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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반짝이는 여름의 필름 | 2025.06.30 | 173 |
아직도 반짝이는 여름의 필름
<태풍태양> 개봉 20주년,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꿈꾸며 정재은 감독 X 김강우 배우 대담 글: 배동미(씨네21) 사진: 오계옥(씨네21) ![]() * (좌측부터) 정재은 감독, 김강우 배우 (장소 제공 서울경제진흥원 규제해소라운지) “감독님~!” <태풍태양>을 연출한 정재은 감독이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주인공 ‘모기’ 역의 김강우 배우가 성큼성큼 다가와 작은 체구의 정 감독을 안으며 인사했다. 긴 시간 보지 못했다는데도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과거로 돌아간 듯 웃음을 터트렸다. 20년 전 두 영화인은 태풍처럼 거침없었고, 태양처럼 빛났다. 정재은 감독은 많은 찬사를 받은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 이후 액션 영화에 도전했고, 그 영화에서 김강우 배우는 처음 주연배우로 캐스팅돼 극을 이끌었다. “액션 영화를 찍는 여성감독이 되고 싶었”던 정재은 감독이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트를 액션의 소재로 삼아 김강우, 천정명, 조이진, 이천희, 온주완 등 신인 배우들과 함께 <태풍태양>을 완성했다. 아쉽게도 박스오피스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정재은 감독은 “몸이 아프면 <태풍태양>에게 미안해졌다”고 한다. 20년이 흐른 뒤에야 정 감독은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상영회에 나설 수 있었다. 천정명, 이천희 배우가 상영회에 힘을 보태고 관객과의 대화에도 참여했지만, 김강우 배우는 촬영 일정상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아카이뷰가 두 사람만을 위한 대담 자리를 꾸렸다. 마침 <태풍태양>이 개봉한 6월, 정재은 감독과 김강우 배우가 만나 기억의 조각을 맞추어 보았다. 두 분은 언제 마지막으로 보셨나요. 김강우 | 감독님, 저희 예전에 성북동에서 밥 먹었던 게 영화 개봉 이후죠? 정재은 | 영화 개봉하고 한 2년 정도 지난 다음 해였으니까 2007년, 2008년 정도? 그때 강우가 성북동에 책을 빌리러 왔었어요. 연쇄살인범을 다루는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고 화성 연쇄 살인범의 심리에 대한 책을 찾아서 제가 몇 권 빌려줬고 책을 돌려받으면서 본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요. 영화 <태풍태양>을 얼마 만에 다시 보셨나요? 정재은 | 사실 <태풍태양>이 저한테는 좀 약간 아픈 손가락 같은 영화에요. 제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 붓고 많은 사람들을 혹사시켰는데 영화가 시장에서 냉대를 받았어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반추했고 20년 동안 영화를 한 번도 보지 않았어요. 볼 기회도 없었죠. 필름 영화다 보니 상영도 쉽지 않았어요. 극장에서 본 건 20년 만에 이번이 진짜 처음이에요. 극장뿐만 아니라 영화를 볼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서 20년만에 보는 영화가 어떨까 궁금했어요. 막상 보고 나서는 디지털 리마스터링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양이를 부탁해>의 경우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지원을 받아서 리마스터링을 했죠. 그러면서 재개봉을 했고 젊은 친구들이 많이 봤어요. 넷플릭스에도 새로운 버전으로 색보정 돼서 올라갔고요. <태풍태양>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전에는 안 했는데 이번에 하게 됐어요. 김강우 | 저는 중간중간 두세 번은 더 봤어요. 마지막으로 본 건 저희 애들이 초등학생 때쯤 보여줘도 되겠다 싶어서 같이 봤어요. 정재은 | DVD로? 김강우 | 네, 근데 이 녀석들 보고 나서 “아빠 담배 피웠었네” 얘기만 해서 괜히 보여줬나 후회했지만 다시 한번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아요. (웃음) 정재은 | 첫째 둘째 다 남자애들이라서 재밌을 수 있겠네. 김강우 | 이 영화가 12세 관람가잖아요. 그러니까 봐도 되겠다 싶었죠. 