업 시스템, 극장 공간 내외부의 건축 구조, 소비문화 성향 등이 중층적으로 결합된 공간이다.
 
시네마테크KOFA 1관  서초동 예술의전당 당시 한국영상자료원 건물 입구

* (좌) 시네마테크KOFA 1관 내부 전경 (우) 서초동 예술의전당 시절 한국영상자료원 건물 입구

영화관은 관객들에게 영화적, 공간적, 시간적 경험을 선사하는 공간 
무엇보다 영화관은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에게 영화적, 공간적, 시간적 경험을 선사한다. 자주 찾든 드물게 찾든 대부분의 사람에게 영화관은 비일상의 경험이며, 그만큼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결국 추억이 된다. 영화를 보러 가던 버스 안의 공기, 극장 앞 행상에서 팔던 쥐포와 오징어 냄새, 로비의 번잡한 분위기, 상영관 의자의 안락함(혹은 불편함), 함께 간 사람과의 대화... 극장이 사라지면 추억의 대상이 사라진다. 한편 영화사 스튜디오나 현상소, 녹음실과 같은 후반작업실 등 다른 공간들은 그 배치의 맥락이 다소 다르다. 이 공간들은 당대 영화산업이 어떤 구조로, 어떤 프로세스와 기술적인 수준으로 연관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디지털 시대가 되자 사라져 버린 필름 장비업체와 현상소들은 필름 시대를 증거하듯.
 
물론 우리 영상자료원이 공간 그 자체를 보존할 수는 없다. 아마도 국가유산청의 소관일 수는 있겠으나, 과거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그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그 흔적이라도 보존하고자 과거 극장을 비롯한 다양한 영화적 공간의 기록들(대개는 사진)을 찾고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쉽지 않다. 여기저기 한두 장씩 산재하지만, 좋은 상태의 사진을 일정 규모 이상으로 수집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로 제대로 된 사진들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아카이브의 어쩔 수 없는 고질병은 회고적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기록들을 찾고, 복원하고, 소개하는 것이 주 임무라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현재와 미래로 돌려보면 간단한 이치를 깨닫게 된다. 현재가 언젠가는, 생각보다 빠르게 과거가 된다는 것. 그때가 되면 다시 아카이브는 과거의 기록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이 이치를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미래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다. 즉 상대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현재 자료를 열심히 보존하면 된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2022년 새롭게 시작한 사업이 “한국영화현장기록사업”이다. 2020년대 한국영화 역사와 문화, 산업에 의미 있거나 중요한 공간들을 기록하는 사업이다. 사진과 동영상뿐 아니라 주요 관계자들의 인터뷰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2022년에는 1969년 설립된 허리우드극장, 이제는 철거되어 버린 원주 아카데미극장을 비롯한 8개 처, 2023년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인 광주극장을 비롯한 7개 처, 2024년에는 메가박스 코엑스를 비롯한 5개 처를 기록했다. 예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기록하는 장소의 수가 갈수록 줄어들어 큰일이다.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재생목록

*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채널 내 ‘한국영화NOW: 영화 공간 아카이빙 프로젝트’ 재생목록 화면

기록 보존을 위한 사업이기는 하나, 서비스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다. 기획 당시부터 이 부분은 고려되었고 서비스를 위한 콘텐츠를 별개로 제작했다. 현재 사업 결과물이 공개되는 통로는 세 개다. KMDb 영화글을 통해서는 그 공간에 대한 일종의 소개글이, 유튜브에는 공간 운영진이나 관계자의 인터뷰 축약 영상이(15분 내외) 서비스된다. 그리고 KMDb의 컬렉션 페이지를 통해 스틸사진들을 볼 수 있다.
 
이 사업은 아마도 한국영상자료원 최초의 공간 기록 프로젝트일 것이다. 처음이다 보니 실수도 있었고, 시행착오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공간 아카이빙의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다. 물론 본격적인 공간 아카이빙 사업이라기엔 예산과 사업 내용이 너무 소박하다. 그러나 아이디어를 내고 추진해 온 입장에서 애착이 많은 사업이기도 하고, 한국 도시공간이나 영화산업 구조의 급변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아마 20년이 지나기 전에 그 가치를 인정받으리라는 확신도 가지고 있다. 현재의 멀티플렉스 상영관들 역시 머지않은 미래에 과거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