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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영화 쓰기 2025.06.30 112
영화로 영화 쓰기
영화평론가이자 비디오에세이스트 오진우가 비디오에세이를 만드는 이유

글: 오진우 평론가 · 비디오에세이스트(www.youtube.com/@jinu_montage)

기획전 ‘영화로 영화 쓰기’를 통해 나의 영상 작업의 한 챕터를 갈무리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당분간 영상을 만들 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길이 더 이상 나지 않는 상황이기에 현재 잠정 중단된 상태다. 중단되기 전에 완성된 에세이 영화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만이 외로이 남아 영화제에 연신 노크 중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인데 왜 끊임없이 펀치를 날리는 것일까? 이번 기획전이 다음 챕터의 물꼬를 틀어주길 희망하며 비디오 에세이를 열정적으로 만들었던 그때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

기획전<영화로 영화쓰기> 포스터

때는 2018년. 서유미 작가의 소설 <쿨하게 한걸음>의 주인공처럼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영화 평론을 하겠다고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전문사에 입학했다. 첫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글을 잘 못 쓴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와 혼연일체가 된 시네필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나름의 생존 전략이 필요했다. 그때 내 눈에 보인 것이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하 비디오 에세이)’.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주관한 비평공모전에 처음 생긴 부문이었다. 영화비평계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틈새처럼 보였다. 웃긴 건 당시에 저 용어의 뜻도 몰랐고, 영상편집 프로그램을 다룰 줄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무모한 자신감과 객기로 덤벼들었다. 처음엔 별다른 출품 조건이 없었기에 ‘짐 자무시’에 관한 비디오 에세이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프로그램을 익히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비디오 에세이 작업과 동시에 영화에 음악을 입힌 뮤직비디오 작업을 병행했다. 오히려 후자의 작업에 매료되어 하루에 3~4편씩 만들 정도로 완전히 미쳐 있었다. 이 작업은 지금도 간간이 하고 있으며 내게는 감을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기초 운동이 되었다. 덕분에 빠른 속도로 나만의 리듬을 파악했고, 몽타주를 비롯해 책으로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던 영화 언어에 대해 빠르고 감각적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 <영상자료원 가는 길>(오진우) 스틸이미지
* <영상자료원 가는 길>(오진우) 스틸이미지
 

살아남기 위해 무모한 자신감과 객기로 덤벼든 비디오 에세이 작업


공모전에서 당선작은 없었지만, 최종심에 처음으로 내 이름이 거론됐다. 이후에 이런저런 빈정 상하는 일들을 겪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회의감이 심하게 들어 비디오 에세이에 대한 마음이 떠나기 시작했다. 만드는 재미도 어느새 사라졌고 평론가로서 나를 시장에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됐다. 당연히 잘되지 않았다. 나만의 색이라 생각했던 비디오 에세이가 어느새 덫으로 느껴졌다. 블루오션이라 생각했던 이곳은 그새 외딴섬으로 변해 있었다. 목적 없는 수단이 된 비디오 에세이는 고치지 못한 버릇처럼 남게 되었다. 이 외로운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 비디오 에세이에서 배운 걸로 전략을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에세이 영화였다. 물론 만들 때는 이것이 에세이 영화인지도 몰랐다. 처음엔 영화를 인용하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상으로 비평이 가능한지 궁금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영화를 직접 인용하지 않고 영화에서 본 것을 훔치는 방식을 택했다. 그간 봤던 영화 속 장면을 포함해 형식이나 장르적 특성들을 긁어모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이 <영상자료원 가는 길>이다. 내용은 한국영상자료원을 오가며 들었던 영화에 대한 단상이라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팬데믹 기간에 새로운 한국영화가 도래하기를 희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제2회 성북청춘불패영화제 경쟁작으로 뽑히는 기적을 일궈냈다.

영화로 가는 여정에서 직행열차는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 같다. 모든 것이 무언가에 실패하고 택한 우회로에서 만난 우연들이었다. 이제는 버릇이 된 비디오 에세이와 에세이 영화의 작업 방식을 이야기해 보겠다. 전자는 영화를 인용하여 영상의 형태로 영화를 비평하는 작업이고, 후자는 창작자의 사유를 영상으로 풀어내는 좀 더 자유로운 작업이다. 후자가 전자의 상위 개념은 아니지만 작업 방식상 전자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비디오 에세이 작업 역시 직접 찍은 영상을 넣을 수도 있기에 두 장르 사이에 엄격한 이론적 구분은 있을지언정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매한가지로 보인다. 나의 경우 둘 다 영화에서 출발한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제4의 종말>을 보고 떠오른 비디오 에세이에 대한 구상을 여기에 풀어보겠다.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로 사유가 전개된다.