아빠가 사실 이렇게 인라인을 잘 탔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본 게 한 4~5년 전인 것 같아요. 김강우 배우는 4~5년 전에, 정재은 감독은 20년 전에 영화를 보셨는데, 이 작품을 만든 지 20년이나 지났다는 게 실감나나요. 정재은 | 매일매일 일하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 보니까 어느덧 <태풍태양>이 20주년이 됐구나 생각이 들어요. <고양이를 부탁해> 재개봉 당시에도 배우들과 그런 얘기를 했거든요. 배우들이 사고를 안 쳐서 영화가 다시 재개봉할 수 있다고. 배우들이 사고를 안 치고 자기 자리를 바위처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영화가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거라는 생각해요. 그래서 배우들한테 새삼스럽게 감사하더라고요. 김강우 | 저 사고 쳐도 되나요 이제? (웃음) 정재은 | 치지 말라고 얘기하는 거야 지금! (웃음) 김강우 | 아 그래요? 또 디지털 리마스터링 해야 되니까. 정재은 | 사고 칠 스타일도 아니면서. 김강우 | 제가 겁이 많아요. (웃음) 저도 20주년이란 실감은 안 나요. 당시에 제가 데뷔한 지 5년도 안 된 신인이었는데, 엊그제 같아요. 여름이 되면 특히 <태풍태양>의 부분부분이 기억나요. 저희가 여름에 엄청나게 연습했거든요. 저한테는 이 작품은 20대의 표본이고, 저한테 20대인 채로 남아있어요. 영화에서 신었던 인라인 스케이트도 한참 가지고 있었어요. 못 버리겠더라고요. 근데 나중에는 인라인이 삭더라고요. 땀이 묻어서요. 이사하면서 처분했는데, 그만큼 저한테는 의미가 있었어요. 보호대도 갖고 있었고, 왼쪽 팔뚝의 상처들도 당시에 생긴 상처들이에요. 정재은 | 우리 영화에도 나오는 상처네. 인라인 연습하다가 넘어져서 생긴. ![]() * <태풍태양> 영화 현장스틸(사진 제공 씨네21) 정재은 감독님은 6월21일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열린 상영회에서 관객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셨어요. 이 영화를 기억하는 관객과 새로운 관객과 함께 본 감정이 어떠셨어요. 정재은 | 극장 맨 뒤에서 보는데 남의 영화처럼 느껴졌어요. 제가 제 영화를 보면서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은 처음인 것 같아요. 광고 현장에서 모기가 사고를 치고 제작진에게 가서 무릎 꿇고 사과하고 혼자 한강에서 낙하해 밤섬으로 헤엄쳐 가는 장면이 정말 울컥해서 울었어요. 물론 김강우 배우가 연기를 잘했기 때문에 이런 감정이 생기는 거겠지만, 밤섬으로 간 모기가 마치 나처럼 느껴졌어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그 모습이 마치 다큐멘터리로 가는 나처럼 느껴졌어요. 그만큼 정말 순수한 관객으로서 영화를 본 것 같아요. 그리고 김강우 배우가 연기한 모기란 캐릭터가 너무 얄밉더라고요. 모기란 캐릭터를 너무 잘 살려서 연기해서요. 김강우 배우가 잘 연기해 주지 않았다면 영화가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요. 상영회 당일 배우들하고 속 터놓고 얘기했는데, 이천희 배우는 연기를 다시 볼 수가 없다더라고요. (웃음) 김강우 |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정재은 | 아니. 김강우 | 아, 걔가. (웃음) 정재은 | 자기 연기를 볼 수가 없다고 해서 나는 심지어 그렇게 얘기를 했어. “처음에는 이 배우들이 다 관객들이 낯설었지만 익숙해지니까 연기도 뭐 좋아 보이지 않나요?”라고. 강우 배우는 연기를 너무 잘하고 역할을 너무 잘 살려서 너무 얄밉던데, 어떻게 이렇게 배역을 잘 살렸어? 김강우 | 모기는 저랑은 굉장히 결이 다른 친구예요. MBTI를 잘 모르지만 제 MBTI가 A면 얘는 완전 Z인 애라 힘들었어요. 저는 스케이트 타느라 힘든 게 아니고 사실 캐릭터를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가 어려웠어요. 그땐 신인이고 한창 뜨거울 때인데도 왠지 ‘20대의 마침표 같은 영화’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 뇌리에 박힐 수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랑 완전히 거꾸로 살았던 것 같아요. 제가 항상 신발을 왼쪽부터 신는다면 오른쪽부터 신었고, 일찍 일어나는 스타일이라면 일부러 반대로 늦게까지 자고 엉망으로 생활했어요. 생활 리듬을 반대로 꺾고 뒤집었죠. 그렇게 해서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요. 머리도 묶어보고 담배도 펴보고 별의별 짓을 다 했어요. 정재은 | 김강우 배우가 너무 특이한 캐릭터를 만들어놨더라고요. 저는 진짜 이번에 다시 보고 깜짝 놀랐어요. 