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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절 선재는 어디에? | 2024.05.29 | 1299 |
그 때 그 시절 선재는 어디에?
'그랬나봐 나 널 좋아하나봐', <첫사랑> 이명세 감독 인터뷰
글 : 김성훈 (씨네21) 사진 : 백종헌 (씨네21) ![]() 이명세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첫사랑>(1993)은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재기가 넘친다. 에피소드마다 애니메이션과 시를 삽입하고, 주인공 영신(김혜수)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세트로 지은 영신의 집과 동네는 아기자기하고, 그린 매트로 찍은 콜라주나 담배 연기가 바람에 실려 창밖으로 날아가는 풍경은 정겹다. 이 영화는 제목대로 첫사랑 이야기다. 대학에 들어간 열아홉 살 소녀 영신(김혜수)이 연극반 연출자 선배(송영창)를 짝사랑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당대 최고의 스타 배우인 안성기, 신인 배우 황신혜 그리고 자신의 스승이자 스타 감독인 배창호 세 명을 데리고 찍은 데뷔작 <개그맨>(1988), 충무로에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고, 이후 리메이크됐던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두 편의 영화로 혜성처럼 등장했던 이명세 감독은 더 특별할 것 없는 첫사랑 이야기에 인물 감정 변화 과정과 시간 흐름을 새롭게 불어넣는다. 선풍기와 부채를 동원해 송영창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바람에 실려 창밖으로 흘러나가는 이미지를 만들었고, 기와에 모두 식용유를 칠하고, 목련을 따서 세트에 달아 한낮에 반짝거리는 지붕을 표현했다. ‘코리안 뉴웨이브’ 바람이 불었던 1990년대 초반, 리얼리즘 영화들 사이에서 이명세의 <첫사랑>은 새롭고 신선해 유독 눈에 띄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이후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형사 Duelist>(2005) < M > (2007) 등 여러 영화로 ‘한국 최고의 비주얼리스트’라는 위치를 얻게 되는 감독 이명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올해 한국영상자료원은 이명세 감독의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와 <첫사랑>을 블루레이 박스세트로 출시할 예정이다. 바람이 시원했던 어느 봄날, 남산에 위치한 서울예술대학에서 이명세 감독을 오랜만에 만나 <첫사랑> 이야기를 나눴다. <첫사랑>(1993)은 원본 프린트가 소실되어 하나 남은 해외 상영용 프린트로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본 프린트를 갖고 있었다면 색감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다보니 색감의 깊이를 알 수 없어서 복원 작업이 좀 힘들었어요. 그럼에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장면 몇 개가 있었어요. 그걸 단서 삼아 기억하는 색을 찾아갔어요. 오리지널 프린트가 있었더라면 그 과정이 훨씬 수월했겠네요. 오리지널 네가 프린트에는 색의 보존값들이 있어서 그것만 불러들인 뒤 정리하면 되니깐요.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친 <첫사랑>은 오랜만에 보셨겠어요. <첫사랑>은 13여년전,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의 회고전에서 상영한 바 있어요.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친 버전은 5년 전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김혜수 배우 특별전 때 상영한 뒤로 오랜만에 봤어요. 영화 얘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첫사랑>은 데뷔작 <개그맨>,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 이은 세 번째 영화입니다. 전작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찍고 난 뒤 차기작으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계기가 무엇입니까. 원래 첫 작품으로 써두었던 작품이 있었어요. <가족>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는데, 한 장면이 잔상처럼 머릿속에 남아있었어요. ‘한 남자가 새벽에 울고 있다. 그리고 나간다.’ 이 장면으로 뭔가를 좀 만들어내고 싶었어요. 그 이미지가 <첫사랑>의 출발점이라고 봐도 되나요. 스스로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질문을 했어요. 첫사랑은 무엇인가. 무슨 색일까. 또 무슨 모양일까. 왜 사람들은 첫사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걸까. 왜 첫사랑은 항상 실패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 그렇게 질문을 던진 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나타난 칠판에 ‘시간의 비밀’이라고 적혀있더라고요. 남자든 여자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이 바로 첫사랑의 비밀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첫사랑>은 시간의 비밀을 그려내는 이야기인 셈이네요. 늙은 첫사랑은 없잖아요. 