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모아 문화를 만드는 곳
제목 | 작성일 | 조회 |
---|---|---|
결혼, 사랑의 끝일까 시작일까? | 2024.11.26 | 1443 |
결혼, 사랑의 끝일까 시작일까?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박중훈 배우 인터뷰 글: 김성훈(씨네21) 사진: 최성열(씨네21) ![]()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이명세 감독의 초기작을 언급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영화다. <개그맨>(1988)으로 혜성처럼 등장했던 이명세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이자 처음으로 흥행감독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사실주의 스타일의 영화들이 등장했던 당시 충무로에서 이 영화는 스틸 이미지를 서사에 깊숙이 끌어들이고, 배우들에게 마임이나 연극 같은 연기를 주문했으며, 아기자기한 천연 색감을 적극 표현해 ‘비주얼리스트 이명세’의 스타일을 제대로 선보였다. 배우 박중훈의 필모그래피에도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특별한 작품이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1학년 때 영화 <깜보>(감독 이황림, 1986)로 데뷔해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감독 이규형, 1987),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감독 석래명, 1988), <바이오맨>(감독 조명화, 김청기, 1989) 등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청춘스타로 발돋움했다가 <칠수와 만수>(감독 박광수, 1988) <우묵배미의 사랑>(감독 장선우, 1990) <그들도 우리처럼>(감독 박광수, 1990) 등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열었던 작품들에 출연하면서 ‘민중배우’라는 타이틀도 달게 됐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박중훈이 배우로서 승승장구하는 상황에서 만나게 된 작품이자,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전 마지막 출연작이자, 이후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출연하며 이명세 감독의 첫 페르소나로 인정 받은 첫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박중훈이 연기한 영민은 미영 역할을 연기한 최진실과 함께 결혼, 신혼여행, 집들이, 부부싸움 등 신혼 부부가 겪는 사건들을 아기자기하게 보여준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디지털리마스터링해서 블루레이 타이틀로 출시한 다음날인 11월 20일, 배우 박중훈을 만나 간만에 옛 추억을 떠올렸다. ![]() 어젯밤(11월 19일)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개봉 25주년 기념 GV에 이명세 감독과 함께 참석하셨던데.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내 출연작 중에서도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다. 그동안 이 영화와 관련한 행사나 GV에 많이 참석했지만, 관객들과 함께 차분히 앉아서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젊은 관객 상당수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거라고 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지금 50대 후반인 내가 30대 초반인 나를 보니 여러 생각들이 교차했다. 무엇보다 저 시절 나는 에너지가 엄청나게 많았구나 싶었다. 이 영화 속 박중훈은 어마어마했다. (웃음) 당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두고 에너지가 많다고 얘기했을 때 그게 무슨 말인지 완전히 모르지는 않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실감이 덜 했던 것 같다. 영화를 다시 보니까 이야, 저렇게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지금은 안 되겠다 싶으면서도 이제는 에너지의 질량은 가지되 내면으로 들어오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 속 내가 주변 인물을 대했던 모습은 당시 실제 모습과도 겹치는데, 그런 태도를 가진 나를 상당히 불편했겠구나 반성도 했고, 그래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부심도 느꼈다.