강우 배우가 만든 아주 사소한 디테일들이 너무 매력적인 거예요. 팔을 다친 소요가 낑낑대면서 머리카락을 감자 모기가 변기에 머리를 넣고 물을 내리라고 말하잖아요. 한줄 정도의 대사이지만 이 캐릭터는 평생 그렇게 장난을 쳐 온 사람처럼 느껴져요. 대사가 몸에 딱 붙는 느낌이죠. 정재은 | 그러니까요. 내가 아는 강우는 그런 친구가 아니거든요. 근데 <태풍태양>에서 유일하게 그런 모습을 정말 보여준 것 같아요. 김강우 | 그전에는 제가 영화를 많이 한 것도 아니었고 타이틀롤을 맡았던 것도 <태풍태양>이 처음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건 여유가 없었어요. 저희가 태릉선수촌에서 올림픽을 준비하듯이 <태풍태양>을 준비했어요. 저는 어렸을 때 롤러 스케이트도 타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인라인을 열심히 연습해야 했고 다른 작품을 하면서도 놓지 않아야 했어요. 또 그해는 왜 그렇게 더웠어요, 감독님? 너무 더워서 영화사에서 준 정제 소금을 먹으면서 연습했어요. 정재은 | 정말? 김강우 | 영화사에서 나트륨을 줬어요. 배우들이 쓰러지면 영화를 못 찍으니까. 제가 반장처럼 배우들한테 나눠주면서 “먹어야 해. 안 먹으면 큰일 난다”라고 했어요. 정재은 | <해안선> 현장 아니야? 우리 아닌 거 같아. 김강우 | 아니에요. 진짜 먹었다니까요. 정명이도 너무 많이 먹었죠. 젊은 배우들이 체력이 좋으니까 계속 연습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연습하는 거예요. 인라인 연습도 해야 하고 연기도 소화해야 하고…. 천희는 저보다 경험이 더 없으니까 힘들었을 거예요. 배우들 연기야 뻣뻣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도 4~5년 전 영화를 다시 보고 저는 그날 밤 울었어요. 왜냐하면 저도 너무 열심히 했지만 배우들이 너무 열심히 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가만히 세어봤더니 감독님도 그때 30대인 거예요. 감독님도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김병서 촬영감독도 저랑 동갑이라 그때 20대였고요. 그런데도 그 예산으로, 그 장면들을…. <태풍태양>이 상업적으로는 조금 아쉬울 수 있어도 감독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어마어마한 영화로 남았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래서 후회는 없어요. 이상한 영화, 세상에 빨리 나온 영화 <태풍태양>정재은 | 다시 보니까 전혀 한국 사회에서 나올 수도 없었고 이상한 영화였던 것 같아. 김강우 | 그렇죠. 너무 빨리 나왔던 영화예요. 정재은 | 어떤 감독님이 나한테 “실험영화 같은데?”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나. 그만큼 이상했던 거지. 캐릭터들도 이상하고. 나는 만화적으로 웃기게 쓴 대사인데 그 대사 하나하나를 사람들이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 김강우 | 대사가 참 중의적이었죠. 그래서 저는 감독님이 그 이후에 다큐로 가신 게 이해가 가요. <태풍태양>은 정말 스케이터들의 삶 그대로를 감독님이 관찰하셔서 만든 영화였거든요. 감독님이 저희 배우들보다 스케이터 친구들하고 더 친하셨고, 다큐의 시선으로 그 삶들을 보셨어요. 그래서 이후에 감독님의 행보를 보고 역시 감독님이 그쪽으로 가시는구나 싶었어요. 물론 당시에는 감독님이 ‘나 되게 상업적이야’ 이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정재은 | 그렇지.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되게 흥행하려고 <태풍태양>을 만들었으니까. 김강우 | 그렇죠. 근데 그 대사들을 소화하려면 저희는 너무 어려웠어요. 정재은 | 대사들이 너무 이상한 거지. 김강우 | 배경은 현대이고 현대적인 캐릭터들인데 말은 고전적이었어요. 정재은 | 맞아, 너무 중의적이었어. 물론 인위적인 대사들도 많이 있지만 이번에 다시 보니까 스케이트를 빗대서 여러 생각할 지점을 던지는 대사를 썼더라고. 2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볼 때는 대사에 크게 이질감이 없었는데 당시에는 연기하기 쉽지 않으셨나요. 김강우 | 정확하게는 제가 대사처럼 느끼지 못하는 거죠. 이를테면 “비겁한 게 나쁜 거냐?” 이런 대사들. 만약 이 나이에 연기할 수 있다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당시에 제가 최대한 표현하더라도 받는 배우가 리액션이 힘들었을 거예요. 정재은 | 난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대사인 “매일 똥을 싸잖아. 