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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으로 말하다, 비스타비전(VistaVision) | 2025.04.30 | 690 |
수직으로 말하다, 비스타비전(VistaVision)
<현기증>과 <브루탈리스트>가 비스타비전을 선택한 이유는 글: 박홍열 촬영감독(<원더랜드>, <이상한나라의 수학자>, 넷플릭스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 이창동 감독의 단편 <심장소리>) ![]() 텔레비전의 확산으로 위기를 맞은 영화산업은 관객을 극장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대안을 모색했다. 1953년 폭스사가 내놓은 시네마스코프는 그 첫 응답이었다. 2.35:1 혹은 2.39:1 비율의 이 와이드스크린 포맷은 수평적 공간감으로 임장감과 몰입형 체험을 강조했다. 시네마스코프에 맞서기 위해 파라마운트가 선보인 것이 바로 비스타비전이다. 세로로 촬영되는 일반 35mm 필름을 가로로 주행시켜 촬영함으로써 약 2.7배 넓은 이미지를 기록하고, 이를 통해 고해상도의 선명한 화질과 풍부한 색을 제공했다. 주로 1.85:1이나 1.66:1의 화면비를 채택한 비스타비전은 시네마스코프보다 수직적 공간을 더 강조한 포맷이었고, 이 가로 촬영 방식은 훗날 아이맥스 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현기증>
<현기증>(1958)은 비스타비전 포맷이 지닌 수직적 미학의 장점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1.85:1 화면비를 통해 주인공 스카티의 고소공포증과 심리적 불안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이 영화는 비스타비전의 선명한 화질과 깊은 심도를 활용하여 영화적 체험을 한층 강화했다. 특히 비스타비전의 고해상도와 선명한 화질은 스카티가 메들린을 미행하면서 경험하는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 공간을 심리적으로 깊이 있게 담아냈다. 관객들은 스카티의 시선을 따라 도시의 수직적 건축물과 지형을 경험하며 주인공의 불안과 현기증을 함께 느끼게 된다. 타이틀 시퀀스부터 강조되는 나선형 회오리 문양과 메들린(킴 노박)의 머리 회오리 모양까지, 히치콕은 비스타비전의 화면비를 통해 현기증의 시각적 모티프를 날카롭게 그려낸다.수직의 비스타비전* 오리지널 극장용 예고편 카메라 움직임 역시 화면비에 맞춘 수직적 움직임을 강조한다. 특히 유명한 '줌인-트랙아웃'기법으로 구현된 현기증 효과는 관객을 화면 안으로 빨아들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데, 이는 비스타비전의 선명한 화질과 깊은 심도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효과다. 인물들의 움직임 또한 공간의 수직적 구성과 함께 비스타비전의 화면비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극적 서사를 강화한다. 히치콕은 프레임 안에 수직적 구조를 의도적으로 담아내며 비스타비전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다. 인물들이 서 있는 공간이나 배경을 의도적으로 수직적으로 배치한다. 메들린이 리전 궁 미술관에서 칼로타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장면, 금문교 앞에 서 있는 장면, 스코티와 메들린이 함께 거대한 삼나무 숲을 배경으로 거니는 장면 모두 비스타비전의 수직성을 극대화한다. 특히 스페인 마을 교회의 종탑 내부 계단이나 메들린이 떨어지기 전 교회 외관, 그리고 메들린이 추락한 후 스코티가 교회를 나오는 부감 롱샷은 비스타비전의 수직적 화면비와 화면 안의 수직적 깊이감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명장면들이다. 인물의 단독 쇼트에서도 히치콕은 바스트 컷보다 미디엄 컷을 주로 활용하며 비스타비전의 선명한 화질과 화면비로 인물을 효과적으로 강조한다. <브루탈리스트>