첫사랑을 언제 시작하는지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지만, 이르면 초등학생 때일 수 있고,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일 수도 있고, 하여튼 누구든 이건 첫사랑이야 하고 첫사랑을 시작하는 게 아니잖아요. 지나고 나니 그것은 나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거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젊은 날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겠다 싶었어요. 이 영화는 주인공 영신의 시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요, 각본 크레딧에 올라간 양선희 작가와는 어떤 방식으로 각본 작업을 하셨나요. 그때 작업 방식이, 이야기 전체적인 구성과 설계를 다 한 뒤 시나리오를 쓸 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나 대사를 말로 하면 양선희 작가가 활자로 옮겨주었어요. 구상은 1년 정도 했고, 쓰는 건 딱 한달만에 끝나야 제대로된 시나리오라고 생각해요. 시나리오 쓰기란,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는 작업인 셈이죠. 그렇게 하루에 한장씩 쓰는 거에요. 요즘 많은 시나리오 작가들은 두세달 만에 써서 열몇번씩 계속 고치는 방식으로 작업하잖아요. 당시 제게 시나리오 작업은 머릿속에서 다 준비된 것을 토해내는 작업이었어요. 하루에 한두장씩 진도가 나가지 않으면 억지로 만들어내는 작업이기도 했고. 김혜수씨가 연기한 영신은 어떤 이미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나요. 가수 이상은 같은 섬머슴 혹은 <빨간 머리 앤>의 앤 같은 평범한 소녀. 그렇다고 배우가 아니었던 이상은씨한테 출연 요청을 할 수는 없었고. 고 최진실씨가 전작인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노개런티라도 영신을 맡고 싶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최진실씨는 선머슴 같은 이미지는 또 아니어서 김혜수씨한테 제안을 넣은 거죠. 김혜수씨가 어딘가 인터뷰에서 <첫사랑>을 작업할 때 섭섭했었던 얘기를 한 적 있는데, 당시 내가 사진으로 이미지를 작업할 때 얼굴을 다 가린 채 눈만 찝어 ‘나는 네 눈만 보고 찍겠다’는 식으로 김혜수 배우한테 얘기한 적 있었어요. 김혜수씨를 영신 역할에 캐스팅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반대가 많았었거든요. (김)혜수씨가 태권도 유단자고, 체격이 좋은 데다가 고등학생 때 과부 역할도 한 적 있어 사람들이 생각하는 첫사랑 이미지가 좀 달랐으니까. 그럼에도 혜수씨가 영화 <깜보>(1986, 감독 이황림)로 데뷔했을 때 모습이 <첫사랑>의 영신과도 연결되는 것 같아 딱 좋았어요. ![]() * <첫사랑>(이명세, 1993) 리얼리즘 영화 시대에서 보기 드물었던 독특한 형식들 <첫사랑>은 당시 충무로에서 유행하던 사실주의 영화들과 스타일도 형식도 많이 다른 작품입니다. 챕터가 끝날 때마다 애니메이션이 삽입되고, 영신의 집과 동네가 세트로 지어진 공간임을 버젓이 드러내는데다가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 채 말을 건네는 등 형식적으로 과감한 시도를 합니다. 이것은 박광수, 배창호, 정지영 등 극 사실주의 스타일을 내세웠던 감독들과 다른 점이기도 한데. 말씀주신 형식적 특징을 두고 브레히트의 소격이론이라고 얘기했던 당시 분위기가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어요. 연극에서 배우가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당신은 지금 어떤 극을 보고 있다’고 알려준다고는 하지만, 그건 그때 당시 생각이고, 아니 아름답고 멋진 배우가 관객을 바라보는 건 황홀한 일이 아닌가요. 배우가 관객을 향해 말을 건다는 행위를 두고 소격이론이나 거리두기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틀에 박힌 논리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는다면 인물은 당연히 정면을 바라봐야 하지 않나요. 물론 촬영감독들은 배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게 부담스럽고, 180도 법칙에 따라 시선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배우에게 카메라의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바라보게 하는 거에요.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봤다는 이유만으로 소격 효과다? 과연 그럴까? 당시도, 지금까지도 이 질문조차 없었던 것 같아요. 많은 감독과 촬영감독들이 대화 장면을 찍을 때 ‘어깨 너머 숏’(OS숏)을 찍는데, 이 쇼트를 왜 찍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없다는 얘기에요. 나 또한 영화학교 출신이지만, 영신이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본 채 말을 거는 숏은 스스로 고민했을 때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찍은 거죠. ![]() * <첫사랑> 촬영 당시 고 유영길 촬영감독(좌)과 이명세 감독(우) (영화진흥위원회 기증자료) 고 유영길 촬영감독과는 데뷔작 <개그맨>,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 이어 세 번째 작업입니다. 얼마 전에도 박광수 감독님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었는데, 촬영감독들마다 특색이 있겠지만 촬영감독의 능력에 대해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감독의 의도를 얼마만큼 충실하게 시각적으로 구현해냈는가가인 것 같아요. 