그 똥이 매일 달라. 스케이트도 매일 타도 매일 달라서 좋아.”라고 농담을 섞은 대사가 참 좋더라. 요즘 대사들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아. 김강우 | 100% 다르죠. 그래서 좋아요. 지금은 대사들이 가볍잖아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대사 한마디에 의미를 담고 연기할 때도 고민해서 한마디 대사를 날렸어요. 지금은 자연스럽게 하는 게 가장 핵심이 돼버렸으니까 배우 입장에서 좀 아쉬워요. 정재은 | 아까 강우 배우가 영화를 보고 되게 나의 젊음의 모든 것이란 느낌 때문에 울었다고 했잖아요. 저도 아마 그런 느낌 때문에 영화를 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20년이 지나서 다시 봤을 때 ‘이게 청춘 영화의 매력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청춘 영화는 어떻게 보면 젊은이들이 보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20년 만에 보는 게 이 영화의 사이클에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 * 어그레시브 스케이트 기술 중 트루스핀 탑 소울(Truespin Top Soul) 이번 상영회 때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는데, 인상적인 순간이나 인상적인 코멘트가 있었나요. 정재은 | 스케이터들이 한 그룹 왔었어요. 지금은 스케이트 파크를 운영한다는 관객은 초등학생 때 영화를 보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했고, 14살의 국내 어그레시브 인라인 챔피언인 꼬마도 영화를 보러 왔어요. 특정 분야와 깊은 관계를 맺는 영화를 만드는 게 중요하구나 생각이 들었죠. 저는 천정명, 이천희 배우랑 나란히 앞에 앉아서 관객과의 대화를 했는데 배우들 얘기도 참 재미있었어요. 배우마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어떤 기억들이 있어 신기했어요. 일단 천정명은 ‘트루스핀 탑 소울’을 성공하고 기뻐하는 한 컷을 내가 바랐나봐요. 근데 하루 종일 찍었는데도 그 기술을 성공하지 못했대요. 연습을 정말 많이 했는데 안 됐대요. 그래서 필름을 수십 통을 썼고 이틀을 찍었다고 하던데, 나는 왜곡된 것 같아요. (웃음) 연출부는 필름 8통을 썼다고 기억하더라고요. 그리고 이틀 연속 찍은 건 아니고 나눠서 찍었을 거예요. 모기, 한주(조이진)가 나른하게 앉아서 서로 대화하고, 소요(천정명) 혼자 스케이트를 타다가 성공하는 장면인데 이걸 이어서 찍으려고 했는데 불가능해서 결국 컷을 끊어서 찍었어요. 천정명 배우가 그 얘기를 하면서 자기는 정말 죽고 싶었다는 거예요. 김강우 | 지금과 달리 그때는 필름을 얼마나 쓰는지 정말 많이 신경 썼어요. 정재은 | 그렇지. 천희 같은 경우 올림픽 파크가 자기 캐릭터 갑바가 일하는 곳이라 자기가 그 공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틈만 나면 거기서 지냈대요. 배우로서 참 노력한 거예요. 근데 어떤 꼬마가 거기서 알짱알짱거리더래요. 그래서 “너 여기 왜 왔어?” 그랬더니 “저 여기 파크에서 스케이트 타려고 하는데 타도 돼요?” 그랬대요. 그래서 “우리 영화 준비하니까 너 이따 촬영할 때 와”라고 했대요. 그 꼬마가 촬영할 때 자연스럽게 영화 안으로 이렇게 들어와서 스케이트를 탔는데 그 꼬마가 30대 중반이 돼서 이번 상영회때 온 거에요. 영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느낌이 정말 재밌었어요.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스케이터들이 질문을 많이 했어요. 스케이터들한테는 <태풍태양>이 마치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과 같은 영화여서 스케이터들이 이제 영화를 지킨다는 느낌을 받았죠. 영화는 누군가가 지키려고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잖아요. 저는 20년 동안 영화를 방치했지만 스케이터들이 자기네들끼리 서로 영화를 돌려보면서 <태풍태양>을 지켜왔구나 많이 느꼈어요. 좋은 영화가 그런 것 같아요. 영화 내부의 질문만 하는 게 아니라 관객의 인생까지 이야기하게 되죠. 영화를 보면서 두 분이 특별히 감정 이입한 캐릭터가 있었나요? 김강우 | 저는 다른 캐릭터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웃음) 감독님이 말씀하시니까 새삼 생각나는 게 배우들이 진짜 그 캐릭터로 살았어요. 그러지 않고서는 우리가 그 캐릭터를 표현할 역량이 없었어요. 저도 그렇고 정명이도 그랬고 천희도 그렇고 주완이도 그랬고 그냥 그 캐릭터로 살았어요. 정재은 | 저는 모기한테 완전히 감정이입해서 봤어요. 