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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다중우주를 지향하는 박물관 | 2025.08.18 | 328 |
한국영화의 다중우주를 지향하는 박물관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 민규동 한국영화감독조합 대표, 김연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가 국립영상박물관 건립을 말하다
글: 배동미(씨네21) 사진: 최성열(씨네21)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상자료원)은 10년도 더 전에 한국영화를 중심에 둔 박물관을 건립하고자 했다. 2014년 '국립영화박물관'을 짓기 위해 정부에 제안하고 연구 용역을 진행했지만 국고가 많이 투입되는 사업이라 한차례의 좌초를 경험했다. 그럼에도 한국영화를 조망하는 박물관에 관한 소망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2017년 영상자료원은 다시 한번 국립영화박물관을 세우고자 검토했고, 또 한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흘러 맞이한 2025년, 영상자료원은 다시 힘을 내어 한국영화와 한국영화인들을 조망하는 박물관 건립을 준비 중이다. ![]() * (좌측부터)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 김연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 민규동 한국영화감독조합 대표 이름도 바뀌었다. 국립영화박물관이 아닌 ‘국립영상박물관’으로. 왜 영화가 아닌 영상이란 더 큰 이름을 갖게 됐을까.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은 이에 관한 설명과 함께 한국영상자료원이 그린 밑그림을 대담 자리에서 소상히 밝혔다. 함께 참석한 민규동 한국영화감독조합 대표는 미래에 도래할 국립영상박물관의 모습이 어떠했으면 하는지 영화인으로서 의견을 보탰다. 아울러 김연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는 박물관학자로서 국립영상박물관이 놓치지 않아야 할 공공성과 최근 전세계 박물관의 경향에 관해 짚어주었다. 세 사람의 말을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마음속에 박물관 하나가 근사하게 그려질 것이다. 벌써 그곳에 가고 싶어진다. ![]() *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 왜 '국립영화박물관'이 아니라 '국립영상박물관'인지부터 이야기해 보면 좋겠습니다.김홍준 | 영상자료원의 존립 근거 자체가 ‘영상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 즉 '영비법'입니다. 비디오물이라는 게 거의 용도 폐기된 개념이지만, 새 법이 안 만들어지고 있죠. 그래서 새로운 법에서는 ‘OTT도 영화에 포함하자, 비디오라는 개념을 폐기하자’라는 아이디어도 있습니다. OTT의 공식 법적 명칭은 ‘온라인 비디오’예요. OTT에 적용할 법을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까 근접한 영비법으로 접근한 거죠. 그리고 IPTV가 비디오로 취급되거든요. 국립영상박물관은 전통적인 영화에다 OTT를 포함하고 더 나아가서는 아직 나오지 않은 미래의 어떤 미디어까지 포함시켜 '영화박물관'이 아닌 ‘영상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리고 영어로는 ‘무빙 이미지Moving Image’라는 표현을 쓰려고 합니다. 공교롭게 우리 기관 이름이 ‘한국영화자료원’이 아니라 ‘한국영상자료원’이에요. 영어로는 Korean Film Archive이지만, 우리말로는 한국영상자료원입니다. 옛날에 필름보관소였다가 기능이 확대되고 이름을 바꾸던 당시에 '영상'이란 말이 쿨했나봐요. 가칭 새로 만들 영상박물관은 ‘Korean National Museum of Moving Image’라고 생각했고, 줄여서 KOMI라고 부르면 어떨까 하고 있습니다. (웃음) ![]() * 민규동 한국영화감독조합 대표 민규동 감독님은 필름영화부터 디지털영화, OTT까지 두루 경험한 영화감독의 관점에서 국립영상박물관의 필요성을 언제 느끼셨나요.민규동 감독 | 영화박물관이 얘기될 때마다 모여서 지지하는 순간에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왜 좌초됐는지 듣지 못했어요. 영화는 물질적이고 시각적인 매체이고, 과거 영화를 계속 본다는 점에서 기억의 의미가 커서 국립영화박물관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그 자리에 있었어요. 아마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하지만 과거에 영화박물관이 논의될 때 그렇다면 어떻게 힘을 보태야 할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해서는 한치도 스며들 틈 없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파리에 살 때 한가운데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도 있지만 ‘포럼 데 이마주(Forum Des Images. 1988년 설립된 영화와 VR, 게임, 만화 등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를 다루는 공간. 