그점에서 유영길 촬영감독님은, 물론 까다로운 면모도 갖고 계셨지만, 당시 활동했던 감독들이 하나 같이 그를 최고로 꼽았다고 생각해요. <첫사랑> 촬영 전, 유영길 촬영감독과 함께 정한 촬영의 원칙 같은 게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데뷔작 <개그맨>을 찍을 때 유영길 촬영감독님께서 제게 ‘이 감독이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먼저 하신 적 있어요. 그래서 제가 ‘램프란트도 좋고, 다 빈치도 좋은 것 같고’ 하면서 꼽다보니 ‘안 좋아하는 화가가 없어요‘라고 대답했어요. 그 말을 들은 유 촬영감독님께서 ‘그러면 내가 어떻게 이 감독의 톤을 맞출 수 있나‘라고 화를 내셨어요. (웃음)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화가를 알면 내 작품을 촬영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아 물어본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 그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고 대답한 거죠.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때는 인터뷰를 할 때마다 늘 하는 얘기지만, 유영길 촬영감독님은 이 영화 속 샛방을 사실적인 공간을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 막상 샛방 세트를 보고선 카메라를 돌리지 않으시는 거에요. 그래서 ‘왜 카메라를 안 돌리시지’, ‘카메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물었더니 ‘자신이 없다’는 거에요. 노랗고 알록달록한 샛방 세트를 그대로 찍어도 되겠냐’고 하시기에 제가 ‘안 될 건 또 뭐가 있냐’고 대답했어요. (웃음) 나는 단 한번도 알록달록한 색감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었는데 유영길 촬영감독님께선 우려가 있으셨던 것 같아요. 어차피 사람 사는 이야기가 흘러가는 영화라 괜찮은 것 같다고 말씀드린 뒤로 서로 간에 믿음이 생겨서 그 다음 작품부터는 제 스타일에 대한 우려는 없으셨어요. 유영길 촬영감독님의 입장에선 사실주의 영화를 찍으시다가 감독님 같은 스타일을 작업하시는 재미가 있으셨을 것 같아요. 살아계셨다면 여쭙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아마도 재미있어 하셨을 것 같아요. 제가 알기로는 <첫사랑>은 촬영하기 전에 스토리보드를 다 준비하고 찍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제작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촬영 일정을 정확하게 운용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스토리보드를 갖춘 채 촬영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 것 같아요. 물론 지금처럼 완벽한 스토리보드는 아니었지만, <첫사랑>의 경우 촬영 전에 어떻게 찍을 건지 논의를 충분히 하면서 준비했었어요. ![]() * 이명세 감독이 보유하고 있던 <첫사랑> 세트스케치와 콘티뉴이티. 이명세 감독은 지난 5월 16일, <첫사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 < M > <형사> 등의 스토리보드와 콘티북을 영상자료원에 기증했다. 이 영화는 사계절을 화면에 꾹꾹 눌러담았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VFX 기술이 전무했던 당시, 그야말로 사계절 내내 찍었다는 얘긴데요, 제작자가 긴 시간 촬영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웃음) 사계절을 담으려는 의도도, 계획도 없었어요. 제작비와 촬영 스케줄 문제가 있어서 흘러가는대로 찍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시나리오에선 겨울방학이 배경인 이야기였는데 겨울에 다 찍으려고 하니 제작비가 안 됐어요. 어쩔 수 없이 봄으로 넘어가니 김혜수씨가 <첫사랑>을 찍고 넘어갈 방송 일정과 겹쳐졌어요. 송영창씨도 마찬가지였고. 스케줄이 꼬이면서 한달에 한번 촬영 일정이 나올 때도 있었고, 밤 12시 이후에 일정이 나올 때도 있었어요. 결국 그렇게 나오는 일정에 맞춰서 찍었어요. 결과적인 이야기지만, 사계절에 걸쳐 벌어지는 이야기가 됐고, 그로 인해 시간의 흐름이 이야기에 잘 반영할 수 있어서 영화의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봄에 찍은 분량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세트에서 찍었기 때문에 그나마 그렇게라도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영신의 집과 동네 집 모두 세트로 제작한 것도 제작비 문제 때문이었나요. 맞아요. 영신의 동네와 비슷한 거리를 가진 도시가 군산이었어요. 세트로 지었을 때와 군산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할 경우 견적을 각각 내서 비교해보니 100만원 가량 밖에 차이가 나지 않더라고요. 날씨, 숙박비, 교통비 등 여러 변수를 고려한다면 세트를 짓고 찍자. 원래 로케이션 촬영을 하려고 했던 장면 몇몇도 세트 촬영으로 바뀌면서 지금 영화처럼 표현이 된 거죠. 현실적인 상황이 이렇다면 세트를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해 찍어봐야겠다 싶었어요. 왜 이런 질문들을 드렸냐면, <첫사랑>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을 때 세트 촬영, 인공 조명, 콜라주, 애니메이션 등 <첫사랑>의 형식적인 요소들이 어떤 고민 끝에 나왔는지 매우 궁금했었는데요. 결국은 현실적인 제약과 그걸 돌파하기 위한 고민에서 내려진 결정이었고, 결국은 그게 <첫사랑>이 가진 매력이 된 거네요. 말씀주신 그러한 형식적인 스타일이 세트라서 일관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나마 세트라서 이런 작품을 찍을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거죠. 