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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를 전시하다 2025.08.18 132
할리우드를 전시하다
국립영상박물관 구상을 위한 해외 사례조사 ① 미국 아카데미 영화박물관

글·사진: 정현경(한국영상자료원)

아카데미 영화박물관 외관(사반 빌딩)

* 아카데미 영화박물관 외관(사반 빌딩) ©Academy Museum Foundation

세계 영상산업에서의 한국 콘텐츠의 독특한 입지와 위상변화를 고려할 때 한국의 국립영상박물관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이 될 수 있다. 글로벌 가치사슬의 변두리에 있었으나 꾸준히 독자적인 역사를 축적해 오다 최근 OTT 플랫폼, K팝과 K드라마의 성장을 기화로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른 나라. 한국의 국립영상박물관은 무엇을, 어디까지, 어떤 방법으로 표현할 것인가? 마치 안개 속에 던져진 것 같은 막막한 프로젝트이지만, 어디서부터 출발할지만큼은 명확했다. 영화의 본향인 할리우드, 그것도 비교적 최근에 생긴 표본이 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며, 영화의 모든 분과를 아우르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가 90년의 숙원을 담아 설립한 명실상부한 영화의 국제적 센터. 이곳에서 고민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하기로 하고, 첫 번째 사례조사처인 아카데미 영화박물관1)을 찾았다.

 

1) 박물관의 원문 명칭은 ‘Academy Museum of Motion Pictures’ 이지만 이 글에서는 국내 언론사에서 사용하는 ‘아카데미 영화박물관’을 사용했다. 아카데미 영화박물관이 다루는 범위는 온라인 스트리밍용 영화와 극장용 영화를 모두 포함한다. 한편 아카데미 영화박물관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필름(film), 무비(movie), 시네마(cinema) 등의 명칭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https://www.academymuseum.org/en/about


로스앤젤레스 상업지구인 미라클 마일의 중심부 전경

* 로스앤젤레스 미라클 마일에 자리한 아카데미 영화박물관 전경. 유리돔 건물이 박물관의 상징인 스피어 빌딩이다.

2021년 개관한 아카데미 영화박물관은 로스앤젤레스 상업지구인 미라클 마일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과거 쇼핑 중심지로서의 활력은 줄었지만, 예술, 건축, 역사가 어우러진 로스앤젤레스의 대표적인 문화중심 중 하나다. 아카데미 영화박물관은 미 서부 최대 미술관인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선사시대 화석 발굴지 라브레아 타르피츠 박물관, 피터슨 자동차 박물관과 함께 대형 박물관들이 접해있는 뮤지엄 거리를 이룬다. 아카데미 영화박물관은 사반 빌딩과 스피어 빌딩으로 구성된다. 박물관 본관인 6층 건물 사반 빌딩은 1939년 지어져 로스앤젤레스 역사문화기념물로 지정된 대형 백화점 메이컴퍼니 빌딩을 복원해 조성됐다. 스피어 빌딩은 유리돔 형태의 신축 건물로 952여석 규모의 첨단 극장인 데이비드 게펜 극장과 돌비 패밀리 테라스가 있다. 돌비 패밀리 테라스에서는 할리우드의 상징인 할리우드 사인을 포함한 로스앤젤레스 도시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아카데미 영화박물관, 로스앤젤레스의 대표적인 문화 중심지 중 하나


(좌측부터) 박물관 로비, 월트 디즈니 컴퍼니 피아자

* (좌측부터) 박물관 로비, 월트 디즈니 컴퍼니 광장(Walt Disney Company Piazza)

박물관 로비는 아카데미 최초 흑인 남우주연상 수상자 시드니 푸아티에에게 헌정되었다. 높은 층고, 천장을 관통하는 에스컬레이터에 화려한 백화점의 옛 모습이 살아있다. 그 외에도 ‘스필버그 패밀리 갤러리‘, ‘월트 디즈니 컴퍼니 피아자’ 등 할리우드의 역사적 인물 또는 후원사들의 이름을 딴 시설물의 명칭들은 박물관 전체가 아카데미 회원들의 재정적, 정신적 후원이 모여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박물관의 대표 전시 ‘시네마에 대한 이야기들(Stories of Cinema) 1~3’은 영화 역사를 조망하는 대형 기획전이다. 이 전시는 하나의 큰 틀 아래 세부 구성은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반(半)상설 구조로, 필자가 방문한 2025년 4월 기준으로는 다음과 같은 전시들이 진행 중이었다.