파리를 소재로 한 영화가 약 7,700편 보관되어 있다. -편집자)’라는 일종의 비디오 비블리오테크에 자주 갔어요. 그곳에서 파리를 소재로 한 모든 영상을 베타 테이프든 VHS든 다 볼 수 있었고, 다큐멘터리나 기록물 위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영상자료원처럼 극장도 프로그램도 당연히 돌아가는 전통적인 시네마테크 기능도 하고 있으면서 시민들에게 열려 있는 복합적인 공간이었어요. 그리고 퐁피두. 그냥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일단 가보면 너무나 좋은 전시가 열렸고 보고 싶은 영화를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책도 읽으며 사람들이 편히 쉴 수도 있는 복합 공간이었어요. 자주 갔죠. 유학 시절에 퐁피두에서 히치콕 특별전이 열렸는데, 한 영화당 소품 하나씩을 전시하고 있었어요. <사이코>에서 딱 하나의 소품만 전시한다면 뭐였을까요? 김홍준 원장 | 동물 박제인가요? 진행자 | 샤워 커튼이었을까요? 민규동 감독 | 여주인공의 흰색 브라였어요. 흰 브라가 빨간 전시관에 놓여있었는데, 그 소품이 일단 보관되고 있다는 것에 감명 받았죠. 전시회에 그 소품만 딱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필모그래피 각각에 등장한 특징적인 소품들을 히치콕의 생애를 거쳐 다루다 보니 콘텍스트가 생기는 거예요. 국립영상박물관이 만들어진다면 연대순으로 전시돼서 관람객으로서 공부하듯이 보고 난 다음에 두 번 가기는 어려운 그런 박물관은 아니었으면 해요. 영화는 문학과 다르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여타 예술 장르와 다른 자기만의 정체성이 있죠. 외계인이 침공해서 전기가 없어 영화 재생이 안 돼도 영화를 둘러싼 맥락을 전시한 영상박물관이 있다면 영화는 독자적인 자기 정체성을 가진 예술 매체로서 재발굴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 국립영상박물관이 없다는 게 일단 이상하죠. 있다면 사람들이 너무 즐겨 찾을 것 같은데 말이죠. 빗살무늬토기는 계속 박물관에 남아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대중적인 예술 장르로서의 영화를 다루는 박물관은 왜 설득력이 없을까요. 권력을 가진 분들이 영화를 쉽게 보거나, 영화가 아직 클래식 계열에 못 들어간 걸까요. 질문들만 계속 따라다니는데요. 다시 한번 이 논의가 시작된다면 몇몇 주도적인 리더들의 선언 같은 것으로 멈추지 말고 보통 사람들에게도 영화에 관한 개념이 확장되고 논의가 끊기지 않고 쌓여가는 방식이었으면 해요. 영화인이 주인이자 손님인 박물관![]() * (좌측부터)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포스터, 영화 소품 '교환 일기'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교환 일기를 기증해주셨는데 정성스런 소품이라고 들었습니다.민규동 감독 | 그거 말고도 여러 개의 소품을 챙겨놨는데 이사하면서 없어졌는지 사라졌어요. 김홍준 원장 | 이사하기 전에 빨리 주세요. 이사가 수집의 적이에요. (웃음) 민규동 감독 | 어느 순간 유실되더라고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고. 교환 일기도 소품팀 친구가 너무 정성을 기울여서 제작하고 애착이 많아서 계속 갖고 있겠다고 했는데 유실의 위험이 있어서 영상자료원에 기증했어요. 그전에 DVD를 낼 때 교환 일기를 디지털화해서 DVD의 굿즈로 판매되기도 했어요. 영화감독으로서 촬영 때마다 PD와 미술팀에게 버리지 말고 보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촬영이 끝나자마자 정말 순식간에 소품들이 사라져요. 그래서 모을 여력이 없어요. 영화 현장에서 소품에 아카이브 가치가 있단 걸 느끼는 사람이 없다고 보시면 돼요. 스태프들의 도움이 필요한데 큰 영화의 소품들은 가져가서 다른 영화에 재활용하려고 해요. 그러면 돈을 아낄 수 있거든요. 촬영한 다음엔 아무리 달라고 말해도 소품을 반납받는 게 너무 어렵죠. 그러다 몇 개월씩 찾아보면 구석에서 먼지에 덮여있어요. 스태프 탓만 할 수 없는 것이 이들에게 작품 전시의 기회가 없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당장 무언가를 기증했을 때 그것이 전시돼서 해석되고 사람들과 만난다는 걸 알면 배우도 오게 하고, 사람들에게 보러 가자고 할 텐데, 그런 체험의 기회를 지금으로선 못 누리잖아요. 기증해도 어떻게 활용되는지 알 수 없고 내가 위대해지지 않으면 기증한 것들이 전시되기도 어려울 것 같고요. 미국의 LA 아카데미박물관도 마찬가지지만, 사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만 박물관에서 볼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일반 스태프까지 아카이빙의 개념이 내려가려면 우리의 흔적이 모두 다 박물관에 들어갈 수 있는 창작이란 걸 느낄 수 있어야 해요. 그런 면에서 영상박물관이 일반 사람들에게도 지지를 받으려면, 나랑 연결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 빗살무늬토기는 만든 사람도 몰랐을 만큼 보통 토기였을 텐데, 시간이 지나면서 교과서에 실렸잖아요. 