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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아키비스트의 상상은 현실이 될까? | 2024.07.25 | 1739 |
필름 아키비스트의 상상은 현실이 될까?
더 나은 필름 보존을 위한 이마지카EMS(일본)와의 기술 교류기 글: 성연태(한국영상자료원)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이제는 필름이 영화 그 자체이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보존성에 있어 필름은 현존하는 가장 안정적인 영상매체이다. 혹자는 고화질 디지털화가 진행된 뒤엔 필름 실물의 중요도가 떨어지지 않냐는 의문을 품기도 하지만, 특정 시대의 관점과 기술력은 보존의 긴 흐름 속에서 찰나일 뿐 그것에 빗대어 중요도의 경중을 논하기가 조심스럽다. 필름은 항온항습 공간에서 관리되면 저온일수록 반영구적인 상태가 유지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원본 콘텐츠를 보존하는 저장물로서의 가치에 여전히 영사 가능한 유물로서의 가치가 더해질 것이다. 이렇게 지켜낸 필름들을 500년 후 자료원 특별 프로그램으로 공개, 영사한다고 상상해 보자. 사람들은 동영상이라는 콘텐츠를 인류에게 최초로 전달한 필름 매체의 재현에 환호할 것이다. 필름 아카이브의 진정한 힘과 존재 가치가 그 순간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상상은 끝이 난다. 눈을 떴을 때 앞에 펼쳐진 현실엔 식초 냄새를 풍기며 초산화 증후군1)이 진행 중인 수많은 필름이 쌓여있다. ![]() * 입고 중인 대량 수집 필름들(좌), 보존처리 전 대기 중인 필름들(우) ![]() * 초산화 필름 예시
반영구적 필름 보존을 위한 노력과 고민 이처럼 필름 보존 담당자는 희망 고문의 상황에 종종 놓인다. 미래를 상상하면 설레지만, 현재를 마주하면 막연한 불안함이 몰려온다. 1974년 설립 이래 5℃ 이하의 저온 보존고 구축을 꿈꿔왔던 자료원은 2007년 상암 본원을, 2016년엔 파주보존센터를 개원하며 대대적인 저온 보존고 이원 운영을 시작했고 덕분에 필름들의 물리적, 환경적 안전은 확보가 된 상태다. 하지만 초산화 증후군1)은 저온 보존고에서도 (느려지긴 하지만) 계속되는 까다로운 현상이다. 이에 대응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초산화 방지 약품을 넣어주거나 새로운 필름으로 복사하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 개인적인 불안함이 해소되기 쉽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기사용 중이던 약품인 코닥 몰레큘러시브(Molecular Sieve)2)의 효과와 사용법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공인된 약품이었지만 관성적으로 사용되다 보니 구체적인 효용성 가늠이 어려웠다. 필름이 보존성에 있어 가장 안정적인 영상매체가 되려면 이 리스크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도 위안인 점은 파주보존센터에 국내 유일의 현상소가 구축돼 보존을 위한 필름 복사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인프라 여건상 연간 30편 정도의 작업만 가능했기 때문에 필름 보존 담당자로서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1) 아세테이트 재질 필름에서 나타나는 병리적 현상으로서 습기와 열이 필름의 아세테이트 성분과 화학적으로 반응해 열화현상을 일으키고, 이 과정 중 초산이 발생하면서 수축->바삭해짐->백화 순서로 점차 필름이 훼손됨. 한번 시작되면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며 환경 조절, 약품 투입 등으로 억제하는 것만 가능. ![]() * 상암 보존고(좌), 파주 보존고(우)
![]() * KODAK 몰레큘러시브(좌), 파주보존센터 현상소(우)
이마지카 마츠오 씨와의 첫 만남과 1차 합동 실험 일본 이마지카(IMAGICA) 그룹의 요시히로 마츠오 씨를 만난 건 이런 고민이 계속되던 2017년 가을쯤이었다. 다른 업무적인 교류로 자료원에 방문했던 그는 파주보존센터에도 견학을 왔고, 한창 초산화 등급 확인 작업이 진행되던 현장에도 방문했었다. 당시 AD스트립 (AD-Strips)3)을 활용하여 전체 아세테이트 필름에 대한 초산화 등급 전수 조사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필름마다 어느 정도의 초산화가 진행되고 있는지 메타데이터를 구축하고, 정도가 심한 필름부터 약품을 투입하려는 목적으로 2년간 진행된 사업이었다. 마츠오씨는 해당 조사 작업에 깊은 관심을 표했고, 필름 보존 담당자들의 고민에도 공감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 * AD스트립 사용 예시
