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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목을 처음 듣는 당신에게 2025.06.30 136
유현목을 처음 듣는 당신에게
유현목 감독 탄생 100주년, 그를 다시 읽는 세 가지 시선
 
유현목 탄생 100주년전 포스터
 

Chapter 01. 감독론
유현목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충무로에서 예술영화 감독으로 살아남는다는 것


글: 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1925년 7월 2일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난 유현목은 북한 땅과 가까운 경기도 파주에서 말년을 보내다 2009년 6월 28일 별세했다. 1948년 처음 영화 현장에 발을 들였고, 1956년 <교차로>로 감독 데뷔한 이후 1995년 <말미잘>까지, 정확히 40년간 42편의 극영화를 남겼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1960년대 중흥기의 다작 감독들에 비하면, 분명 그의 필모그래피는 과작이다. 물론 그의 작품 역시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성장하고 번성했던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에 집중되어 있고, 1968년 한 해만 그의 영화 6편이 개봉되기도 했다. 또한 그 역시 197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쇠퇴 일로를 몸소 겪었다.
 
우리는 유현목을 <오발탄>으로 대표되는 예술영화 감독으로 기억하지만, 혹은 흥행과는 거리가 먼 감독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는 장르영화와 예술영화가 복잡한 층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라고 해서 대중 관객들의 사랑을 받길 원하지 않았을까. 그는 한국형 작가주의 영화에 다름아닌 문예영화에 열중했지만 결코 남발하지 않았고, 멜로드라마가 싫었지만 그 누구보다 근사한 멜로를 뽑아냈으며, 코미디와 공포영화 같은 새로운 장르에 도전할 때마다 평단과 관객의 마음을 훔쳤다. 국가와 영화 자본의 노골적인 이해가 만난 반공영화 역시 그의 연출 세계에서는 끝모를 심연이 더해졌다. “유현목은 영화다”라는 변인식의 선언을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을까.

‘유현목은 한국영화다’.

그동안 유현목의 작품 편수가 45편 전후에서 혼란스럽게 정리됐지만, 극영화만 보면 42편이 맞다. <회전목마>(1969)는 완성되지 못했으므로 극영화 목록에서 제외해야 하고, 정진우·김기영 감독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로 연출한 <여>는 한 편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극영화 외에도 문화영화 <산업시찰>(서울편, 1969), 기록영화 <조국의 등불>(2부작, 1990)이 그간의 작품 목록에 포함됐고, 실험영화 <선>(13분, 1964)과 <손>(50초, 1967)은 포함되지 않았다. 유현목 감독은 후배 영화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1972년 유프로덕션을 설립하고 다수의 문화영화를 연출하고 제작했다. 이는 그가 극영화 필모그래피를 넘어서는 영화 작업에 관여했고, 우리가 디지털화되지 않은 비극영화 필름을 일일이 검색하지 않으면 그 전체상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거론한 광의의 비극영화 전체를 포함해, 그가 감독으로 크레딧을 올린 비극영화는 현재의 KMDb 기준으로 22편에 달한다. 이제는 유현목의 비(非)극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목록을 정비해야 할 것이다.
 
다시 그의 극영화 필모그래피로 돌아가자. 그는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조감독이었던 그 역시 몸값이 올라가 감독 데뷔 기회를 얻는다. 첫 연출작은 이청기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교차로>(1956)이다. 전후 사회를 배경으로 쌍둥이 자매의 운명을 그린 멜로드라마였는데, 평론가들로부터 새로운 감각을 인정받으며 신인감독으로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두 번째 작품 <유전의 애수>(1956) 역시 세련된 화법의 멜로드라마로 흥행에 성공했고, 세 번째 작품 <잃어버린 청춘>(1957)은 범죄영화 톤의 멜로드라마였는데, 흥행보다는 평단의 찬사를 받고 그해 감독상을 휩쓸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영화 테크닉의 과시에서 벗어나 영상으로 주제 의식을 표현하려고 고심한 첫 작품이다. 이처럼 유현목은 당시 한국 관객에게 가장 친숙한 장르인 멜로드라마를 빌어 영화언어를 체화하고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갔다.