살아남는다면 자기가 빚어내는 것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란 사실이 먼저 교육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영화인 스스로가 교육되지 않았어요. 우리 자신이 손님이 되고 주인도 돼야 하는데 말이죠. 국립영상박물관을 체험한다는 게 프랑스에 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체험한다는 것과 동류의 가치를 내게 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그래 만들자'라며 사람들이 모이게 될 것이고, 논의가 끊어지면 '왜 더 이상 논의가 안 되는가'에 관해 질문이 나온다고 봐요. ![]() * 김연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 박물관학자의 눈으로는 국립영상박물관의 필요성과 시의성을 어떻게 보시나요.김연재 교수 | 관람자들의 박물관 방문 동기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부터 일단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아요. 그 동기는 결코 단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어떤 장소를 방문할 계획을 세운다면, 그곳을 가는 이유와 목적 그리고 경험의 기억이 저마다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거죠. 제가 영국에서 학위 과정을 밟았을 때가 생각나는데요. 저처럼 박물관학을 연구하는 전 세계의 다양한 연구자들과 함께 모여서 환담을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동료가 "너희들은 박물관에 가는 이유가 뭐야?"라고 질문했어요. 저는 다들 전문적인 학술 개념을 쓰면서 박물관에 기대할 수 있는 다층적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답변을 생각했었는데요. 그런 저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어요. 왜냐하면 어떤 동료가 "나는 공짜로 화장실 갈 수 있어서 박물관이 좋아!"라고 답변했는데 그곳에 있던 다른 동료 연구자들이 그 이야기에 웃으며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가 유럽 출신 학생이었는데, 유럽의 어떤 도시에서는 소정의 돈을 지불하고 화장실에 가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경제적, 심리적 부담을 박물관과 같은 공공기관에서는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게 그 친구한테는 매우 중요한 이유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시 자녀를 양육하고 있던 친구는 "난 우리나라의 모 박물관에 가는 걸 너무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딱 하나야. 바로 수유실 시설이 너무 좋거든”하고 대답했어요. 이 친구는 부모의 입장에서 다른 장소와 비교했을 때, 관람객의 편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박물관일수록 수유실과 같은 부대시설이 어떻게 갖춰져 있느냐가 재방문의 요인으로 고려된다고 말했습니다. 수유실이 편안한 것은 물론 친환경 벽지로 꾸며져 있고 폭신폭신한 이불에 워터 서버까지 갖춰진 곳이라 마음 편히 방문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큽니다. 즉, 사람들이 박물관을 방문하는 이유는 반드시 전시나 교육 프로그램 경험에만 있지 않다는 걸 반증하는 거죠. 결국 어떤 목적으로 갔든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은 이곳에서 하루 여정을 어떻게 즐기고 또 기억하는 가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 기억이 긍정적이었다면, 주변 지인이나 SNS를 통해 그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불특정 다수의 잠재적 관람객들의 방문 동기를 고취시킬 수 있는 동인으로 기능할 수 있겠죠. 만약 누군가 국립영상박물관을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혹자는 영화와 영상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국가가 공인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듣기 위해 박물관에 오는 사람들은 굉장히 한정적이거나 과제를 하기 위해 일시적인 목적으로 방문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다면 국립영상박물관이 왜 필요한가, 국민들은 이 기관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무빙 이미지는 특정 작품을 어떤 감독, 배우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그 시대를 관통하는 문화적, 사회적 지점들을 발견하는데도 의미가 있습니다. 60년대 때 문예영화나 청춘영화가 많이 나왔고, 70~80년대 넘어서는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들도 있었고, 90년대 들어서는 상업적인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생충>, <오징어 게임>이 등장했죠. 