그리고 모기의 디테일한 연기들이 재밌더라고요. 갑바가 일하는 올림픽 파크에서 손님이 와서 스케이트를 사려고 하니까 비싸니까 사지 말라고 말하면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손동작을 취해요. 근데 그 모습이 너무 얄밉고 너무 귀여워요. 그때는 잘 몰랐는데 이런 디테일들이 모기라는 인물을 형성한 것 같아요. 시나리오 안에 썼던 디테일도 있지만 사실 강우 같은 경우 시나리오에 없었던 디테일을 많이 표현한 것 같아요. 배우가 굉장히 디테일들을 정말 많이 연구했고 많은 것들을 해줬구나 생각되면서, 영화를 볼 때 스케이터를 지하철 보관소에 딱 맡기고 떠나는 신에서 감정이 올라오더라고요. 김강우 | 말씀하신 그런 디테일들은 다 상상해서 만들어냈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신인배우가 연기를 다 내려놓고 할 수는 없던 분위기였어요. 드라마의 경우, 작가들이 써주는 대로 연기를 했어야 됐어요. 근데 영화 현장에서 새로운 경험을 했던 것 같아요. 계속 상상해 보고 캐릭터를 만들어 나가는. 그러니까 이 영화가 제 연기 인생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였죠. 정재은 | 트위터리안들이 <태풍태양>을 보고서 김강우 배우를 이렇게 표현하더라고요. “<태풍태양>의 김강우는 과장 조금 보태서 <폭풍 속으로>의 페트릭 스웨이지처럼 멋있었다”라고. 김강우 | 오! 정재은 | 내가 <슬램덩크>를 되게 좋아했잖아. 그래서 만화적인 캐릭터들을 그린 거거든요. 또 다른 트위터리안이 내 의도가 통한 것처럼 “김강우한테 <슬램덩크> 강백호 같은 얼굴이 있는 걸 처음 알았음. 찰나를 살고 요절할 것 같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표정들이 참 좋았다”라고 했어요. 정말 정확한 표현이네요. 정재은 | 그렇죠. 저도 이렇게 소통되는구나 처음 안 거예요. 옛날에는 이 영화를 볼 수 없었어요. 개봉 당시 기자 시사회때 한 번 보고 안 본 것 같은데, 그때는 고생하고 너무 힘들다는 생각 때문에 강우 연기를 즐길 수도 없었어요. 이번에 보니까 배우가 너무 매력 있는 캐릭터를 정말 만들어줬더라고요. 새삼스럽게 고마웠어요. 김강우 | 감독님 덕분에 한 거죠. 제 인생의 젊음을 박제해서 평생 가지고 갈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주셨어요. 그런 기회를 얻기 쉽지 않죠. 그때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여쭤보면 새삼스럽지만 그럼에도 말씀해 주세요. 그때 얼마나 스케이트에 진심이었나요? 김강우 | 그때는 전쟁이었어요. 전쟁. 와이어 액션을 배우고 스케이트도 배워야 됐어요. 인라인 장면들 자체를 혼자 해결을 해야 하니까요. 영화 속 기술들은 연습 기간, 촬영 기간 안에 절대 할 수가 없는 기술들이에요. 그러니까 정명이도 이틀 동안 촬영해서 좌절을 느낀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희가 절대 할 수 없었던 게 맞아요. 몇 년씩 타도 다섯 번 시도해야 한 번 성공할 정도로 어려운 기술이기 때문에 저희가 몇 개월 탄다고 표현할 수 없어요. 시간이 쌓이지 않는 한 안 되는 기술들이라 어쩔 수 없었던 거죠. 과거 기사를 찾아보면 두 달간 스케이트를 연습했다고 하더군요. 김강우 | 제 기억에는 캐스팅이 완료되고 나서 몇 개월간 길게 연습했어요. 제가 중간에 다른 작품 촬영 때문에 중국에 갔는데, 그때도 스케이트를 가지고 갔어요. 낮에는 너무 더워서 연습을 못하고 해가 지고 촬영을 마치면 밤에 스케이트를 탔죠. 정재은 | 같이 훈련할 스탭도 중국에 보냈지. 김강우 | 맞아요. 제 대역하는 친구와 한달 반 정도를 같이 살았죠. 정재은 | 스케이트 영화를 배우들과 이렇게까지 찍는다는 게 참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박주영 PD도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배우들이 이렇게 액션을 해줬기 때문에 배우들의 영화로 이제 남고 관객도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배우들이 이렇게 스케이트 타는 장면을 실제처럼 연기하려고 노력을 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배우들이 진짜 힘들었겠죠. 고생 많이 했을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저는 너무 신경 쓸 게 많으니까 배우들 연기를 볼 틈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강우 같은 경우, 자기 공간이 굉장히 넓어진 거죠. 뭔가를 탐구하고 만들어내고 저는 그 연기가 좋다고 했고요. 