그의 초기 필모에서 이 대목을 얘기하고 싶다. <유전의 애수>와 <잃어버린 청춘> 두 작품 모두 유두연의 각본이었는데, <유전의 애수>는 “프랑스영화 <인생유전>과 미국영화 <애수>를 연상시키는 작품”(『한국일보』, 1956.9.9.)으로 평가받았고, <잃어버린 청춘>의 각본은 일본영화 <요루노오와리(夜の終り)>(1953) 시나리오를 표절한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 번안된 문자를 넘어서는 유현목의 미학적 연출이 펼쳐졌음은 물론이다. ‘한국’영화의 개척기, 영화감독이 서구영화와 일본영화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자신의 작품으로 표출한 것은 흠이라기 보다 당연한 과정이다. 특히 유현목에게는 연출력을 가다듬으며 여덟 번째 작품 <오발탄>으로 모든 역량을 응축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형 철호와 동생 영호의 시간이 각각 예술영화의 화법과 범죄 멜로드라마 장르로 교직된 <오발탄>은 한국 모던시네마의 가장 앞 자리에 위치시켜야 할 것이다.
 
4.19와 5.16을 거치며 <오발탄>의 작품적 운명이 희비의 극단을 오간 다음, 그는 사극 프로젝트에 참가했는데 바로 <성웅 이순신>(1962)과 <임꺽정>(1961)이다. 후자는 5.16 쿠테타 군사정부가 들어선 후 만들어져, 민중의 히어로 임꺽정을 내세우면서도 그 저류에 부패한 권력의 몰락과 새로운 권력의 등장을 표시했다. 사실 전자는 1959년 여름에 착수됐다가 중단된 후, 박정희의 성웅 사업과 맞물려 공보부 영화금고의 첫 케이스로 지원받고 1962년 4월 개봉했다. 두 작품 다 유현목에게는 도전적 프로젝트였고, 1960년대 초반 극장가의 대형 사극 붐과 연동된 것이다. 이후 그는 ‘멜로 리얼리즘’을 표방한 <아낌없이 주련다>(1962)로 흥행은 물론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쓰며 평단의 지지를 확고히 했고, 1966년 문예영화의 제도적 유행 이전부터 <김약국의 딸들>(1963), <잉여인간>(1964), <순교자>(1965)를 작업하며 예술영화 화법을 세련했다.
 
충무로의 전례없는 실험, 영화 <춘몽> 촬영 현장에서

* 충무로의 전례없는 실험, 영화 <춘몽> 촬영 현장에서
 
그 역시 1960년대 한국영화계의 심각한 문제였던 일본영화 ‘시나리오’의 표절과 번안 기조에 기대기도 했다. 대중작가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을 영화화한 <푸른 산맥>(1963)이 원작인 <푸른 꿈은 빛나리>(1963), 마스무라 야스조의 1961년작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아내는 고백한다>(1964), 일본에서도 성적 검열의 대표작으로 기록되는 <백일몽>(1964)을 저본으로 삼은 <춘몽>(1965)이 그것이다. 그가 표절 감독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앞의 두 작품인 청춘영화와 멜로드라마를 통해 그의 대중영화 필모가 확장되었고, <춘몽>에서는 그가 꿈꿔오던 실험영화 언어를 충무로 상업영화에 적용해보는 흔치않는 기회를 잡았다.
 
그가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반공법 위반과 <춘몽>의 음화제조죄 기소로 곤욕을 치른 후, 1960년대 후반기 필모그래피부터는 새로운 경향이 추가됐다. 코미디와 공포영화라는 무엇보다 흥행을 감안한 장르를 시도하는 한편, 영화사가 수익과 직결되는 외화수입쿼터를 받을 수 있는 반공-문예영화 연출에 착수했다. 1966년 전후 시점부터 그는 직업감독으로서 계속 생존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라디오 연속극을 영화화한 <특급 결혼작전>(1966)과 <공처가 삼대>(1967), 두 편의 코미디가 성공하며 연출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희곡 『토끼와 포수』를 영화화한 <몽땅 드릴까요>(1968)를 추가했다. 한국 전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한 공포영화 <한>(1967)과 <속 한>(1968)은 마치 동양화가 펼쳐지는 듯한 정제된 이미지에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를 결합한 연출로 걸작이라는 찬사까지 들었다.

