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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장례식은 끝나지 않았다 2025.11.11 315
한국영화의 장례식은 끝나지 않았다
스크린쿼터가 남긴 기억과 지금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

글: 이지윤(한국영상자료원)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양기환 기증 자료)


1998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시위 현장/ 한국영상자료원·양기환 기증(2024)

* 1998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시위 현장/ 한국영상자료원·양기환 기증(2024)

서울 명동성당 앞, 배우들의 사진이 붙은 상여를 든 상여꾼들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영화 죽이기 음모 즉각 중단하라”, “무심코 던진 돌에 한국영화 맞아 죽는다” 등의 피켓을 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진짜’ 장례 의식이 아니라 무언가를 상징하는 퍼포먼스인 듯한데, 저들은 왜, 무엇 때문에 저런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사진은, 어쩌면 지금의 2,30대에게는 다소 생소할지도 모를, ‘스크린쿼터’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영화인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온 1998년 12월 1일의 모습이다. 미국의 압력으로 정부가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려고 하자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고, 12월 1일 하루 동안 모든 영화 제작을 중단하고 광화문사거리에서 명동성당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영화인 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배우들 역시 상복을 입고 근조 띠를 두른 자신의 사진을 들고 이 시위에 참여했다. 여전히 스크린쿼터라는 용어가 생소한 누군가는 ‘그게 뭐길래 생업까지 뒷전으로 미룰까?’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한국의 스크린쿼터는 꽤 오랜 역사를 지닌 제도이다.

영비법 제 19조

일반적으로 스크린쿼터는 자국의 영화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극장에 연간 일정 일수 이상 자국 영화를 상영하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현행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약칭 영비법)을 통해 ‘한국영화 상영의무’를 법제화하고 있으며, 영비법 시행령에 한국영화 의무상영 일수를 연간 상영 일수의 5분의 1 이상으로 정해 놓았다. 이 제도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때가 1966년이니, 어언 6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도입 초기에는 서울과 부산 개봉관을 대상으로 2개월에 1편 이상(연간 6편 이상)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하되 서울 개봉관은 90일, 부산 개봉관은 60일 이상 상영해야 했다. 이후 한국영화 의무상영 일수는 1970년에 4개월에 1편 이상(연간 3편 이상), 총 상영 일수 30일 이상으로 축소되었다가 1973년에는 연간 상영 일수의 1/3(120일) 이상, 1985년에는 연간 상영 일수의 2/5(146일) 이상으로 확대되었고, 2006년부터는 연간 상영 일수의 1/5(73일) 이상으로 축소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9년 6월 16일 동숭홀 '스크린쿼터 축소 음모 저지 투쟁선포대회'

* 1999년 6월 16일 동숭홀 '스크린쿼터 축소 음모 저지 투쟁선포대회'/ 한국영상자료원·양기환 기증(2024)

이상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듯, 스크린쿼터 제도는 도입 초기부터 극장 측과 제작자 측의 팽팽한 견해차를 낳았다. 아무래도 관객이 많이 드는 외국영화(특히 미국영화) 상영을 선호하는 극장 측은 스크린쿼터 축소를 주장했고, 자신들의 영화가 보다 많이 상영되기를 원하는 제작자 측은 스크린쿼터 확대 내지는 유지를 주장했다. 그런데 1980년대 무렵부터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갈등의 양상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극장 측과 제작자 측의 갈등뿐 아니라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려는 정부의 제도적 움직임과 그것을 지키려는 영화계의 저항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정부와 영화계 간 갈등의 배경에는 시장 개방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태생적으로 국내 영화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법제화되었다는 점에서 스크린쿼터는 보호무역의 상징이었으며, 시장 개방 문제에서 항상 걸림돌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19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를 관통하며 발견되는 스크린쿼터 담론에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적 중심 화두가 되었던 시대적 맥락이 존재한다.

2006.2.17 광화문 열린시민공원. 영화인과 농민이 함께한 촛불문화제 현장

* 2006.2.17 광화문 열린시민공원. 영화인과 농민이 함께한 촛불문화제 현장/ 한국영상자료원·양기환 기증(2024)

특히 미국 통상압력의 결과 1987년부터 허용된 외국영화사의 직접 배급, 이른바 직배와 1989년부터 적용된 연차별 외화 프린트 벌 수 제한 단계적 완화 및 1994년 전면 폐지 등의 조치는 우리 영화인들을 한국영화의 마지막 보루인 스크린쿼터 사수에 더욱 매진하게 했다. 스크린쿼터를 지키고자 1993년 영화인들이 자발적으로 발족한 스크린쿼터감시단은 전국 극장 상영 실적과 스크린쿼터 위반 실태를 조사하는 등, 일상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는 상황이 다소 긴박하게 돌아갔다. 1997년 말부터 시작된 IMF 외환위기는 미국이 스크린쿼터 폐지를 요구하는 빌미를 제공했고, 정부 역시 한미투자협정 체결을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조직적으로 전개되었고, 이들의 투쟁은 2006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긴 투쟁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 의무상영 일수가 연간 146일에서 73일로 반토막 나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의무상영 일수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게다가 그 결과, 한국영화의 위상은 막 빛을 보기 시작한 199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K컬처가 세계를 사로잡은 이 시대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시대에 한국영화 보호를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줄어들고 다양한 OTT 채널들이 극장을 대체하고 있는 이 시대에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영화관에 적용하는 스크린쿼터가 여전히 유효한가? 아직은 이런 질문들에 확신의 답을 할 만큼의 내공은 부족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간의 스크린쿼터 운동이 한국/영화에만 국한돼 전개된 담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스크린쿼터 문화연대'라 적힌 수호천사단 모집 부스에 사람들이 모여 서명을 하는 모습

* '스크린쿼터 문화연대'라 적힌 수호천사단 모집 부스에 사람들이 모여 서명을 하는 모습/ 한국영상자료원·양기환 기증(2024)

모든 운동은 확장과 연대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길고 길었던 스크린쿼터 운동 역시 시위를 거듭할수록 여러 시민단체, 나아가 세계와 연대하며 ‘문화 다양성’을 위한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향유할 수 있는 문화의 양은 많아졌지만 모순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문화가 점점 획일화되어 가는 것을 비판하며, 당시의 영화인들과 시민사회는 다양한 문화가 존중되고 보호받아아 함을 역설했다. 영화가 극장을 벗어나 OTT 환경으로 들어선 지금도 사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다양한 OTT 채널에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도파민 세대에게 더 많은 자극을 전하는 콘텐츠가 절대 우위를 차지하는 시대에, 그리고 그런 콘텐츠가 아니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의 ‘문화 다양성’은 과연 보호받고 있는가. 채널이 다양해지고 콘텐츠가 넘쳐나지만, 여전히 자본/힘의 논리에서 소외되고 사라지는 문화가 없도록, 스크린쿼터 운동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남기고 있다.
 
* 이 글의 일부는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에 수록된 필자의 졸고 「컬렉션 해제: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를 발췌, 요악한 것으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컬렉션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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