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의 배려로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블루레이 타이틀에 수록하는 코멘터리에 참여하면서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이십몇 년 만에 다시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영화를 보니까 어땠나. 거짓말처럼 영화 속 장면 대부분 시간이 얼마 안 지난 것 같았다. 무려 34년 전에 촬영했던 영화인데도 체감상 7, 8년밖에 안 지난 느낌이랄까. 이명세 감독님과도 당시 기억을 생생하게 주고받고. 영화 속 어떤 장면은 지금 제 모습 같지 않게 어리고 젊은 반면, 또 어떤 장면은 지금과 비슷한 모습도 있고. 그렇게 막 오래된 옛날 영화를 회고하는 느낌은 덜 든다. 제 의도와 무관하게 <나의 사랑, 나의 신부>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출연작 두 편을 연달아 보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옛날에 어른들이 ‘참 시간이 빨라’라고 말씀하시면 왜 저런 얘기를 하나 지겹게 들었었는데, 나이를 먹어보니 시간이 빠르다는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겠더라. ![]()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장면이 있나. 세 아이의 아빠다 보니 영화의 마지막에 자는 아이들에게 입맞춤하고 홀로 하늘을 보는 장면이 그렇게 따뜻하고 기억에 남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요즘은 남녀 평등 지수가 많이 올라가서 이런 얘기를 꺼내기가 쑥스러울 정도의 사회가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여성은 결혼하면 전업주부를 강요받고,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경력 단절이 되지 않았나. 영민이 신인 작가상을 받기 위해 집에서 나갈 준비하면서 수상 소감을 연습하는데, 아내 미영(최진실)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인 것처럼 소외감을 느끼는 걸 최진실이 잘 표현했다. 다시 보니까 당시 시대가 참 저랬구나, 여성의 마음은 참 저랬겠구나 싶어서 더 기억난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칠수와 만수>(감독 박광수, 1988) <우묵배미의 사랑>(감독 장선우, 1990) <그들도 우리처럼>(감독 박광수, 1990)을 연달아 찍은 뒤 이명세 감독으로부터 제안받으면서 시작한 영화다. 당시 이명세 감독은 <개그맨>(1988)으로 재기 넘치는 감각을 막 인정받은 신인감독이었는데. <인정사정 볼 것 없다>도 <나의 사랑, 나의 신부>도 그렇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두 편 모두 서사랄 게 없지 않나. 당시 내가 썼던 표현으로는 ‘뭐 이렇게 줄거리가 없지’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이명세 감독님께서 영화를 워낙 독특하게 연출하니까 줄거리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시나리오를 읽고 나니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또, 촬영 감독님이 되게 중요했는데…. ![]() 고 유영길 촬영감독님! 맞다. <칠수와 만수>, <우묵배미의 사랑>, <그들도 우리처럼> 등 전작을 연달아 함께 작업하면서 신뢰가 컸다. 그리고 영화를 제작한 삼호필름 박효성 사장이 배포가 커서 영화가 될 것 같아서 출연하기로 한 거다. 지금도 이명세 감독님을 만나면 재미 삼아, 농담 삼아 놀리는 게, 감독님의 유일한 흥행작이 <나의 사랑, 나의 신부>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밖에 없다고. (웃음) 나는 이 영화로 제36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당시 영화가 끝난 뒤 감독님과 형, 동생 사이가 됐고, ’형님 앞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밥과 고기를 사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 속 배우는 보통 스크린에서 요구하는 자연스러운 움직임보다는 연극 같은 다소 과장된 몸짓을 해야 하고, 대사보다는 행동 위주인데, 배우로서는 어떻게 받아들였나. 이명세 감독님은 무성 영화에 대한 애정이 깊은 연출자여서 마임에 대한 오마주가 작품마다 있다. 신작 <더 킬러스>도 무성 영화이듯이 어떤 장면에서는 무성 영화 시대의 연기를 주문하실 때도 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도 그랬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장선우, 박광수 같은 사실주의 스타일의 작품들에 출연하면서 당대의 청춘스타에서 영화배우로 자연스럽게 진화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감독 이규형, 1987)나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감독 석래명, 1988) 같은 청춘스타로도 여전히 건재한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나.