그의 반공영화 작업은 <카인의 후예>(1968), <악몽>(1968), <나도 인간이 되련다>(1969)을 거쳐 <불꽃>(1975), <장마>(1979)로 이어졌다. 유현목은 반공주의자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는 반공이 국시일 수는 없다고 주장해 국가적 폭력에 노출됐지만, 인민재판의 잔혹함을 생생히 목격하고 월남한 그에게 반공주의는 국가 이념이기 이전에, 체험에서 비롯된 정서적 반응이었을 수 있다. 질문을 바꿔보자. 그는 반공영화를 만들고 싶었을까. 그는 반공영화를 연출해야 한다면, 기존 반공영화에서처럼 국군의 총에 북한군이 일제히 쓰러지는 도식적 재현을 거부하고, 사람이 아닌 시스템의 차원에서 반공을 사유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예술영화 감독으로서의 지위도 꿋꿋하게 유지했다. 이만희, 김수용, 이성구가 모더니즘 영화에 골몰한 시기 유현목은 <막차로 온 손님들>(1967)로 대답했고, 방영웅 원작의 <분례기>(1971)를 연출해 문예영화에서의 작가적 인장을 확인시켰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영상 미학을 일치시킨 <사람의 아들>(1980)은 사실상 그의 필모그래피를 마감한 작품이다. 1976년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취임한 그는 저서와 번역서를 내놓으며 후학을 양성했다. 그의 마지막 극영화는 1995년에 개봉한 <말미잘>이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은 한국 근현대사의 전환점이자, 깊은 상처를 남긴 비극의 역사였다. 유현목은 이 격변의 시기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삶 그 자체를 영화에 밀착시켰고, 수많은 생사의 갈림길을 견뎌낸 끝에 마치 운명처럼 영화감독이 되었다. 그는 <오발탄>에 이르기까지 서구 영화문법을 체화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모색했으며, <춘몽> 이후에는 예술영화 감독으로 살아남기 위해 역설적으로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동시에 반공영화 역시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고심했고, 정권의 통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문화영화 제작도 이 시기에 본격화되었다. 그의 삶은 물론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한 ‘절망과 구원’이라는 문제의식은, 20세기 ‘한국’영화가 직면했던 운명이기도 했다.


 
 

                                              




 

Chapter 02. 기억
아름다운 사람, 천생 영화감독


글| 이우빈(씨네21) · 사진| 백종헌(씨네21)


굴지의 시네아스트 유현목에 앞서, 사람 유현목은 어떤 이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흔적을 찾기 위해 유현목 감독의 평생 반려자였던 박근자 여사를 찾았다. 두 사람은 1958년 결혼했다. 유현목 감독이 2009년 작고하기까지의 긴 세월을 함께 보냈다. 박근자 여사는 서울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며 일찍이 예술적 감각을 뽐냈던 화가다. 유현목 감독과 한 쌍의 미적 궤도를 만든 동반자였던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근자 여사의 자택엔 촬영 현장에서 일하던 유현목 감독의 생전 사진들과 박근자 여사의 그림이 나란히 수놓아져 있었다. 영화감독 유현목, 그리고 사람 유현목에 대한 박근자 여사의 회고를 조심스레 청해 들었다. 박근자 여사가 터놓아준 말들을 일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해 전한다.
 