* <제4의 종말> 예고편
 

비디오 에세이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가


<제4의 종말>은 지구의 주인이라 여겼던 인간이 개미에게 그 지위를 빼앗기는 과정을 그린 SF영화다. 영화 속 개미를 보다가 문득 영화평론가 마니 파버의 글 <흰 코끼리 예술 vs. 흰 개미 예술>이 생각났다. 영화를 보는 내내 발췌할 만한 장면을 기억해 둔다. 영화가 끝나고 집에 걸어오는 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쏟아진다. 지금이 영화의 종말을 말할 시기일까? 한국에 국한된 이야기일까? 영화사에서 영화의 죽음을 논했던 여러 순간이 있었다. 유성 영화, 컬러, 세계 대전, 필름에서 디지털… 이것들은 영화 역사의 변곡점이라 할 수 있겠다. 최근에 팬데믹이 있었다. 팬데믹 이후 흰 개미 같은 예술적 실천을 보인 영화는? 흰 코끼리 같은 영화는 또 어떻게 변했을까?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은 꼭 넣어야겠다. 인트로에 무조건 넣을 노래는 로버트 알트만의 <내쉬빌>에 나온 것이면 좋겠다. 가사가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200년을 위해”

메모 앱을 켜고 이러한 생각을 무질서하게 일단 적어둔다. 바로 만들 때도 있지만 대개는 묵혀둔다. 비디오 에세이로 현실화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영화를 구할 길이 없거나 만들다 회의감이 밀려오거나 저장 공간이 부족하면 아이디어만 스케치한 러프한 버전의 비디오 에세이를 만들고 프로젝트 파일을 지워버린다. 그렇게 묵혀둔 아이디어는 전혀 상관없는 글을 쓸 때 활용되기도 한다. 미완의 프로젝트이지만 비평적 사유에는 도움이 되는 실천인 것이다.

에세이 영화의 경우 영화 이미지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유롭다. 나의 경우 현재는 스마트폰으로 일상을 찍고 몽타주하는 방식을 이어 나가고 있다. 주로 일상으로부터 얻어낸 사진이나 영상으로 만들기에 ‘우연’을 어떻게 영화 안으로 흡수할 것인지가 핵심이다. 이것은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마음가짐에 해당한다. 자신이 만드는 영화적 세계를 완벽히 통제하고 싶은 창작자에겐 추천하지 않는다. <영상자료원 가는 길>의 태양이 폭발하는 장면은 카메라의 어떤 현상 때문에 얻어 걸린 장면이다. 우연히 얻은 이 장면은 영화의 챕터를 역순으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했고 장르 자체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세카이계’를 적극 끌어들이는 단초를 제공했다.


<전주에서>(오진우) 스틸이미지  <전주에서>(오진우) 스틸이미지

*<전주에서>(오진우) 스틸이미지
 

훗날 한국 영화비평사의 B-Side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다면


비교적 최근에 만든 비디오 에세이 <홍상수: 중력과 은총>이 좋은 소식을 접한 시기와 이번 기획전에 제안을 받은 시기가 겹치면서 2018년부터 영상을 만들면서 잊고 살던 고민을 다시 생각해 봤다. 두 장르 모두 애매한 포지션에 놓여 있는 작업이다. 좀 더 애매한 비디오 에세이에 대해 말하며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말의 시대에서 문자 비평도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에서 비디오 에세이는 그것을 뒤엎을 만한 힘을 지니지 않았다. 만들다 보면 글이 더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글로 두 영화 속 비슷한 장면을 엮고 싶다면 문단을 나눠서 쓰면 그만이다. 하지만 비디오 에세이는 다음과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두 장면을 바로 연결할지 아니면 간격을 놓고 둘지, 디졸브로 넘길지, 분할 화면으로 보여줄지, 화면비가 다르다면 어떻게 조율할지, 사운드는 어떻게 처리할지, 텍스트나 내레이션은 어떻게 배치할지, 폰트와 글자 크기와 색상은 어떻게 할지 등 수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비디오 에세이는 확실히 글보다 품이 많이 들고 오히려 제한적일 때가 많다. 결정적으로 수요가 별로 없다. 수요를 끌어낼 인물이 만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이 나는 아니었다. 한때 바랐던 적도 있지만 그것은 헛된 희망이었다. 비디오 에세이와 에세이 영화는 내게 고치지 못한 습관 혹은 만성적인 질환처럼 남게 됐다. 이 증상으로서의 시네마를 발견해 준 담당 프로그래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린다. 향후 미래에 다시 누군가가 이 분야를 디깅했을 때 재발견되어 한국 영화비평사의 B-Side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까지, 설령 그날이 안 와도 영화로 가는 길을 계속 걷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