이번 상영회 때 관객들이 호응한 건 이미 긴 시간을 견딜 만한 힘을 가진 영화였기 때문이 그런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정재은 | 당시에는 참 낯선 영화였을 것 같아요. 당시 많이 통용되던 서사는 한국 사회의 억압적인 문화에 속해있는 영화들이 많았어요. <태풍태양>처럼 내가 무엇을 좋아해서 그걸 추구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지금 이대로면 안 되냐, 왜 더 노력해야 하고, 왜 더 나아지려고 해야 하나, 왜 내가 하고 싶을 때만 하면 왜 안 되는 거냐라고 질문하는 모기란 캐릭터가 고도 생산기의 한국 사회에서는 어울리지 않았고 이해받지 못했죠. 김강우 | 모기는 삶의 의미를 쫓아가고 그 순간을 즐기는 건데, 과거에는 모기 같은 사람을 소위 ‘한량’으로 본 거죠. 너무 앞서갔다는 말이 이런 부분이에요. 한국은 모기 같은 캐릭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인 여건이 아직 안 됐어요. 그러니까 저도 이해하기 힘들어서 외국 영화도 많이 봤어요. (웃음) 모기는 한국 사람이 아닐 거다, 외국에서 태어났을 거다 별의별 생각을 다 했어요. 그러지 않고선 이해가 안 됐으니까요. 정재은 | 해외 영화를 많이 봤다니까 혹시 그때 <폭풍 속으로>의 패트릭 스웨이지 연기를 혹시 참고한 적 있었어요? 김강우 | 아니요, <태풍태양> 이후에 그 영화를 봤어요. 압구정 출신 유학파를 상상한 건가요. 김강우 | 유학파도 아니고 어릴 때 외국에서 살아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도 되나 보다 상상했어요. 그러니까 모기는 갑바와 다른 친구들과 맞질 않는 거죠. ![]() 과거보다 지금 관객에게 더 와닿을 캐릭터 '모기'도대체 캐릭터 이름은 왜 모기인가요. 정재은 | 액션 영화를 찍어야 되겠다, 되게 만화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인물들의 이름을 쨍, 깡맨, 아루, 단테, 지로 이런 식으로 정한 거죠. 특히 모기는 시나리오를 쓸 때 모기 한마리가 저를 너무 괴롭혀서 이렇게 작명했어요. 김강우 | 아 맞다. 이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정재은 | 갑바 같은 경우에도 만화 캐릭터 같은 느낌으로 지었죠. 당시 스케이터들이 일종의 닉네임을 썼고 걸거리 문화를 리드할 때에요. 그들이 캠코더를 들고 촬영도 하고 영상을 스스로 편집하고요. 스케이터들의 길거리 문화에 착안해서 캐릭터들의 이름도 만들었고, 가장 평범한 이름인 소요는 ‘천천히 산책하다’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에요. 근데 모기란 이름 진짜 좋지 않아? (웃음) 김강우 | 절대 까먹을 수 없는 이름이죠. 파리가 아니어서 다행이지. (웃음) 시나리오 쓰실 때 파리가 있었으면…. 정재은 | 다 같이 스시를 먹으러 가는 장면이 있어요. 친구들이 스시를 먹으러 갔는데 모기가 파리를 잡는 장면이 있어요. 김강우 | 맞다, 맞다! (웃음) 정재은 | 시나리오에 “모기가 파리를 잡는다”라고 썼던 것 같아요. 이렇게 흘러가 버리는 유머가 너무 많아서 관객이 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죠. 김강우 | 파리 사운드가 안 들어갔어요? 정재은 | 아니 들어갔는데, 잘 안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은 갑자기 왜 박수를 치나 하는 거죠. 나만 아는 정보가 많은 거죠. 그 장면 초반에 천희 연기가 좋더라고요. 월급을 타자 친구들이 뜯어먹으려고 하니까 갑바가 도망을 가는데 그때 천희의 진짜 웃음소리가 들어갔대요. 나는 몰랐는데 그렇게 웃으면 안 되는데 웃어버려서 천희는 너무 괴롭대. (웃음) * The Beatles의 "Across The Universe". 영화 『태풍태양』(감독 정재은, 2005) 삽입곡. 마지막으로 스케이트를 신나게 타고 스케이트를 지하철 분실물 센터에 맡기는 모습이 정말 모기다웠어요. 그리고 스케이트를 탈 때 쓰기 어려운 비틀즈의 음악 ‘Across The Universe’가 들려오는데요. 김강우 배우는 그 장면을 연기할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묻고 싶어요. 김강우 | ‘그 장면에서 그 모든 기술을 망라해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하지?’라고만 생각했어요. 지금이야 워낙 카메라가 경량화됐고, 보디캠도 다양하지만 당시에는 스케이터가 같이 달리면서 찍어야 했어요. 정재은 | 맞아요. 스케이터가 무거운 필름 카메라를 들고 찍었어요. 김강우 | 차도만 달리는 게 아니니까 좁은 공간도 달려서 차나 자전거로 찍을 수도 없어서 별의별 방법을 다 썼어요. 근데 그 별의별 장면들이 나중에 붙여지고 비틀즈의 음악이 들려오니까 그렇게 멋있는 거지 현장은…. 정재은 | 이번에 다시 보면서 재발견한 또 다른 장면은 듀스의 ‘여름 안에서’가 나오고 모기가 춤을 추는데 생각보다 잘 추더라고요. 