박근자 여사

* 박근자 여사
 

“장난꾸러기 로맨티시스트”


유현목 씨는요.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어요. 처음 만났던 때가 아직도 생생하네요. 대학생 시절 미국 유학길이 엎어지면서 한창 방황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무학고녀(현 무학여고) 때 친구였던 이경자 씨를 명동의 청동 다방 밑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한 번 영화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묻더라고요. 자기가 어떤 감독님 영화의 스크립터(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 -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데, 네 솜씨면 세트 디자이너로 참여해 봐도 괜찮겠단 얘기였어요. 한 번 들여다보기나 할까 싶어서 영화 제작진들이 모여 있다는 다방으로 올라갔죠. 그곳에 유현목 감독님이 계셨어요. 제대로 된 첫 만남이었죠.
아마 그이는 저에게 첫눈에 반했나 봐요. (웃음) 그때 저는 분홍색 원피스를 차려입고, 공예가셨던 아버지가 손수 조각하셨던 수제 양산을 들고 있었죠. 가방엔 커다란 캔버스를 넣어 뒀었고요. 자연스럽게 감독님의 눈에 띄었던 것 같아요. 반면에 감독님은 아주 소탈하신 분이셨어요. 화려하게 꾸미시는 편도 아니셨고, 담배를 워낙 많이 태우시니까 손가락이 누렇게 변할 정도였죠. 다방에서 만난 뒤 몇 번씩 시간을 보냈고 1년쯤 교제한 뒤에 결혼까지 하게 됐네요.
감독님은 은근한 로맨티시스트이기도 하셨어요. 언제였더라. 결혼하고 같이 살 때였는데 비가 막 오는 날이었어요. 감독님께서 마당에 있는 아주까리 이파리를 우산처럼 쓰고 벌쭉벌쭉 웃으며 들어오시더라고요. (웃음) 뜬금없이 그런 장난기를 보여주실 때가 종종 있었어요. 돌아보면 재미있는 구석이 많은 삶이었죠. 언제는 외국에 나가서 멋있는 옷 몇 벌을 사 오셨어요. 감독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에도 옷 보는 눈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진열장에 걸려 있는 옷들을 그냥 통째로 사셨더라고요. (웃음) 여하간 그 옷들 덕에 제가 신문사의 베스트 드레서로 뽑혀서 기사에 난 적도 있어요. 그때만 해도 한국엔 기성복이라는 게 없었거든요. 구호 물품으로 얻는 옷이나 직접 맞춰 입는 옷밖에 없었어요. 또 감독님은 후배 감독들, 제자들을 유난히 아끼시며 잘 모르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셨죠. 그렇게 감독님은 저뿐만 아니라 언제나 다른 사람을 살펴보고 돕는, 그런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셨어요.

(좌측부터) 박근자 여사, 유현목 감독

* (좌측부터) 박근자 여사, 유현목 감독
 

“다시 태어나도 영화감독으로”