마츠오 씨가 소속된 이마지카 그룹은 1935년 극동현상소로 출발하여 현재까지 필름 현상, 복원, 보존 기술이 축적된 일본의 민간 기업이다. 수익 사업에 중점을 두는 민간 기업이지만 일본국립영화아카이브(NFAJ) 등 자국 내 공공기관의 필름 보존 자문을 진행하기도 하고, 공공 영역에서 접근하기 힘든 훼손 심한 필름의 전문적인 보수를 대행하기도 한다. 필름 보존 복원 기술력에 있어 유럽에 이탈리아 볼로냐 리트로바타가 있다면 아시아에는 일본 이마지카가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파주보존센터 개원 이전 과거의 자료원에서도 이마지카에 여러 작업을 의뢰했었는데, 해외에서 극적으로 발굴됐으나 훼손이 심했던 <이국정원> 필름의 고난이도 복원, 현상 작업이 이마지카에 의뢰한 대표적 사례이다. 한편, 마츠오 씨는 당시 이마지카에서 개발 중이던 초산화 방지 약품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합동 실험을 제안했다. 실험의 주된 목표는 기성 제품인 코닥 몰레큘러시브와 이마지카가 개발 중인 씨네킵1(Cine Keep1)4)의 초산 억제 성능을 비교해 보는 것이었다. 제안된 실험 방법 중 눈길을 사로잡았던 점은 약품 투입 전후 비교를 위해 사용하는 기체 채취 장비가 농도(ppm) 단위의 측정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4가지 색상 차이로 대략적인 정도 구분만 가능했던 AD스트립에 비해 정밀도가 높은 방법이었다. 이 방법을 활용하면 약품 성능 비교뿐 아니라 필름 보관 온도별, 산화 정도별 약품 실효성 등 평소 고민하던 사항들의 검증도 겸할 수 있었다. 여러 협의 끝에 약품 투입 전후로 2차례의 실험이 파주보존센터에서 실시됐다. 그 결과 기성품인 코닥 몰레큘러시브가 이마지카 씨네킵1보다 필름캔 내부 초산 농도 감소에 효과적이었다. 또한, 저온 보존고에서도 초산화 약품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었고, 다양한 변수 적용을 통해 여러 가설이 검증됐다. 마츠오 씨는 성능 결과에 아쉬워했지만, 개선품 제작을 다짐하며 일본으로 돌아갔다. 필름 보존 담당자 입장에서 해당 경험은 막연했던 초산화 필름 보존관리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3) 미국 IPI(Image Permanence Institute)에서 개발한 용지로서 필름에 투입한 뒤 초산 PH 값에 따라 용지 색상이 변하는 원리를 이용했다. 색상별 총 4단계 등급으로 구분할 수 있음. ![]() * 이마지카 씨네킵1(단종)
![]() * 영상자료원 및 이마지카 1차 합동 실험 ![]() * 1차 실험 후 마츠오씨와 기념 사진(제일 좌측이 마츠오 씨)
다시 재회한 이마지카와의 2차 합동 실험 이후, 필름의 초산 농도 정밀 측정이 가능한 기체 채취 장비를 자료원 자체적으로 도입하고 방법 및 효과를 검증했다. 사용 절차가 간단하지 않아 일상적인 활용은 어려웠지만 필름 초산화가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얼마나 심해졌는지, 또는 완화됐는지 정밀하게 파악할 방법이 생긴 것만으로도 장기적인 필름 관리에 있어 리스크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2021년, 이마지카에서 개선된 약품인 씨네킵2(Cine Keep2)5)를 개발했고 국제표준화기구(ISO) 인증도 받아 정식 출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2023년 봄, 이마지카에서 해외 영업을 담당하던 후지와라 리코 씨로부터 신약품과 관련해 또다시 합동 실험을 진행해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고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전 실험을 토대로 여러 방법론들이 보완됐고, 샘플 수도 늘렸다. 마츠오 씨의 개인 사정으로 기술부 후배인 노하라 아카네 씨가 한국에 방문했으며 리코 씨도 함께했다. 실험 결과는 몰레큘러시브와 씨네킵2의 성능이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마지카 측 연구 자료에 따르면 씨네킵2의 효과 지속성이 몰레큘러시브보다 뛰어나다고 하여 해당 부분은 향후 추가적인 검증 실험을 지속하기로 했다. 특히, 2차 실험에서는 검지관의 측정 범위를 넘어서는 고농도 초산 측정을 위해 희석 장비를 활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실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마지카는 어떤 곳일까. 그곳의 작업자들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필름을 대하고 있을까. 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아카네 씨 일행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저희가 이마지카에 방문해도 될까요?” 5) 이마지카에서 두 번째로 개발하고 정식 출시한 초산화 방지 약품으로서 실리카 알루미나 (Silica-Alumina)의 화학적 흡착 원리를 이용했다. ISO 18916 기준 충족함. ![]() * 동일한 농도의 초산 샘플에 몰레큘러시브(좌)와 씨네킵2(우)를 넣어 놓은 사진 ![]() * 2차 합동 실험 모습(좌), 교육 받은 대로 희석 장비 사용하는 모습(우) ![]() * 2차 합동 실험 마친 뒤 기념 사진(좌측에서 3번째 노하라 아카네, 4번째 후지와라 리코) 이마지카 오사카 프로덕션 센터에 방문하다 ![]() * 이마지카 외관 2024년 5월, 오사카 텐마역에 마중 나온 아카네 씨, 리코 씨와 함께 십여 분 걸으며 이마지카 오사카 프로덕션 센터로 향했다. 