그래서 깜짝 놀랐는데 원래 좀 안무를 스스로 해왔던 거예요? 김강우 | 혼자 막 했어요.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웃음) 정재은 | 되게 잘 추지 않아요? 그냥 막춤인데. <벌새> <빌리 엘리어트>에서 아이들이 혼자 춤을 추잖아요. 어떤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장면은 청춘영화에서도 많이 등장하죠. 정재은 | 소요의 집이지만…. (웃음) 김강우 | 맞아, 소요네 집이었죠. 남의 집에서 여자친구랑 동거한 거잖아요. 지금으로썬 그럴 수 있다 생각할 수 있지만 옛날 같으면 저런 양아치가 있나. 정재은 | 그렇지. 근데 김보람 감독님이 이번에 영화를 보고 부모님들이 없는 집에 다 같이 모여 살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더라고. ![]() 감독과 배우의 일“뭐든 일이 되면 힘든 거야. 좋아하는 건 좋아하다 해서 끝내야 돼”라는 모기의 대사에 감정 이입됐어요. 20년 전의 대사를 어떻게 느끼시나요. 많이 공감하시는지 아니면 좀 다른 생각인지 궁금해요. 김강우 | 저는 올해로 데뷔 25년이에요. 연기라는 게 참 연애 같아요. 어떨 땐 징글징글하게 꼴 보기 싫은데 어떨 땐 너무너무 좋아서 끌어안고 안 놓고 싶어요. 반복이죠. 연기를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사랑하는 건지 미워하는 건지가 지금은 구분이 안 돼요. 그 감정들이 다 섞여서 애증이 되는 것 같아요. 근데 한 5년 전부터 연기가 너무너무 좋아지더라고요. 연기가 아니면 나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거죠. 배우뿐 아니라 목수나 농부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일이 힘들면 때려치워야겠다 하다가 어느 순간 거기에 점점 다시 몰입하는. 앞으로는 더 그렇겠죠. 정재은 | 저는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로 너무 많은 칭찬을 받았어요. 그러고 나서 의기 충전돼 두 번째 영화 <태풍태양>을 만들었는데 이 영화가 손해를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어요. 배급을 맡았던 쇼이스트 김동주 대표님은 <태풍태양>과 다른 작품들의 결과로 회사 문을 닫았어요. 감독이 작품의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그때 느꼈어요. 내가 무엇이 부족했는가, 관객들한테 왜 다가가지 못했는가 많이 생각했고, 너무 괴로웠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가 진짜 찍고 싶을 때 찍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일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하게 됐어요. 완전히 극영화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자유를 느끼게 되었다는 면에서 <태풍태양>은 저한테는 저에게 굉장히 많은 걸 준 작품이에요. “뭐든 일이 되면 힘든 거야. 좋아하는 건 좋아하다 해서 끝내야 돼”라는 모기의 대사에 대해 덧붙이자면, 일이 되면 책임감이 생기는 거예요. 배우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출연한 영화를 사람들이 많이 보도록 끝까지 끝까지 노력해야 해요. 배우의 작품 사랑이 끝없어야만 관객들이 영화를 보겠다는 마음을 먹거든요. 그건 감독도 마찬가지예요. 근데 그때 저는 도망가기 바빴어요. 내가 원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하면서 도망가기 급했지 내가 끝까지 더 사랑하고 더 지켜야 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모기의 대사를 들으며 오히려 일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일을 더 잡고 늘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태풍태양>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는데 내가 베를린 영화제도 안 갔어요. 나는 빨리 그냥 다음 작품을 생각하고 싶었거든요. 이 작품을 다시 볼 기운도 나지 않았어요. 그만큼 열정과 에너지를 바쳤어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니까 이 작품을 다시 지켜줘야 되겠다, 미안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그래서 디지털 리마스터링이 꼭 되었으면 좋겠어요. 김강우 | 감독님이 그때 힘들어하셨던 게 지금 느껴져요. 쫑파티 때도 힘들어하셨던 기억이 나요. 