청동 다방에서 저희가 만났을 때는 감독님이 <잃어버린 청춘>을 준비하고 계시던 때였어요. 주연 배우이자 제작자인 최무룡 씨가 제작비를 구하겠다고 홍콩에 가셨는데 영 돌아오질 못하셨죠. 그래서 제작진들이 하릴없이 다방에 죽을 치고 모여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감독님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곤 하셨죠. 제작비 문제는 계속됐어요. 감독님은 그쯤 어느 초가집의 사랑방에 얹혀살던 중이셨죠. 감독님과 만나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그 좁은 방은 전부 <오발탄>의 콘티와 관련 자료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어요. 건축가들이 쓰는 설계 도면을 벽에 잔뜩 걸어서 촬영 계획을 세워 두셨죠. 모든 신(scene)의 대사를 맨 아래에 적고, 위엔 그 장면들에 맞는 리듬을 하나하나 다 그리셨던 게 기억에 남네요. 그렇게까지 준비했는데 제작비 조달이 한동안 막혀버렸어요. 영화의 내용이 어둡다 보니 돈을 얻어오기 쉽지 않았고, 결국 당시 김성춘 조명감독 등의 제작진이 알음알음 제작비를 모아야 했죠. 열심히 준비하신 작품의 제작이 하염없이 지연되니 무척 억울하셨던지 벽의 도면을 확 뜯어버린 적도 있으셨어요. 그런 고난이 있었으니 <오발탄>이라는 걸작이 나오지 않았던 걸까 싶어요.
그 이후 영화들은 <오발탄>만큼 구체적이고 대대적으로 사전 작업을 하신 것 같진 않아요. 아마 나름의 요령이 점점 생기셨던 거겠죠. 물론 영화에 대한 열정은 한결같으셨어요. 오죽하면 밤에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레디! 액션!”을 외치셨던 적도 많으셨으니까요. (웃음) 집에서나 촬영 현장에서나 마찬가지였어요. 어느 날은 새벽에 너무 소란스럽길래 거실에 나가 보니 혼자 이런저런 연출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속으론 얼마나 무서웠던지. 촬영장에서도 잠옷 바람으로 갑자기 뛰쳐나가서 혼자 촬영을 시작하시곤 했다더라고요. 제작진들이 너무 놀랐다며 얘기해 주곤 했어요. 그런데 막상 감독님은 당신께서 그러신다는 걸 잘 모르시는 것 같았어요. 영화에만 집중하고 몰두하다 보니 몽유병 같은 증세가 생겼나 봐요. 그렇게 평생을 영화에 빠져 사셨죠.
서로의 작품에 많은 개입을 하진 않았어요. 감독님께선 제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문간에 서서 조용히 관찰하시는 편이셨죠. 저도 촬영 장소를 몇 번 추천해 준 적은 있었어요. 아무래도 화가의 눈이 어떤 장소를 보는 데에는 더 빠른 편이니까요. 다만 그 외에 특별히 더 조언해 드릴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워낙 철두철미하신 분이셨으니까요. 촬영 현장엔 자주 놀러 갔어요. 결혼 초에는 자동차에 탄 감독님 무릎 위에 앉아서 돌아다니기도 했죠. (웃음) 지방 촬영장에 갔을 때 배우들 의상이 없으면 제가 급히 재봉틀로 옷을 만들어서 입히기도 했어요.
영화를 왜 그렇게 사랑하시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하신 적은 없으셔요.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요. 감독님께 영화는 생명 같은 것, 숨 같은 것 아니었겠어요? 숨을 쉬어야만 사람이 살 수 있듯이 영화를 찍어야만 살 수 있던 사람이었죠. 첫 장편이었던 <교차로>의 필름을 잃어버리셨을 땐 정말로 슬퍼하셨죠. <교차로>는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화신백화점에서 감독님께서 직접 보여주셨던 영화이기도 하거든요.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요즘 따라 부쩍 생각나네요. “난 다시 태어나도 영화감독을 할 거야.”라는 말씀이었죠. 지금쯤 어딘가에서 어린애로 환생하셔서 또 영화를 보거나 만들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박근자 선생님 인터뷰 영상



 

                                              




 

Chapter 03. 학술행사
최전선의 영화감독이자 운동가이자 스승


글| 이우빈(씨네21) · 사진| 최성열(씨네21)


지난 6월 27일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2관에서 ‘유현목 100th: 한국영화 프론티어’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진행한 ‘유현목 탄생 100주년전: 시대, 장르, 실천’과 연계하여 유현목감독탄생1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등이 주최한 프로그램이었다. 3시간 30분 동안 이뤄진 세미나는 2009년 타계한 유현목 감독의 지인, 제자를 비롯해 여전히 유현목을 연구 중인 후대 연구자들의 발표로 진행됐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유현목뿐 아니라 각종 시네클럽과 영화 운동을 주도해 온 활동가로서의 유현목, 그리고 스승으로서의 유현목 등을 다면적으로 해부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왜 유현목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그의 영화뿐 아니라 ‘유현목’이라는 인간에 대한 너른 탐구가 필요했다.

