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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영상엔 아직 랜드마크가 없을까? 답은 국립영상박물관 2025.08.18 146
왜 영상엔 아직 랜드마크가 없을까? 답은 국립영상박물관
영상문화의 빈자리를 채울 첫 번째 박물관

글: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좌측부터) 한국영화박물관, 부산 영화체험박물관

* (좌측부터) 한국영화박물관, 부산 영화체험박물관(출처 영화체험박물관 홈페이지)

애석하게도 우리에겐 국립영상박물관이 아직 없다. 사실 없는 건 아니다. 한국영화박물관이 엄연히 존재하고, 부산엔 영화체험박물관이 있다. 사립으로는 강릉의 손성목영화박물관이 대표적이며, 춘천엔 애니메이션 박물관도 있다. 하지만 영화뿐만 아니라 영상 문화 전반을 다루는, 국가적 인프라 사업으로 건립된, ‘국립영상박물관’은 없다. 문화와 예술을 테마로 삼는 수많은 국립박물관들이 있음에도 ‘영상’은 우리나라 박물관 지형에서 지금까진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은 대상이다.

여기서 본질적인 질문. 공적 자본이 투여된 영상 박물관은 왜 만들어져야 하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상은 문화 유산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국립 박물관들의 목적은 과거를 현재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오래된 사물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역사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 가치이며, 박물관의 중요한 기능이다. 영상도 마찬가지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광복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를 겪은 우리의 역사와 그 시절을 살았던 민중의 삶을 담아낸 영상과 영화는 중요한 기록이자 재현이다. 그것은 영리와 무관한 영역에 있는, 박물관이라는 공적 공간을 통해 영속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가치인 것이다. 그렇다면 국립영상박물관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국립영상과 박물관이라는 세 개의 단어를 중심으로 질문을 던져 보려 한다.




 

왜 '영화'가 아닌 '영상'을 다뤄야 하나

 
19세기 말 인류는 움직임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대서양 양편에선 토머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1889)와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피(1895)가 등장했다. 처음엔 단순한 기록이었지만 픽션의 형식이 등장했으며, 그 러닝타임은 점점 길어져 ‘장편 극영화’가 영화라는 매체의 스탠더드로 자리잡는다. 이후 사운드와 색채가 결합되었고 영화는 가장 강력한 엔터테인먼트로서 지구촌을 뒤덮었다.

MoMa
* 뉴욕현대미술관(MoMA) 전경, © ajay_suresh, CC BY 2.0

나이테가 깊어지면서 영화는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식되었고, 빠르게 소비되는 볼거리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클래식의 지위에 오른다. 필름을 안전하게 보관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필름 아카이브’는 박물관의 초기 형태로 등장한다. 1935년에 프랑스의 앙리 랑글루아가 건립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대표적이었고 같은 시기 미국엔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필름 라이브러리가 만들어졌다. 필름 아카이브 혹은 시네마테크가 상영과 연구 활동을 중심으로 한다면, 전시 중심의 영화 박물관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50년대의 일이었다. 독일의 뮌헨영화박물관이나 이탈리아의 토리노국립영화박물관 등은 그 초기적 형태였고, 1960년대부터는 전시와 아카이브와 영화 교육 등이 결합된 공간이 등장했다. 영화라는 매체의 파급력과 위상이 점점 상승하면서, 일정 규모의 영화 산업이 존재하는 국가엔 자국 영화의 역사를 담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후 박물관은 대형화되거나 랜드마크가 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고, 최근엔 체험형 전시나 VR 테크놀로지 그리고 온라인 방식 등도 결합되었다.

여기서 관건은 매체의 확장성이다. 필름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에서 시작된 ‘무빙 이미지’의 역사는 이후 비디오, 디지털 등으로 이어졌고, 영화관뿐만 아니라 컴퓨터, OTT 등 관람의 공간과 방식도 변하게 되었다. 박물관은 영화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이젠 영상 전반을 테마로 한 ‘영상박물관’이 필요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영상박물관은 전시 방식의 변화를 수반한다. 기존의 영화박물관이 영화라는 단일한 테마를 ‘연대기적 구성’에 따라 전시한다면, 영화를 포함해 다양한 영상의 역사를 담아내는 영상박물관은 여러 테마를 다루는 만큼 다선적이다. 이러한 특성은 관람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데, 동선에 의해 정해진 순서로 관람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플랫폼을 선택하는 방식이 더 적절해 보인다.

한국에서 영상박물관이 건립될 경우 예상되는 플랫폼 구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전통적인 영화를 중심으로 크게 세 개의 범주가 가능하다.

① 한국영화 : ‘충무로’로 상징되는 20세기 한국영화. 필름 기반 영화
② K 무비 : 21세기 한국영화.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통해 글로벌 스탠다드에 접근한 한국영화. 디지털 전환기. 
③ 독립영화 : 21세기에 등장한 얼터너티브 시네마의 흐름. 다큐멘터리의 본격적 시작


영화 이외의 플랫폼으로서 가능한 분야들은 다음과 같다. 