헤아려보면 감독님도 당시 어린 나이였잖아요. 제가 더 지켜드리고 힘이 됐어야 되는데 저도 사실 역량이 안 됐죠.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배우라. 그리고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감독님! 제가 <식객>으로 김동주 대표님 돈 벌어드렸어요. (웃음) 감독님이 성격상 남한테 폐 끼치는 거를 너무 싫어하시니까 미안해하신 것 같아요. 정재은 | 모든 신 하나하나 쉽게 찍는 게 없더라고요. 그때 제가 예산을 많이 오버했어요. 김강우 | 좀 그럴 수도 있어요! 뻔뻔하게 잊고 빨리 다음 걸 하셔도 됐는데 <태풍태양>을 계속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두 분에게 <태풍태양>이란 여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나요. 마지막 소감을 끝으로 긴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해요. 김강우 | 저는 아직도 그때가 제일 기억나요. 웃옷을 벗고 버스에 타는 장면이요. 스케이트를 딱 들고 버스에 타고 소유는 이렇게 타도 되나 부끄러워하지만 모기는 햇빛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앉아 있어요.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해요. 제가 그때 되게 기분 좋았나 봐요. 영화가 아니었다면 저도 웃옷을 벗고 버스에 탈 수 없잖아요. 그때 내 안에 무언가를 깬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 영화니까 연기니까 이렇게 살아갈 수 있지. 이런 장면을 표현할 수 있지. 아, 이게 배우구나’라고 느꼈어요. 연기하면서 후련함을 느낀 게 <태풍태양>이 처음인 것 같아요. 정재은 | 내가 생각해도 진짜 이상한 장면이네. 아무리 장난이지만 그치? 김강우 | 근데 너무 재밌잖아요. 그리고 너무 예쁘잖아요, 젊음이. 햇빛에 살도 반짝반짝하더라고요. (웃음) 정재은 | <고양이를 부탁해>는 겨울이 배경인 영화였고 <태풍태양>은 여름 영화잖아요. 나로서는 영화적으로 많은 도전을 했던 그런 영화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들을 해보려고 되게 노력했던 작품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아요. 보이지 않는 기준을 굉장히 뛰어넘고 ‘나는 이만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를 보여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참 어려운 작품으로도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세상과 통하지 않다니 좌절도 겪었죠. 그래서 20년 후에 이번에 다시 보면서 굉장히 위로를 받았어요. 김강우 | 불과 2~3년에 찍은 영화인데 촌스러운 영화가 있어요. 트렌드랑 안 맞는 영화가 꽤 많아요. 근데 이 영화는 지금 봐도 그렇지가 않아서 신기해요. 그래서 젊은 관객이 많이 봤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없네요. 그 방법을 누가 좀 마련해주셨으면…. 정재은 | 20주년 특별 상영 때 필름 프린트로 영화를 봤어요. 필름이기 때문에 그 안의 세계들이 멈춰 있는 시간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리고 생각보다 35mm 필름에 입혀져 있는 사운드가 요즘에 디지털 영화하고 다르게 굉장히 부드럽고 온화하더라고요. 스케이트 사운드를 디지털 작업으로 하면 굉장히 날카로웠을 것 같아요. 하지만 필름의 사운드의 범위가 그 소리를 안온하고 부드럽게 잡아주더라고요. 그래서 ‘맞아, 필름의 사운드가 이랬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필름 프린트는 20~30분씩 한 권이 되어 몇 캔씩으로 구성돼 있잖아요. 영화 상영 중간에 권과 권이 이어질 때 지지직거리면서 튀기 마련이고요. 이번에 영화를 볼 때 권이 처음 바뀔 때 깜짝 놀라 ‘어머, 사고인가봐!’ 생각했어요. 그만큼 디지털에 익숙하니까요. 내 영화인데도 오래간만에 권이 바뀌는 걸 봤죠. 그리고 영화 끝부분에 머리카락 같은 긴 먼지가 몇 분 동안 이어지기도 했고요. 오랜만에 영화를 아날로그 매체의 맛을 느꼈어요. 20년 전으로 훅 들어간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이번에 상영된 필름이 영문 프린트라서 도메스틱 판권만 산 ‘Across The Universe’, ‘Sk8er Boi’ 음악이 안 나왔어요. 그래서 국내판으로 한 번 더 상영했으면 좋겠어요. (웃음) + 보너스 트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