강성률 교수
김시무 영화평론가

* (위) 강성률 교수, (아래) 김시무 영화평론가

[ 영화감독 유현목 ]
세미나의 첫 번째 세션은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와 유현목’이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첫 연사로 나선 강성률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는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현목 감독의 강의를 들은 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 <오발탄>(1961)의 의의를 설명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영화사가 이영일이 유현목을 “해방 후 한국영화계의 가장 대표적인 영화작가”라고 한 점, 김종원 영화평론가가 <오발탄>을 “한국영화의 수작이자 리얼리즘의 대명사”라고 평가했던 점 등을 들어 20세기에 이미 <오발탄>의 위상이 높았다는 점을 제시했다. 이어 강성률 교수는 “<오발탄>이 왜 걸작인지 다시 고민”하며 “단지 개봉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신화가 아니라 그 시대가 요구한 걸작이면서, 한편으로는 유현목의 이전 영화와 이후 영화의 어떤 특징을 모두 포괄하는 모태와 같은 영화”임을 주지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오발탄>이 종전 이후 미국 중심의 서구화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했던 <자유부인> 등의 다른 영화들과 달리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고민과 고통이 생생한 분단 영화”라는 점을 들었다. 또한 <오발탄>이 문예 영화로서 가지는 의의, 실존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해석의 폭, 종교영화로서의 가치 등이 복합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연사로 나선 김시무 영화평론가는 ‘한국영화사에서 유현목의 위상’이라는 주제 아래 1960년대 유현목 감독이 내놓았던 <오발탄> <김약국의 딸들>(1963) <잉여인간>(1964) <순교자>(1965) 등에 대한 당대, 후대 영화평론계의 시선을 종합했다. 이는 “유현목 감독이 지향하는 철학적 및 미학적 토대는 리얼리즘과 실존주의에 있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 (위) '유현목 100th: 한국영화 프론티어' 현장사진 (아래) 한옥희 감독
 

[ 영화 운동가 유현목 ]
두 번째 세션의 주제는 ‘실험영화 운동과 유현목’이었다. 1973년 유현목 감독을 만나 연을 이었고, 유현목 감독의 지원으로 ‘카이두 실험영화 클럽’의 기수로 활동했던 한옥희 감독이 연사로 나섰다. 한옥희 감독은 1970년대 유현목 감독이 ‘소형영화동호회’를 창간하고 ‘카이두 실험영화 클럽’의 영화 제작과 상영을 돕는 등 실험영화의 지대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남겼음을 구술로 증언했다. 유현목 감독이 운영하던 영화 제작사 ‘유프로덕션’의 건물 옥상에서 16mm 실험영화를 촬영했다던 한옥희 감독의 생생한 회고가 생전 유현목 감독의 상을 그리게 했다.
김수연 영화연구자(부산대학교)는 ‘유현목의 실험영화 운동과 새로운 영화로의 도약’이라는 연구를 발표했다. “유현목은 한국영화의 기둥이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된 발표는 유현목의 작품 세계를 이론·역사적으로 정리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유현목의 영화 미학적 토대에 해외 영화계 시찰을 통한 1960년대 ATG 등 일본 뉴웨이브 운동의 섭렵, 1969년 UCLA 유학 중이던 하길종 감독과의 만남 중 접한 당대 미국 뉴시네마(마야 데렌, 스탠 브래키지, 요나스 메카스부터 존 카사베츠 등)의 영향 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유현목 감독은 해외에서 일어난 일련의 뉴시네마 운동을 한국에 들여오며 ‘오프 할리우드’라는 명명으로 제도권 바깥의 영화를 확장하는 실천을 이어갔던 것이다.
유현목 감독은 1964년 최초의 실험영화 동인 ‘시네포엠’을 창립해 실험영화 <선>과 <손>을 만들었고 이러한 영향이 이어진 <춘몽>과 <한>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1970년 ‘한국소형영화동호회’를 창립하여 ‘소형영화 대중화 운동’이라는 아마추어리즘의 실천과 순수영화 제작을 주도했다. 이후 ‘제4집단’, ‘카이두 실험영화 클럽’ 등 1970년대 나타난 실험영화 동인들을 물적·공적으로 지원했으며, 1972년 ‘새마을영화’ 제작사 ‘유프로덕션’을 설립해 소형영화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유도했다. 한편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에 기반한 ‘동서영화동우회’(이후 동서문화연구회)를 발족해 후학들이 비제도권 영화의 발굴과 프랑스 누벨바그 등 해외 작가주의 영화에 관한 공부를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 이 영향 아래에서 정성일 영화평론가, 강한섭 영화평론가, 전양준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김의석 동의대학교 교수 등 20세기 한국의 영화평론계를 이끈 인물들이 배출됐다.
 