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러한 이미지를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배우는 작품을 고르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작품이 나를 불러줄지 기다리는 직업이고, 내 상황에선 상대적으로 가장 좋은 작품을 선택하는 거니까. 당시만 해도 <그들도 우리처럼>이나 <우묵배미의 사랑>이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을지도 몰랐다. 그냥 출연했고, 하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민중 배우’라는 이미지도 붙었다. (웃음) 액션 영화도, 누아르 장르도 출연했었는데, 1990년대는 코미디가 관객에게 주효했던 시대였다. 시대 흐름으로는 자연스럽게 코미디 장르에 출연하게 됐고, 그러다가 좋은 것도 한두 번이었던 게 1997, 8년도쯤 되니 배우로서 지쳐갔다. 광고도 인기도 뚝뚝 떨어졌고, 사람들이 나를 지겨워하는 게 보여서 일을 잠깐 그만두고 가족 데리고 일본에 갔었다. 어쨌거나 배우로서 중요한 변곡점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 앞서 말씀대로 이 영화는 고 유영길 촬영감독과의 네 번째 작업인데, <칠수와 만수>, <우묵배미의 사랑>, <그들도 우리처럼>이 사실주의 스타일의 작품이라면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아기자기한 작품 아닌가. 이때 유영길 촬영 감독님와의 작업은 어떤 점에서 인상적이었나. 유영길 촬영 감독님과 함께 일한 영화가 한 편 더 있는데, 찍다가 중단된 <들소>(1992)라는 영화다. 이문열 작가의 <들소>를 원작으로 최사규 감독이 연출하고, 나와 변우민이 주연으로 캐스팅된 작품이다. 선사시대가 배경인데 고증이 이상해서 스틸 한두 장이 유출됐는데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돼 제작이 중단된 안타까운 작품이다. 어쨌거나 유영길 촬영 감독님과 그렇게 다섯 편을 작업했는데 유 촬영 감독님은 따뜻하면서도 엄격하신 분이었다. 저희 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해 현장에서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감독님 어깨도 주물러 드리면 허허 웃으시다가도 슛 들어가면 매우 엄격하셨다. 상대역인 고 최진실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제작사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감독 강우석, 1989)와 각종 CF로 인기를 구가하던 이미연을 먼저 캐스팅하려고 했다고.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기훈 역할이 이정재 배우에게 가기 전에 많은 배우들을 거쳤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나. 배우마다 자기 작품에 대한 운이 정해져 있고, 작품마다 임자가 있다고들 하는데, 최진실 배우가 결정되기 직전까지 이미연 배우를 미영 역할로 캐스팅하라고 제작사에 어필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배역이 결정돼 바꿀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최진실 배우가 관객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사회적으로 신드롬을 일으키는 비결로 귀엽고, 당당하다 같은 매력들을 들곤 하는데, 배우로서 봤을 때 최진실 배우의 장점은 연기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건 타고난 것이다. 반대로 연기가 자연스럽지 않은 배우는 영원히 좋은 배우가 못 되더라. 최진실은 사람 자체가 자연스럽고, 카메라 앞에서도 그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아는 배우다. 그러니 최고가 될 수밖에 없었다. ![]()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는 박중훈이 더 인기가 많았는데, 개봉할 때쯤 최진실씨가 인기가 많아지면서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어떤 포스터에선 최진실 얼굴만 큼직하게 박힌 버전도 있었다고. (웃음) 맞다. 처음에는 최진실이 대체 누구야 궁금해하는 정도였다가 촬영하는 몇 달 사이에 최진실이 유명해지면서 최진실이 장미꽃을 입에 무는 사진을 크게 배치하고, 그 옆에 내가 작대기로 서 있는 버전의 포스터를 만들었더라고. 이 영화를 기획했던 채윤희 대표님한테 ‘나 곧 유학 가는데 이게 뭐냐’고 따졌다. (웃음) 최진실 배우가 가진 귀여움과 사랑스러움과 그리고 그가 출연한 광고가 장작처럼 활활 타고 있는 상황에서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그 열풍에 기름을 확 부은 셈이다. 