어쩌면 한국영화와 영상은 불연속적으로 흘러온 게 아니라 어떤 계보학적인 맥락이 존재했다고 봅니다. 그 지점을 국립박물관으로서 일반 시민들에게 전해줘야 하는 어떤 사회적인 책임, 공적인 책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다양한 문화예술의 영역에서 비롯된 시지각적 요소들을 합쳐 놓은 결과물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국립영상박물관은 그 기능적, 담론적 가치를 생각했을 때 주제의 확장성과 다양성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 *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 / 우측 사진 출처 씨네21 김홍준 원장님은 영화감독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라디오를 통해 대중에게 영화를 알려준 선생으로서 여러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국립영상박물관의 필요성을 언제 절감하셨나요.김홍준 원장 | 영상자료원장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느낀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영화인이고, 한국영화가 21세기에 들어와서 세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니까 영화박물관이 없는 게 이상하지 않나 원론적으로 생각했어요. 제가 <서편제> 조감독을 했거든요. 영상자료원 1층에 있는 한국영화박물관에 가면 <서편제> 소품인 북이 하나 있어요. 이제 와 말하지만 실제 촬영할 때 쓴 북이 아니에요. 원래 있는 북을 사다가 소품 담당께서 오래된 북처럼 만들었고 촬영이 끝나고 없어졌죠. <서편제>가 100만 관객을 동원하고, 임권택 감독님이 국민 감독에 등극하면서 한국영상자료원에 몇몇 소품을 기증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 영화에서 제일 인상적인 소품이 북이지만 이미 유실된 뒤였죠. 그래서 소품 작업을 하셨던 김호길 선생님께서 기억을 되살려서 다시 작업한 북이 한국영화박물관에 전시돼 있어요. 판화로 치면 ‘세컨드 에디션’ 같은 거죠. 시간이 흘러 한국영상자료원장에 임명돼 박물관을 둘러보니까 그 북이 갑자기 달라 보이는 거예요. 번개처럼 ‘북 말고도 <서편제>에서 중요한 소품들이 참 많았는데. 당시에 한국영상자료원 같은 기관이 체계적으로 영화 촬영이 끝난 다음 중요한 소품들을 보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들었던 거죠. 수집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후대에 ‘그때 수집했더라면…’ 하고 후회하지 않을 작품들을 수집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예산을 들여 중요한 영화들의 소품과 의상을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영화감독들은 자료원에 대한 이해가 높기 때문에 굉장히 협조를 잘해 주시거든요. 의상 같은 경우, 기증을 받으면 의상 감독님하고 인터뷰도 하고 사진을 찍어서 홈페이지에 올리고, 감독님에게 따로 피드백을 드려요. 의상을 수집하고 온라인으로 공개하는 과정이 체계적으로 이뤄지니까 결과물이 꽤 쌓이더라고요. 그러면서 OTT 작품까지 확장했어요. 어떤 작품들의 수집을 진행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주세요.김홍준 원장 | <오징어 게임> 속 최후의 3인이 입었던 운동복이 들어와 있어요. 민규동 감독 | 영희 인형은요? 김홍준 원장 | 영희 인형도 갖고 있습니다. 민규동 감독 | 어디다 갖다 놓으셨나요? 분해하셨어요? 김홍준 원장 | 포장해서 파주에 갖다 놓았어요. 아직 그런 것들을 수집할 여력이 안 되지만 <오징어 게임>이 워낙 전세계적인 콘텐츠니까 수집해야겠다고 생각했죠. OTT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수집할 의무도 없고 납본 받을 권리도 없어서 순전히 IP를 가진 쪽의 선의에 기대고 있어요. 민규동 감독 | 한국 작품이 아니라 우리가 용역을 제공한 것이라 미국 영상 자료가 아닌가요? 김홍준 원장 | 그렇죠. 그렇지만 대부분의 스태프들과 감독들이 한국영화계에서 배출된 사람들입니다. 아직은 경계가 모호합니다. 만약 법에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 국적의 작품만 수집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으면 <오징어 게임>은 손을 못 댔을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게 없거든요. 반면 그 역도 성립하죠. 가령 ‘의무 납본 제도’라고 해서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한국영상자료원에 작품을 제출해야 해요. 한국영상자료원은 수집, 보존, 복원, 활용이라는 원칙을 따르는데 OTT의 경우 수집 단계부터 딱 걸려요. 최근에 지금 저희가 눈독을 들이고 섭외 중인 OTT가 <폭싹 속았수다>, <애마>입니다. 연계해서 영화부터 OTT까지 한국영상자료원이 한국영화의 역사를 새롭게 국립영상박물관을 통해 보여준다면, 단선적인 연대기가 아니라 좀 뻗어나가는, 어떻게 보면 다중우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영화를 이런 시각으로 보면 이렇게 보이고, 다른 방식으로 보면 또 저렇게 보이는 방식으로요. 