<브루탈리스트>도 1.66:1 비스타비전 필름으로 촬영되었다. 디지털로 손쉽게 고해상도 비스타비전을 구현할 수 있는 시대에 필름으로 이 포맷을 고수한 것은 주목할 만한 시도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일반적인 비스타비전 영화들과 달리 이 포맷의 특징을 '내적으로' 전복하는 방식을 택한다. <브루탈리스트>는 하나의 중심으로 시작해 중심으로 끝난다. 비스타비전의 1.66:1 화면비를 사용하면서도 수직적 화면구성과 카메라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인물과 공간을 좁게 고정시켜 놓고 그들만을 바라보게 화면비를 구성한다. 이 영화에서는 공간의 수직적 구조를 드러내는 프레임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샷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인물 중심 샷들로 구성된다.내적 비스타비전![]() * <브루탈리스트> 스틸이미지 <브루탈리스트>는 얕은 심도로 배경의 공간들을 지우고 인물들만을 부각시킨다. <현기증>에서는 단독 쇼트마저도 비스타비전 화면비에 맞게 활용해 인물들의 관계성을 의식하게 프레이밍 하지만, <브루탈리스트>의 인물 샷들은 화면비와 무관한 바스트 컷과 클로즈업을 강조하며 관계성보다 한 명의 인물에 집중하게 만든다.이 영화는 비스타비젼의 대형 스크린의 시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깊은 심도의 샷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필름의 질감과 브루탈리즘 건축물의 질감이 만나는 순간도 드물다. <현기증>이 이미지 안에 수직적 배경과 인물,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비스타비전의 화면비를 적극 활용한다면, <브루탈리스트>는 수직적 구조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마저 수평적 이미지로 구성한다. 브루탈리즘 건축의 웅장하고 거친 미감도, 인물들이 등장할 때는 얕은 심도로 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해버린다. 카메라의 무빙도 수평적 움직임이 주를 이루며, 인물들의 수평적 움직임과 함께 수평적 화면 구성을 만든다. 영화 속 공간들은 대부분 수직이 아닌 수평적으로 구성된다. 흥미롭게도 수직과 수평을 함께 담아내는 몇 안 되는 장면들은 4:3 화면비로 전환되어 보인다. ![]()
* <브루탈리스트> 타임랩스 화면(2:19) 폴란드 홀로코스트의 이야기를 담은 파벨 파블리코프스키의 <이다>(2013)는 4:3 화면비로 인물들을 프레임 중심에서 벗어나게 배치하며, 불편한 앵글과 좁은 세로 화면비로 중심에서 배제되고 잊힌 폴란드 유대인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반면 <브루탈리스트>는 비스타비전 1.66:1 화면비로 프레임 한가운데 인물들을 배치하며 시오니즘 유대인의 역사를 강조하고 그 외 다름을 배제한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브루탈리즘 건축물을 비스타비전의 화면 안에서 거의 볼 수 없다.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가 폴란드에서 지었던 건물들은 사진으로만 확인 가능하며, 해리슨의 땅 위에 지어지는 라즐로의 혁신적 건물 건축 과정은 4:3 비율의 타임랩스 화면으로만 보여진다. 비스타비전의 선명한 화질과 필름 질감의 미학은 라즐로가 제작한 기념비적 건축물 모형에서만 수직적 구조와 만날 뿐이다. 시오니즘과 유대인 중심성을 강조하기 위해 비스타비전의 유령을 화면비 위에 세워둔 <브루탈리스트>. 비스타비전의 무게감으로 비스타비전의 진정한 미학을 거부하는 역설적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비스타비전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1.66:1 화면비가 아닌 4:3 화면비 장면들이다. 영화 초반 유엔의 이스라엘 국가 선언 장면과, 라즐로가 미국에 도착해 목격하는 급식 배급소의 선명한 수직 'Jesus' 간판을 카메라의 수직적 움직임으로 포착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현기증>이 비스타비전이라는 포맷으로 극적 서사를 관객들이 체험하게 하는 '외적 표현'에 집중했다면, <브루탈리스트>는 잊힌 비스타비전 필름 촬영을 통해 외적 표현의 구현이 아닌 '새로운 내적 비스타비전'을 구현한다. 두 작품은 같은 포맷을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시각적 경험과 정치적 함의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영화 매체의 특성은 단순한 기술적 도구가 아닌, 비스타비전이라는 공통된 형식 안에서도 상반된 미학적 선택을 통해 영화의 본질이 만든이의 시선에 있음을 다시금 확인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