시네마에 대한 이야기들2 - 시네마 세계들의 창조 전시 공간
* 시네마에 대한 이야기들2 - 시네마 세계들의 창조 전시 공간

먼저 ‘시네마에 대한 이야기들 1’은 시대별 영화 클립들이 분할화면으로 대형스크린에서 상영되는 무료전시다. 전시는 2, 3층으로 이어지는데, 그 중 ‘중대한 영화와 영화인들(Significant Movies and Moviemakers)’ 전시에서는 할리우드 고전 <카사블랑카>, 1980년대 흑인 사회를 다룬 <보이즈 앤 더 후드>, 라틴아메리카 사회를 조명한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 루르데스 포르티요 감독을 기리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고전’과 ‘소수자·다양성’라는 축을 통해 영화사의 중요 기점들을 안내하는 셈이다. ‘시네마 세계들의 창조(Inventing Worlds of Cinema)’ 전시에서는 판타지, SF 영화 속 캐릭터와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감독의 기증품, 돌비, 소니, 파나소닉 등이 기술지원한 설치물들이 펼쳐져 있다. <아이언맨>의 마스크, <스타워즈>의 C-3PO 등 할리우드 영화의 아이콘이 모인 전시실에서는 압도적인 아우라가 풍겨 나온다.


기획전시: 사이버 펑크
* ‘사이버 펑크(Cyber Punk)’ 전시

아카데미 영화박물관의 기획전시는 3개의 대형 전시, 2~3개의 중소 규모 전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형 전시는 하나의 구성요소(‘컬러’), 하나의 장르(‘사이버 펑크’), 한 명의 감독(‘감독의 영감’) 등 하나같이 모두 거대한 주제를 다룬다. ‘모션 속의 컬러(Color in Motion)’ 전시는 영화에 색이 처음 도입된 20년대부터, 60년대의 실험영화, 디즈니 애니메이션, 그리고 오늘날 디지털 영상에 이르기까지 색상의 역할을 시대별, 매체별로 조망한다. 색상을 주제로 영화사를 관통하는 엄청난 기획이다. ‘사이버 펑크(Cyber Punk)’ 전시에서는 3면 화면과 스피커를 통해 사이버펑크의 이미지들과 테마 음악이 흘러나온다. 주요 아이템과 드로잉이 전시되어 영화 속 세계를 물리적, 시청각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이야기가 있는 전시, 물리적 자료를 적극 활용하는 전시


‘감독의 영감(Director’s Inspiration)’은 한 감독의 작품세계를 다룬 전시로, 스파이크 존즈, 아녜스 바르다에 이어서 봉준호 감독의 전시가 세 번째다. 만화적 상상력과 디테일에 담긴 봉준호 감독의 세계관을 생생하게 구현한다. 할리우드와 한국의 박물관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할 수는 없다. 거대한 규모와 화려함만 본다면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은 막막한 일이다. 그러나 그 구성과 관점 면에서 한국의 영상박물관에 적용할 수 있는 실마리들을 찾을 수 있다.


* '감독의 영감(Director’s Inspiration): 봉준호' 전시 공간

첫 번째는 이야기가 있는 전시이다. 영화사 전시는 연대기순으로 나열되지 않는다. ‘중대한 영화·영화인’과 같은 기본틀 위에서, 다양한 관점의 렌즈를 통해 역사를 이야기한다. 역사는 박제된 것이 아니라 대화와 해석을 통해 다르게 이야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두번째는 물리적 자료의 중요성이다. 인터랙티브 미디어가 전시에 활용되지만, 아카데미 영화박물관의 전시 기반에는 소품과 의상과 같은 실물 유산들이 있다. 영화 속 장면 혹은 캐릭터의 정수가 담긴, 감독과 배우의 손길이 닿은 아이템들은 그 자체로 화려한 광경을 이루고 관객들에게 감동을 준다. 오늘날 가상 현실, 확장 현실의 세계 가운데서도 물리적 아이콘은 관객들에게 또 다른 감흥을 준다는 의미다.

세 번째는 영화·영상계의 후원과 지지이다. 아카데미 영화박물관은 아카데미 회원들의 기술적, 산업적 유산들이 모여 조성될 수 있었다. 영화·영상계의 탄탄한 지지가 국가대표 박물관이 만들어지기 위한 필수 조건임을 보여준다. 아카데미 영화박물관은 미션은 ‘영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기념, 보존’하는 것이다. 이 미션은 어떻게 실현되고 있을까? 2021년 당시 아카데미 박물관의 디렉터였던 빌 크레이머의 말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그는 개관 전 기자 간담회에서 “예술과 기술, 역사와 사회적 영향, 아티스트까지 두루 비추는 한편, 복잡하고 매혹적인 영화의 세계를 보여줄 전시와 프로그램을 선보일 것”이며 “기념비적이고 교육적인 동시에 때때로 비판적이고 불편한, 영화 제작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하는 콘텐츠를 만들겠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국립영상박물관은 한국영화의 역사를 어떻게 기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간다면 국립영상박물관의 첫 단추가 끼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국립영상박물관 구상의 한 줄기를 그려보았지만 아직 그 상이 뚜렷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이것은 국립영상박물관이 더욱더 기대되는 이유다. 앞으로 만들어갈 박물관 자체가 전에 없던 처음이자, 누군가에게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