욕심이지만 한국영화의 다중우주가 박물관의 건축에도 반영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영상박물관이 미완성이고 끊임없이 확장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해요. 콘텐츠 플랫폼으로서의 박물관![]() * 보이는 수장고, 국립민속박물관 파주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유튜브 채널) '왜' 국립영상박물관인가에 관해 질문을 던진 다음, '어떻게'에 관해 여쭤보려고 했어요. 물론 앞서 많이들 이야기해 주셨습니다만 국립영상박물관이 만들어진다면 어떤 모습이었으면 하고 상상하시나요.김연재 교수 | 물론 국립영상박물관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건물 설계, 조직 구성원, 아카데믹한 상설 전시와 기획 전시를 가능하게 하는 소장품 및 큐레이션 그리고 수장고가 중요하겠죠. 하지만 박물관의 중장기적 운영 방향을 생각해보면, 기관의 기능을 보다 다목적 차원에서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박물관 건립 트렌드 중 특기할 부분은 교육 기관을 박물관 안에 두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영국 노리치(Norwich) 소재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교(University of East Anglia) 내에 위치한 세인스베리 아트 센터(Sainsbury Art Center)는 전술한 목적을 건축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가령 이 미술관 내부에는 전시장은 물론 이스트앵글리아 대학교 미술사 & 세계미술연구 단과 대학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시장 바로 옆에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도서관과 컴퓨터실 및 아카이브 센터가 있습니다. 이는 학생들이 수업도 듣고 실무적 트레이닝을 이 미술관에서 할 수 있다는 의미죠. 저의 개인적인 망상일 수도 있지만, 만약 국립영상박물관을 만든다면 유관 교육 기관을 공간 내부에 위치시킨 다음, 그곳의 학생들이 실습하는 모습을 관람자들한테 보여주는 건 어떨지 상상하고는 합니다. 요즘 국내에서 ‘보이는 수장고(open storage)’가 트렌드인 상황과 결부되는 거죠. 만약 국립영상박물관의 영문명을 생각했을 때 그 이름에 ‘무빙 이미지’가 들어간다면, 이 박물관은 관람자들한테 고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상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영화라고 하는 하나의 종합적 산물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가를 관람자들한테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겠죠. 학생들 입장에선 국립기관 안에서 자신이 미래의 영화인으로서 국가 지원을 받으면서 내공을 쌓을 수 있다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요. 따라서 국립영상박물관은 미래의 한국영화의 주소를 어떻게 보여주고 또 어떤 비전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을 명확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김홍준 원장 | 말씀하신 내용에 관해 준비는 돼 있어요. 사람도 있고 콘텐츠도 있고 수장품도 있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필름 테크놀로지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 한국영상자료원입니다. 이미 한국영화계에서 주로 활동하는 영화인들 상당수가 필름작업을 해보지 못한 시대가 됐어요. 한국영상자료원은 현상소를 운영하고 있고 필름으로 상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름을 다룰 수 있는 영사기사가 중요한데요. 상근 영사 기사가 있는 곳은 한국영상자료원하고 서울아트시네마밖에 없을 거예요. 또 한국영상자료원에는 필름을 보존하는 팀도 있어요. 일련의 필름 테크놀로지는 영상 박물관이 만들어질 때쯤 극소수의 사람이지만 그 기술이 끊어지지 않게 전승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유화나 디지털 미디어를 한다고 해서 예전에 프레스코화를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니듯이 필름 테크놀로지 자체도 한국영상자료원의 콘텐츠이고 제도화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게다가 바쁜 저희 직원들이 필름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작업하고 있어요. 한국영상자료원은 정말 할 게 너무나 많고 어떤 아이디어를 내주셔도 저희는 솔직히 준비가 돼 있어요. 