사계절 촬영도, 세트 촬영도 모두 제작비 때문에 내린 현실적인 대안 개인적으로 <첫사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김혜수씨가 밤에 자전거를 타고, 주제곡이 흘러나오는 장면입니다. 그 시퀀스 전체를 정말 좋아하는데, 혹시 그 장면 찍을 때 기억나시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첫사랑>이 개봉했을 때 영화를 좋아해준 기자도 있지만, 한 매체의 영화 기자는 그 장면이 너무 유치하다고 했어요. (웃음) 개봉한 뒤 몇년이 지난 뒤 그 기자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와서 하는 얘기가,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그 장면이 떠오르면서 눈물을 흘리며 술을 마신 적이 있다는 거예요. 바로 그거다, 우리가 유치한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게 바로 첫사랑이자 시간의 비밀이다. 개봉 당시 이런 키치한 영화를 막 사랑해준 분들도 있는 반면, 아주 유치하다는 혹평을 주신 기자들도 많았어요. 이런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내쫓아야 한다’고도 했고. (웃음) 그때는 리얼리즘의 시대였으니까. ![]() * <첫사랑>(이명세, 1993) 에피소드가 바뀔 때마다 애니메이션이 삽입돼 서사를 열고 닫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정서를 환기해줍니다. 이 영화에 애니메이션을 삽입해야겠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원래는 10분 단위로 호흡을 끊어서 서사를 전개해야겠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데뷔작 <개그맨>을 제작사인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님께 필름 1000자씩 끊어서 시사를 진행한 적 있어요. 천자씩 끊어서 트니까 이 사장님께서 너무 재미있게 보시는 거에요. 잠깐 화장실을 갔다왔다가 다시 보시기도 하고. 그런데 영화를 한 호흡으로 이어서 보니까 뭔가 지루해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뭘까. 이야기가 10분 단위로 새로 시작하면 사람들이 더 집중할 수 있겠구나. 마침 <첫사랑>은 청소년 영화로 생각하고 기획했으니 청소년 관객들에게 첫사랑의 과정을 시와 함께 야심차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시를 억지로 보여줄 수는 없으니 광고 업계에서 그림을 그렸던 친구 이경수에게 따로 애니메이션 제작을 맡겼고, 그렇게 만든 애니메이션을 시와 함께 삽입한 거죠. 암튼 <첫사랑>으로 해외 영화제에 가면 기립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상당수가 할아버지, 할머니 관객이에요. 이 영화를 청소년들을 주요 타깃으로 생각하고 만들었는데 어르신들이 더 공감을 하며 보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영화가 시간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요. 필름은 몇자를 사용하셨어요. 필름은 많이 안 썼어요. 촬영 전, 톤 앤 매너를 찾기 위한 테스트와 연습을 오래 하는 편이지 현장에서 카메라가 돌아갈 때는 오래 찍는 편이 아니에요. <개그맨>과 <나의 사랑 나의 신부>도 그렇지만, <첫사랑>은 역시 첫사랑을 주제로 다루었던 <형사 Duelist>(2005)와 < M >(2007)의 스타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합니다. 이 영화가 이후 필모그래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런 건 있는 것 같아요. <개그맨>과 <나의 사랑 나의 신부>도 영화라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열심히 찍었지만, 영화를 제대로 꼼꼼하게 찍으려고 했던 시작이 <첫사랑>인 것 같아요. 그것과 동시에 이야기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야기 너머의 어떤 고민들을 이성적으로 자각하고, 재대로 발견한 작품이 <첫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첫사랑>은 <나의 사랑 나의 신부>와 함께 올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매하는 블루레이 타이틀 박스세트를 통해 감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젊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봤으면 좋겠나요. 글쎄, 제가 젊은 관객들에게 어떤 가이드를 주기보다는 이제는 그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감상할지 궁금해요. 당시 청소년들, 젊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이 영화가 지금 젊은 관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가 가장 궁금해요. 지난해 옴니버스 영화 <더 킬러스>에서 감독님께서 맡으신 단편 <무성영화> 촬영현장을 찾은 적 있습니다. 모니터 앞이 아닌 카메라 옆에서 배우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연출하시는 모습을 보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랜만에 현장에 나가시니 어떠시던가요. 좋았어요. 진짜 한 팀으로 일을 하는 느낌을 오랜만에 받았어요. 요즘은 공격수는 공격만, 수비수는 수비만 하는데 이번 현장은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공격할 때는 모두 공격을, 수비할 때는 모두 수비를 했던 작품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