① OTT : K 무비의 진화 형태. 글로벌 콘텐츠의 핵심으로 진입한 한국의 시리즈
② 이머시브 콘텐츠 : XR, AR, VR 등 유저가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체험형 콘텐츠
③ 미디어 아트 : 미술과 실험 예술에서 사용되는 영상들
④ 영상 저장 매체 : VHS와 Beta, DVD와 Blu-ray 등 필름 이후 등장한 영화 및 영상 저장 매체
⑤ 애니메이션 : 셀, 스톱모션, 디지털 등 다양한 질감의 애니메이션
⑥ 뮤직비디오 :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된 뮤직비디오의 미학적 흐름
⑦ AI 영화 : 최근 등장한 새로운 흐름. 기존의 제작 방식과 완전히 다른 프로세스의 영상


이러한 모든 테마를 다루긴 힘들겠지만, 영상박물관은 영화부터 시작된 영상 유산의 다양한 변화와 흐름을 종합적으로 접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완결된 구조가 아니라, 앞으로 새롭게 등장할 영상 플랫폼에 대해 열려 있는 마인드를 지녀야 할 것이다(여기서 드라마, 쇼, 다큐멘터리, 뉴스 등 TV 관련 영상들은 제외한 것은, 함께 다루기에 너무 방대한 규모이며 TV 콘텐츠만으로도 박물관 하나의 테마가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왜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필요한가

 
대중의 문화 향유권과 편익 관점에서 볼 때, 박물관은 반드시 필요한 공공재이다. 박물관은 최대한 접근성이 높은 곳에 건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며, 이것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 및 평등권과도 관련성을 지닌다. 특히 영화나 영상처럼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테마를 담고 있는 박물관은 사회적 교류나 커뮤니티 형성 그리고 교육과 문화 복지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박물관은 관광 자원으로 큰 가치를 지니며 경제 효과를 만들어낸다. 랜드마크 기능도 빼놓을 수 없다.

네덜란드 EYE FILM MUSEUM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랜드마크 중 하나인 아이필름뮤지엄(EYE FILM MUSEUM)

더욱 중요한 것은 문화 자본으로서 대중의 집단적 크리에이티브와 예술적 감수성 향상에 박물관이 기여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박물관의 교육 기능과 직결되는 부분인데,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유저들에 대한 교육 활동은 영상박물관의 중요한 역할이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박물관의 성패와 연결되는 부분으로, 영상의 원리 체험이나 영화 장난감 만들기 같은 기초적인 단계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1분짜리 단편 만들기(생애 첫 영화 만들기)나 스톱 모션 제작하기 같은 ‘원 데이 워크숍’ 같은 프로그램도 병행될 필요가 있다. 
제작뿐만 아니라 리터러시 사업을 통한 문화적 기여도 있다. ‘영화의 이해’ 같은 기초 과정부터 심화 단계까지 다양한 강좌를 통해 영화 및 영상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 평론이나 시나리오 같은 글쓰기 과정에 대한 생산적 과정도 박물관이 수행할 수 있는 교육적 기능이다.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학술 포럼이나 기획 상영, 영화제와 토론 이벤트 등도 시민들의 참여도를 높이는 박물관의 활동일 것이다. 
온라인에 대한 활용도 중요한데, 오프라인의 전시나 교육 기능은 온라인과 병행되어야 하며, 거리의 한계로 박물관을 직접 방문하기 힘든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특히 박물관의 방대한 데이터는 AI 테크놀로지와 결합할 때 커다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왜 '국립'이어야 하는가?

 
영상박물관이 만들어질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국립영상박물관’이 가장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의 영상 문화 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것이 지닌 공공성 때문이다. 상품으로 만들어졌지만, 영화와 다양한 영상물은 시간이 흐르면 공동체가 공유하는 일종의 문화적 DNA가 된다. 이것에 대한 관리를 시장 논리에 맡기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공공성을 기반으로 시장의 접근 방식을 접목시키는 방식이 가장 이상적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립영상박물관이 건립될 경우엔 자료가 유실되거나 판매될 위험이 거의 없다. 법적인 토대 위에서 판권에 대한 체계적 관리도 가능하다. 하지만 민간이 관리할 경우 이 부분은 안정성을 담보 받지 못한다. 자료 수집에 있어서도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역사적 가치나 공적 가치를 우위에 둘 수 있다. 그리고 활용도가 다소 낮더라도 아카이빙의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문화 유산들이 체계적으로 수집되어 관리될 수 있다. 독립영화 같은 경우 가장 좋은 예인데, 국립영상박물관이 아니라면 마이너리티의 영상들이 아카이빙 되긴 힘들 것이다.

시민들의 접근성에 있어서도 국가에서 영상 유산을 관리하는 것이 유리하다. 민간의 경우 전시나 상영 및 교육에 있어 손익분기점을 맞춰야 하는 경영의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이용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하지만 국가에 의한 관리는 문화 향유권을 전제로 하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연구자나 관련 산업 종사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부분인데,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자료를 장벽 없이 제공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해외 박물관과의 교류에도 국가 주도의 기관이 훨씬 유리하다. 영상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인류 공통의 영상 자료에 대한 복원과 교류인데, 이를 위해선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국립영상박물관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최근 점점 상승하고 있는 K 컬처의 위상과, OTT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한국의 콘텐츠 등을 떠올린다면, 아직 우리에게 내세울 만한 영상박물관이 없다는 것은 큰 아쉬움이다. 우리 문화를 즐기고 경험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선 그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한국의 영상 유산을 공공의 영역에서 책임성 있게 보존하고 시민들이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서 국립영상박물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중요한 변화의 시작이며, 그곳을 통해 우리 공동체가 감각적으로 반응했던 이미지들의 역사가 현재의 관객들과 만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