시류에 영합하는 표현이라고 그러면 할 말이 없겠지만 (웃음) 한국영상자료원을 ‘필름 보관소’가 아니라 ‘콘텐츠 플랫폼’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싶고 그 첫 번째 구체적인 결과물이 국립영상박물관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 아카데미 박물관 숍 홈페이지 화면 (출처 아카데미 박물관 공식 홈페이지) 민규동 감독 | 저는 굿즈도 강조하고 싶어요. 미국아카데미박물관에서 전시 기획을 볼 때 마음속 한가운데에는 ‘얼마나 재밌는 굿즈가 있을까’라는 기대감이 들잖아요. 도쿄 한적한 곳에 위치한 ‘미카타의 숲 지브리 미술관(이하 지브리 미술관)’의 경우, 필름 메이킹 방식과 하야오의 작업실 등 고전적인 자료를 잘 전시해놓고 동시에 필름 조각들을 랜덤하게 팔아요. 그리고 필름 영사 시스템을 함께 전시하고 있어서 그 시기에 애니메이션 영화는 한 조각 한 조각 움직여서 생명력을 얻는 것이란 걸 느끼게 하죠. 거길 거치면 관람객들이 커다란 봉투를 들고나오거든요. 국립영상박물관은 갔다 왔을 때 그 흔적을 집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굿즈에도 소홀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국립영상박물관 건물 자체가 영화적이거나 미학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브리 미술관에 가서 느낀 점은 그곳에 입성하는 순간부터 지브리 세계관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어요. 영화는 창의적인 예술이라고 우리가 많이 찬양하지만, 그것이 들어있는 집 자체가 영화적이지 않으면 시대가 빠르므로 금방 낡은 것이 될 수 있죠. 이점을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 * 루이비통 VVV (VOLEZ, VOGUEZ, VOYAGEZ) 전시 포스터 김연재 교수 | 국립영상박물관이 지향해야 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생각할 때, 필름 테크놀로지 같은 전문성 측면에서의 공공성, 사람들이 물리적, 정서적으로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하는 대중적 측면의 공공성을 균형 있게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루이비통(Louis Vuitton)이 2017년 동대문 DDP에서 전시를 했어요. (지금도 그럴지 모르지만) 당시 루이비통은 사람들의 지갑에서 돈을 갈취해 가는 기업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이 전시의 개최 목적은 제품에 대한 쇼케이스가 아니었어요. 전시에서는 루이비통의 시작이 실용적 목적을 충족시키는 여행 가방 제조기업 이었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보여줬어요. 처음부터 사치품의 대상이 아니었던 거죠. 그렇게 루이비통의 역사와 소비자들을 위한 질적 향상의 노정을 쭉 보여주다가, 동선의 마지막에 이르면 실제 장인들이 현장에서 직접 가방을 만들고 있는 시연 장면을 보여줍니다. 즉, 하나를 만들더라도 제대로 만든다는 제조 기업으로서의 장인 정신, 매니페스토와 윤리 의식을 관람자들에게 전했던 거예요. 박물관 전시란 그런 역할을 하는 겁니다. 대중의 집단적인 인식이나 기억을 소환시킬 수 있고, 그걸 또 새롭게 재가공, 재해석할 수 있게끔 유도할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국립영상박물관은 제가 이제까지 봐왔던 그 어떠한 주제 박물관과 비교했을 때 주제나 소재 측면에서 엄청난 가능성과 선택의 수가 있습니다. 저는 국립영상박물관이 완성된다면 어떤 모습일지 또 어떻게 운영될지 정말 기대가 큽니다. 김홍준 원장 | 너무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예전에 국립영화박물관의 취지는 영화계가 일종의 청원을 한다거나 또 일부 지자체가 관심을 가지고 한번 해보겠다는 선언적인 움직임이었다면 이번에 저희는 처음 예산을 따내고 기본 계획 용역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점점 분위기는 국립영상박물관 개관에 대한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앞으로 만들어질 영상박물관이 어떻게 지속 가능할 것인지 지금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캠페인성 발언을 하자면, 첫째로 영화인들에게는 영상박물관은 사실 영화박물관이니까 안심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영화인 중에도 OTT나 한류와 같은 키워드가 섞여서 박물관이 이상해질까 선입견을 가질 수 있으나, 확장성을 갖는 동시에 박물관을 현실화하기 위한 실질적이면서 전략적인 포석이라고 이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저희가 적극적으로 국립영상박물관에 관해 설명해 드릴 테니까 힘을 모아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수집을 위해 영화인들께서 많은 것들을 기증해 주시고 계속 협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또 하나의 캠페인성 발언은, 영상자료원이 공공기관이라서 수익 사업과 기부금이 금지돼 있었는데 작년에 공익법인 자격을 취득하면서 기부 받는 게 가능해졌어요. 