최진실 배우는 이 영화를 시작으로 대중 스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건 이 영화 이후 4년 뒤 강우석 감독의 영화 <마누라 죽이기>(1994)에서 나와 최진실이 다시 만나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싫어하는 부부가 되었다. (웃음) 이 영화는 1990년 12월 29일 피카디리에서 개봉해 크게 흥행했다. 당시 극장 앞에 선 긴 줄을 보신 적 있나. 당시 피카디리 극장의 좌석 수가 천 석이었는데 하루에 5회 상영했었다. 하루에 전속 매진이 되면 5천 명이고, 한 달 전속 매진이면 15만 명이 온 거잖아. 피카디리 극장에서만 이 영화가 20만 명을 동원했는데, 당시 어떤 뒷얘기가 있었냐면 당시 극장에 영화를 걸려면 몇천만 원의 뒷돈을 줘야 했다. 극장의 횡포였지. 당시 한 외화 수입업자가 유덕화가 주인공인 홍콩영화를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뒤에 배급 날짜를 박는 바람에 더 길게 상영할 수 없었다. 피카디리 극장에선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이렇게 많은 관객이 들어올 줄 몰랐다가 관객이 몰려드니까 당황한 거다. 어쩔 수 없이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피카디리 옆 피카소 극장을 옮겨 상영을 이어갔고, 이명세 감독님은 술자리에서 술을 취해서 피카디리 극장 사장에게 박치기를 했었다. (웃음) 저는 1990년 12월 29일에 개봉해 한 달 뒤인 1991년 1월 27일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었다. 말씀대로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끝나자마자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 NYU로 떠나셨는데. 당시 진행하던 KBS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박중훈의 인기가요>(1990)도 중단하셨고. 영화배우로 데뷔한 지 2, 3년이 지난 뒤에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제 안이 텅 빈 것 같아서 영어도 배울 겸, 미국에 유학 하러 가서 석사도 딸 겸. 그렇게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출연했던 영화들이 흥행이 안 됐는데, 성적이 안 좋을 때 유학을 가면 모양새도 좀 안 좋을 것 같아서 토플 학원에 다니면서 흥행할 때 가자 싶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크게 흥행하면서 곧바로 유학을 떠났다. 학생 비자를 받는 데만 4, 5개월이 걸린다고 해서 그냥 관광 비자로 갔다. 당시 광고 모델만 11개 했는데 물어줄 거 다 물어줄 만큼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심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나를 유학 보내준 작품이다. 어제 GV에서도 같은 얘기를 했지만, 이명세 감독님 덕분에 배우로서 많은 혜택을 받았고, 20대 중반을 이명세 감독의 페르소나가 됐던 것도 큰 행운인 것 같다. ![]() 첫 연출작 <톱스타>(2013) 이후 배우보다는 감독, 시나리오 작가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관객 입장에선 배우 박중훈을 다시 스크린이나 TV로 보고 싶다. 감독으로 사는 중간에 OCN 드라마 <나쁜 녀석들 : 악의 도시>도 찍었지만 그건 드라마였으니까….말씀대로 감독으로 산 시간이 10년이 넘었다. 지금은 배우를 다시 하고 싶다. 감독을 처음 시작할 때는 시대를 읽어내는 데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드라마도 트렌드도 따라가기에 바쁘다. 자의 반, 타의 반 긴 시간 배우로 활동하지 못해서 배우인 줄 모르는 젊은 사람들도 많지만, 배우로서 그간의 공백이 또 다른 자양분이 되겠구나 생각하고 있다. 큰 역, 작은 역 마다하지 않지만 매력적인 역할을 맡고 싶다. 보통 이유가 있는 역할은 주연급 조연이라고 해서 주역이라고들 하는데 그 주역을 하고 싶다. 요즘 운동도 관리도 열심히 하고 있다. 오랜만에 배우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건 좋지만, 에너지가 빠지면 여태껏 나를 마음에 뒀던 관객들이 속상해할 것 같아서다. 앞으로 30년 더 연기하셨으면 좋겠다. (웃음) 입방정 같아서 아직은 말을 아낄 수밖에 없지만 내년쯤 아주 큰 작품이 하나 있다. 1년 전부터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이게 공개도면 왜 제가 그런 얘기를 했는지 이해가 될 거다. 앞으로 인생을 더 적극적으로 살고, 최선을 다 하되, 앞으로 벌어지지 않은 일까지 큰 욕심을 부리진 않으려고 노력하겠다. 이벤트 참여하기[이명세 컬렉션 블루레이 증정 이벤트 참여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