현재 이마지카 그룹 내에서 필름 현상, 보수 등 아날로그 기술 인력 대부분은 오사카 프로덕션 센터에 근무 중이라고 한다. 과거 필름 산업의 황금기엔 도쿄, 오사카를 거점으로 수많은 인력이 필름 공정에 종사했지만, 디지털 기술로의 변환기인 15년 전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구조 조정 이후 30여 명 직원들이 아날로그 필름 파트에 남아 있다고 한다. 재회의 소회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덧 센터에 도착했다. 1층에는 자료를 들일 수 있는 하역장이 있었고 6층 정도 높이에 회색 줄무늬가 켜켜이 쌓인 듯한 외관이 독특했다. 시사실로 향하는 복도에는 이마지카에서 작업한 작품들의 포스터가 걸려있었는데 그 모습이 이국에서 온 손님들을 반기는 듯했다. 시사실에서는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됐다. ‘성연태 san! 신동민san!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시작 화면이 부끄럽지만 따뜻했다. 이후 이틀간 센터 내의 모든 시설들을 견학하고, 기술 및 관련 장비를 참관하거나 실습해 볼 수 있었다. 이마지카에서는 필름 인화/현상 시설을 필두로 보수, 스캔, 디지털 복원 등 다양한 작업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서로 연계되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국내외 개인 컬렉터, 필름 아카이브, 영화 제작사 등이 작업을 의뢰하는 주 고객층이라고 한다. 특히, 필름 토닝 기술6)과 렌티큘러 필름7) 복원 기술 등 과거 짧고 굵게 성행했던 옛 기술들을 복각한 점이 인상적이었고, 초산화 필름의 적극적 환기를 돕는 카라시(KARASY) 등 필름 보존에 도움이 되는 장비들을 계속 연구하고 생산해 내는 점에서 이마지카 특유의 장인정신이 느껴졌다. ![]() * 렌티큘러 필름 복원을 위해 직접 만든 필터 소개 ![]() * 필름 보수 작업 중인 이마지카 직원(좌), 현상 시설 견학(우) ![]() * 카라시 설명 중인 마츠오 씨(좌), 장비 실습 중인 자료원 필름 보존 담당자(우) 한국에서의 실험 이후 7년 만에 만난 마츠오 씨는 여전히 필름 보존을 위한 다양한 연구들과 장비 제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료원 유투브 채널을 구독하며 우리와 자료원의 사업들을 응원하고 있었다며 포옹해주는 그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졌다. 방문 일정의 마지막 시간에는 이마지카 담당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해당 자리를 통해 자료원과 이마지카의 장기적인 협력 방향을 논의하고 이마지카 측이 계획하고 있는 사업 구상을 들을 수 있었다. 이마지카가 기획하는 장기적인 사업 모델에는 전세계 다양한 아카이브를 대상으로 한 필름 보존법, 장비 구축 컨설팅이 포함돼 있었다. 마츠오 씨는 “단기적으로는 기술 오픈이 (이마지카에게) 불리할 수 있겠으나, 필름이 잘 보존되지 않으면 회사의 기술 토대가 활용될 기회조차 없고,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들도 점점 사라질 것”이라며 공공과 민간의 가치를 함께 추구하고 싶다고 전했다. 공식적인 업무 미팅 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우리들은 필름의 매력과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틀간의 꿈만 같던 일정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6) 1900년대 초 무성영화 시기에 성행했던 기법으로서 영화 장면의 분위기에 따라 필름 자체를 황색, 청색, 녹색 등으로 염색하는 기술. ![]() * 이마지카 직원들과 마지막 단체 기념 사진(상단 좌측 자료원 필름 보존 담당자 2인) 여전히 필름 보존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자문해 보면 자신감보단 불안한 마음이 크다. 하지만 지금까지 소개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서두의 상상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조금 높아졌으리라 믿는다. 타국의 필름 보존을 위해 많은 경험과 지식을 공유해주신 마츠오 씨, 아카네 씨, 리코 씨, 그리고 이마지카 측에게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