재단이건 개인이건 기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기부금 처리도 됩니다. (웃음) 30년 전 1995년 <씨네21>이 생겨서 구독하고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오고 수많은 시네마테크 했던 그 영화 청년들은 다 어디 갔을까요. 이제 막 은퇴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분들이 자신의 젊은 날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줬던 영화에 뭔가 보답하고 싶다면 그 기회를 드리는 게 저희의 희망입니다. (웃음) 그리고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영화인들은 이사 가실 때 짐을 저희한테 주시면 돼요. 버리지 마시고요. (웃음) 영상의 외연을 넓힐 수 있는 확장적 공간![]() * (좌측부터) 민규동 한국영화감독조합 대표,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 김연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 긴 시간 동안 국립영상박물관의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여주실 말이 있다면요.김연재 교수 | 저는 영화를 전공하거나 영화를 만드는 분들을 항상 부러운 눈으로 봤던 사람입니다. 영화가 갖고 있는 가장 큰 힘은 관람하는 사람들이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근대의 박물관은 형성 초기부터 단선적인 역사 서술과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가 고정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설 때 관람자들은 반드시 전시 기획자가 의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가지고 가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람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하지만 동시대 박물관은, 특히나 국립영상박물관은 더 유연하고, 다양한 생각을 포용하고 또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특정 영화를 놓고 ‘당대 대중과 영화평론가들의 평가와는 달리 관람자 당신은 이 영화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워크숍을 연다든지. ‘아카데미 수상작만 연구 대상 또는 찬탄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골든 라즈베리에서 상을 받은 작품들이나 출연 배우들은 재평가 받을 가치가 없는 것인가?’라는 주제로 영화감독과 관람객이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합니다. 그 자리에서 도출된 내용을 책자나 자료집으로 만들어 판매한다든지. 관람자들로 하여금 영상이라는 개념의 외연을 넓힐 수 있는 확장적인 공간으로서 국립영상박물관이 운영된다면 더없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홍준 원장 | 저는 요즘 새롭게 개관되는 박물관의 상설 전시는 꼭 가서 봐요. 어떤 박물관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전시를 보기 전과 후가 달라진 게 뭔지 모르겠고, 기존의 어떤 갖고 있던 생각에 약간 충격이 오는 것들이 없는 경우도 있거든요. 사실 현재의 한국영화박물관 전시도 마찬가지죠. 영화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게 보이겠지만 한국영화의 추억의 순간들을 쭉 나열하는 방식에서 멈춰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영화의 역사를 보면, 좋은 시절보다 안 좋은 시절이 항상 많았어요. 한국적 위기 상황 속에서 영화는 늘 요동쳤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어쩌면 굉장히 강렬한 콘텐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말하자면 이건 할리우드나 유럽의 영화 박물관이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상처와 단절, 식민과 검열, 그리고 거기에 또 맞섰던 이야기들. 이를 어떻게 대중적으로 풀 수 있을까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고, 저도 아직 고민 중입니다. 민규동 감독 |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라는 이분법에는 늘 딜레마가 생깁니다. 비슷하게 국립영상박물관이라면 클래식하고 예술적인 정체성이 있어야 할 것 같이 느껴질 수 있어요. 모든 게 고급스러워야 할 것 같고, 거기 들어가려면 엄청난 지위를 이미 획득한 훌륭한 작품과 권위 있는 컬렉션들만 갈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렇게 처음부터 이렇게 문을 닫지 않고 즐기는 사람이 주인일 수 있는 박물관이면 어떨까요. 영화의 역사는 다른 예술에 비해 짧지만 대중과 함께 한다는 특수성이자 정체성을 처음부터 견지한 박물관이 탄생한다면 어떨까 생각이 드네요. 예를 들자면 <범죄도시> 속 마석도(마동석)의 점퍼 같은…. 김홍준 원장 | 이미 수집했습니다! 민규동 감독 | 이미 열려 있군요. 좋습니다!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