강석우 배우
김성수 감독

* (위) 강석우 배우, (아래) 김성수 감독

[ 스승 유현목 ]
세 번째 세션은 ‘감독 유현목, 스승 유현목’이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먼저 김종원 영화연구자는 필름이 유실되어 현재 감상할 수 없는 유현목 감독의 <인생차압>(1958) <잉여인간>을 기억하며 그 작품들의 가치를 설명했다. <인생차압>은 “재산을 위해 ‘죽음’마저 희롱하는 인간의 이기주의적 속성”을 드러내면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연출자의 솜씨와 장악력이 집약된 작품이었음을 설명했다. <잉여인간>은 <오발탄>에서 아픈 이로 앓던 철호 역의 김진규 배우가 치과의사 서만기 역으로 등장한 작품이며, 6·25 전쟁의 피폐한 현실을 <오발탄>과 함께 집중적으로 조명한 영화였다. 김종원 영화연구자는 “30여 년 동안 43편의 영화를 만든 유현목 감독의 <인생차압>과 <잉여인간>을 잊지 않고 찾아야 한다”라는 발언으로 발표를 마쳤다.
‘나의 영원한 매니저 유현목 감독님’이란 주제로 발표한 강석우 배우는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부 재학 시절 유현목 감독의 제자였다. 그는 스승이었던 유현목 감독이 자신을 영화에 출연시키기 위해 가했던 온갖 노력을 회고했다. 스승의 노력 끝에 강석우 배우는 김수용 감독이 연출하고 윤정희 배우가 출연한 <여수>(1978)을 통해 스크린에 데뷔했으며, 그 이후 유현목 감독은 자신의 영화 촬영 현장에 강석우 배우와 동행하며 현장의 체계에 익숙해질 기회를 주기도 했다. 강석우 배우는 “유현목 감독님께선 생전 나에게 무관심한 표정으로만 일관하셨다”라고 유현목 감독의 생전 성격을 떠올리면서 “그렇게까지 뒤에서 나를 지원하셨던 것은 감독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제대로 알게 됐다.”라는 사실을 밝혔다. “뒤늦게나마 알게 된 스승의 공에 깊은 존경을 표한다.”(강석우 배우)

유현목 감독의 제자이자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아수라> <서울의 봄> 등을 연출한 김성수 감독이 마지막 연사로 나섰다. 김성수 감독은 1986년 <오발탄>을 본 이후 영화적 충격에 빠졌고, 그길로 다짜고짜 유현목 감독을 찾아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했던 일화를 밝히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유현목 감독의 조언을 통해 동국대학교에 재학하게 됐고, 유현목 감독의 강의에서 콘티 작업 등을 수학하며 자신의 영화적 스타일을 찾았다고 회고했다. “장면을 매끄럽게 연결시키는 건 중요하지 않아. 관객이 무의식적으로 어, 하면서 놀라게 만들어야 해”라는 유현목 감독의 가르침이 아직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김성수 감독은 유현목 감독의 권유로 박광수 감독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성하면서 지금의 경력을 이어오게 됐다. 김성수 감독은 유현목 감독과의 마지막 만남을 기억하며 잠시 말문을 삼켰다. 질환으로 입원 중이던 유현목 감독과 사제 시절 자주 즐겼던 냉면을 함께 먹었던 기억을 끌어왔고,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밝혔다. “못난 제자를 영화감독으로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